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전, 조선에 잔혹한 피바람이 불었다
정여립사건이다
옥사는 3년간 계속되었고 서인의 무고와 날조로 죽어간 사람들이 무려
천여명이었다
이는 4대사화의 희생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숫자였으니, 참상은 눈을
뜨고는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모두가 침묵할때, 오직 김성일만이 그들의 억울함을 강변했으니
그 기개와 강직함이 사림의 으뜸이었다
김성일은 대궐의 호랑이로 불렸다 그는 잘못된 것은 과감히 비판하고 부패한
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탄핵했다 밖으로는 백성의 곤궁함을 살피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임진난 발생1년전, 김성일, 황윤길은 통신사의 임무를 마치고 선조앞에
복명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보고했고 김성일은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김성일의 잘못된 의견이 임진왜란의 참상을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과연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가능성에 동조했다면 조선은 쉽게 일본을 이길수
있었을까
김성일은 후일 백성의 동요를 막기위한 궁여지책이라고 이야기했지만,그것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의 준비소홀을 모두 김성일 한사람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것은 너무
과도한것이다
이제 김성일에게 지워진 과도한 멍에를 덜어주고 그를 위해 변명을
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김성일이 당파의 이익때문에 서인 황윤길의 의견을 맹복적으로 반대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김성일의 인격과 성장과정을 모르는자들의 폄훼일뿐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는 자기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념을 지켰던,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들
중의 한명이었다
먼저 김성일은 자신의 의견을 표명한 것뿐이었다 최종결정권자는 선조란
말이다
선조는 여러의견(황영길의 반대의견포함)을 참조하고 최종결정을 내렸다
결국 최종책임은 선조가 져야한다
둘째. 이미 일본의 전쟁반대세력은 여러경로로 조선에 경고를 해왔다 하지만 모두
묵살되었다
하지만 통신사와 같이들어온 일본사신이 1년후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을 칠것이라고
통보하자
크게 놀라 경상도,전라도의 여러성들을 신,개축하고 무장들을 승진,배치하고 서울에 있던
연초와
무기들을 지방에 배치하였다
즉 조선은 다시판단을 바꾸어 전쟁준비에 들어갔던 것이다
세째 김성일이 복명한뒤 일년이 지나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시기적으로 전쟁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촉박했다
국방력은 평소에 적의 침략에 맞설수 있도록 유지를해야한다 적의 침략이 있을경우에 부랴부랴 쌓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조선은 평화시에 국방을
소홀히하였다 이제 침략의 기미가 보이자 준비를 시작했지만
수년을 준비한 적의 공세를 어찌 감당할수 있겠는가
신묘한 기책으로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키는 경우는 전쟁사에서 드문경우다 대부분은
각국의
국방력의우열에 따라 판가름나기 마련이다 김성일의 말 한마디에 국방력이 급격히 늘고 준다면
나라를 어떻게 유지할수 있겠는가..
결국 조선왕조의 무능함을 한 신하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참고로 한국역사의 가장 큰 문제점중 하나는 군주와 지배층에게 매우 관대하고 나쁜 점은
특정개인이나 국가구성원전체에게로 돌려버린다는 점이다 결국 시시비비가 불명하니 배울것이 없는
역사가 된다
임진란발생시 조선의 병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일본군의 병력이 약15-20만, 조선군의 병력은 탄금대전투 8천,
용인전투6만-10만, 임진강전투 1만5천등 가용병력이 대충 10만은 넘었다 오합지졸이기는 했지만 완전한 무방비상태는
아니었다
당시 조정수뇌부나 사대부중에서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침략규모를 어느정도로 예측했을까.. 신립등도 조총을 보고도 일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고 한다
고금에 10만군이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임진난전까지 왜의 침입규모는 만명을 넘긴경우가
없었다
인간의 예측은 과거의 경험을 기준으로 할수밖에 없는만큼 당시 지도부는 일본군의
침입규모를 많아야 4-5만 정도로 예측하지 않았을까..
넷째 조선의 세제, 군역제도가 사실상 붕괴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은 위기의 시대였다
훈척과외척의 부패가 마침내 조선의 세제와 군역제도을 무력화시켰다 방납업자들의 횡포와
족징,인징의 가렴주구가 농민들을 극한으로 몰았다 토호와 관료들의 토지겸병으로 땅을 잃고 유리걸식하는 농민들이 증가하고 도적들이 각지에
출몰했다
또한 국가재정의 부족으로 성곽이
허물어지고 ,군인들의 숫자가 줄었으며 무기와 군량미가 바닥났다 남은 기간이
1년..얼마나 준비할수 있었겟는가
이 시대의 최대 화두는 부패척결이었다 어떻게 부패한 훈구파를 쓸어버릴것인가 ,어떻게
제도적으로 부패를 방지할것인가는 핵심쟁점이었다
사림은 성리학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던 이때 밖으로 외적이 쳐들어 오면서 7년전쟁이
시작됐다
(결론)
김성일의 보고는 임진왜란전 조선의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조선조정은
여러경로로 일본의 침략의도를 보고받았고 대비태세를 갖추어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의 전력과 규모를
과소평가했다 조선은 적의 침략가능성과
상관없이 평소에 국방력을 일정하게 쌓아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기존의 세제,군역제는
무너졌다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않았다
7년전쟁이
터진것이다
김성일은 그 누구보다도 당대를 뜨겁게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정세판단을 잘못했고
이것을 공론화 하지않음으로서 조선의 대응에 손실을 끼쳤지만 그 행위에 비해 너무 과도한 멍에는 벗겨져야 한다 그는 임진난때 경상도의병을 지휘하면서 분투하다 병사한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56년(명종 11) 동생 김복일(金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으로 이황을 찾아가 『서경』·『역학계몽(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 해정자가 되었으며, 이어서 검열·대교 등을 거쳤다. 1572년 봉교(奉敎)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단종의 능)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채용할 것을 진언했으며, 임금의 덕과 당시의 잘못된 폐단에 대하여 논했다.
이듬 해전적과 형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고,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부수찬을 거친 후 정언의 신분으로 변장(邊將)에게 초피덧저고리[貂裘]를 받은 우의정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 해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가계를 고쳐 달라고 사신을 보내 주청하던 일)를 위해 노력했으며, 돌아와 이듬 해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의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 해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임씨(林氏)·나씨(羅氏) 사이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나주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자성록(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하였다. 1588년종부시첨정에 이어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 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되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였고,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 조선시대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과 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가담하였고,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