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던져준 생각.
2018 08 03. (입추 나흘 전)
서울 날씨가 장난 아니다. 아마도 한반도 아니 지구의 날씨가 장난아리라고들 한다. 어제는 사람들이 시간대로 기록 갱신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마치 마라톤 경주를 실시간으로 보는 것처럼 기록을 보고 있었다고들 한다. 뭐, 1994년 더위는 저리가라고 하고, 111년 만에 오는 더위란다. 공식적으로 기록을 잰 이후의 이야기지만, 오랜 만에 온 것이리라. 그렇다고 그전에 이런 기록이 없으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지구 온난화 현상,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대의 끝자락에 들어섰다고들 한다.
더위와 추위란, 밤과 낮, 여름과 겨울처럼 자연의 교대현상이 아니겠는가? 자연 현상에서는 교대현상과 달리 대립과 상보의 현상도 있으리라. 아마도 남과 여는 한편으로 대립으로 다른 한편으로 종족의 영위를 위해서는 상보현상에 속하리라. 자연 현상에서 대립은 과 상보를 모순으로 환원시키려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대립과 상보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연속성이다. 모순은 인위적으로 따로 떼어내어 불연속을 강조하는 주지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관념의 놀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이런 문제를 철학적으로 다룬다고들 한다.
있음과 없음(존재와 무), 움직임과 안 움직임(운동과 정지, 동태와 정태)는 또 다른 연관의 문제거리 이다. 이런 것을 사고하는 철학자들은 사고의 전개를 끝까지 밀고나가 추상화하여 형이상학이라 이름 붙였다. 여전히 없음(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고 하나, 나로서는 존재에 대해 할 말이 많이 있지 무에 대해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정지에 대해 할 말보다 운동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존재와 무, 운동과 정지를 논하는 사유를 잘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자연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 그것 참, 문제거리이다. 더위와 추위, 밤과 낮이 교대하는 자연현상이 아닌가? 하나가 있다가 없어지고 다른 것이 있는 것. 그리고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있다와 없다를 추상화하여 존재와 무라고 하면 다른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있다와 없다’라는 자연의 순환의 문제에서 인간의 신체와 영혼으로 바꾸어 보면, 괜시리 복잡한 관심의 방향의 차이가 드러난 것 같다. 나는 더워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교대 또는 이중화 현상에서 인간의 이중화 현상(이원론이 아니다)을 유추한 것이 기원전 5세기 쯤에 와서야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한다. 인류가 그 오랜 이전에는 신체를 영혼과 구별하기보다, 신체가 자연의 물체들과 다른 점에 대해 더 주목하는 시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러다가 이 신체가 다른 물체들보다 더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고(동태적)과 그리고 전수(기억, 유전)를 통해서 보존되고 전달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착안하게 되었으리라. 다양한 작업에 주목한 것이 거푸집(관념)을 사고하게 되었을 것이고, 전달이 이루어지는 측면에서 기억의 보존 또는 영혼의 연속성을 생각했으리라고 본다.
어쩌면 초기에는 영혼과 신체, 생명과 물질이 자연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은 포괄적으로 운동하고 있고, 여러 다양한 물체를 만들고(창조하고) 또 변형하고 변질하게 하는 힘(동태)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의 활동(운동)안에서 더 활발하게 생생하게 움직이는 것이 있고, 느리고 타성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있으며, 게다가 긴 시간에는 움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일생동안 보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도 있다고 여겼으리라. 이렇게 보면 3가지 층위(위상)으로 간추려지지만, 자연은 무한히 많은 층위를 생산하고 변화하게하고 소멸하게 하는 위상들을 만드는 실재성일 것이다. 자연의 위상에서 상층을 점하는 생명체의 위상에서 신체와 영혼은 한편으로 신체적 측면에서 소멸하고 거의 움직이지 않은 평형적 상태를 유지하려는 물체적 측면에서부터, 생명의 활동으로 이동하고 자라는 측면도 있고, 작업하는 능력도 있고, 그 작업의 도구와 도안을 전수하는 능력도 있고, 그리고 늦게서야 등장하는 자아의 범위를 정하는 의식도 발전하였으리라.
덥다. 신체가 자기 유지를 위한 온도를 넘어서면, 그 유지를 위한 노력을 신체뿐만 아니라, 신체와 독립적이라고 여기는 영혼도 그 유지 노력에 동참한다. 사람들은 현재의 노력을 사고로 바꾸어, 과거의 인물을 떠올린다. 처음으로(1902년)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스 캐리어(Willis Carrier, 1876-1950)에 대해 존경한다고 한다. 한편으로 기억을 상기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구체적으로 그 기계를 이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둘째의 사실에 만족하고, 첫째의 사실은 있었던 일이지만 우리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 기억은 영혼의 것이고 더위를 식히는 에어컨의 활용은 신체의 것인가? 사람들은 현재로 기계 활용을 하는 사고부분과 과거의 기억을 현재까지 이어가는 사유부분이 다르다고 여긴다. 사실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덥다는 의식의 차원이라기보다 신체의 차원, 더 넓게는 한반도의 차원이 이라는 측면에서, 자연, 물체, 신체, 영혼(의식)은 불가분의 연결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연결 또는 불가분의 연속은 의식이 심층에 닿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럼에도 도구의 사용에 매료되어 자연(물질)을 버리고 물체로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만을 이용하기를 좋아한 것은 길어도 2천 5백년 정도이다. 노마드라는 생태를 무매개적으로 지니고 있는 인간은 생태계에서 살다가 생태계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하지 않지만 안다. 천국으로 간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어린이에게 우화적으로 이야기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노마드란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노래와 같다]
의식이 좀 개회되던 시기에 인간은 지성이 도구를 통한 도구를 제작하여 편리하고 안전한 삶을 산다는 것을 알았다. 지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좀더 추상적 기하학(기원전 300년경)을 전개할 수 있는 시기에 이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능력이 있음을 자각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 즉 생태계의 삶에 순응 또는 숙명으로 사는 것과 달리, 지성 또는 이성을 통해 자연을 지속가능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욕망은 19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모든 것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조작 또는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진 것이 이기심이라는 욕망이다. 그럴까? 자연은 반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길을 즉 자기원인의 길을 간다.
