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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 대불포교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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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玉泉寺) 경남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번지 ☎ 055-672-0100
대한불교조계종 제 13교구 본사의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676년(문무왕 16)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학을 널리 펴기 위해 전국 요소에 창건했다는 화엄 10찰의 하나라고 전해진다.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을 한 연화산의 옛 이름은 비슬산이었는데, 폐허나 다름없던 옥천사가 인조 때 중창되면서 산 이름도 연화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옥천사라는 이름은 맑은 물이 샘솟는 경내의 옥천(玉泉)샘에서 비롯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에 자방루(滋芳樓), 좌측에 탐진당(探眞堂), 우측에 적묵당(寂黙堂)이 있으며, 그 밖에 명부전∙금당(金堂)∙팔상전(八相殿)∙나한전∙산신각∙독성각(獨聖閣)∙칠성각∙객실 등이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큰 규모를 보이고 있고, 가람의 지붕이 마치 연꽃무늬처럼 배열되어 있어 규모면에서 본사인 쌍계사를 능가하고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보물 제 495호로 지정된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53호인 자방루,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60호인 반종(飯鍾),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32호인 대웅전이 있다. 그 밖에도 큰 법고(法鼓)와 자방루 앞뜰에 하얀 화강암으로 다듬어 세운 청담(靑潭)의 사리탑이 있다. 이 절은 청담이 처음 출가한 사찰이기도 하며, 고려말의 신돈(辛旽)이 노비로 살았던 절이기도 하다. -------------------------------------------------------------------------------------- 옥천사는 주차장에서 내려 약 15분 가량 걸어 올라가야 한다.
옥천사가 있는 산 이름은 연화산(蓮華山)이다. 옥천사 주지스님의 말씀을 옮겨본다. 물은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연꽃의 식물적 특징은 그런 썩은 물 속에서 연꽃은 핀다. 그러면서 그 연꽃이 더러운 물을 정화하여 깨끗한 물로 바꾸어 준다. 부처님께서 연꽃을 예로 든 이유가 바로 그기에 있다. 부처님의 말씀도 연꽃처럼 탁한 세상을 맑게 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연잎은 물이 스며들지 않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연줄기는 구멍이 8개로 팔정도를 의미한다.
연꽃이 피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연화산의 형국이 연꽃이 반쯤 핀 모습이며, 경주의 토함산과 마찬가지로 물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심한 가뭄에 온갖 다른 산들의 물이 말라 없어질 때에도 연화산에는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옥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설화를 또 스님은 말씀하신다.
원래 옥천사 경내에는 몸에 좋고 맑은 옥샘이 4군데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장군샘이 가장 좋은 물이 나오는 샘이었다. 어느 날 한 고승이 옥천사를 방문해 물을 마시더니만 장군샘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이 물은 효험이 너무나 크서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에너지가 넘쳐서 사고를 많이 친다고 하였는데, 과연 옥천사 주변 대중들이 사고를 많이 치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고승의 말씀대로 장군샘을 막아버리니 그 이후로는 사고를 치는 대중이 없어졌다고 한다.
옥천사 일주문(一柱門)
옥천사 일주문(一柱門) - 옥천사 일주문에는 연화산 옥천사(蓮華山玉泉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옥천사 부도전(浮屠田)
옥천사 부도전(浮屠田) - 주차장에서 옥천사 가는 길목 좌측 언덕에 옥천사 부도전이 있다.
옥천사 천왕문(天王門)
옥천사 천왕문(天王門) - 천왕문 안에는 사천왕을 모셔놓았는데, 사천왕은 부처님께 불법을 수호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분들로 사찰에 침범하는 일체의 잡귀나 삿된 자들을 막아주는 하늘의 천왕들이다. 동방의 지국천왕, 남방의 증장천왕, 서방의 광목천왕, 북방의 다문천왕을 말한다. 이들은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일곱 겹의 산맥과 해와 달을 관장한다고 한다. 이 천왕문은 1991년에 건립되었다.
