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_ 서정인
“눈이 내리는군요.” 버스 안. 창 쪽으로 앉은 사나이는 얼굴빛이 창백하다. 실팍한 검정 외투 속에 고개를 웅크리고 있다. 긴 머리칼은 귀 뒤로 고개 위에 덩굴 줄기처럼 달라붙었는데 가마 부근에서는 몇 낱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섰다.
“예. 진눈깨빈데요.”
그의 머리칼 위에 얹힌 큼직큼직한 비듬들을 바라보고 있던 옆엣사람이 역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목소리가 굵다. 그는 멋내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얀 목도리가 밤색 잠바 속으로 그의 목을 감싸 넣어 주고 있다. 귀 앞머리 끝에는 면도 자국이 신선하다. 그는 눈발 빗발 섞여 내리는 창 밖에 차츰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다. 버스는 이미 떠날 시간이 지났는데도 태연하기만 하다.
“뭐? 아, 진눈깨비! 참 그렇군.”
그들 등 뒤에서 털실로 짠 감색 고깔 모자를 귀 밑에까지 푹 눌러쓴 대단히 실용적인 사람이 창문 쪽에 앉은 살찐 젊은 여자에게 몸을 기댄다. 그녀는 검은 얼굴에 분을 허옇게 바르고 있다. 그는 창문 유리에 이마라도 대야 되겠다는 듯이 목을 쑥 뽑고 창 밖을 내다본다. 여자는 가슴이 답답하다. 남자의 왼쪽 어깻죽지가 그녀의 앞가슴께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별로 불편한 기색이 없다. 여자도 잘 참는다. 그녀는 머리를 의자 뒤에 기대 버린다. 윤이 나는 탐스러운 머리채가 의자의 밋밋한 비닐 위로 나신처럼 곡선을 그린다. 잠바를 입은 앞자리의 사내가 뒤를 돌아본다. 그는 그의 행운이 부럽다. 그러나 뒤에 앉은 사내는 ‘정말이지 이건 진눈깨빈데!’라고 중얼거리면서 열심히 창 밖을 내다볼 뿐, 누가 뒤를 돌아보는 것 따위에는 흥미가 없다.
“정말이지 진눈깨비야.”
“형은 어디서 입대허셨오?”
외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진눈깨비에 원한이 있다. 그는 신용산에서 입대했었는데 그때도 이렇게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데도 ‘입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염색한 헌 작업복을 입고, 헌 구두를 신고, 손에는 비닐로 만든 회색 세면 가방을 들고, 그리고 여자 친구란 이럴 때 써먹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단아한 여자가 슬픔을 머금고 저만치 서 있는 것을 그려 보면서……. 그러나 물론 그런 건 없었다. 그 대신 어디나 역 근처에는 흔히 있는 매춘부들 중의 하나가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역전 광장에 있는 더러운 공중 변소에서 나와 게처럼 엉금엉금 걸어서 판자집들 사이로 사라져 갔었다. 입대할 사람들은 약 이십 명이었다. 환송 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악대도, 단 한 장의 태극기도 없었다. 진눈깨비만이 내리고 있었다. 역 청사 저쪽에서 누런 석탄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허공으로 기적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질 때마다 그는 ‘아, 이제는 서울을 떠나는구나!’라고 탄식하면서 조금 전에 병든 창부가 사라졌던 판잣집 쪽을 돌아보곤 했었다. 미구에 날이 저물고 미련이나 아쉬움 같은 화사한 감정들이 지루함 속으로 파묻혀 버렸을 때 병사구 사령부에서 상사가 하나 나와 그들을 인솔하고 논산으로 갔었다.
“나는 시골에서 입대를 했었단 말이오.”
잠바를 입은 사람은 조금 볼멘소리다. 그는 뒤돌아보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약간 돌려서 옆엣사람을 쳐다본다. 그는 불만인 모양이다. 그러나 진눈깨비가 내린다고 해서 옛날 입대하던 때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는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계속한다.
