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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하 소설에 나타난 「마산」
바람도 없고 물결도 없습니다. 바다가 아니요, 호수 같은 마산만의 푸른 물은 마치 어떠한 그릇에 왜청을 풀어서 하나 가득 담은 듯이 묵직하고 진합니다. 그 위로 사람이 굴러도 빠지지 않고 거친 것도 없을 듯이 잔잔하고 평탄합니다(-나도향-).
소설은 사건과 인물과 배경 들로 꾸며진 허구의 세계를 구축하고 독자들을 그 속으로 불러들인다. 이 허구의 세계, 소설의 공간은 사건과 인물과 그 구체적 무대가 하나의 삶의 세계를 구축해 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등장인물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에 따라 장소는 다르게 채색되며, 사건들이 허구의 공간을 가득 채워 마침내 소설의 공간은 지리적이며, 단순한 물리적 장소를 ‘의미 있는 삶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야기의 여러 요소들로 꾸며진 소설의 세계는 때로는 환상적이고 때로는 우리가 익히 보아온 기억 속의 어떤 한 세계를 연상하게도 한다. 도연명이 그려낸 ‘무릉도원’은 우리가 전생에서 떠나온 꿈 속의 잃어버린 고향인지도 모른다. ‘페스트’가 창궐하여 다른 모든 곳으로부터 통행이 차단된 ‘오랑’시는 1947년 까뮈가 세운 도시다. 1964년 한국 소설의 지도 한 곳에도 김승옥은 「무진기행」에서 저 유명한 ‘무진’을 새로이 그려 넣었다. 휴식과 위안과 절망으로 채색된 물의 공간, 무진은 온통 안개에 젖어 있다. 지난해 최윤은 「하나코는 없다」에서 ‘베네치아’ 곤돌라를 저으며 ‘산타루치아’를 목청껏 내뽑는 이국의, 그 물의 도시를 우리 앞에 투명하고 鮮姸한 이미지로 떠올려 놓았다. 마산 기억 속의 바다는 ‘파아란 물’로, ‘꿈에도 잊지 못할 향수’로 가득한 노래로 불린다. 마산의 아름다움은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정감으로 메워져 시와 노래 속에 녹아 있다. 고난과 고통과 굴욕의 역사가 시의 기억 속에서 달콤하고도 아름다운 꿈과 다소 슬픈 추억으로 채색되어 있다. 마산은 시 속에서만 노래되고, 마산은 약간의 그리움이 슬픔과 짝하여 순간과 격정과 추억 속에서만 노래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이 늘 서정의 골짜기에서 한잔 소주와 한가닥 깊은 숨으로 뽑아올리는 절창으로 삶을 마무리지어버리려 하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기쁨과 슬픔의 정서가 서사에까지도 비집고 들어가서 소설이 서정의 노래와 함께 자리하는 것은 아닐까. 스물 다섯의 나이로 요절한 나도향은 꺼져가는 촛불을 부여잡은 심약한 결핵 환자의 정서로 마산을 노래한다. 나도향 소설의 ‘화자’는 바다 한 자락을 끼고 앉은 요양소를 나와 해안 부두를 걷는다. 절망으로 마산을 들어 섰었기 때문일까. 그가 쓴 ‘서간소설’의 편지는 외로움과 절망으로 차 있다.
마산에 와서 두 주일이 넘었습니다. 서울서 마산을 동경할 적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마산이었는지요! 그러나 이 마산에 딱 와서 보니까 동경할 적에 그 아름다운 마산이 아니요, 환멸과 섬섬함을 두고 쓸쓸한 마산이었나이다. (「피묻은 편지 몇 쪽」1927)
무학산 쪽으로 훨씬 물러나 앉아 있었던, 지금과는 다른 신마산 부두길을 걷는 그에게 마산은 쓸쓸함으로 마음에 파문을 일게 하는 곳이었다. “마음에는 잔잔한 파도에 진주 한 알을 떨어뜨린 것같이 가늘게 떠는 파문”이 인다. 憧憬의 바다도 그의 외로움과 우울까지는 채워 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다의 상상력은 자신의 응어리진 가슴을 씻어내린다. 오존이 가득한 바다 공기를 들이 마시면 그것은 가슴 혈관 하나하나로 들어가 그의 혼탁해진 육신의 피를 맑게 한다.