옥천사 하마비(下馬碑)
옥천사 자방루(滋芳樓,도 유형문화재 제 53호)
옥천사 자방루(滋芳樓,도 유형문화재 제 53호) - 이 곳의 자방루는 거대한 성채처럼 절 외곽을 둘러쌓아, 중심 영역인 대웅전을 가리고 있다. 이런 유형은 산지에 큰 뜰을 갖춘(山地中庭) 절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자방루는 그 크기와 형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방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또 기둥 사이를 모두 두터운 문으로 막고, 오직 앞마당과 면하는 전면만을 개방하여 큰 성채를 방불케 한다.
건물의 장식 역시 당당하고 사치스러울 만큼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이러한 건물 형식은 이 건물이 단지 신도를 위한 설법용이나, 불구(佛具)를 두기 위한 보관용이 아님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직후 조정에서는 전략 요충지에 비상시를 대비한 군사적 목적의 사찰을 건립한 예가 있다. 경남의 대표적인 호국사찰이었던 옥천사의 건물도 이러한 목적에서 지어졌을 것이다. 즉 군사용 회합장소로 대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며, 사찰을 보호하는 외곽의 방어용 성채도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군사 훈련을 위한 넓은 장소도 있어야 했을 터이므로 산지에 자리 잡은 절에서는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자방루 앞의 넓은 앞마당에 바로 그러한 목적에 잘 부합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거대한 성채와 같은 자방루는 조선 후기 사찰 건립의 또 다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자방루 내부
자방루(滋芳樓)는 영조 40년(1764) 뇌원대사(雷遠大師)가 초창하고 고종 25년(1888)에 중수한 누각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건물이다. 240여 년 된 건물로 경남 유형문화재 제 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들보 6개 중 왼쪽에서 4번 째에는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비천상이 쌍방으로 그려져 있고 3번 째에는 비룡(飛龍)이 그려져 있다.
4개의 기둥 중 2번, 3번 기둥머리에는 용두(龍頭)가 쌍방으로 조각되어 있다. 지붕 빝의 장혀와 창방에는 화조도(花鳥圖)와 풍경화를 번갈아 그렸는데 이는 120년 전 중수 당시에 그린 단청그림이다. 각종 기묘한 새 그림이 안팎으로 다수 그려져 있어 조선말기의 단청장 스님들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밑의 큰 벽화는 근래에 그린 풍경화로 솜씨에 차이가 있다.
사찰의 누각은 대게 2층 누각 밑은 통과하여 대웅전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으나 자방루의 경위 초창 당시 300여명의 승군(僧軍)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단층 누각을 건립한 것이다. 이후 누각은 승려들에게 불경을 가르키고 초파일 같은 큰 행사 때 법회를 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자방루(滋芳樓)"란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는 말로 "불도를 닦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3번째 대들보의 비룡(飛龍)
4번 째 대들보의 비천상
자방루의 대웅전 방향에는 연화옥천(蓮華玉泉)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템플수행관
템플스테이수행관 - 템플수행관에는 불교용품점이 입점해 있고 그 앞에 이 옥천사에서 출가한 청담의 사리탑이 있다.
콘테이너박스는 종무소로 이용되고 있고 그 뒤로 괘불대와 범종각이 있다.
옥천사 대웅전(大雄殿)
옥천사 대웅전(大雄殿, 경남 유형문화재 제 132호) - 옛 대웅전은 정유재란(1537) 당시 왜군들이 불태우고 임란이 끝난 후 40여 년 동안 잡초만 무성한 빈터로 남아 있었다. 인조 17년(1639) 학명대사가 이 근처를 지나다가 대둔리 촌락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절터를 현몽함으로 이튿날 이 곳에 올라와 절터를 발견하고 수년 동안 초옥을 짓고 참선 수행했다. 이후 10년 후인 인조 27년(1649) 영옥대사(靈玉大師)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숙종 3년(1677)에 묘옥(妙旭)대사가 개수하고 영조 12년(1736) 시축대사가 개수하였으나 건물이 너무 낡았으므로 고종 원년(1864) 용운(龍雲)대사(만해 한용운은 아님)가 새롭게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이르렀다.
