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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룡산(432.9m) : 전남 강진군 |
“용의 등줄기처럼 거칠고 힘찬 산세” |
1. 개념도
강진 덕룡산은 산이 반드시 높이에 따라 산세가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산이다. 해남 두륜산(頭崙山.703m)과 한줄기로 이어져 있는 덕룡산은 높이래야 해발 400m를 가까스로 넘지만 산세만큼은 해발 1,000m 높이의 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웅장하면서도 창끝처럼 날카롭게 솟구친 암봉의 연속, 말잔등처럼 매끄럽게 뻗는 초원능선 등, 능선이 표출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힘의 진수를 보여주는 산이다.
정상이 동봉과 서봉 쌍봉으로 이루어진 덕룡산은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아 자연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짙푸른 빛깔의 이끼가 끼어있는 암봉은 바위 틈마다 이름모를 야생화가 피어나 있어 억세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암봉과 암봉을 연결하는 육산은 일단 들어서면 하늘을 볼 수 없을 만큼 키큰 수풀이 우거져 있어 대자연의 은밀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하지만 강진과 남창을 연결하는 55번 지방도를 따라 이어지는 덕룡산 산줄기는 산?H에서 바라보면 기가 질리고 만다. 북쪽 석문산에서 남쪽 첨봉(尖峰.약425m)를 거쳐 주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남도에서 가장 긴 암릉(물론 중간중간 육산도 나타난다)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길고 험난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3. 코스가이드
덕룡산 산행 기점은 ‘강진의 소금강’ 이라 불리는 석문산(石門山.272m) 남쪽 소석문 협곡으로 주능선을 타고 정상까지 간 다음 다시 세 번째와 네 번째 봉 사이의 안부로 되돌아와 만덕광업쪽으로 내려 가거나 또는 정상 다음의 안부에서 동사면의 잡목숲을 헤치고 수양리로 내려서여 한다. 장거리 산행에 자신있는 사람은 첨봉 직전의 안부까지 능선산행을 마친 다음 그곳에서 수양제로 하산하거나 내친김에 첨봉~주작산~작천소령~수양리조트까지 뽑아도 된다.
강진에서 18번 국도를 따라 해남으로 향하다 약9Km 지점의 벌골 삼거리 지점에서 좌회전, 55번 지방도를 따라 4Km쯤 가면 도암면 소재지를 지나 도암중앙초등학교 입구에 닿는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봉황저수지 방향(서쪽)으로 1Km쯤 들어서면 석문협곡에 이른다. 석문협곡 북쪽에 솟은 산은 석문산으로 석문산 북쪽의 계곡을 대석문, 남쪽의 협곡을 소석문이라 한다. 산행기점은 소석문이다.
산행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봉황천을 건너자마자 수풀이 거칠게 우거지고 낙석 가능성이 높은 암릉을 타야 한다. 이 구간을 피하려면 도암중학교 뒤로 나 있는 산길을 타고 첫 번째 봉으로 오르면 된다. 하지만 암릉을 타고 오르노라면 고생하는 만큼 멋진 암릉과 주변의 경관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우뚝 솟은 암봉과 그 암봉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리는 듯한 암릉은 마치 날카로운 암봉이 도열한 설악산의 칠형제봉 같은 분위기다. 석문 안에 들어선 봉황저수지도 보인다. 덕룡산과 주작산 서쪽 사면의 물이 모두 모여드는 곳이다. 저수지 물에 비친 덕룡산을 보노라면 물 밖의 산이 진짜인지, 물안의 산이 진짜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암중학교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순해지는 듯하다 첫 번째 암봉에 올라서면 입이 벌어진다. 마치 설악산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웅장한 암릉이 줄지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덕룡산 정상부가 설악산의 용아릉을 옮겨다 놓은 듯하다면, 그 앞부분은 암릉미의 극치는 천화대를 본ms 듯하다. 산길은 두 번째 봉과 세 번째 봉은 왼쪽(동쪽) 사면을 타고 이어지다 네 번째 봉에서는 꼭대기로 올려친다. 이쯤 오면 이번에는 탐진강 하구가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탐진강은 장흥군 유치면에서 발원하는 길이 41Km에 불과한 짧은 강이지만 하구는 그 어느 강 못지 않게 넓은 강이다.
네 번째 암봉을 내려서면 너덜과 초원이 뒤섞인 안부에 닿는다. 여기서는 암봉을 왼쪽에 끼고 길이 이어지지만 암릉 산행에 자신 있고 보조자일을 휴대한 사람은 계속 날등을 타도 된다. 다섯 번째 봉우리가 덕룡산 동봉이다. 정상에는 금릉산악회가 1997년 5월 11일 세워놓은 정상 팻말이 있다. 동봉에서 정상인 서봉까지는 10여분 거리로 역시 금릉산악회의 서봉 표시 팻말이 박혀있다.
