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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11 결말이 좋아야 합니다
옛날에 농촌 교회에서 수염이 긴 목사님을 부흥 강사로 모시고 부흥회를 했습니다. 첫날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해도 교인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조는 성도, 시계를 보는 성도, 성경책을 여기저기 들춰보면서 아멘도 잘 하지 않았습니다. 부흥 강사 목사님은 점점 맥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앞 좌석을 보니 할머니가 계속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역시 앞자리가 은혜받는 금자리이구나!’ 생각하며 힘을 내어 설교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은 그 할머니와 악수를 하면서 "할머니, 오늘 설교는 정말 할머니를 위한 말씀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말씀이 그렇게 은혜가 되었어요?" "목사님, 저는 말씀은 잘 모르겠고요. 며칠 전에 제가 오랫동안 키우던 염소가 죽었어요. 목사님 수염을 보니까 자꾸만 죽은 염소 생각이 나서 울었어요."
부흥 강사가 충청도 지방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성도들을 좀 웃기려고, 유머를 사용하였으나 좀처럼 웃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앞에 앉은 성도에게 물었습니다. “유머를 사용해도 웃지 않는데, 충청도 양반들이라 웃지 않습니까?" 그러자 "아닙니다. 목사님! 나중에 집에 가서 웃으려고요.”
인심 후하게 써서 지금 웃으세요! 지금 아멘 하셔야 합니다.
용을 그린 뒤 마지막에 눈동자를 찍는다는 화룡점정(畵龍點睛-그림 화, 용 룡, 점 점, 눈동자 정),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 마무리하여 완성하거나 끝손질을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지막 점을 잘 찍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점을 잘 찍어야 할 12월에 중순에 서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끝을 아름답고 좋게 마무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일과 인생의 결말이 좋아야 할 줄 믿습니다.
성경은 끝이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요셉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듬뿍 받은 요셉이 형들의 시기 질투로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요셉은 아픈 사연과 마음 가지고 살아야 했고 버터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또 한 번의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아프고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끝은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애굽 왕의 꿈 해석을 해주고 하루아침에 총리로 등극하여 흉년 가운데 가족을 살리고, 애굽과 많은 사람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렇게 끝이 아름다워야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억울함과 한이 스토리가 되고 아픔이 추억과 간증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욥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인으로 동방의 부자였던 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오랜 인내와 큰 인내가 필요한 메가톤급 시련의 밤이 찾아왔습니다. 전 재산을 순식간에 잃어버렸습니다. 자녀 10남매를 다 잃고 가슴에 묻었습니다. 자신의 온몸에는 악창이 생겨 병으로 인한 고난도 모두 견뎌내야 했습니다. 인생이 이대로 마무리된다면 “하나님 믿는 사람의 끝이 왜 저렇게 좋지 않냐!” 하나님 영광 가리고 인생이 얼마나 얼룩지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끝은 우리가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약 5:11)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 42:10)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욥 42:12-13)
욥의 끝은 아름답고 은혜로웠습니다. 그의 결말은 갑절의 축복이었습니다. 노년이 복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욥처럼 끝이 회복되어 이전보다 더 복되고 아름다우면 과정의 아픔은 치유되고 모두에게 도전과 감동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잘 믿고 끝까지 인내하여 처음보다 나중이 더 잘되시고 행복하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
끝이 제일 안 좋고 고통인 곳이 어디일까요? 지옥입니다. 반면, 끝이 제일 좋고 영생 복락을 누리는 곳은 천국입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는 천국에 입성하니 끝이 제일 좋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계신 곳은 끝이 항상 아름다웠습니다. 예컨대,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져 부끄러움을 당할 처지에 놓였을 때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더 좋게 해주었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수고를 했는데도 한 마리를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여 빈 배가 두 배 가득 채워지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자는 자유를, 병에 눌러 고통당하는 병자에게는 나음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들에게는 구원을 주셨습니다. 모두 끝이 좋았습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도, 하나님의 자녀도 인생의 터널을 지날 때가 있고 인생의 겨울이 찾아와 너무 추울 때도 있습니다. 그게 영원하다면 지옥이 따로 없겠지만, 잠시뿐입니다. 당하는 당사자에게는 길게 느껴지고 너무 아픈 긴 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나의 마음을 연단시키고 복을 받을 그릇을 깨끗하고 크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는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기록된 욥의 인내와 욥의 결말을 배우고 믿고 반드시 기억하여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시길 축원합니다.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