우리 선조들은 목조건물을 지으면서 못 하나 쓰지 않고 서로 엇물리게 하는 기법으로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건립했던 것이다. 대웅전 현판 글씨는 영조 때 동국진체풍(東國眞體風)의 대가인 동화사 기성대사(1693-1774)의 글씨이다. 이 법당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셨으므로 "극락전"이라 해야 옳을 것이나 옛날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실 때 '대웅전"이라 쓴 편액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옥천사 대웅전에 모신 아미타불과 관세음 대세지보살
옥천사 대웅전에 모신 불보살님 세 분 다 똑 같은 수인(手印)을 하고 계시는 독특한 형태이다. 사찰측의 설명(주불이 아미타불)이 없었다면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 보현보살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옥천사 대웅전 내 삼장탱
옥천사에는 전형적인 면에서 벗어나는 것이 삼장탱에서도 나타나다. 대웅전의 불보살님에 이어서 삼장탱까지 그러하다. 삼장탱은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지지보살 지장보살이 일반적인데 옥천사에는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지장보살 지지보살을 모신 형태이다.
옥천사 괘불함
옥천사 탐진당(探眞堂)
옥천사 탐진당(探眞堂) - 탐진당은 '진리를 탐구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대칭으로 마주보고 있는 적묵당과 함께 영조 30년(1754)에 건립되었다. 적묵당은 상판스님들 30여명이 공동 거처하고 탐진당에는 하판스님 30여명이 공동 거처했다고 한다. 현재는 왕생계 영가 1,000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일부는 종무소로 쓰여지고 있다. 2013년말 보수공사를 하였다.
옥천사 적묵당(寂默堂)
옥천사 적묵당(寂默堂)- 적묵당은 영조 30년(1754)에 건립된 건물로 옛날에는 옥천사의 상판(上阪)스님들이 경을 읽고 공양을 하며 공동 기숙하는 큰방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지장보살님을 모셔놓았고, 재를 올리거나 경을 읽는 경학당(經學堂)으로 사용되고 있다. 적묵당 3칸에 잇대어 요새채를 달아내어 전체 건물의 모습은 ㅁ자형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추녀 밑에는 옛날 단청이 고색창연하게 남아 있으며, 주두(柱頭)위에 조그마한 단지 하나씩을 얹어 놓았는데 이는 화재방지를 위하여 바닷물을 떠다 올려놓은 비기(秘祈)로 보인다. 집이 낡아 2006년 정부에서 전면 해체보수공사를 하였다.
옥천사 나한전(羅漢殿)
옥천사 나한전(羅漢殿) - 나한전은 16나한님을 모신 전각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삼존을 모셨는데 정조연간(1776-1799)에 조성된 것이다.
나한상은 상단 불상의 좌우로 각 여덟 분씩 16분을 모셨다. 16나한은 최근에 일률적으로 개분, 개체하였는데 그 중 9분은 조선 전래의 나한님들이시고 7분은 최근에 조성된 나한님들이다.
나한전 건물은 고종 32년(1895)에 건립한 단포(單包)집으로 내부에는 4모서리에 비룡(飛龍0을 조각하여 매다는 등 조선 건축의 멋을 보여주고 있다. 바깥 기둥의 주련은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州 1896-1944) 선생의 글씨다.
옥천사 나한전 내 석가모니불 좌우에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옥천사 산령각(山靈閣)
옥천사 산령각(山靈閣) - 산령각에는 산신을 모셨고 독성각에는 나반존자를 모셨다. 두 건물은 고종 34년(1897)에 건립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전각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산령각은 높이 120Cm, 폭 102Cm, 건평 0.46평으로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예배하도록 되어 있다. 독성각은 그 보다 약간 큰 1.08평으로 겨우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다. 두 건물은 작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다. 기둥에 주심포 형식의 간결한 공포의 구성, 그리고 창방과 주두의 결합에서 구조적인 아름다음을 느끼게 한다. 옥천사의 전체적인 조화를 고려하여 대웅전 뒤쪽에 이와 같은 작은 건물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옥천사 독성각(獨聖閣)
옥천사 독성각(獨聖閣) -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으므로 성문(聲聞)이라고 한다. 그에 비하여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세상에서 홀로 수행하여 깨달은 수행인을 독성이라고 한다. 독성은 홀로 공부하여도 12인연의 이치를 깨달아 알기 때문에 연각이라고도 부른다.