서봉에서 남릉을 바라보면 만덕산 북릉은 서곡에 불과하다 싶을 정도로 기가 질리게 하는 암릉이 버티고 서 있다. 푸른 초원을 이룬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솟구친 남릉은 설악산 장군봉이 세 개 이어져 있는 듯, 북한산 노적봉과 백운대. 인수봉이 겹쳐 있는 듯 웅장하기 그지없다. 첨봉을 지나 주작산으로 이어지는 초원능선도 일품이다. 암릉 오른쪽으로 초원능선을 타고 삐죽 솟구친 첨봉, 그 뒤의 주작산 정상은 과연 이 산줄기의 최정상답게 힘찬 모습이다.
서봉 남쪽 안부에서 첫 번째 암봉을 오를때는 암봉과 첨봉, 그리고 주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가슴 벅차게 하지만, 두 번째 암봉을 오를 때는 긴장의 연속으로 상황이 바뀐다. 특히 두 번째 암봉을 내려설 때는 물골, 낙석, 잡목구간이 뒤섞이고 추락의 위험마저 높아 간담이 서늘하다. 세 번째 암봉 역시 아슬아슬한 암릉을 타고 넘어야 첨봉 못미쳐 안부로 내려설 수 있다.
안부에서 첨봉쪽으로 오르다 보면 능선 날등에 분묘 두기가 보인다. 수양저수지로 내려서려면 여기서 왼쪽(남동쪽) 산길을 따라야 한다. 지릉을 하나 살짝 넘어 급사면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르면 너덜지대와 잔솔밭을 지나 수양리 벌판으로 내려선다. 덕룡산을 해발 400m대의 산이라고 다른 남도의 야트막한 산을 찾듯 얕잡아보고 덤볐다가는 그야말로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덕룡산 산행은 단단히 마음먹고 보조자일, 식수와 간식을 충분히 준비한 다음 나서야 한다. 특히 수풀이 우거졌을 때는 긴소매와 긴바지를 입어야 상처 입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한 암릉에는 낙석구간이 많으니 조심해야 하고 비가 내릴 때는 산행을 삼가는 것이 안전하다.
4. 주변의 명소
가. 무위사 극락보전 - 국보 제13호
무위사는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39년(617) 원효대사에 의해 당초 관음사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면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려왔던 사실은 경내에 현존하고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명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네 번째 중건인 서기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전만은 1956년에 실시된 보수공사에서 본존 후벽의 벽화 명문에 “십이 병신삼월초길 화성”이란 기록이 판독됨으로서 성화12년(1476)보다 앞서는 건물일 것으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1983년 옥개부 이상을 해체 보수할 대 종도리 장여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12년(1430)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뤘고 내부 벽에는 여러 보살 및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당대 인물화가인 오도자의 신필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나.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 - 보물 제507호
비신과 비신을 받친 거북, 비신머리가 모두 온전하다.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인데 정수리에 뿔이 있고 귀 뒤에 작은 깃이 달렸다. 코가 벌름하고 우?입술은 조금 말려 올라갔는데 여의주를 문 입에 가지런한 아래 윗니와 혀가 보이는 것이 독특하다. 거북 등 가운데 마련된 비신받침 앞뒤에는 구름무늬가, 양옆에는 안상이 새겨졌다.
비신에는 “고려국 고무위갑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명”이라는 제목 아래 최언휘가 짓고 유훈률이 쓴 비문이 앞면에만 새겨져있다. 비신머리는 두 개의 돌을 포개 만들었고 운룡문과 쌍룡문으로 장식되었다.
선각대사 형미는 신라 경문왕4년(864)에 나서 경명왕1년(917)에 죽었다. 광주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였다. 15세에 출가하여 가지산 보림사에서 가지산문을 연 보조선사 체징의 제자가 되었다. 28세 되던 해에 조공하러 가는 사신을 따라 당으로 건너가 운거도응의 법을 받고 효공왕9년(905), 45세로 귀국했다. 이때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태봉을 세워 몰락해 가는 신라와 함께 후삼국 시대를 열던 무렵이었다.
왕건은 고려를 개국한 후 형미에게 선각대사라는 시호와 편광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그가 죽은지 28년이 지난 정종원년(946)에 무위사에 그의 부도비가 세워졌다.
다. 전라병영성지 - 사적 제397호
조선초 병영이 설치된 후 이곳에는 3,000호가 살 만큼 번성하였다. 그런데 동학 농민군의 병영성 점령으로 성은 불타고 이듬해인 1895년 병영이 폐지되었다.
