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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서 시를 읽다(29)
- 피렌체 (피티궁전 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김철교(시인, 배재대 명예 교수)
2015년 7월 10일 (화)
오늘의 일정은 베키오 다리 -> 피티 궁 ->산타 크로체 성당 ->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거쳐, 기차로 로마(Novella 19:04- Roma termini 20:35)로 가는 날이다. 한가한 피렌체의 아침거리를 바라보면서, 호텔 식당에 앉아 커피와 빵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며 예술에 대해 짧은 생각을 했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나름의 예술철학과 새로운 예술기법이라 할 것이다. 건축에 비유한다면 설계도 혹은 골조가 예술철학이고 인테리어는 예술기법에 해당한다. 이 양 날개를 갖추지 못하면, 운이 좋아 한때의 유행에 편승하여 인기가 있을지는 모르나 클래식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는 평론가의 시각과 감상자(혹은 독자)의 시각이 다를 것이다. 평론가는 예술가의 예술철학과 예술기법 모두를 잘 알고 있어야 가치있는 평을 할 수 있겠지만, 감상자에게는 그러한 사전지식들이 색안경 역할을 하게 되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작품 앞에 서면 무한의 상상의 나라로 갈 수 있지만, 사전지식들은 그러한 상상력의 영역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이라는 편견없이 작품 자체만 바라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기서 예술가에 대한 사전지식이라는 편견과, 감상자의 예술적 안목이라는 편견은 구별되어야 한다. 감상자의 예술적 안목은 한 작품을 다양하게 감상을 할 수 있는 좋은 편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작품에 모두가 똑같은 느낌을 갖는다면 그것은 로봇의 세상이지 인간의 세상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적 안목이 제각각인 감상자의 느낌은 옳고 그름이 없다.
어떤 나무를 그린 그림은, 그 나무 자체가 아니라 화가의 눈으로 본 별도의 작품인 나무이듯이, 비평 혹은 감상문은 비평 대상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문이 제대로 작품을 평가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비평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비평을 보는 올바른 시각이 아닐까 한다. 비평문이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어야겠지만 논리적인 짜임새도 중요한 항목의 하나일 것이다. 게다기 평론가의 독톡한 문학적 향기가 첨가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미술관을 순례하면서 쓴 글이 어쩌면 감상자들에게 무용지물일지도 모르며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 글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다음으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예술철학이든 예술기법이든 ‘새롭고 독특한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새롭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피카소가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좋은 예술가는 복사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라고 말했듯이, 앞선 예술 작품 속에서 많은 영감을 얻게 되고 거기에 나의 향기를 첨가시키면 새로운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새롭다는 것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처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을 달리할 수 있으며 예술가의 안목에 의해 전해 새로운 모습으로 읽히면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처음 창조는 이미 창조주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장식할 뿐이다. 건축에 빗대어 말한다면 이미 그 설계도는 창조주가 만들었고 우리는 자신의 취향(혹은 인생관, 예술관)에 따라 그것을 꾸미는 작업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 자체도 이미 80퍼센트 정도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다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DNA 지도는 일종의 건축 설계도라 할 것이다. 다만 거기에 환경이라는 요소가 20%정도 영향을 미쳐서 우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만약 창조주가 설계도를 미리 마련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인간의 한정된 지혜와 무한한 욕심으로 엉망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배려가 아니겠는가 싶다.
예술도 기존 대상은 고정되어 있고 다만 그것을 보고 해석하는 자유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예술은 다만 복사하는 것이 아니고 (복사할 때는 남의 것) 훔치는 것(훔치는 것은 자기 것이 된다는 뜻)이다. 사실 미술사의 큰 흐름을 바꾸어 놓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도 이집트의 마스크, 과거 비너스의 그림들에서 훔쳐다가 자신의 시각으로 재조립한 것이다.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피카소의 <알제리의 여인들>도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작품을 자신의 기법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없는 독특한 기법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도 필요하긴 하지만, 기존의 많은 작품들을 소화하고 그것들을 나 자신의 예술철학과 기법으로 가공하여 내놓으면 좋은 작품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예술가는 누구보다 더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브레히트의 <배움을 찬양함 (Lob des Lernens)>이라는 시가 갑자기 떠오르며 내 생각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배워라, 난민 수용소에 있는 남자여!
배워라, 감옥에 갇힌 사나이여!
배워라, 부엌에서 일하는 부인이여!
배워라,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이여!
