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장두로 나서다
두 차례 등소에 실패한 농민들은 평화적인 호소가 먹혀들지 않자 격분하였다. 드디어 1894년 1월 10일 고부관아로 쳐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마을 앞들에 남녀노소 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8일 저녁에 통문을 발송하고 9일 저녁에 모여들었고, 10일 새벽 2시경에 고부로 출동하였다.
고부민요를 주도한 이는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최경선 등 7명이었다. 최경선은 태인 주산의 접주였다. 금구 용계의 대접주 김덕명에게도 미리 알렸다. 동학도 300여명과 수 천 명의 원민들을 규합하여 기포(起包)하였다.
노약자는 제외하고 500여 민이 죽창과 총포를 들고 고부관아로 쳐들어갔으나 조병갑은 이미 눈치를 채고 정읍, 순창을 거쳐 전주 감영으로 도망쳤다. 고부를 점령한 민요군은 일단 군기고를 부수고 총창을 탈취하여 무장한 다음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날이 밝자 탐관오리들을 잡아들여 갇주고 조사한 다음 합당한 벌을 내렸다. 그리고 통문을 띄워 고부주민들 모두 동참토록 했다. 14일에 이르러 18개 동에서 1만명이나 나왔다. 강제 징수로 수탈한 벼를 찾아서 해당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17일 말목장터로 되돌아왔다.
감여에서는 전봉준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전주진영 군위 정석진이 부하 수삼인을 대동하고 봉준과 면회한 후 해산을 권유하였다. 병정 50명을 변장시켜 동학당 진영으로 들여보내 기회를 엿보다가 3명을 체포하려하였으나 오히려 정체가 드러나 50명 모두가 포로가 되었다. 5~6일 고통을 주고 백산으로 이동한 다음 모두 석방했다.
말목장터에 본진
감영군의 내침을 염려하여 민요군들은 각 면의 장정들을 교대로 차출하여 번을 서게 하였다. 교대일에는 말목장터에 500명의 장정이 머물게 되어 자연히 장사치가 몰려들고 음식점과 잡화상이 늘어나 장을 이루었다.
민요가 일어나면 군수를 바꾸고 안핵사를 파견하는 것이 상례이다. 한 달이 지나도록 정부는 아무런 조처가 없었다. 전라감사 김문현이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조병갑을 익산군수로 발령했을 때 농간을 부려 고부군수로 유임시켰던 터라 조병갑이 탐관오리로 몰려 농민들에게 쫓겨났다고 보고할 면목이 없었다.
2. 안핵사 이용태 출현
새 군수에 박원명
김문현은 수습할 길을 찾지못하자 민요 사실을 2월 10일경에야 정부에 보고하였다. 정부는 김문현을 3개월 감봉시키고 조병갑을 잡아다 문초하기로 했다. 2월 15일 새로운 고부군수로 용안현감(정읍 용안면) 박원명을 차출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였다.
민요군들은 전라도 53개 고을에 격문을 돌렸다. 대략,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알지 못하고 백성을 재물이 생기는 본원으로 보고 있으며, 전운사까지 창설하여 심하게 괴롭히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위태롭게 되었다. 비록 초야에 묻혀사는 백성들이지만 차마 나라가 위태롭게 된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각 고을 여러 군자들은 다같이 의분의 목소리를 내어 나라를 해치는 도적들을 없애어 위로는 종사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케 하자”고 하였다.
2월 19일 고부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은 농민들에게 수세징수를 비롯하여 지난날 부당하게 거두었던 각종 세미를 없애고 한 사람도 다치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다짐하였다. 민요군들도 안심하고 해산하였다.
안핵사 이용태는 2월 15일 임명되었으나 민요군들이 해산하기를 기다렸다가 3월 3일 800명의 역졸들을 끌고 내려왔다. 당시 이용태는 나이 40으로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 5개국 공사관 참사관을 거치면서 선진국의 문물을 접한 인물이다. 그러나 반상(班常)을 엄격히 따지는 고루한 인물이었다.
말목장터 민요군 본진에서는 800명의 역졸에 대항하기 위한 논의를 벌였다. 2월 25일 백산성으로 이전하였다. 백산은 비록 표고 47미터밖에 지나지 않으나 사방 20리를 내다볼 수 있는 곳이다. 북동남 삼면은 지형이 가파르고 서쪽은 나지막한 구릉으로 이어져 있어 방어에 적합했다.
『전봉준실기』에 따르면, 민요군이 백산성으로 이동한 후에 전봉준 등 수령들은 함열(咸悅) 조창을 공격하여 전운영(轉運營)을 격파하고 전운사 조필영을 징치(懲治=혼내주려)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반 민요군이 따르지 않아 실행할 수 없었다. 일반 민요군은 여기서 그치기를 희망했고, 동학도들은 새로운 단계의 운동으로 나아가려 하였다.