“술을 엉망으로 마시고 뭐가 어떻게 된지도 모르게 입대를 했었지요. 누구하고나 악수를 하고, 같은 사람과 두 번도 좋고 세 번도 좋고, 그저 아무 손목이나 잡히는 대로 무릎에서 이마께까지 마구 흔들면서 고함을 지르고, 탄식을 하고, 머리를 끄덕거리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랑곳없이 벌써 백 번도 더 말했을 작별 인사를 하고, 노래를 하고, 그러다가 차를 탄 다음에는 발을 구르고……그리고는 얼마 후에 정신을 차려 보니 글쎄 그게 화물칸이지 뭡니까!”
고깔 모자의 사나이는 기분이 언짢다. 그는 기피자다. 도대체 논산이라든가 입대라든가 하는 말만 들으면 그는 어떤 콤플렉스에 사로잡힌다. 그는 창문 쪽으로 기울였던 몸의 중심을 다시 꼬리뼈께로 옮겨서 반듯이 앉는다. 여자는 그의 비스듬한 몸무게로부터 해방되어, 뒤로 기댔던 머리를 들고 몸을 추스린 다음 창 밖을 내다본다. 논산 이야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너무 많이 들어 왔다. 도대체 만나는 놈마다 논산 이야기다. 일등병에게 워커 구두발로 채여서 어떻게 머리로 문짝을 들이받았다든가, 훈련장에서 화랑 담배 한 까치씩을 걷어 상납했더니 사격 자세가 어떻게 갑자기 편안해졌다든가, 모두가 중대 향도 아니면 기타 간부가 되어서 동료 훈련병들로부터 갹출한 성금을 어떻게 배임 횡령하여 재미를 보았다든가, ‘조교’와 ‘기간 사병’들의 음담패설이 어떻게 노골적이었다든가……. 그는 그곳에 관해서 거기에 갔다 온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도대체 논산이라면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이것은 대단히 불유쾌한 노릇이다.
“어디까지 가세요?”
불쾌한 일을 오래 천착할 필요는 없다.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속담이 있다.
“군하리까지 가요.”
여자는 의외에도 부끄럼을 타는 눈치다. 제법 이마를 붉히기까지 한다. 실핏줄이 가느다랗게 두드러진다.
“미스타 김은 어디서 입대를 하셨소?”
잠바를 입은 사나이는 옆엣사람이 무감동하게 창 밖만 내다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꺼림칙하다. 그가 질문을 한 것은 이쪽의 대답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논산판(版) ―― 또는 입대판 ―― 을 내어놓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나? 아, 나! 나, 난…….”
그는, 외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 김씨는 입대하던 날의 광경을, 그것이 조금 전에 문뜩 떠올랐을 때완 달리,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요? 그건 참 재미있게 되었는데! 우리도 거기까지 가거든요.”
모자를 쓴 사람이 모자 밑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여자 쪽으로 조금 다가앉는다. 여자는 행복한 표정이다. 그 여자는 바라는 것이 지극히 작음에 틀림없다. 아마 그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는 일은 쉬울 것이다.
“아, 이 눔의 버스는 떠날 줄을 모르나!”
잠바를 입은 사나이는 울적하다. 그는 승강구 쪽을 흘겨본다. 차장은 아마 점심이라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이 차, 어디로 가나?”
검은 색안경을 쓴 사람이 고개를 뒤로 발딱 젖히고 차 안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 그는 제풀에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해 보이고 차의 문이 만들어 주는 좁은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잠바를 입은 사나이는 적이 마음이 풀린다. 색안경은 사치품일까, 필수품일까. 대부분의 경우, 필수품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뻔뻔스럽게 길거리에서 파는 백 원짜리로 사치를 하려고 하다니! 그는 이천 원짜리를 사려다가 너무 비싸서 천 원을 주고 중고를 산 바 있다. 그것은 지금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눈만 하얗게 쌓인다면 언제든지 꺼내서 코 위에 걸칠 수 있다.
김씨는 색안경을 낀 사람을 보면 장님을 생각한다. 그는 한때 자기가 검은 안경을 쓰고 장님이 되어 안마쟁이 노릇을 하는 상상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전투에서 눈을 부상당한다. 육군 병원에 입원한다. 눈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다. 애인이 찾아온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차이로 인해서 만나지 못한다. 장님이 되어 색안경을 낀다. 지팡이로 밤의 아스팔트 위를 더듬으며 퉁소를 분다. 창문 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가 그를 부른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집이 거기쇼?”
