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3년에는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創製)에 참여하고, 이어《훈민정음》 을 한글로 옮겨 풀었으며, 〈용비어천가
1444년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로서 오례(五禮)를 찬진, 1445년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창제에 참여하고,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용비어천가보수(龍飛御天歌補修) 등을 찬진(撰進) 하였으며, 1448년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올랐다. 1450년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使臣)을 맞이하여 접대를 하였으며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여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1년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로 수사관(修史官)을 겸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개찬(改撰) 하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올라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하여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이어 문종실록(文宗實錄)에 참여하였다.
1455년(세조 1년)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승진하였으며, 이후 1458년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하며 1459년(세조 5년) 《육전》(六典)의 편찬을 비롯하여 《관음현상기》, 《십이준도》 등을 찬하였고, 중추원사(中樞院事)로 《명황계감》의 가사(歌詞)를 한글로 번역하는 한편, 《동국통감》을 찬수 하였으며, 신숙주대사성을 겸 하고, 1460년 이조판서와 우참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들 중에는 친명(親明)을 주장하며 한글을 반대하는 최만리(崔萬理) 등 연장 학사들과, 한글을 창제(創製)를 주장하며 비밀리에 연구하는 권채(權採), 최항(崔恒), 안의(安誼)등의 소장 학사들로 구분된다.
한글창제 빌상 근원지는 권채(權採), 최항(崔恒), 권제(權題), 안의(安誼), 정의공주(세종의 둘째 딸)등이 전라도 정읍 상두산 자락을 중심으로 사찰에서 은거하며 비밀리에 한글을 연구 하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 최항(崔恒) 등에게 비밀리에 특지를 내려 한글을 연구 하도록 특명을 내린다.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는 한글을 만든다는 것은 성패에 있어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은밀히 왕족출신인 수양대군과, 세종대왕의 둘째 공주 정의공주를 후원자로 삼아 보냈다, 또한 정의공주는 전라도 정읍 부근 태인현(泰仁縣) 시댁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학사들을 정읍 상두산 사찰(미륵당)로 보낸것이다. 수양대군은 칠보면(七寶面)의 송현수(宋玹壽) 친구 집에서 집현전 학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은거하며 생활 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이 왕자시절 왕명으로 민족음악을 채집하면서 가무여인 박씨(후일 후궁 근빈박씨) 처녀와 세조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덕원군, 창원군)을 낳았다. 그리고 윤씨 왕비에서 두 아들을 산외면 도원에서 낳아 도원군(인수대비 남편) 평남정에서 낳아 평남군(예종왕)을 낳아 예종대왕 태실묘를 모악산에 세웠다.
수양대군은 왕자시절 상두산 미륵당 가무기예 무녀(無比身)으로 보이는 근빈박씨가 여기서 두 왕자를 낳은후에 윤씨왕후로 도원군과 평남군(平南)인데 산외면 도원마을과 평남정 마을이름으로 왕자의 아명이 지명으로 불린듯하다. 수양대군이 자주 목욕하는 목욕소(목욕리)마을이 있고 그 산외면(山外面) 목욕 마을에 근빈박씨 두 왕자(덕원군, 창원군) 들이 왕이 되려고 명당으로 왕자산과 태자봉을 신봉하자 예종왕이 불러서 금지시켰다.
옹동면 사람 : 권채(權採), 최항(崔恒), 안의(安誼) : 옹동면(瓮東面:瓮池面+東村面) 거주(居住).
최항(崔恒)의 부친(父親) 최사유(崔士柔)는 외직(外職)으로 두 고을 의성현령(義城縣令)과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냈다, 용담현령(龍潭縣令) 당시 옹동면(瓮東面)에서 출생(出生) 거주(居住)한 것으로 문헌(文獻)에서 확인(確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