정부는 이런 사실을 알고는 김문현과 이용태에게 민요군이 불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다가 박원명이 부임하고 3월 3일 농민 위로 잔치를 베풀자 일반 민요군은 완전히 해산하였다. 그러나 전봉준 등 일부 민요군은 계속 남아 있었다.
민요군 일부 해산
3월 1일 동학도 수백 명이 부안군 줄포에 있는 세고(稅庫=세금창고)를 털었다. 그리고 3월 3일에는 일반 민요군이 모두 해산하였다. 『오하기문』에 보면 “3월 3일 고부군수 박원명은 음식을 푸짐히 차려놓고 난민을 불러다 대접하면서 조정은 그대들의 죄를 용서하였으니 집으로 돌아가 농사일에 힘쓰라는 뜻으로 타일렀다. 난민들은 모두 흩어졌다,”고 하였다.
모두 해산한 것은 『전라도고부민요일기』에 3월 13일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핵사 이용태가 800명의 역졸과 나타난 것도 동기가 되겠으나, 그 보다는 전봉준이 원평서 동학도 수천 명을 이끌고 임천으로 이진하자 이와 합류하기 위하여 백산을 떠난 것이다. 그 후 이용태는 고부에 나타나 조병갑을 두둔하며 난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체포, 구타, 약탈, 부녀자 강간 등의 행패를 부렸다. 신임군수 박원명이 잘 수습해놓은 것을 뒤집어버렸다.
안핵사의 만행
고부에 나타난 이용태는 먼저 박원명을 위협하여 민요 장두를 색출할 것을 명령하고 역졸들을 풀어 온 고을을 횡행하며 부녀자를 강간하고 재산을 약탈하였다. 젊은 사내들은 채찍을 가하고 생선꾸러미 엮듯이 포박해갔다. 온 고을 백성들의 고통이 골수에 스며들었다.
과거부터 민란을 수습하는 일반적인 행태였다. 이용태는 수습하기보다는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셈이다. 전봉준과 뜻을 같이 하는 금구대접주 김덕명과 무장대접주 손화중, 태인대접주 김개남은 이번 기회에 부패한 정치현실을 뜯어고치기로 하였다. 그동안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창의운동을 통하여 나라의 현실을 보는 눈이 남달랐던 이들은 새로운 운동을 결단하게 되었다.
그 시기는 말목장터로 옮겨가던 2월 25일경 구체화 된 것으로 보인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음력 2월에 이르러서는 ‘보국안민창대의’(輔國安民倡大義)라는 큰 깃발을 펄럭이며 완전히 반항의 결심을 보이기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3. 보국안민창대의
민요 단계를 넘어서다
보국의 輔자는 “도와서 바로잡는다”는 뜻이 있다. 수운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이상사회를 꿈꾸면서 그 필요적 조건으로 보국안민을 들었다. 보국안민이란 무조건 나라를 돕자「=보(保)」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아「=보(輔)」 인민의 생활을 안정시키자는 것이다.
동학운동은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데 목적이 있다. 이것은 동학의 이상이다. 그러나 사인여천의 이상은 우선 보국안민(정의로운 나라)를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보국안민창대의의 깃발을 들었다는 것은 동학의 이상사회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에 나섰다는 의미다.
당시 동학은 첫째, 종묘사직과 임금을 건드리지 않았다. 무능한 고종과 부정부패의 근원 민비를 건드리지 않았다. 군주제를 훼손시키려 하지 않았다. 둘째, 외국의 사례를 들면서 정치가 잘못되면 민회(民會)를 열어 고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모임은 작은 병기도 휴대하지 않았으니 이는 곧 민회라 할 것이다. 나라의 정책이나 법령이 국민에게 불편함이 있으면 회의를 열어 논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근자의 사례인데 어찌하여 우리들을 비류로 취급해버리는가?”고 항의했다.
당시 동학의 정치의식은 오늘의 입헌군주제를 연상케 한다. 1894년 4월 17일 주한일본공사에서 외무성에 보고한 문건에도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몰래 오가던 동학도 수십 명을 붙들어 취조하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충효를 근본으로 하며 조정에 가득찬 역적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어찌 우리를 역적이라 하는가. 묻기를 너희들은 관을 적으로 보고 항전하고 있다. 어찌 역적이 아니랴?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단지 역적의 병사를 적으로 삼을뿐이다. 어찌 왕명을 받든 경군(京軍)과 감히 저항했다고 하는가? 묻기를 누구를 역적의 병사라고 생각하는가? 대답하기를 탐학한 방백 수령들을 어찌 역적이라 아니하겠는가? 묻기를 너희들의 괴수는 누구인가? 대답하기를 동도(東道)대장군 이(李)씨이다. 나이는 겨우 14세지만 천문과 지리에 통달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간『주한일본공사관기록』1. 당시 동학군이 영광에 머물러 있을 때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퍼졌다. 신통한 14세 소년장군이 나타나 동학군을 훈련 지휘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분명 동학군이 심리전의 하나로 퍼드렸을 것이다. )
첫댓글 동학 이야기 흥미진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