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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미국이야기
1. 미국의 탄생
콜럼버스는 1492년 첫 항해를 시작으로 3회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가지만 죽을 때까지 인도(印度)인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을 인도인이라는 의미로 인디언(Indian), 스페인어로 인디오(Indio)라고 불렀다. 1502년에는 또 다른 스페인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풋치(Amerigo Vespucci)도 아메리카대륙을 탐험하는데 이곳은 인도가 아닌 새로운 대륙(New World) 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America)라고 명명한다.
아메리카 대륙은 60여 개의 원주민(Native American) 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유럽 각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원주민과 이민자들 간의 알력이 시작된다. 이민자들 중에는 탐험가들이 있는가 하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오는 사람, 범죄를 짓고 도망을 오는 사람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오게 된다. 1620년에는 종교 박해를 피해 오월의 꽃(Mayflower)이라는 배를 타고 영국으로부터 청교도(Protestant /Pilgrim Fathers)들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몰려온다.
<1> 식민지(植民地) 쟁탈전
아메리카 대륙은 처음에는 스페인의 세력권에 있었지만 스페인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이 통치하던 최전성기였는데 1578년 길버트 경(Sir Humphrey Gilbert)과 1584년에는 랄리 경(Sir Walter Raleigh)에게 스페인에 맞서 미국에 식민지를 개발하게하고 정착할 권리를 부여한다.
1585년 랄리 경은 현재의 버지니아 지역을 탐험하고 평생 독신으로 보낸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려서 처녀라는 의미의 버지니아(Virginia)라고 명명했다.
1607년 버지니아를 시작으로 식민지를 넓혀나가기 시작한 영국은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 프랑스는 캐나다, 네덜란드는 뉴욕 일대,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차지했다.
랄리요새 / 길버트경 / 랄리경 / 엘리자베스 1세
그러나 당시 유럽 열강들 중에서 군사력으로 가장 우위를 점했던 영국은 종내는 당시 중남미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스페인 세력까지 몰아내고 미 대륙전체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스페인은 아메리카대륙에서는 밀려나지만 중남미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차지한다.
미국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 동쪽 대서양 해안을 따라 식민지가 13개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 13개의 식민지를 열거해 보면,
북부지역이 뉴햄프셔(New Hampshire), 마세추세츠(Massachusetts),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코네티컷(Connecticut)이고
중부지역은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델라웨어(Delaware),
남부지역은 메릴랜드(Maryland), 버지니아(Virginia),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조지아(Georgia)였다.
<2>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년부터 6년간 오하이오 강(Ohio River) 주변의 인디언 영토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쟁탈전을 벌인 전쟁인데 우여곡절 끝에 협상으로 전쟁은 끝난다. 뿐만 아니라 1757년, 유럽에서도 거의 모든 나라가 참전하는 7년간의 전쟁이 벌어지는데 포메라니아 전쟁(Pomeranian War), 또는 일명 7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포메라니아전쟁(7년 전쟁)은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을 말하는데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스웨덴-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하노버-영국의 연합군에 맞서 벌였던 유럽대륙 전체의 전쟁이었다. 영국은 미 대륙과 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된다.
국가경제가 어려워진 영국은 미국 식민지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게 된다. 또 개척정신이 강한 이주민들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부로 가려고 하자 영국은 이 지역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설정하고 나가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하여 자주 분쟁이 발생하였다. 서부로 가는 미국인들이 현지의 원주민(인디언)들과 자주 분쟁이 발생하자 인디언 식민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영국은 군대를 파견하게 되는데 군사비용 일부를 식민지에 부과하여 그러잖아 심한 반발에, 불을 지르는 꼴이 된다.
<3> 보스턴 차(茶) 사건
1770년 보스턴에서 시가행진을 하던 영국군과 시민이 충돌하여 보스턴 시민 5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 극도로 감정이 악화됐는데 1773년 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한다.
1773년 12월, 홍차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자를 실은 영국배가 보스턴 항구에 들어오자 인디언 복장으로 위장한 식민지 사람들이 배에 올라가 홍차를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이다.
보스턴 차 사건 / 제1차 대륙회의
영국의 압력이 거세어지자 영국의 횡포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식민지 대표들은 1774년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대책을 의논하는데 이것이 제1차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이다.
이어 제2차 회의도 열려 논의사항을 영국에 건의하지만 영국의회에서 건의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국과의 완전 분리를 결정하게 된다.
<4> 독립전쟁의 시작
1775년 4월, 영국 정규군과 미 민병대가 보스턴 근교 렉싱턴(Lexington)에서 충돌한 것이 첫 전투인데 양측이 큰 피해를 입었고, 자신감을 얻은 미 민병대들은 계속 공격하여 영국군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결국 영국의 윌리엄 하우(William Howe)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1776년 3월에 보스턴에서 철수한다.
1775년 6월, 제2차 대륙회의에서 아메리카 군(軍) 총사령관으로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임명했으며, 임시정부 수립, 화폐 발행, 차관, 우편업무 개시, 해군 창설 등 일련의 중대한 결정을 한다.
1776년 7월 2일 식민지연합(United Colonies)의 각 주는 자유가 보장된 독립된 주(州) 임을 선언하고 이틀 뒤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를 채택한다.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언하는데 이 날이 바로 미국의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이다. 이 독립선언으로 영국과의 전투는 내란(內亂)이 아니라 정식으로 전쟁, 즉 선전포고가 된 것이다.