고깔 모자를 쓴 사람은 색안경이라면 질색이다. 그에겐 색안경을 쓴 사람은 형사다. 그리고 형사는 기피자를 단속한다. 그는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까지 매달 월급날이면 정기적으로 형사의 ‘예방’을 받은 적이 있다.
“예? 예, 선생님은요?”
“나요? 난 거긴 배꼽 따고 처음이요.”
“호 호 호.”
여자의 웃음소리는 김씨의 상상을 망쳐 버린다.
|생략 부분 줄거리| 세 사람과 여자는 군하리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린 여자는 길가의 술집 안으로 사라지고 세 사람은 혼삿집을 찾아간다. 그 날 밤, 서울로 돌아가지 못한 세 남자는 여인숙을 찾아들지만 대학생 김씨만 남고 이씨와 박씨는 버스에서 만난 여자가 있는 술집으로 간다.
“학생, 하, 학생.”
그러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마당이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편에 시커먼 마루가 있고 불빛이 비친 방문이 있다. 그 방문이 열리고 남폿불이 쑥 나온다. 그는 그리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마루에 걸터앉는다. 소년이 남포를 기둥에 걸고 방을 치운다.
“들어가두 괜찮으니?”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루 위로 오른다. 걷기보다는 몸을 위로 올리기가 더 힘들다. 바깥이 조용해진다. 아마 주사와 선생은 술집으로 간 모양이다. 소년이 책 나부랭이를 챙겨 가지고 나온다. 부러진 연필 토막이 희미한 남포 불빛을 받아 눈에 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어둡고 냄새가 고약하다. 소년이 불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벽 중간께에 있는 못에다가 건다. 호야가 양철에 부딪치면서 소리를 낸다. 소년이 나간다. 그는 불 건너편 벽에 기대앉아서 담배를 피워 문다. 연기를 내뿜는다. 불꽃이 한참 있다가 흔들린다.
소년이 침구를 안고 다시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을 편다. 일어설 때 보니 가슴에 훈장이 달려 있다. 그는 그를 가까이 불러서 그 훈장을 들여다본다. 둥근 바탕에 가로로 5년 2반이라 씌어 있고 그것을 가로질러서 세로로 반장이라 씌어 있다. 조잡한 비닐 제품이다.
“너 공부 잘하는구나.”
“예. 접때두 일등했어요.”
아, 이건 뻔뻔스럽구나, 못생기고 남루한 옷을 입을 주제에.
“여기가 너의 집이니?”
“아녜요. 여긴 이모부 댁이예요. 저이 집은요, 월출리예요, 여기서 삼십 리나 들어가요.”
가난한 대학생. 덜커덩거리는 밤의 전차. 피곤한 승객들. 목쉰 경적 소리. 종점에 닿으면 전차는 앞뒤 아가리를 벌리고 사람들을 뱉어 낸다.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초라한 길가 상점들의 희미한 불빛들이 그들을 건져 낸다. 그들은 고개들을 가슴에 묻고 조금씩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 은밀히 하나씩 둘씩 골목들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가난한 대학생 앞에 대문이 나타난다. 그는 그 앞에 선다.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망설인다. 아, 이럴 때 꽝꽝 두드릴 수 있는 대문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는 주먹을 편다. 편 손바닥으로 대문을 어루만지듯 흔든다. 또 흔든다. 고무신짝 끄는 소리가 들려온다. 식모의 고무신짝은 겸손하게 소리를 낸다. 그는 안심한다. 안심이 배 속으로 쑥 가라앉는다.
“학굔 여기서 다니니?”
그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심지를 줄인 남폿불이 눈앞에서 가물거리고 있을 뿐 소년은 보이지 않는다. 방바닥이 뜨뜻하다. 술이 점점 더 취해 오른다. 그는 옷을 입은 채 허리를 굽히고 손발을 이부자리 밑으로 쑤셔 넣는다. 넥타이를 풀어야지. 그러면서 그는 눈을 감는다.