마산의 바다는 좋습니다. 바다의 공기를 마시고 그것을 내뿜을 때는 마치 바다를 삼켰다가 배앝는 듯한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서간소설의 화자를 스물 다섯, 각혈로 생을 마친 나도향으로 보아 크게 어긋남이 없음을 안다. 서간의 형식이 그러한 것처럼 객관적 세계보다 서술자의 주관적 내면이 더 깊이 나타난다. 그에게 마산은 동경의 세계이었으며, 생을 되찾게 될지도 모를 희망의 땅이었던 것이며, 그러면서도 외로움과 쓸쓸함과 자신에게 없는,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욕망하게 하는 곳이다. 그러나 산책 부두길에서 만난 여인 장영숙에게 한껏 피워 올리는 사랑의 상상력도 죽음의 시간이 손짓하는 그에게는 더 큰 슬픔이 된다. 나도향의 마산은 호수와 같은 바다의 고요와 고독 속에서 여인에 대한 사랑, 번민, 격정, 죽음에 대한 두려움들이 애닲은 한 소멸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마산의 바다는 파도치지 않는다. 마산의 바다는 생활이 아니라 슬픔의 정한으로 채색되어 있다. 삶의 고통스런 역사까지도 회상 속의 쓸쓸함으로 떠오른다. 거창에서 나서 마산시 상남동에서 산 이현욱은 또 어떤가. 사회주의자 문학 이론가 임화의 둘째 부인이 되어 임화를 따라 가 북에서 외롭게 죽어간 여인. 그녀가 지하련이라는 이름으로 남긴 소설에도 고통은 이미 슬픔의 서정으로 채색되어 고향 마산의 바다는 고요, 슬픔, 쓸쓸함, 비애의 이미지로 물들어 있다. 東京昭和高女, 동경 경제전문학교까지 마친 수재인 그녀가 어떻게 하여 결핵으로 요양소를 찾은 임화와 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두번째 부인으로……. 1940, 그녀가 쓴 「결별(訣別)」은 부부 사이의 일상의 작은 감정과 대립들, 대수롭지 않은 말들의 꼬투리와 그것들로 하여 속내의 불화가 들추어지며 마침내는 더욱 깊어 가는 마음의 골을 서정적 필치로 엮은 이야기이다. 주인공 형례는 친정 마산을 찾아오고 이곳에서 몇달을 보낸다. 고향 마산에서 떠올리는 바다는 서울에 두고 온 일상의 무게로 하여 더욱 슬프다.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언제 보아도 호수 같은 바다가 눈앞에서 찰싹거린다.
“왜 바다가 얼마나 좋은데 그래, 우린 매우 슬프거나 외로울 땐 갑자기 바다가 그리워지고, 풍랑이 몹시 이는 바다에 가서 죽고 싶대요.
풍랑이 이는 바다에 죽고 싶지만 마산의 바다는 풍랑이 없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밀물처럼 옴몸을 흠뻑 고독에 잠기게 할 뿐이다. ‘형례’는 ‘성호천’을 따라 내려서 해안통을 걸으면서 “가까운 모든 사람이 하나 이방인처럼 느껴”지고 자신은 “물새처럼 외로워”진다. 타인처럼 느껴지는 남편을 떠나온 그녀에게 “언제 보아도 호수같은 바다”는 고독과 외로움을 덜기도 하고 오히려 더해 주기도 한다. 때마침 “산에고 바다에고 김처럼 서”리는 “뽀얀 안개”도 원귀가 구슬프게 우는 바다의 이미지로 채색된다. 인망이 높다는 남편의 이중성을 생각해 본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더 사랑하지 않는지 모른다. “밤이 점점 기울수록 악마구리떼처럼 버러지들이 죽게 울어”대고 고독은 밀물처럼 밀려온다. 마음의 ‘결별’은 외로움의 바다 이미지로 끝이 난다.
갑자기 밀물처럼 고독이 온다. 드디어 형례는 완전히 혼자인 것을 깨닫는다.