<5> 새러토가(Saratoga) 전투
미 민병대는 거듭된 패배에도 물러서지 않고 줄기차게 공격을 감행하자 1776년, 영국은 하우 제독을 파견하여 식민지 대표와 협상을 할 것을 제의한다. 그러나 미국 임시정부는 평화제의를 거부한다.
1776년 12월 24일, 미국의 워싱턴(George Washington) 장군은 트렌턴(Trenton)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수비대를 공격하여 1,000여 명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린다.
트렌턴 전투 / 조지 워싱턴 / 호레이쇼 게이츠 / 존 버고인
또 프린스턴에서는 영국군 3개 군단을 격파하는데 이것이 독립군 최초의 승리로 ‘트렌턴·프린스턴 전투(Battle of Trenton Princeton)’라고 한다.
1777년, 미 독립군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 장군은 새러토가(Saratoga)의 베이스고지 전투에서 마침내 영국군 존 버고인(John Burgoyne)의 항복을 받아내고 협정을 체결한다.
<6> 해외 각국의 원조
유럽 여러 나라들이 직·간접적으로 미 독립군을 돕는데,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준 나라가 프랑스이다. 1778년 프랑스는 해군 함대와 육군을 파견하고 영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다.
그 외에도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도 무기와 물자를 제공했고,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는 무장 선박을 보내 군수물자 운송을 직접 도와주기도 하였다.
<7> 요크타운(Yorktown) 전투
1781년 영국군 장군 콘월리스(Cornwallis)는 요크타운 요새에 있었는데 미국의 워싱턴 장군과 프랑스 로샹보(Rochambeau) 백작의 연합군이 요새를 포위하여 꼼짝을 못하게 하였고, 영국의 토머스 그레이브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는 프랑스 함대에 밀려 뉴욕 항으로 피신해야 했다. 결국, 24척의 프랑스 함대와 지상 연합군의 공격을 견지지 못하고 콘월리스는 전 병력을 이끌고 나와 항복하였다.
<8>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탄생
그리하여 1783년, 파리에서 종전 강화조약을 맺었고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미국은 1787년 헌법을 제정하고 1789년 정식으로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연방공화국(聯邦共和國)이 탄생하였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은 미 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선출된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날이 1776년 7월 4일이므로 7월 4일이 독립기념일이고, 아메리카합중국이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1798년이다.
2. 멕시코 전쟁(Mexican War)
실질적으로 멕시코의 지배를 받던(원주민/인디언) 텍사스지역은 1836년, 소수의 백인 이민자들의 주동으로 혁명을 일으켜 텍사스 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샘 휴스턴(Sam Houston)이 취임하였다. 그 이후, 이 텍사스 공화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오스틴(Stephen Austin)이 미국과 합병을 추진하자 멕시코는 이 지역을 자기들의 영토(Territory)라고 주장하며 개입하여 1864년부터 3년간 미국은 멕시코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텍사스 남부 샌안토니오(San Antonio)는 18세기 초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전도소를 짓고 알라모(Alamo)라 명명했는데 수도회에서 이지역의 전도를 포기하자 스페인(사실 멕시코)이 점령하여 요새로 사용했다. 이곳 주변에 미루나무가 많아 미루나무라는 의미의 알라모(Alamo:스페인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835년 12월 텍사스 의용군 부대는 멕시코 군대를 몰아내고 알라모를 되찾는데 샘 휴스턴을 비롯한 텍사스 지도층은 이곳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철수 하지만 의용군들은 끝까지 사수하기로 하고 철수를 거부하였다.
1836년 2월 23일, 멕시코의 ‘산타 안나(Santa Anna)’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 정규군의 대 공세가 시작되자 의용군을 이끌었던 ‘제임스 보이(James Bowie)’ 대령과 ‘윌리엄 트래비스(William Travis)’ 대령은 183명의 의용군을 지휘하여 5.000여 명의 멕시코 군과 14일 간이나 저항하다가 전원이 전사한다.
이 알라모 전투에서 멕시코는 1.000~1.600명의 전사자를 냈다고 한다. 이들이 알라모 요새에서 14일 간 버티어 준 덕분으로 샘 휴스턴 장군이 이끄는 텍사스 정규군은 방어준비를 철저히 할 수 있었고, 결국 멕시코 군을 격파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멕시코 땅이었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일부의 엄청난 땅이 텍사스(미국) 영토가 되었고, 그 이후 알라모는 텍사스 인들의 자랑이자 영웅적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며 전사자들 전원이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이 전쟁(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함으로 멕시코는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 자신들의 영향권에 있던 대부분 지역을 미국에 넘겨주게 되는데 전쟁 보상금형식으로 일부지역은 강제 매각형식을 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텍사스공화국은 텍사스(Texas) 전체와 와이오밍(Wyoming), 뉴멕시코(New Mexico), 콜로라도(Colorado), 캔자스(Kansas)주 일부가 포함되었다니 엄청나게 큰 공화국이었던 셈이다. 전쟁 이후 텍사스공화국은 국무장관이었던 오스틴(Stephen Austin)의 주도(협상)로 공화국 설립 8년 만에 미합중국과 합병하는데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주(州)다.
3. 알래스카
알래스카(Alaska)는 원래 소련영토였지만 크림전쟁 등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된 소련이 1867년 미국에 720만 달러에 매각하게 되는데 초기에는 쓸모없는 땅을 샀다고 매매를 성사시킨 미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가 맹비난을 받지만 그곳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미 본토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1912년에는 미국의 49번째 주(州)로 지정되는데 미국의 주 중에서 가장 큰 주(한반도의 7배)라고 한다. 알래스카는 금 뿐 만 아니라 은, 철광석에 석유까지 무진장 매장되어있어 미국이 노다지를 얻은 셈이다. 매각대금 720만 달러는 100평에 우리 돈 2원....