“일등을 했다구? 좋은 일이다. 열심히 공부해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 영국, 불란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나랏돈이나 남의 돈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돈 없는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흔한 것이 장학금이다. 머리와 노력만 있으면 된다. 부지런히 공부해라, 부지런히. 자신을 가지고.”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는 입을 다물고 흥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자 그의 머릿속에는 몽롱한 가운데에 하나의 천재가 열등생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 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 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이었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 된다. 그들은 천재가 가난과 끈질긴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열등생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누구나가 다 템즈 강에 불을 처지를 수야 없는 일이다. 허옇게 색이 바랜 짧은 바지를 입고 읍내까지 몇 십 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중학생. 많은 동정과 약간의 찬탄. 이모집이나 고모집이 아니면 삼촌이나 사촌네 집을 전전하면서 고픈 배를 졸라매고 낡고 무거운 구식의 커다란 가죽 가방을 옆구리에다 끼고 다가오는 학기의 등록금을 골똘히 생각하며 밤늦게 도서관으로부터 돌아오는 핏기 없는 대학생. 그러다 보면 천재는 간 곳이 없고, 비굴하고 피곤하고 오만한 낙오자가 남는다. 그는 출세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다. 어떠한 것도 주임 교수의 인정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외국에 가는 기회는 단 하나도 그의 시도를 받지 않고 지나치는 법이 없다. 따라서 그가 성공할 확률은 대단히 높다. 많은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만 적중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적중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적중하건 안 하건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데에 있다. 적중하건 안 하건 간에 그는 그가 처음 출발할 때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아 ―― 되찾을 수 없는 것의 상실임이여!
|생략 부분 줄거리| 세무서원 이씨와 하숙집 주인 박씨는 술집에서 버스의 여자와 술을 마시며 수작을 한다. 두 사람에게서 김씨가 대학생이라는 말을 듣고 여자는 김씨에게 호감을 갖는다.
“너 가서 대학생 데리고 온.”
“어머, 대학생!”
“아까 버스에서 나허구 나란히 앉아 있던 양반말야. 창 밖만 내다보구 있었지만 속은 엉큼허다. 옆집에 있는데 지금쯤 늘어지게 한숨 잤겠지. 가서 깨워도 싫어하지 않을 거다. 오늘 밤 밤샘 한번 해 보자.”
여자는 주의 깊게 듣는다. 박씨도 듣고만 있다. 박씨는 눈꺼풀이 무겁다. 여자가 살며시 일어서자 기대고 있던 이씨는 비스듬히 모로 쓰러져서 방바닥에 녹아 떨어진다. 여자가 조용히 방문을 여닫고 밖으로 나간다. 남폿불이 펄럭인다.
밖으로 나온 여자는 놀란다. 그녀는 신발을 끌고 마당 가운데로 나선다. 눈이 하얗게 쌓였고 또 소리 없이 내리고 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쳐다본다. 점점이 검게 눈송이들이 하늘에 꽉 차 있다. 얼굴 위에 와서 닿는 그것들의 감촉은 상쾌하다. 그녀는 입을 떡 벌린다.
“아, 신부는 좋겠네. 첫날밤에 눈이 쌓이면 부자가 된다는데. 복두 많지.”
그녀는 두 눈을 껌벅인다. 수많은 눈송이들이 눈앞에서 명멸한다. 그녀는 신부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신부들은 똑같은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행복, 기대, 불안 또는 그 전부…….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린다. 무릎을 굽히지 않고 다리를 쭉 편 채 신발을 질질 끌어서 쌓인 눈 위에 두 갈래 길을 낸다. 그녀는 그렇게 마당을 빙빙 돈다. 눈송이가 금새금새 머리 위에 얹힌다. 그녀는 문득 신발 끄는 일을 그만둔다. 문간으로 간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대문을 비집고 밖으로 나간다.
눈은 길 위에도 쌓이고 있다. 쌓인 눈 위에 떨어지는 제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마치 백 리라도 걸을 듯이 그녀는 걷는다. 방금 쌓인 눈은 밟혀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세상은 참으로 조용하다. 그녀는 옆집 여인숙의 샛문께로 간다. 비사리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어 손쉽게 사립문을 연다. 솜 같은 눈덩이들이 부실부실 떨어진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선다. 손님을 받는 방은 둘인데 그 중의 하나에 불이 켜져 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리로 간다. 마루 위로 기어올라가서 뚫어진 창호지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본다. 한 사내가 희미한 불 밑에 웅크리고 누워 있다. 그녀는 흠칠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불이 꺼진 그 옆방 앞으로 간다. 문에다가 입을 댄다.