1941년에 쓴 「滯鄕抄」는 주인물 ‘삼희’가 친정인 마산 월영동을 찾았다가 오라비가 살고 있는 ‘산호리(山湖里)’에서 너댓 달을 머물다 떠나는 동안에 잔상들을 적은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주인물 ‘삼희’의 상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두 사람의 등장인물을 통하여 일제 말기 마산의 어두운 지적 분위기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다. 소설 모티브들이 실제와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작가의 체험적 세계 속의 모티브와 비슷한 부분을 많이 볼 수 있다. 「체향초」에서도 1930년대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이 소설 공간과 일치하는 몇가지 것이 있다. 1940년 경의 마산 산호리, 지금의 산호동은 “시가지와 떨어진” 변두리 지역이었다. ‘삼희’의 친정 오빠는 노비산 “산 밑에서 나무와 짐승을 기르면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산호리는 산과 바다와 새 그리고 나무와 꽃이 우거지고 짐승들이 살고 있는 양지바른 곳이다. 이곳에서 ‘삼희’의 오라버니가 가축을 기르며 축사와 같은 작은 집에서 살고 있다. ‘삼희’가 말하는 “얼굴 흰 오라버니”는 1930년 중․후반기에 전향한 지식인의 한사람이다. ‘얼굴 흰 오라버니’가 전향한 지하련의 집안 누구인지 아니면 지하련의 남편 임화를 두고 그려낸 것인지는 아직 알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1930년대 전향지식인들의 방황하는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작중의 오라버니는 자신이 전향인의 ‘태’를 내는 것이 스스로 싫어 유폐된 생활을 한다. ‘태’라는 것은 하나의 ‘자세’를 말한다. 그는 자신이 ‘자세’를 버리려고 하여도 또 하나의 ‘자세’가 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가축을 기르고 유폐된 생활을 한다. 전향자처럼 자신을 버리고 또 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겠나. 그것은 아마도 사회주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난 번민의 전향 생활이 또다른 ‘자세’가 됨을 싫어 함이리라. 그는 저신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서 확고한 이념을 가진 박군을 부러워하며, 스스로 자신을 초라한 자화상으로 그려 놓기도 한다. 김윤식은 박군을 임화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1934년 임화가 사상범으로구금되어 쉬 풀려나게 되는 행위는 일찌기 그가 앓았던 결핵이 사실로 밝혀지게 하는 한편, 그의 사상적 번민을 읽게 하는 징표가 된다. 또 일제 말기 마산에 있었던 몇몇의 이념주의자들을 생각한다면, 소설 「체향초」에서 박, 오라버니 들의 이념적 세계는 ‘삼희’의 엿듣는 서술 형식으로도 한 시대 마산의 삶의 공간을 불투명하게나마 떠올릴 수가 있게 한다.
파도치지 않는 바다. 마산의 바다는 파도치지 않는다. 바다가 파도치지 않기 때문일까. 마산은 내면적 세계의 기록으로, 삶의 서정으로만 이야기된다. 소설 속의 마산에는 어판장 경매꾼의 외침도 없고, 밀수꾼이 몰래 배를 밀어대는 이야기도 없고, 해적이 산을 끼고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이야기도 없고,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바다에 떠오르는 익사체 이야기도 없다. 소설 속 마산의 거리에는 총성도 없고, 핏발을 세우며 이 도회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산 이야기도 없다. 또 마산의 심장을 씩씩거리며 가로질러 달리는 검은 증기 기관차의 이야기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삶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과거와 미래를 함께 조망하려는 부릅뜬 눈이 없는 것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바다를 호수로 부르지 않고 산을 정한으로 말하지 않는 몇개의 시각을 만난다. 소위 제 3세대로 일컫는 60년대 이후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마산은 비로소 서사적 산문의 세계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김원일(「시골 여인숙」), 손영목(「풍화」), 김병총(「불칼」, 「풍요세대」), 이규정(「패자의 고백」), 이제하(「한양고무공업사」, 「기차, 기선, 바다, 하늘」, 「태평양」) 이들의 소설에서 현실을 하나의 전체적 시각에서 보려 애쓰는 서사의 세계가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가 이 지역 사회에서 생장한 작가들이다. 이들 소설에서는 비록 유년 시절이 다루어진다 하더라도 이전의 소설들에서처럼 회고의 정한이 아니라 삶이 그 깊이와 역사적 삶과 맞닿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아주 특이하게 마산의 산과 바다의 이미지를 인간 무의식의 두 양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제하의 소설이 있다. 이를 살펴 보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흥미 있은 일이 될 것이다. 이제하는 마산을 객관적이고 메마른 시선으로 우리들 앞에 새롭게 조망해 보인다. “힘껏 잡아늘인 이등변 삼각형을 바다에서 산비탈 쪽으로 밀어올려 붙인 듯한 시가지” 기하학적 시각으로 잡힌 마산은 더 이상 순간의 격정과 애환의 파아란 물도,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바다도 아니다. 마산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그려낸 이제하의 소설을 인용해 본다.