4. 하와이(Hawaii)
미국의 50번째 주 하와이(Hawaii)는 하와이왕국이 외국인이 운영하는 사탕수수농장 국유화를 선언하며 미국과 갈등이 생겼는데 미국인 농장주와 미 해병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농장주 대표이던 샌퍼드 돌(Sanford Dole)이 하와이 마지막 왕인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여왕을 몰아내고 임시대통령이 된다. 돌(Dole)은 하와이 태생이지만 부모가 미국 이주민인 백인이었다.
돌(Dole)은 정권을 잡자 곧바로 미국에 편입을 요청하고 미국이 승인하는 절차를 거쳐 1959년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는데 모든 설계는 막강한 미국이 뒤에서 조종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검은 구름이 하늘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다시 만날 날 기대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하와이 민요 알로하오에(Aloha Oe)는 하와이어로 ‘안녕 그대여’ 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여왕인 릴리우오칼라니(Queen Liliuokalani)가 작사 작곡했다고 한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여왕은 많은 노래를 남겼는데 이 알로하오에는 그녀가 왕녀(王女)이던 시절 승마장에서 목격한 미 해군 보이드 소령과 하와이 처녀가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4. 남북전쟁의 발발
미국의 남북전쟁은 미국이 북부와 남부로 갈려져 만 4년에 걸쳐 벌인 내전으로, 격전 끝에 결국 북부가 승리한 전쟁이며 수많은 사상자와 엄청난 재산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북부를 대표하는 공화당 출신 에이브라햄 링컨(Abraham Lincoln)이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노예해방 문제가 남북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각 지역 간의 이해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갈등, 남-북은 물론 동-서 지역의 이익이 엇갈리는 등 수많은 갈등이 전쟁의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전쟁 / 흑인노예시장 / 스토우부인 / 링컨 대통령
<1>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
1850년, 학교 교사이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 부인은 흑인 노예들의 참상을 그린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반 노예제 신문인 내셔널 에라(National Era)지에 연재하였다. 연재소설에서 흑인노예들의 참상이 부각되어 북부에서는 흑인노예들에 대한 동정심이 커진 반면 남부에서는 스토우 부인의 이름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노예는 공업이 발달한 북부지방에서는 필요성이 크지 않았지만 목화재배 등 농업이 주된 산업인 남부는 노예가 꼭 필요하였던 것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연재를 끝내고 단행본으로 나오자 미국 각 지역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은 것은 물론, 23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미국 흑인노예들의 참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링컨 대통령이 인도적 차원에서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어찌 보면 이 책이 남북전쟁의 발단이요, 북군 승리의 열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아브라함 링컨은 스토우 부인을 백악관에 초대하여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스토우부인의 손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가냘픈 손으로 수많은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셨군요!”
<2>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의 경과
전쟁은 처음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 텍사스 등 7개 주가 링컨이 이끄는 연방정부로부터 떨어져 나올 결의를 굳히고 1861년 2월 버지니아주 리치몬드를 본부로 하는 『미국 남부 연합』을 조직하면서 구체화 되었다.
1861년 4월, 대통령 에이브라햄 링컨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 찰스턴 항구에 있는 『섬터 요새(Fort Sumter)』에 식량을 보내려 하였는데 남부 연합은 연방정부가 남부를 공격하려고 지원하는 것으로 보고 섬터 요새에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중립적 태도를 취하던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버지니아 등 4개 주가 남부 연합에 가담하게 되어 총 11개 주가 되었는데, 버지니아 주는 두 쪽으로 갈라져 서쪽인 웨스트버지니아는 북부편이 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섬터요새 / 리(Lee)장군 / 미드(Meade)장군 / 그랜트(Grant)장군
전쟁 초기에는 경제력이 든든하고 유능한 군인인 『리(Robert Edward Lee) 장군』이 버틴 남부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위기에 처한 북부의 링컨대통령은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맞대응을 펼쳐 크고 작은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3> 전쟁의 참상
마지막 최대의 격전지가 된 『게티즈버그(Gettysburg) 전투』가 1863년 7월 1부터 7월 3일까지 펜실베니아 남부 게티즈버그에서 벌어졌는데 7월 4일에는 「리 장군」이 이끄는 남부군이 밀려서 포토맥(Potomac) 강까지 후퇴하였다. 이때 계속 공격하였으면 남부군이 전멸하고 전쟁이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북부군을 이끌던 「미드(George Gordon Meade) 장군」은 평소에 친했던 「리 장군」과의 우정을 생각하여 포토맥 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북군은 곧 총사령관이 「그랜트(Ulysses S. Grant)장군」으로 바뀐다. 그러나 후일 미드장군은 제18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 게티즈버그 전투로 남군은 2만 5천명, 북군은 2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하는데 결국 1865년 4월 12일 「그랜트장군」과 「리 장군」이 만나 정식으로 남군이 항복함으로써 결국 북군의 승리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