독성각은 1.08평으로 겨우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으며 고종 34년(1897)에 건립되었다. 산령각과 함께 건물이 매우 작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전각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옥천사 칠성각(七聖閣)
옥천사 칠성각(七聖閣) - 칠성각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성신을 모신 전각이다. 우리나라 민간신앙에서는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얻고자 할 때, 혹은 수명 장수하고자 할 때 칠성님께 헌공하거나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도교의 영향으로 칠성 신앙이 크게 유행할 때 불교에서 이를 수용하여 칠성각이 세워졌다. 원래 북두칠성은 도교에서 태을성신(太乙星神)이라 받들면서 사람의 수명과 부귀, 복록,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별이라 한다.
옛날 큰 스님들은 자정에 일어나 자정수(子正水,달빛의 음기가 서린 샘물)를 마시고 북두에 절한 후 하루에 10만독씩 염불하는 스님들이 많았다. 이런 스님들은 대개 90세를 넘게 살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1899년에 건립되었으며 내부는 1981년애 조성된 칠성탱화를 모셨다.
옥천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내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시왕
옥천사 명부전(冥府殿,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 146호) -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여 염라대왕 등 10대왕을 봉안한 전각으로, 지장전 혹은 시왕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석가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부처없는 세계에 머물면서 육도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옥천사는 처음 의상대사에 의해 676년(문무왕 16)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원 사찰은 불타 없어지고 지금 전하는 명부전은 1895년(고종 32) 옛 궁선당(窮禪堂) 터에 중건한 것이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옥천사 팔상전(八相殿)
옥천사 팔상전(八相殿) - 팔상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8폭의 탱화로 그려 모신 전각이다. 팔상전 건물은 고종 27년(1890)에 건립되었다. 8상 탱화의 원본은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따로 보관 중에 있으며 대신 이 곳에는 원본 탱화의 사진을 봉안하였다.
탱화 밑의 존상들은 부처님의 8대 제자들로서 최근에 풀리싱으로 조성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2600년 전 카필라성 동남서북의 4문을 돌아보시고 생로병사가 있음을 아신 후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출가했다고 하지만, 근래의 고승 청담대종사는 "부처님께서는 생노병사 중에서도 특히 중생들의 죽는 고통을 불쌍히 여겨 죽지 않는 도리를 구명하기 위하여 출가하셨다."고 설법하였다 . 마음을 깨치면 생사가 따로 없다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가르치셨다.
옥천사 옥천각(玉泉閣)
이 옥천각 아래 샘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은 우리나라 10대 명수(名水)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전설을 갖고 있다.
옥천사라는 이름은 연꽃이 반쯤 핀 모습을 한 연화산의 형세와 맑은 물이 샘솟는 옥천에서 비롯되었다. 이 샘(옥천, 玉泉)에서는 매일 일정한 분량의 공양미가 나왔는데 어느날 더 많은 공양미를 얻으려는 욕심으로 바위를 깨뜨리자 공양미와 더불어 물도 끊어졌다고 한다. 그 후 잘못을 뉘우치는 지극한 참회기도 끝에 샘물이 다시 솟고 연꽃 한송이가 피면서 다시 약수(藥水)가 되었다고 한다. (옥천사 주지스님의 말씀의 설화는 위에 참고 바람.)
옥천사 노주(爐柱)
옥천사 보장각(寶藏閣) - 보장각은 유물전시관이다.
옥천사 삼천불전(三千佛殿)
삼천불전 상단에는 중앙에 약사여래와 좌우에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모셨다.
이 밖에 축성전이 있다고 하는데 축성전은 찾지를 못하였다.
축성전(祝聖殿)은 임금의 수복과 강녕을 비는 전각이다. 고종 27년(1890)에 상국 박규희가 경상도 관찰사 겸 진주목사로 내려와 있을 때 조정으로부터 '명산고찰에서는 왕실을 위해 기도를 올리라'는 교지가 있음에 따라 박목사는 사재를 털어 축성전을 짓고 임금의 수복안녕을 기원하였다. 옥천사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되살려 2000년 옛 극락전 자리에 축성전을 짓고 약사여래를 모셨다....라고 옥천사 홈페이지에서는 전하고 있는데 아마도 축성전을 삼천불전으로 고쳐 지었지 않나 하고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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