학교를 찾아가라, 집없는 자여!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 <배움을 찬양함> 부분 (김광규 역)
<피렌체 아르노강 위의 베키오 다리>
1.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와 피티 궁(Palazzo Pitti)
아르노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두 번째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폭격으로 아르노 강의 많은 다리가 파괴되었지만 베키오 다리는 지금도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재 베키오 다리에는 금속 공예품과 액세서리를 파는 상점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예전에는 대장간, 정육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다리에서 베아트리체와 단테가 잠깐 스치듯 나눈 인사가 단테의 시집 <새로운 인생, 1295>를 탄생하게 한 배경이 되고 있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피티 궁전(Palazzo Pitti)은 피렌체에서 가장 큰 궁전이다. 원래는 메디치 가문의 경쟁자였던 피티 가문이 1458년에 저택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하였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가 초반에 설계를 맡았으나, 1549년에 경제난으로 메디치 가문에 매각되었다. 그 후 토스카나 대공국의 왕궁으로도 쓰였고, 1864-71년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왕궁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1919년부터는 국유화되어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피렌체 피티 궁전 앞면>
지하에는 메디치가 보석 박물관(Museo degli Argenti: The Medici Treasures 혹은 Silver Museum)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소장한 은그릇과 상아세공품, 귀금속 등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티치아노와 라파엘로 등의 회화가 전시되어 있는 팔라티나 미술관(Galleria Palatina: Palatine Gallery)이 있다.
2층 현대미술관(Galleria d' Arte Moderna: Modern Art Gallery)에는 주로 20세기 이탈리아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아울러 의상 갤러리(Galleria del Costume: Costume Gallery)에는 18~20세기의 역사적인 의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피티 궁 뒤로는 1549년 트리볼로(Tribolo)가 조성한 아름다운 보볼리 정원(Boboli Gardens)이 있는데, 정원을 가로질러 언덕을 올라가면 프랑스와 독일의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도자기 박물관(Museo delle Porcellane)이 있다.
피티 미술관(Gallerie Pitti)의 공식 명칭은 팔라티나 미술관(Galleria Palatina)이며, 피티 가(家)에서 1458년 설립하였다. 이탈리아의 전성기 르네상스 및 바로크 회화 특히, 특히 라파엘과 티치아노의 작품이 유명하다. 작품의 대부분은, 피티가를 비롯하여 메디치가 등 이 건물에 살았던 역대 귀족들이 수집한 것이다. 대표적인 소장품으로는 라파엘로가 그린 <대공작의 마돈나(Madonna del Granduca)> 등 마돈나를 주제로 한 그림들, 티치아노의 <회개하는 막달라의 마리아>, 루벤스의 <성가족> 등이 있다. 우선 팔라티나 미술관에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와 <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살펴보자.
(1) 알로리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
이 그림은 어두운 배경 속에서 화려한 색깔로 그려진 대상들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유디트는 성경속의 인물로 조국을 위해 적장을 유혹하여 목을 잘라 조국을 구한 과부로 우리나라 논개가 생각나는 여인이다. 이 그림에서 독특한 것은 유디트는 화가 애인의 얼굴이 모델이 되었으며, 여종은 화가 어머니 얼굴이고, 홀로페르네스의 목은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화가들은 신화나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그릴 때 실체 이야기 속의 얼굴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주변 인물들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알로리는 좀 지나친 것 같다. 어머니를 애인 하녀로 만든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자신이야 원한다면 애인의 칼에 죽어도 누가 뭐랄 사람은 없지만.
<Allori,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 <Titian, Penitent Mary Magdalene,
1613, Oil on canvas, 139 x 116 cm, 1531, Oil on canvas. 84 x 69 Cm,
Galleria Palatina(Palazzo Pitti), Florence> Galleria Palatina(Palazzo Pitti), Florence>
(2) 티치아노 <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
이 그림의 특징은 성인 반열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그리는데 가슴을 다 드러내놓고 있는 섹시한 모습으로 그렸다. 이렇게 그린 배경을 알고 보면 이해가 간다.
성서에 기술된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악령(귀신)’에 시달리다가 예수에 의해 고침 받고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 향료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와, 요한 및 야곱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또한 가버나움에서 세 번이나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죄를 회개한 여자이다.
또한 <<황금전설>>에 의하면 “아름다운 막달라 마리아는 관능적 쾌락에 일신을 내맡긴 채 살아가던 중,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가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닦고 난 뒤 참회하고 개심하였다. 예수 승천 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며 죽은 자를 살리는 등 기적을 행하였다. 그리고는 30년간 광야생활에 들어가 매일 천사들에 의해 천국에 들려 올라가서 천국 백성들의 영광스런 성가를 들으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참회와 명상의 시간을 보내었다. 마지막으로 사제에게 나아가 제단 앞에 엎드린 채 생을 마감하였다.”