이 4년간의 전투로 북부는 총동원 200만 명 가운데 36만 명이 사망하였고, 남부는 70만 명 중에서 25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1월, 미국 남북전쟁의 격전지였던 펜실베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링컨 대통령이 한 연설은 약 3분 정도의 짧은 연설이었지만 지금까지 미국에서는 가장 훌륭한 연설로, 가장 완벽한 글로 기억되고 있다. 1865년 불리하던 전쟁을 북부군의 승리로 이끌어 낸 것도 이 연설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링컨의 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For the People, Of the People. By the People)』는 민주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전쟁의 결과는 너무도 참혹하였다.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 외에도 전쟁이 끝나고 이틀 후인 1865년 4월 14일 링컨 대통령은 암살된다. 남부는 전쟁으로 인하여 대부분 황폐해졌는데 링컨이 약속했던 관대한 남부 재건안도 물거품이 되었으며 남부는 거의 북부의 식민지로 떨어지게 되었다. 특히 자부심이 강한 미국 남부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굴욕이었고, 사사건건 무조건 북부를 반대하는 전통은 지금까지 남아있어 북부 정당인 공화당은 무조건 반대하고 남부 정당인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5. 미 대통령 관저 백악관(White House) 이야기
백악관은 1800년에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대통령의 집(President's House)’ 이라 불리었다고 하는데 1812년 영국인들의 습격에 의해 불에 검게 그슬렸고 그 그슬린 시커먼 벽에 흰 페인트칠을 해서 백악관(白堊館/White House)이라 불리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루스벨트 대통령 때부터 그렇게 불리어졌다고 하며 당초의 건축은 프랑스 건축가 피에르 찰스가 설계했다고 한다. 백악관은 모두 132개의 방이 있으며,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만 빼고 2대 존 애덤스(John Adams)부터 역대 미국 대통령이 모두 여기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2005년 8월의 내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은 혼잡한 뉴욕과는 달리 도시 가운데를 관통하는 시원한 포토맥 강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널찍한 도로와 함께 어느 부분을 쳐다보아도 건물과 푸른 숲이 조화를 이루어 여유롭게 느껴졌다.
웅장한 국회의사당, 하늘을 찌르는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 스미스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등이 몰려 있고 또 백악관 근처 웨스트 포토맥 공원에는 한국전 참전 기념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총검 위에 우의를 걸친 채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걸어가는 피곤한 군인들의 모습이 한국전쟁의 참상을 여실히 그려내고 있어 가슴이 쓰렸다.
6. 체로키(Cherokee) 인디언의 슬픈 역사
아칸소(Arkansas)주에서 40번 고속도로를 타고 오클라호마 주를 지나다 보면 ‘눈물의 길(The Trail of Tears)’ 이라는 사적(史蹟) 표지판이 보인다. 대륙의 가슴에 길고 깊게 패인 흉터라는 그 눈물의 길이다. 60여 년 전 미 남동부에 살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백인의 총부리에 떠밀려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고, 미시시피 강을 건너, 멀고 먼 지금의 오클라호마 주까지 끌려온 길이다.
눈물의 길은 한 줄기가 아니고 북쪽 루트(Northern Route), 물길(Water Route), 벨 루트(Bell Route), 벤지 루트(Benge Route)등 여러 줄기가 있다. 짧게는 수백 킬로미터에서 길게는 조지아 주에서 오클라호마 주까지 2,ooo km에 이른다. 한 부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들이 추방됐기 때문에 종착지도 여러 곳에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종착지가 바로 체로키국(Cherokee Nation)의 수도인 탈레쿠아(Tahlequah)이다.
2000년 인구센서스에서 체로키는 72만 9.533명으로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인디언 부족이며 이중 25만 명 정도가 체로키국의 국민이라고 한다. 체로키 부족은 아칸소, 미주리, 캔자스,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등 8개 주에 퍼져 있다. 인디언 부족들은 주로 보호구역(Reservation)이라고 불리는 곳에 모여 살지만 이 체로키 부족은 보호구역이 따로 없고 대단위로 모여 살지 않는다. 탈레쿠아 만 해도 인구 1만 4천명의 소도시인데 그 중 인디언 인구는 4천명도 안 된다. 명색이 체로키국의 수도인 여기에서도 인디언은 소수이고 60%가 백인이다. 하지만 핏줄은 더 심각한 문제다. 일단 미 정부의 관청인 인디언부(Bureau of Indian Affairs)에서 정한 기준은 인디언으로 인정 되려면
첫째, 미 연방정부가 인정한 인디언 부족에 속해야 하고
둘째, 이 부족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이거나 또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최소한 4분의 1은 섞여야 한다.
체로키 부족은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말을 타고 창으로 들소를 잡아서 먹고 사는 그런 부족은 아니었다. 사냥도 했지만 농사를 지으며 한곳에 정착해 살았고 동물의 가죽으로 만드는 원뿔형 천막(Tepee) 대신 흙으로 된 집을 짓고 살았다. 그들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개화된 5개 부족(5 Civilized Tribes)’ 중 하나로 불린다.
특히 1809년 세쿠오야(Sequoyah)라는 문자를 만들어 1828년부터 영어와 섞어서 체로키 피닉스(Cherokee Phoenix)라는 신문을 찍어낼 정도로 ‘선진적’인 부족이었다. 이 문자는 세쿠오야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 사람은 자신도 문맹이었지만 여섯 살 난 딸 아요카(Ahyokah)의 도움을 얻어 문자를 창제했다고 한다.
이 문자를 보면 영어 알파벳과 유사한데 발음은 전혀 딴판이다.