전라도 육군의 지휘소인 병영을 이곳에 설치하게 된 군사지리적 이유는 당시 병영의 융성함을 반증하는 증거의 하나로 강진군 옴천면에서 병영으로 오는 고개의 이름이 귀활재(활기가 넘치는 병영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라는 사실이며, 병영중학교 앞에 조산(造山, 兆山)이라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는데 평지인 원래의 땅에 만든 산이라는 의미에서 조산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 병영의 위세를 상징하는 설화로 '군동에는 천불산, 도암에는 만덕산, 장흥에는 억불산이 있으니 천만억을 아우르는 조산이라고 하자'는 기록과 병영성의 다른 이름으로 설성과 세류성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1).병영이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방에 둔 육군 지휘소로 전라도의 경우 고려 때는 광주 송정동에 있었다. 고려말 이후 왜구의 침입이 거세지자 왜구 방어가 병영이 위치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곳에는 병마 절도사라는 지역 사령관이 파견되는 데 관찰사(감사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도지사)와 직급이 같았다. 원래 이 곳의 이름은 내상리였는데 조선초 병영이 설치된 이후 지명이 되었다.
(2).병영을 선택한 이유
당시 병영 위치의 기준이 왜구 방어에 있다고 보았을 때, 군사적 이유를 살펴야 한다. 이 곳은 분지로서 주위를 완전히 둘러싼 산 사이에 있어 요새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고려말에 만들어진 수인산성은 유사시 대피에 적합하며, 수인산 꼭대기에 오르면 멀리 마량과 완도가 보여 왜구 침입을 한 눈에 감시할 수 있다. 또한 작천, 성전 쪽으로 이르는 넓은 들은 군량미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곳은 왜구 침입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데 최적의 위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병영성과 사또샘
병영성은 병영을 만들면서 쌓은 성으로 현재 병영 국민학교의 담 일부가 이 성터인데, 일제에 의해 국민학교가 세워졌으며, 신사참배 장소를 만들었다
이 성의 북쪽에 절도사 전용 샘이 있는데 이것을 일명 어사샘, 사또샘이라 하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4).병영홍교
일명 배진강 다리라고도 하는데 조선 숙종 때 이 마을 출신으로 정승이 된 유한개의 금의환양을 맞이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아침 비 내릴 때의 모습은 병영 8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원래는 다리 입구에 석장승이 있었는데 1984년에 도난당했다. 현재 지방 유형 문화재 129호
라. 대구면 도요지 - 사적 제68호
대구면 용운리·계율리·사당리·수동리 일대의 도요지는 고려청자의 발상지이자 그 발달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유적지이다. 이를 대변하듯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위치한 청자요지는 전국에 분포하는 요지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고려청자 중 국보로 지정된유물의 대부분이 이곳 도요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청자의 발생기에서부터 전성기, 쇠퇴기를 거쳐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로 전환되는 시기까지의 모든 유형의청자를 만들었던 요지로 밝혀져 한국 도자사 연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강진 지역에 고려청자 도요지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14년 봄 일본인에 의해서였다. 그 후 1928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이 지역을 조사하여 100여 개소의 도요지를 확인했다. 이를 지역별로 나누어 보면 대구면 용운리 39개소, 계율리 28개소, 사당리 30개소, 수동리 3개소이다.
현재 확인된 바로는 고려시대 청자도요지는 전국에 약 300여 개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들 중 전북 부안 일대의 80여 개소와 해남의 50여 개소를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은몇 개소씩에 불과하여 상대적으로 강진 청자요지가 돋보인다. 더욱이 강진 청자도요지는 다른 지역과 달리 고려 전시대에 걸쳐 청자가 계속 만들어졌던 곳으로 고려청자 제작기술의발전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유적이어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처음 청자가 구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용운리 일대 도요지느 정수사 아래 운곡마을 건너편 산기슭에서부터 항동·용운마을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곳은 청자 제조연대가 가장 앞서는 해무리굽이 발견되는 지역이다. 또한 이 곳에서는 여러 기의 토기요지도 발견되었다. 용운리지역 도요지는 주로 산기슭이나 산골짜기에 많이 남아 있어 초기에는 땔감을 조달하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용운리에 이어 11세기경 강진청자가 집단적으로 만들어졌던 곳은 계율리였다. 이 곳에서는 해무리굽이 없어지면서 수레바퀴(輪) 모양의 굽이 나타나며, 굽바닥에는 규석받침이나 내화토로 빚은 받침이 사용되었다. 계율리의 청자도요지는 용운리와 경계를 이루는 나발잔등주변과 청용제 좌우측 산기슭, 청용과 율촌의 중간지점에 분포한다. 이 곳 도요지에서는 용운리보다 늦은 시기의 고려청자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조사 확인되었으며 상감청자 파편들도발견되고 있다.
