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었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을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가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이 시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지금까지 나타와 안정에 빠져 살던 생활을 버리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고 ‘아름다운 혼(魂)’을 되찾아 죽을 때에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고향인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을 가겠다는 다짐을 표현한 시이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었다.’에서 ‘백골’은 화자가 죽어야하는 자신의 습관을 말한다. ‘백골’의 뜻은 이 시에서 분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부는 ‘바람이’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을 일으켜 없애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에서는 화자와 시인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하늘’은 시인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하늘’로 시인이 이상적 주제자로 여기는 ‘하늘’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옳다. 따라서 ‘하늘’이 ‘풍화작용(風化作用)’을 시켜 없애는 ‘백골’은 화자에게서 없어져할 부분을 뜻한다. 이를 시인의 다른 시인 <자화상>을 통해보면 현재의 자아인 화자가 ‘미워’하면서 ‘가엾어’ 하고 ‘그리워’ 하는 존재이나 결국은 ‘우물 속에’ ‘추억(追憶)처럼’ 놓고 떠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백골’은 화자의 과거의 삶을 의미하며 화자에게서 없어져할 부분을 뜻한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에서 ‘어둔 방’은 화자의 내면을 뜻한다. 화자는 현재 일제 강점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어둡다. ‘어둔 방’이 화자의 내면이기에 화자는 ‘이상적 주제자’인 ‘하늘’이 있는 ‘우주로 통하’는 것이고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는 인간의 소리와는 다르다. 화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바람’으로 전달된다. 이를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선가’에서 ‘-ㄴ가’는 ‘자기 스스로에게 묻는 물음이나 추측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로 화자가 ‘하늘’의 소리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려준다. 이 ‘바람’은 하늘의 뜻이면서 양심의 소리를 상징한다.
‘어둠 속을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에서 ‘어둠 속’은 화자의 마음 속을 말한다.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은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점차로 파괴되거나 분해되’고 있다. ‘곱게’는 이러한 일이 저항 없이 순조롭게 일어남을 말한다.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에서 ‘눈물 짓는 것’은 ‘백골’이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여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이 슬퍼하는 주체가 ‘내, 백골, 아름다운 혼(魂)’ 중 어느 것이냐 묻는다. 이 셋은 모두 화자이다. 이를 자아의 분열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자아의 분열은 정신병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은 적당하지 않다. 이 셋은 화자가 지니고 있는 자아로 분열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찰하는 현재의 나’와 ‘버려야할 과거의 나’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미래의 나’로 보아야한다. ‘내가 우는 것이냐’는 ‘이상적인 나’를 이루기 위하여 ‘과거의 나’인 ‘백골’을 버려야 함에도 ‘백골’이 가지고 있는 장점인 ‘편안함’이 없어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냐는 질문이다. ‘백골이 우는 것이냐’는 ‘버려야할 과거의 나’인 ‘백골’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지는 것을 슬퍼서 우는 것이냐는 질문이다.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는 ‘미래의 나’가 ‘과거의 나’인 ‘백골’에 연연하는 ‘현재의 나’를 가엾게 여겨서 우는 것이냐는 질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질문은 화자가 ‘아름다운 혼(魂)’을 추구하나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에서 ‘개’는 일반적인 개가 아니다. ‘밤을 새워 어둠을’ 향해 ‘짖는’ ‘개’이다. ‘밤’은 일제강점의 불의한 시간을 의미하고 ‘어둠’은 조선을 강점한 불의한 세력을 의미한다. 불의한 시간과 세력을 용납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없어질 때까지 쫓는 소리를 내기에 ‘지조(志操) 높은’ 존재이다.
‘어둠을 짖는 개가/ 나를 쫓는 것일게다.’에서는 불의한 세력을 향해 외치는 ‘지조(志操) 높은’ 소리를 들으면서 화자가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어둠을 짖는 개’는 화자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혼(魂)’을 가진 존재이다. 그런데 화자는 ‘어둠 속을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고 있다. ‘어둠을’ 향해 ‘짖’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둠을 짖는 개가’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를’ ‘아름다운 혼(魂)’이 되라고 편안한 ‘고향(故鄕)’에 안주 하지 말고 떠나라고 ‘쫓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에서 ‘쫓기우는’의 ‘-우-’는 사동 또는 피동의 선어말어미로 화자가 ‘가자 가자’하는 말이 마음이 움직여 흔쾌하게 동의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아직도 편안한 ‘고향’에 대한 연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곳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고향이 두 개이다. 태어나서 자란 고향과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곳이다. 여기서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은 후자를 말한다. 그 곳은 ‘아름다운’ 곳이고 그 곳은 ‘아름다운 혼(魂)’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이곳는 ‘백골(白骨)’과 함께 갈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이 버려야할 과거의 자신인 ‘백골(白骨) 몰래’ 가려고 하는 것이다.
윤동주는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불굴의 의지를 가지진 않았지만 현실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사적인 역할을 인식하면서 그 길을 갈등하면서 가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 윤동주의 매력이다.
이 시는 과거의 나타와 안정에 빠져 살던 자신을 ‘백골(白骨)’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자신이 버리려고 한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워 현재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들게 한다. 화자는 자신의 마음인 ‘방’에서 반성을 한다. 화자의 마음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하느님의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와 마음 속에 있는 ‘백골을’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여 사라지게 만든다. 화자는 사라지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다. 아직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눈물 짓는 것이’ 자신의 과거를 보고 있는 ‘내가 우는 것이냐’ 아니면 사라지는 ‘백골이’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슬퍼서 ‘우는 것이냐’, 아니면 화자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혼(魂)이’ 과거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는 현재의 내가 가엾어서 ‘우는 것이냐.’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조(志操) 높은 개’가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데 울면서 머뭇거리는 ‘나를 쫓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화자는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고 한다. ‘내 백골(白骨)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고 결심한다. 20070115월후0320 약간 흐림 전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