이를테면 ‘S’는 ‘데’, ‘G’는 ‘와’, ‘R’은 ‘슨’으로 발음된다. 이것은 영어를 전혀 모르던 세쿠오야가 영어 알파벳을 자신의 말을 기록하는 기호로서만 부분 차용했기 때문이다.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남이 만든 문자를 익히거나 자기가 전혀 새로운 한 가지를 만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후자는 말처럼 쉽지 않다. 세쿠오야는 창제 과정에서 무모한 짓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조롱에 시달렸고 또 문자를 발명하면 문자를 쓰는 백인처럼 ‘나쁜 사람’이 된다는 협박도 받았다. 무엇보다 부인의 반대가 심해 그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그녀는 그가 만들어놓은 문자들을 갖다 버렸다고 한다.
<체로키 문자> ᎠᎣᎤᎭᏁᏊ ᏏᏈᏛᏜ ᏫᎸᏥ ᏀᎯᏄᏩ
어쨌든 이에 굴하지 않고 문자를 만들어낸 그의 덕택에 체로키 부족은 문자를 갖게 됐고 근처에 사는 백인들보다 훨씬 문맹률이 낮았다. 이쯤 되면 누가 야만인이고 문명인인지 그 기준이 모호해진다. 체로키 부족은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것과 달랐는데 그 중 하나는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성경과 찬송가까지 부족어로 번역해 암송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는 백인들처럼 흑인 노예를 부렸다는 점이다. 당시 남부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흑인의 관점에서는 체로키 부족도 인종차별의 가해자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백인이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가한 고통이 묻혀서는 안 된다. 처음 아메리칸 대륙을 찾아온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호의에 의존해 삶을 연명하다가 담배 재배에 성공, 처음으로 환금 작물을 수확하게 되자 떼 지어 몰려와서 대륙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인디언들에게 수없이 많은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면서 땅을 빼앗아 나갔다.
많은 인디언 부족들이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 편을 들었는데, 이미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영국은 인디언들에게 살 땅을 보장해주겠다고 유혹해 같이 미 독립군을 협공했는데 미국이 이기면서 인디언들의 설 자리가 좁아졌다.
미국은 점점 넘쳐나는 백인 이민자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동부 인디언들을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 그 다음엔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몰아냈고 그 다음엔 보호구역 안으로 몰아넣거나 땅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다. 백인들이 퍼뜨린 천연두와 수두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점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1828년 조지아 주의 워드(Ward) 계곡에 살던 한 인디언 소년이 백인 장사꾼에게 갖고 놀던 금덩어리를 판 것은 체로키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근처에 금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백인들은 금광 일대의 땅을 보유하고 있는 체로키 부족의 추방을 더욱 서둘렀다. 조지아주 의회는 체로키 땅을 몰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개척민 출신의 앤드류 잭슨(AndrewJackson)대통령이 이끄는 연방정부는 인디언 강제 이주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체로키 부족은 개화된 부족답게 세련된 구제절차를 밟아 미 대법원에 위헌 심판을 청구했는데 그 계기는 체로키 부족을 돕던 선교사 새뮤얼 워체스터 목사(Reverend Samuel Worchester)가 조지아 주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건이었다. 이른바 워체스터 대 조지아 주정부의 사건에서 1832년 미 대법원은 당연하게도 구속의 근거가 된 조지아 주의 체로키 부동산 몰수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건국 이후 불안정했던 미국의 법체계를 바로 잡은 대법원장으로 유명한 존 마샬(John Marchal)의 판결이었다.
자국의 이해에 어긋난다고 해도 법적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정신이 신생국가인 미국에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소식을 들은 잭슨 대통령의 말은 두고두고 기억되는 ‘망언(妄言)’이 되었다. ‘어 그래, 마샬이 그렇게 결정했어? 그럼 그 사람보고 그렇게 해보라고 그래.’
잭슨 대통령은 대법원의 판결을 깡그리 무시했다. 판결이 난 지 1년이 지난 뒤에도 워체스터 목사는 풀려나지 못했다. 1838년 5월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장군은 7,000명의 병사들을 풀어 조지아주 뉴 에코타(New Echota)라는 곳에 모여 살던 체로키 부족을 포위하고 1만 6천여 명을 임시수용소에 강제로 수용했다.
그 뒤 체로키인들은 병사들의 감시 하에 인디언 영토(Indian Territory)라고 불리던 황량한 불모의 땅 오클라호마 주의 탈레쿠아까지 1,600km의 거리를 마차를 타거나 또는 걸어서 왔다. 도중에 겨울을 만나 모진 추위와 영양부족으로 4천명이 숨졌으니 총만 안 쏘았을 뿐 사실상 대량 학살이었다. 당시 인디언들을 호송하던 미군 사병 존 버넷(John Burnett)은 80세에 당시를 회상한 글을 남겼다.
‘차가운 비가 내리던 1838년 10월의 어느 날, 그들은 짐승처럼 645대의 마차에 태워졌다. 그 날 아침의 비애와 엄숙함을 잊을 수 없다. 추장 존 로스(John Ross)가 인도한 기도가 끝나자 나팔이 울려 퍼졌다. 이어 마차가 구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작은 손들을 흔들며 정든 산과 집들에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버넷은 ‘눈물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라고 썼다. 1839년 3월 26일 탈레쿠아에 도착할 때까지 눈물의 길을 따라서 무덤이 행렬을 이뤘다는 것이다.
희생자 중에는 추장 존 로스의 부인도 있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하나밖에 없던 이불을 아픈 아이한테 주고 결핵에 걸려 숨졌다. 박물관에 전시된 체로키의 기록을 보면 담담하게 당시의 고통이 기술돼 있다.
‘3주가 지나자 남매 5명이 매일 한 명씩 차례로 숨졌다. 우리는 그들을 묻고 계속 갔다.’