한편 사당리의 도요지는 당전과 미산·백사마을 등에 분포되고 있는데 이 중 당전일대의도요지는 강진지역에서도 가장 완숙한 비색청자와 상감기법의 청자가 만들어졌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미산마을의 도요지에서는 고려청자의 가장 말기에 해당되는 도자편들이 보이므로 고려청자의 퇴화과정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마. 정다산 유적지 - 사적 제107호
정다산 유적지는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하는데, 이 곳에는 다산초당(茶山草堂), 동암(東庵), 서암(西庵), 천일각(天一閣), 다산사경(茶山四景) 등의 유적이 있다.
초당은 원래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외가인 귤동마을 입향조 윤취서(尹就緖,1688∼1723)에 의해 건립된 해남윤씨 산정(山亭)으로 전해지며,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당하여1808∼1817년까지 10여년간 이 곳에 거처하면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본래의 초당은 초가로 되어 있었으나 1936년에 허물어져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의 건물은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옛 건물터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와가 팔작집이다.동암은 초당에서 남동쪽으로 약 35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와가 맞배집이다.
1974년 다산유적복원위원회가 중건하였는데 구 건물은 서암과 함께초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암은 초당의 동쪽 아래에 있는데 '다성각(茶星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집이다. 역시 1974년 동암과 함께 중건되었다.천일각은 동암으로부터 약 30m 되는 지점에 있는데,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 약전(若銓)이 생각날 때 이 누각에 올라 멀리 남해를 바라보던 곳이라 전한다. 정·측면 1칸의 아담한누각이다.
그밖에 정다산유적지에는 다산 선생의 손길이 어린 '다산사경'이 있다. 초당의 서쪽 언덕암석에 '정석(丁石)'이라고 다산이 친히 새긴 글이 있으며, 초당 바로 앞에는 차를 다렸다는 '청석(靑石)'이란 넓적한 돌이 있다. 초당 뒷편으로는 '약천(藥泉)'이라 부르는 조그마한 샘이있으며, 동쪽으로는 방형(方形)의 '연지(蓮池)'가 축조되어 있다.
바. 영랑 생가 - 지방기념물 제89호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
영랑 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사. 마도진 만호성지 - 지방기념물 제179호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마도진 만호성은 石城으로 둘레가 890자(尺), 높이가 12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서북벽의 일부만이 남아 있음
성벽의 총 연장 길이는 730m정도이고, 방형 및 장방형의 대형 석재로 기단부를 구축하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30×20㎝ 정도의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내탁법(內託法)에 의해 쌓아 올렸으며, 현존 서북벽은 길이 220m, 높이 2.3∼4.7m, 상부폭 1m 하부폭 2.5m임
마도진이 있는 마량은 우리나라 서남해에 위치하여 강진, 장흥, 해남, 영암으로 이어지며 제주도와 연결되는 요충지이다. 마도진(馬島鎭) 만호성지(萬戶城址)는 마량에 들어서는 도로변(23번 지방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속칭 『말머리(馬頭)』라 불리 우는 마량의 배산(背山)을 뒤로하고 원마(元馬) 마을의 서북쪽에 장방형의 형태로 남아있는 마도진성(馬島鎭城)은 군항(軍港) 으로써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해상의 전면으로는 고금도·까막섬·노리묵 등이 이·삼중으로 외호(外護)하고 있으며 육지 쪽으로는 말머리산의 능선을 휘감으며 자리잡고 있어 외부로부터 은폐·엄폐되어 있다.
마도진성(馬島鎭城)은 남쪽은 낮고 북쪽이 높은 구릉 상에 축조하였는데 현재는 서북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유구를 통한 성벽(城壁)의 총 연장길이는 730m정도이며, 방형 및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내탁법(內托法)에 의해 쌓아 올렸다. 현존 서북벽은 길이 220m, 높이 2.3∼4.7m, 상부(上部) 폭(幅) 1m, 하부(下部) 폭(幅) 2.5m정도이다.
그 외 동·서·남·벽은 마량지서 등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현재는 기단부만이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기타 부속시설로는 북문지(北門址)의 기단석만이 확인된다. 문지(門址)는 폭 4.3m, 높이 1.6m로 근래 도로 확장사업계획에 따라 곧 파괴될 위험에 처해있다. 한편 서북벽 근처에는 행만호(行萬戶) 이종호(李鍾浩)의 선정비가 1기가 남아 있는데 규모는 높이130㎝, 폭50㎝, 두께 1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