“꼬마야, 꼬마야.”
아무 대답이 없다. 문을 흔들어 본다. 역시 반응이 없다. 그녀는 다시 불 켜진 방 앞으로 간다. 그리고 방문을 연다.
김씨는 네 다리를 이불 밑에 쑤셔 넣은 채 새우처럼 등을 굽히고 옆으로 누워 곤히 자고 있다. 여자는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낮에 본 사람이 분명하다. 대학생! 그녀는 살포시 김씨의 어깨를 밀어서 바로 눕힌다. 넥타이가 목에 켕기는지 턱을 좌우로 흔든다. 츳, 츳, 옷두 벗지 않구. 가엾어라. 그녀는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넥타이를 풀고, 이불을 젖혀서 바지를 벗기고, 와이셔츠를 벗기고 요를 바로 펴고……. 김씨가 꿈틀하더니 일어날 듯하다가 다시 요 밑으로 파고든다. 여자는 화가 난다. 그의 팔다리를 요 밑에서 빼어 내고 그를 안아서 간신히 요 위에 눕힌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다가 덮어 준다. 베개를 바로 베 주고 그대로 엎드려서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대학생!
남폿불이 피시식 소리를 낸다. 그녀는 일어나서 방바닥에 널려 있는 옷들을 주섬주섬 벽에다 건다. 남포는 호야가 시커멓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위에서부터 남포 호야 속으로 살며시 바람을 불어 넣는다.
밖에서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그녀가 남겨 논 발자국을 하얗게 지우면서.
서정인(徐廷仁, 1936~ )
전남 순천 출생. 1962년 <사상계>에 단편 소설 「후송」으로 등단하였다.
방황하는 지식인의 자의식을 상징적·환상적 기법으로 형상화하여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물결이 높던 날」, 「미로」, 「나주댁 」, 「강」, 「분열식」 등이 있다.
작품 투시도
포인트 1 뚜렷한 사건 없이 장소의 이동으로 구성 단계가 변환됨
포인트 2 줄거리보다 인물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는 구도
작품 해설
현실에 좌절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 작품은 현실에 좌절한 사람들을 중심 인물로 하여 줄거리 자체보다는 주제 의식에 비중을 두고 환상적인 수법으로 묘사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이다. 뚜렷한 사건이 제시되지는 않지만, 현실로부터 소외된 인물들에 대한 담담한 묘사를 통해 인생의 허무와 비애를 드러낸다.
여행이라는 형식
이 소설은 개인의 내면을 환상적이고 심리적인 기법으로 묘사하여 담담한 비애의 모습으로 안정시키고 있다. 이러한 안정감은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여행이라는 형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사색의 분위기와 공간을 제공하며, 잊혀진 자신의 과거와 현실 생활의 의미를 생각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방황하는 지식인의 내면
서정인의 초기 작품에는 진실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지식인의 고민이 정확한 구성과 단아한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삭막하고 답답한 현대인의 삶이 작가의 비극적 인식하에서 분석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도 나이든 대학생 김씨는 이러한 지식인의 고민을 안고 있는 인물로, 꿈을 잃고 소시민이 되어 살아가는 삶을 보여 준다.
제목인 ‘강’의 의미
서정인의 대부분 작품들은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간직한 무기력하고 쓸쓸한 모습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차분하게 그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강’이라고 붙여진 제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는 실제로 강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데, ‘강’이란 제목은 강처럼 흘러가는 인생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핵심 정리
갈래단편 소설
배경시간 - 1960년대 어느 겨울
공간 - 군하리라는 시골 마을
시점전지적 작가 시점
주제현실에서 소외된 인물들이 갖는 허무와 비애
작품 내용
나이 많은 대학생. 가난 때문에 좌절을 맛본 이상주의자이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우울한 인물
하숙집 주인. 세상을 자기 식으로 살아간다고 자부하나 다소 낭만적인 성향의 소심한 인물
세무서원. 농담을 즐기며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속물 근성을 가진 인물
세 남자가 버스에서 만나게 되는 술집의 여자.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