다음 구절에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다.
‘마차에서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매일 노인과 아이들이 죽어나갔다. 온통 눈물과 슬픔의 범벅이었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 결코 웃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새 땅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나를 다시 찾았고, 환희에 가득차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텔레쿠아가 척박한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체로키국을 건설했다. 1839년 8월 존 로스는 체로키국의 최고 추장으로 선출됐다. 2년 만인 1841년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남녀 공학 학교를 설립해 또다시 이곳에서도 아칸소나 텍사스 주의 백인들보다 훨씬 낮은 문맹률을 기록했는데 체로키인 90%가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체로키 문화유산센터 정문 앞에는 3개의 원주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건국 후 11년 만인 1850년 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체로키 여성 고등 교육기관(Cherokee Female Seminary)의 남은 자취다. 체로키의 교육기관들은 탈레쿠아에 있는 노스이스턴 주립대(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의 모태(母胎)가 되었다.
추장 로스는 오늘날 인디언부의 기준에 따르면 아메리칸 인디언이 아니다. 피의 1/8만 체로키인이었다. 하지만 순수 혈통의 체로키인들로 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특히 백인들의 회유에 넘어가 고향 땅을 미 정부에 헐값에 넘겨준 뉴 에코타 조약(Treaty of New Echota)에 서명한 몇몇 순수 혈통의 체로키 지도자들과 명확히 대비됐다. 그는 마치 모세와 같은 지도자다. 고난 속에서 분열되기 시작한 부족을 흩어지지 않게 하나로 묶고 유배지에서 ‘체로키국의 황금기’를 이끌다가 1866년 세상을 떠났다.
공간적으로 눈물의 길은 탈레쿠아에서 끝나지만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눈물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제몰수와 추방, 대량학살에도 불구하고 거친 평원에서 나라를 건설하는 저력을 보여준 체로키인들은 이곳에서도 점점 늘어나는 백인들에게 포위되고 있었다. 체로키인들은 개인적으로 땅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땅을 개인적으로 소유한다는 개념은 낯설었다. 땅은 공동체가 관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체로키인들에게 땅을 개인에게 할당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땅을 사고 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1880년대 헨리 도즈(Henry Dawes) 상원의원이 체로키의 땅을 조사하러 왔다. 체로키국에는 빈민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부족은 단 한 푼의 빚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기심을 장려하지 않는 부족의 시스템이 잘못 됐다고 설파한다. 이기심이야말로 발전의 동력이며 문명의 기초라고 말했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돌아가 1887년, 땅의 개인적 할당을 의무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우리가 평소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때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마치 그런 질문에 대비라도 하듯 미국은 어떤 일도 법을 만들어서 한다.
1898년에는 커티스법(Curtis Act)을 만들어 부족 단위의 땅 소유를 아예 금지해버렸다. 그리고 1908년 오클라호마가 미합중국의 46번째 주가 되면서 인디언 영토(Indian Territory)는 소멸돼 버렸고 체로키국도 사실상 와해됐다. 체로키인들은 그 이후 ‘눈물의 길’ 보다 더 험한 길을 걸어왔다. 기댈 언덕이 없어졌고 1930년대 대공황이 닥쳤을 때는 살길을 찾아 각자 눈물의 길을 떠났다. 체로키의 언어인 세쿠오야는 더 이상 쓰는 사람이 없어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법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해로운 법뿐이었고 우리는 미국의 법정신에서는 보이지 않은 투명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공존(Co-existence)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결코 잊지 않는다.’
체로키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 정부의 ‘관료적 제국주의’에 맞서 체로키국을 인정받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 끝에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체로키인들이 지도자들을 다시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법에 서명함으로써 재건의 발판을 닦았다. 그 때 체로키국의 ‘공무원’은 불과 3명, 예산은 1만 달러였다. 오늘날 체로키국의 공무원은 4천명, 예산은 2억 7천만 달러로 늘어났다. 체로키국은 사실은 특이한 나라다. 국토도 없이 마치 망명정부처럼 정부청사만 있다. 그래도 국민은 있다. 세금도 걷는다. 체로키인들은 이중국적자다. 주정부에는 세금을 안내지만 연방정부에는 세금을 내고 체로키국에도 세금을 낸다. 하지만 체로키국의 주요 재원은 연방정부의 보조금과 카지노 운영 수익이다.
체로키국의 수반은 여전히 최고 추장(Principal Chief)으로 불리며, 현재 채드위크 콘터셀 스미스(Chadwick Corntassel Smith)이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늑대와의 춤을’을 보면 인디언들이 ‘주먹 쥐고 일어서’, ‘늑대와의 춤을’, ‘발로 차는 새’, ‘머릿속의 바람’과 같이 보통명사를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스미스 추장의 경우 콘터셀이 그렇다. ‘옥수수수염’이라는 뜻이다. 옥수수수염은 법학 박사 학위가 있는 인디언법 전문가다.
체로키국도 나라인 만치 일 년에 한 번씩 최고 추장의 국정(State of the Nation)연설이 있다.
옥수수수염은 이 연설에서 체로키국의 목표가 10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눈물의 길이 100년 전으로 돌아가야 끝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닐 것 같다. 시간을 거꾸로 걷는다고 상상해보라.