철기시대의 거푸집을 통한 지성 또는 이성은 전형 또는 형식을 만들고, 그 형성과정은 물질이라는 것을 마음대로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19세기 말에 와서야 지구의 자전이 상반된 두 자기력을 생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상반되 두 힘이 대립이지만 상보관계라는 것을 조작을 통해 깨닫는 것은 20세기 중반에 반도체로부터 일 것이다. 생태계는 모순이 없다. 모순은 순수 사유에서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그 모순을 자연 즉 생태계에 침입 또는 명령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덥다, 추위는 여섯달 지나면 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더위와 추위가 모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상반된 두 힘이 교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두 힘이 상반된 대립의 정점을 하나로 규정해서 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름에서 겨울로 입하에서 입동으로 설명하는 것은 말이다. 살아본 사람들은 그 날이 언제 인지는 모르지만 그 지나감을 안다.
자연계를 도구로 삼아서 지속가능한 착취와 잉여생산을 하는 것은 지성이 이기심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모순을 가장하여(가식으로) 생태계 또는 자연자체를 수동적으로 명령(지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상층과 심층의 분할방식이 제국주의의 또는 유일신앙의 방식이다. 이기심의 존속을 위해서 배제자 또는 제외자 또는 이방인을 설정해야 한다. 한반도의 더위 아니 한반도의 생태적 지위에서도 둘을 분할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이 있다. 하나를 배제하면서 배제되지 않은 부분이 당연하게(어이없게) 옳고 건전하고 도덕적이라는 형식을 만들었다. 제국이 만든 것인데 그 마름(주구)들이 주구 장창 떠들고 있다. 이 더위가 생태계 바탕까지 연결이 아니라, 잘라진 상부가 에어컨으로 견딜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하는 한, 지구의 반격은 아니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은 생태계의 보존으로 이어질 것이다. 연결없는 사유가 만든 더위, 남북의 지위, 분할된 사고가 제국이 통치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지구 환경의 더위에다 전개하면, 사람들은 너무 과도하게 나갔다고 할지 모른다. 지구 온난화로 가는 잘못과 오류는 자연을 도구로 삼는 유일신앙과 제국주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자연의 자기원인에 의한 자기 활동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노력, 생태계로 하방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인간이 도구의 활용으로 환경을 지속가능하게 한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자연과 생태의 순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사유할 필요가 있다. 자연 생태로부터 생각하는 것도 이기심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지지만, 자연 속에서 생태에 대한 생각을 지금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윤구병이 던지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 어린 시절의 교육은 자연 생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술은 그 다음 차원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기술은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지만, 생태의 삶은 온몸으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의 이야기를 빌지 않더라도 청소년 시절에는 토양(생태)과 더불어 살며 배우고, 청소년을 지나 제2의 탄생기에, 즉 고교 마지막에, 추상과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추상에서는 단절이 아니라 자연의 연속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제2의 탄생은 그 시절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 긴 생애동안에 계속해서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하방은 필요하다. .
그래도 한 마디,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라는 주문을 아침 체조때 마다 외우자. (51SKC, 보완 51SKE)
첫댓글 [삼복더위로 더울 때, 예전에선 마루, 평상, 또는 더하여 나무 그늘 및 도로 가에 돛자리를 펴고 선잠을 자기도 했다. 인민이 생태 속에 파편화되었다고 하지만 열린 공간에 있다. 그런데 에어컨의 시대 방콕의 잠을 자고, 절편으로 부분의 일을 하는 환경 시대이다. 생태론이 자연의 뿌리에 닿아 있다면 환경론은 뿌리없는 파편들의 조합인 셈이다. - 들뢰즈가 절편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나찌와 파쇼의 등장이라 한다. 갇힌 방의 에어컨 문화가 미시정치의 극단이며, 제국의 분할과 통치의 기술의 일부일 것 같다. ]
<자연(즉 방황하는 원인) 다시 말하면 자연의 능동성에서 출발하여 사유하는 것은> ... 모두 전부 유물론적 해석이야. (275) - 박홍규(1919-1994), 「방황하는 원인(planômenê aitia -티마이오스(Timée), 47e-48c)」(1987년 6월 28일 강의), in 형이상학 강의 1: 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pp. 248-299(P.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