힘껏 잡아 늘인 이등변삼각형을 바다에서 산비탈 쪽으로 그대로 밀어올려 붙인 듯한 시가지의 한끝에서 기차가 발주(發走)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선로는 시가지 중심을 한옆으로 꿰고 내려앉았다 뚝이 되었다 하면서 삼각형의 다른 변 한끝으로 빠진다. 거기가 신마산(新馬山)이다. 기차는 거기서 대가리가 떨어져 식식거리며 한참이나 헐개질을 하다가 차량들의 꽁무니에 가 슬며시 붙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그것을 끌고 찌그러진 이등변을 따라 헐떡이며 올라가게 되는데 그쪽이 북마산(北馬山)이다. 그러니까 지금 기차가 출발하고 있는 역은 구마산(舊馬山)이 된다 (「기차, 기선, 바다, 하늘」).
기하학적 시각으로 그려낸 마산은 다소 희화적이기도 하고 괴기스런 모습으로 변신한다. 무학산 북마산 신마산 구마산 해안통 바다 우리는 마산을 이렇게 쉬 조망한 눈을 보지 못하였다. 거기에다 해안통을 밑변으로 하고 양변을 길게 늘인 ‘이등변삼각형’의 도시를 그리고 그 도시를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길-게 관통하며 가르고 내닫는 “검댕칠을 한 거대한 쇠뭉텅이 같은 화통”의 기차를 상상해 보라. “안개 저쪽” 베일 속에서 짐승의 숨결로 엄습해오는 그것이야말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차’이자 거칠고 거대한 남성적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기차는 지독히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5미터 전방도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갇혀 걸으면서, 사정(射精)을 못해 몸부림치는 짐승같은 그 숨결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퍽, 퍽, 하고 지축을 울리는 거센 숨결소리가 드디어 절정이 가까왔다는 것을 알리면서 등 뒤로 엄습해왔을 때, 나는 걸음을 멈췄다.
기차는 잡아늘인 이등변삼각형의 가장 긴 한 변을 이루는, 바다를 달리는 말[馬]의 남성적 이미지로 콧김을 내뿜으며 치닫고 있다. 이제하가 즐겨 그리는 말상[馬像]은 ‘馬山’이라는 지명과 말상을 한 이제하 자신의 용모와도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秘苑」의 심동운이라는 인물은 예술가인데 그는 “말상을 한 긴 얼굴”에 “이상하게도 문둥이의 그것처럼 눈썹이 아주 약하고 희미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또한 그의 소설 곳곳에 나타나는 수컷스러움의 粗暴性으로 표상되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이루는 것은 아닐까. 직선과 이들이 이루는 각의 기하학의 구도는 남성적 강직함과 동시에 닫힌 공간에서 뻗어나가고자 하는 힘을 가진다. 가슴 한가운데로 길게 내뻗은 무쇠의 철로는 끝없는 가학의 힘을 가진다. 그러나 내리닫는 욕망과 거칠음의 한 발 앞에는 어느듯 바다가 있다. 한 발만 앞으로 내디디면 그곳에는 바다가 물의 친화력으로 우리의 몸을 감싸고 몸에서 내뿜는 땀과 열기를 순식간에 식혀준다. 바다는 물의 부드러움과 깊이 모를 가슴으로써, 바다의 중심을 향해 배를 뛰워 보내는 進水路의 무쇠로 된 철로의 욕망도, 기차의 거친 증기와 숨결까지도 조용히 잠재운다. 바다는 어머니 같은 여성성으로 뜨거운 온몸을 어루만지며 거친 숨결을 잠재운다.