‘지금부터 100년 뒤, 우리가 100년 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다면 우리가 나라를 성공적으로 재건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가 말하는 100년 전이란 오클라호마 주가 생기기 전의 체로키국. 문자 해독률이 90%에 이르고 넘치지도 않지만 부족할 것도 없었던 공동체 생활을 누리던 그 상태다. 그는 그 상태를 "삶의 질"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삶의 질이란 둑방에서 낚시하는 겁니다. 호화 보트를 타고 알래스카로 원정 낚시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질이란 우리의 아들딸과 손자들이 조그만 공을 갖고 마당에서 노는 것을 지켜보는 겁니다.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를 구단주 특석에서 보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시작한 삶의 질에 대한 그의 연설은
‘우리가 지구상에 있는 순간들을 사랑하고 즐기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게 삶의 질입니다. 불평하고 남을 탓하는 불안정한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와 같은 생활철학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은 ‘삶의 질은 존재하는 것이며 행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Quality of life is being and doing, not having)’ 였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언어와 일, 그리고 공동체를 중심단어로 던졌다. 언어를 잃으면 문화를 잃는 것이다. 눈물의 길도 원래 체로키의 말로는 ‘Nunna dual Tsuny(The trail where they cried)’다. 그들이 눈물을 흘린 길이라는 뜻이다.
‘눈물의 길(The trail of tears)’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짧게 해야 하기 때문에 줄여서 그렇게 했겠지만 체로키 말에서는 아직도 피눈물이 나는 것 같은 동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반면 영어로 표현된 ‘눈물의 길’에는 눈물이 왠지 응고되고 메마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어로 옮기면서 의미를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체로키(Cherokee)도 영어식 표현이고, 원래는 다스라게(Tas-La- Ge)로 ‘마을’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옥수수수염은 언어를 통해 풍요로운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면서 일을 통해 자립하며 공동체를 통해 함께 나누는 삶을 기약하자면서 연설을 마쳤다. 세계의 어느 나라의 국가수반으로부터도 듣기 어려운 내용의 연설이다. 이 연설은 ‘당신의 초라한 종(Your humble servant)’ 이라고 자신을 낮추는 말로 끝난다.
그러나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다. 많은 인디언들이 사회 부적응자로, 알코올 중독자로, 정부의 구호대상으로 현대를 살아간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인디언들의 국가적 실체(체로키국)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엄연히 살아 있다.
오클라호마 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던 공화당의 톰 코번(Tom Coburn) 하원의원은 ‘미 연방정부와 인디언 국가들과의 조약은 원시적이고 웃기는 합의’ 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인디언의 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의 말은 ‘독립국 안에서는 독립국이 있을 수 없다’는 미국 내 반(反) 인디언의 오랜 전통을 대변하는 것이다. ‘눈물의 길’이 현재 진행형인 ‘눈물을 흘리고 있는 길’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물의 길’은 미국 체로키인디언의 가슴에 패인 깊은 흉터가 아니라 아직도 피가 흐르는, 아물지 않은 상처다.
7. 조셉 추장(Chief Joseph)의 마지막 연설
*조셉 추장(1840~1904, 미국 오리건 주에 거주하던 인디언 네즈퍼스족의 마지막 추장)
『나는 이제 지쳤습니다. 나의 족장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노인들도 다 죽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젊은이들인데 그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젊은이들을 이끄는 사람도 죽었습니다. 밖은 춥고 덮을 이불이 없어 어린 생명들이 죽어갑니다. 일부는 먹을 것도 없이 도망쳤습니다. 이미 얼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어린 것들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지만 얼마나 많이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을 죽음 속에서 찾게 될 겁니다. 지배자들이여! 나는 너무 지쳤습니다. 내 심장은 아프고 슬픕니다. 지금 태양이 떠 있는 이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겠습니다.』
<1877년 10월 5일, 미국 몬태나 주 베어포산>
1870년 경 네즈퍼스(Nez Perce) 족은 금광을 찾는 백인 개척자들의 공격을 받는다. 우두머리 조셉 추장은 결국 부족민을 이끌고 캐나다 국경지대로 이동한다. 이들은 국경을 64km정도 남긴 몬태나 주의 베어포산에서 미국 기병대에 포위된다. 이때 조셉 추장은 한 편의 시와 같은 항복 연설을 하게 된다.
그의 연설문은 골드러시 시절, 미국 인디언의 피와 눈물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여겨진다. 조셉 추장의 연설은 담백하고 진솔하다. 항복을 결심한 리더지만 비굴해 보이지 않는다. 부족민의 생명을 위하여 자존심을 내려놓는 용기와 절실함이 읽히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기 개인의 자존심을 앞세워 무리한 선택을 하다가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조셉 추장의 다른 연설이다.
『내가 문명인들의 학교를 마다하는 이유가 있다. 학교를 세우면 문명인들은 교회를 세우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끝없이 하느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곳 네즈퍼스 인디언 주거지역에서도 마찬가지 듯 어느 곳엘 가나 가톨릭과 개신교는 끝없이 싸운다. 우리는 그런 걸 원치 않는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것을 가지고 가끔 다투기는 하지만 위대한 정령(Great Spirit)에 대해선 건드리지 않는 법이다. 우린 그런 걸 배우고 싶지 않다.
우리는 위대한 정령이 만물을 만들어 놓은 대로 세상의 것에 만족하고 손대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강이나 산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바꿔 버린다. 그들은 그것을 창조라고 부르지만 우리의 눈에는 철없는 파괴로 보일 뿐이다. 대지를 적시며 흐르는 강, 이 대지, 내가 선 이 자리를 나는 세상 어느 것보다도 사랑한다. 자기 아버지가 묻힌 대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들짐승보다 못한 자이다.』
조셉 추장은 백인 개척자들을 ‘문명인’이라고 지칭했는데 당시를 되짚어보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훨씬 더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백인 개척자들은 대부분 문맹이었지만 체로키 인디언들은 90%이상이 읽고 쓸 줄 알았고, 고등 교육기관도 있었다. 단지 백인 개척자들은 총으로 무장되어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보다 전투능력이 앞섰을 뿐이었다.