16세기 베네치아에서는 미(美)와 덕(德)을 연결시켜 육체의 아름다움은 신성한 정신의 결과라고 본 피치노(Ficino)의 사상이 유행하였다. 이에 티치아노는 성스러운 여성상을 대표하는 성서 속 여인들을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그린 바 있다. 이 그림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신성한 죄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참고: 김보연,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연구, 미술사학보 38, 미술사학연구회, 2012.)
2. 산타크로체 성당
'산타 크로체(Santa Croce)'는 '성스러운 십자가'라는 뜻인데, 14세기에 건설된 고딕양식 성당으로 피렌체에서 두오모 다음으로 큰 성당이다. 이 성당은 ‘피렌체의 판테온’이라 불리기도 하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작곡한 로시니, 미켈란젤로 등을 비롯한 피렌체 출신 유명인사 276명이 안치되어 있다.
<단테의 가묘> <미켈란젤로의 묘>
이 중에 유일한 가묘(假墓)는 <신곡>을 쓴 단테(Dante Alighieri)의 것이다. 젊은 시절 단테는 교황파와 황제파가 싸우던 정치싸움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떠돌다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하고 1321년 라벤나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한 후 라벤나 프란체스코 성당에 안치되었다. 라벤나는 피렌체에서 북동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이다. 피렌체 시에서 라벤나에 유골반환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해 가묘를 만들고 유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성당 입구에는 단테의 동상도 서있다.
그가 쓴 <신곡>을 통해서 오늘날의 이탈리아어가 확립되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는 저마다의 방언을 사용했으나 <신곡>이 쓰여진 후에는 피렌체의 말, 즉 토스카나 방언이 공용어나 다름없이 되었다. 또한 이 <신곡>에 영감을 받은 많은 음악가와 화가들은 수많은 명작들을 생산하였다.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무덤에 있는 맨 위 그림은 미켈란제로의 <피에타>를 주제로 그렸고, 그 아래 세 개의 조각은 그가 심혈을 기울였던 회화, 조각, 건축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3.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Accademia di Belle Arti Firenze)
<다비드 상> <다비스 상 쪽으로 향한 복도에 있는 미켈란젤로 작품들>
이 미술관은 미켈란젤로의 최고 걸작이라고 하는 <다비드 상>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원래 시뇨리아 광장에 있었으나 훼손이 너무 심해 1807년부터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이 미술관은 원래 미술학도들에게 피렌체의 회화와 조각을 제대로 공부시키기 위해 1784년에 설립한 미술학교였다. 어제 방문한 베니스에도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1501년 피렌체의 요청으로 2년여에 걸쳐 만든 대리석 조각상이다. 1504년 미켈란젤로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완성한 <다비드 상>은 공화국의 자유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에게 최고의 조각가라는 명성을 얻게 해준 작품이다. 다비드 혹은 다윗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소년으로, 적군의 거인 장수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리고 승리한 후에 왕이 된 인물이다.
<다비드 상>이 있는 곳으로 통하는 복도 양쪽에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품인 <수염이 있는 노예>, <잠에서 깬 노예>, <젊은 노예>, <아틀라스 노예> 등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를 장식하기 위해 만든 4점의 노예상이 전시되어 있다. 이 미술관에는 그밖에도 피렌체가 속해있는 토스카나 지역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4.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Masaccio, The Holy Trinity, 1425-28, fresco, 667 x 317 cm, Santo Maria Novella>
피렌체 중앙역(Firenze Santa Maria Novella) 앞에 위치한 이 성당에는 여러 작가의 프레스코화로 내부가 장식되어 있으나 무엇보다 르네상스 최초의 원근법이 적용된 작품인 마사치오(Masaccio)의 <성 삼위일체(The Holy Trinity), 1425-28>가 유명하다.
원근법의 기본 원리를 최초로 창안한 사람은 15세기 이탈리아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였다. 그는 두오모 성당의 거대한 돔인 쿠풀라를 지은 사람이다. 멀리 떨어질수록 형태는 작게 보인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지만, 브루넬레스키는 이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체계화시켰다.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4)가 쓴 <<미술가 열전, 1550>>에 따르면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을 발견하고 이를 마사치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마사치오는 이에 근거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벽에 프로스코로 <성 삼위일체>를 그리게 된다.
이 그림에서 예배당 밖 양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명의 기증자인 도메니코 렌치(Lenzi)와 그의 부인,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에 서 있는 마리아와 성요한, 성부와 성자 그리고 비둘기로 표현된 성령을 차례로 보게 된다. 한 벽면에 그려진 인물들이지만, 각 층위의 공간의 깊이가 달리 느껴지는 것은 원근법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림 맨 아래 부분에는 해골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나도 한때 당신과 같았다. 당신들도 지금의 내가 될 것이다.”라는 문구가 피렌체 방언으로 쓰여 있다. 해골은 아담의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골고다 언덕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진 바로 아래에 아담의 무덤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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