12월 중순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용서와 화목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밤을 꼬박 새운 불법적인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구타와 채찍질로 이미 만신창이가 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가라 합니다. 걸어가시다가 쓰러지시고 무겁고 힘이 들어 또 쓰러지시고 더는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군병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구레네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시몬’이라는 한 순례자를 지목하여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십자가를 넘겨주고 비틀거리며 길을 걷는 예수님 뒤를 큰 무리가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드디어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여 십자가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거친 나무 위에 눕게 한 뒤 양팔을 좌우로 벌렸습니다. 그러고는 굵은 대못을 예수님의 양 손목에 박고는 십자가를 높이 들어 세웠습니다. 공중에 매달린 예수님의 얼굴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심히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으로 몸을 떠는 예수님의 좌우에는 두 명의 강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병사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고통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웃고 떠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꼴좋다’라는 표정으로 비웃으며 다른 사람은 구원한 자가 자기는 왜 구원하지 못하냐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구경꾼들조차도 경멸하듯 고개를 흔들며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독설과 조롱과 냉소적인 말들이 난무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사형 틀이라는 십자가의 형벌보다 이들의 말이 더 아프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분노에 찬 욕설이나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무리를 쓸어버리는 보복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예수님은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나온 첫 번째 말씀이고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보복보다 용서를 택했습니다. 덕분에 우리 죄가 모두 용서받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삶의 여정 가운데 남에게 아픔과 피해를 주기도 하고 상대로부터 아픔과 피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힘이 있어 보복하시겠습니까? 끝까지 기억하여 갚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용서를 해야 합니다. 보복이 힘이 아니라 용서가 가장 큰 힘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1-22)
용서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교훈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용서한 아버지는 ➀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한 첫째는 분노했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그 마음에는 미움과 분노가 가득했고 불편합니다. 잔치에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건강을 해치고 몸이 망가집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는 것이 좋습니다. 용서한 아버지는 ➁아들을 얻었습니다. 용서하지 않았다면 둘째는 갈 데가 없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었다 해서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잃은 것도 없습니다. 이게 용서의 힘이고 사랑의 힘입니다.
용서는 ➂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잘못했다고 돌아온 아들, 앞으로 잘 해 보겠다는 돌아온 아들에게 기회를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끼는 제자 베드로의 배반 때문에 가슴 아프셨지만,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너도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고 치라며 기회를 주셨습니다. 용서받은 베드로, 기회 얻은 베드로는 평생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용서를 통해 얻은 기회가 베드로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아픔과 피해를 상대에게 주었다면 먼저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34)
하나님께 회개하고 형제와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관계 중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바르고 가까운 관계가 되기 위해서 예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친밀해집니다. 나의 신앙을 예배로 표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드리다가 사람과 잘못된 것이 생각나면 해결하고 와서 예배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위해서라도 사람과의 관계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결해야 할까요?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잠 29:11)
분노를 회개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분노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 드러내고 살 것이냐 아니면 다스려 억제할 것일까입니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 29:22)
화를 내면 다툼만 생깁니다. 그 화로 인해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발적 범죄는 거의 모두 화를 참지 못하고 욱해서 순간적으로 지은 것입니다. 성도는 “내가 주님 때문에 참습니다.” “아버지” 한번 말하고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탐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지나친 욕심, 즉 탐심이 있으면 우상 숭배입니다. 돈, 명예, 권세 등 무엇이든지 마음이 지나치게 그쪽을 향해 있으면 우상 숭배입니다. 회개합시다. 성령님께서 기억나게 하신 죄를 회개하면 됩니다. 찬송하다가 성령의 인도함과 도우심으로 회개하는 심령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벙어리가 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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