8. 친구 이야기
뉴욕 퀸즈(Queens)의 으리으리한 고급 중화식당에서 조군 가족을 만났습니다. 중학교 동기인 조군이 마침 북부뉴욕 이타카(Ithaca)에 있는 아들네에 가 있던 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초대를 해서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들이 사는 뉴욕주 북쪽(Upstate) 이타카(Ithaca)에서 뉴욕시까지는 승용차로 4시간 반이 걸립니다. 아침 일찍 떠나 맨해튼을 구경하고 저녁을 약속한 중식당으로 찾아갔습니다. 조군은 부부와 작은아들 내외가 나왔고, 나는 우리 부부와 아들내외 그리고 젖먹이 손자까지 다섯입니다.
조군의 친구사랑은 익히 알려진 터이지만 미국사회에서 아들부부까지 불러내어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시겠지만 미국사회는 개인생활을 매우 중요시하는 까닭에 비록 아들이지만 아버지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 함께 불러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부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네 가족이 모여 두 시간여 멋진 식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군의 둘째아들은 UN에 근무하는데 스위스에서 2년, 뉴욕 본부에서 2년, 벌써 4년차 직장인이고, 우리 아들 녀석은 나이는 한 살 위(35)인데 아직 학생(코넬대 대학원)이고... 조군 와이프는 여전히 건강하셨고, 나는 중학교 단짝친구였던 조군과 이야기하는 내내 서로 어깨를 감싸 안고 옛일을 회상하며 그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었습니다.
<조군과의 특별한 에피소드>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형편이 어려워 일 년을 쉬고 강릉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바람에 조군이 3회, 내가 4회로 졸업을 했다.
1학년 때 봄 소풍을 갔는데 1, 2학년이 함께 진재(長峴) 저수지 위 여찬리의 굵은 소나무 밭으로 갔었다. 어머니가 싸 주신 벤또를 덜렁거리며 거기까지 걸어갔는데... 도착하여 나무 밑에 앉아 쉬고 있는 참인데 뒤에서 급우가 쿡 찌르며 2학년 형이 나를 찾는다고 한다. 돌아다 봤더니 중학교 단짝이었던 조군이 거기 서 있었다. 얼결에 일어나서 갔더니 슬쩍 빠져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하는 말이 네가 진학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진학해서 너무 기쁘다. 우리 가서 한 잔 하자. 내가 자네 입학 축하주를 살터이니...
아직 아침을 조금 지났을 즈음인데 두 놈이 어슬렁거리며 면사무소께로 올라가다보니 마침 구멍가게가 하나 보인다. 어려운 시절에 어디서 돈이 났는지 쐬주 한 병과 이까(오징어)한 마리였던가... 축하한다, 고맙다, 어쩌구 하면서 한 잔씩 주고받다 보니 조군은 말짱한데 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한 병 더 시켜서 두 놈이 소주 두 병을 해 치웠는데 나는 완전히 취해 버리고 말았던 모양이다.
‘야! 너 술 잘 못 마시는구나.’ ‘몰라, 언제 술을 먹어 봤어야지...’ 조군은 나를 보더니
‘안 되겠다. 너는 집으로 바로 가야겠다.’ 그 때부터도 고지식한 나는
‘야, 그래도 담임 선생님한테 얘기는 하고 가야지 날 찾으면 어떡허냐?’
‘내가 슬쩍 얘기할 께 그냥 가’ ‘안 돼, 내가 직접 담임 선생님께.... ’ 조군은 할 수 없었던지,
‘그래 그럼 맘대루 해...’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담임 선생님을 찾았더니 새파랗게 젊었던(이름은 기억안남) 우리 담임 선생님도 한 잔 하셨는지 홍당무가 된 얼굴로 내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빙그레 웃으신다.
‘선생님, 저... 머리가 갑자기.... 아파서....’ ‘어, 그래 그럼 먼저 집에 가거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는 반 친구들을 뒤로하고 돌아서니 조군은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얼른 집으로 가라고 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비척거리며 사람들 눈을 피해 먹지도 못한 벤또를 덜렁거리며 얼마쯤 오다가 결국 길옆에서 조금 떨어진 산소 옆의 잔디위에 뻗어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세상모르고 잤는지 갑자기 정신이 드는데 오들오들 한기가 난다. 눈을 떠 보니 하늘에 별이 총총.... 다 쉬어빠진 벤또를 덜렁거리며 집에 오니 식구들은 소풍간 녀석이 저녁이 늦도록 오지 않으니 온통 난리가 났고....
그런 이야기를 뉴욕 한복판 식당에서 털어놓으며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다. 사모님(조군),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고요..... <근데 조군은 기억을 못하겠단다. 머리 나쁜 녀석,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
<그 이후의 이야기>
우리는 강릉(江陵) 관동(關東)중학교 1회 졸업(63년)이고 조군은 해양대학을 나와 마도로스생활을 시작해 현대상선 영국, 호주, 지사장을 지냈다. 그리고 지금은 뉴욕 퀸즈에서 네일 아트(Nail Art) 가게를 크게 운영한다. 그리고..... 무지 술을 좋아한다. ^^ (2020년 한국으로 완전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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