5월로 접어들어 등허리에 끈끈한 땀기라도 비칠 부렵이면 우리는 벌써 그 불가사의한 부피의 중심에 접신이라도 되고 싶어 마음이 들떴다. 밤의 바다는, 두려움을 털고 몸을 던지기만 하면 길을 열어준다. 팔다리와 허리를 넘나들며 가슴을 따뜻이 어루만지는 물의 알 수 없는 친화력, 무수히 명멸하면서 꽁무니 쪽에 은빛 길을 만들고 어디까지 따라오는 해조류를 돌아보며 방파제 틈서리에 달랑 벗어놓은 속옷들이 행여 바람에 불려가지 않을까, 그래서 알몸으로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어리석다. 반 오리도 못헤엄쳐 그대는 주위가 이상스러울 정도로 조용해지는 것을 깨달으리라.(「바다를 위한 대생」)
어둠으로 감싸인 바다는 헤엄치는 자의 몸을 간지럽히며 열기를 식힌다. 바다는 영원한 여성성으로 모든 것을 감싼다. “숨길 것도 없이 벌거벗고 끝에서 끝까지 통째 노출되어 기세 좋게 드러누워버”릴 수 있는 공간 - 바다. 이제하는 이제 바다의 거죽이 아니라 바다의 가슴을 열고 현상의 깊이에 실재한 숨은 원질을 찾아 내어 바다 그 깊은 어둠 세계를 꿰뚫어 내보인다. 바다는 말의 발길을 머무르게 하고, 자갈을 날리며 치익증기를 내뿜는 기관차의 콧김을 잠재우고, 바다는 이제 그 깊이에서 기차, 기선, 바다가 소용돌이 치며 뒤틀리면서 꿈틀대는 심층의 무의식을 보여준다.
호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평선이 보이는 것도 아닌 작은 섬과 어두운 산들로 첩첩이 둘러싸인 바다. 이 보잘 것 없는 소도시 전체가 뻔질대는 자잘한 바닷물결을 따라 어디론지 조금씩 이동해 가면서, 조금씩 뒤틀리면서 침몰하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는 지금 조각으로 남아 병든 앞 바다에서 동화처럼 그것이 간직하고 있는 이제하 소설의 외디푸스 신화를 찾아 읽을 수 있다. 달리는 기관차가, 그의 소묘집 바다에 수없이 그려진 말과 半人半馬와 산을 뒤로하고 바다에 머물러 있는 말의 모습으로 어울러 있음을 본다. 기하학적 메마름과 시가를 가로질러 달리는 증기 기관차의 남성적 이미지가 호수 같은 모성적 바다 그 깊이에서 뒤틀리고 있다. 그러면서 마산이 어디론가 조금씩 조금씩 이동하며 뒤틀리며 침몰함은 유년의 외디푸스콤플렉스의, 욕망의 한 모습임을 상상해 본다.
우리는 30년대 소설문학에서 마산의 바다가 서정적 애상으로 우리의 눈에 비췬 바를 보았으며 상당한 시간을 뛰어넘어 70년대 이제하에게서 마산과 마산의 바다에서 그 신화적 상상력을 읽어 보았다. 소설과 비평이 취약하다고 말해지는 이 지역의 문단에서 그것이 그럴 수 있는 소이는 우리의 흥분 잘하고 격정적인 정서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소설의 공간을 채우는 것은 비판적이거나 논리적인 사고와 깊은 역사의식이지 않는가. 끝으로 이글은 임화연구, 작가세계5 등의 자료들에 많은 도움을 입었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지하련(1912-1960) 본명 이현욱, 거창 출생 마산 상남동 이주, 東京昭和高女, 동경 경제전문학교 수학 1936년 임화와 결혼 / 이제하(1937- ) 밀양 출생, 1946 마산으로 이주, 회원국교 3년에 편입, 동중, 마산고(15회), 홍익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