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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30권
46. 초품 중 선근공양(善根供養)의 뜻을 풀이함
【經】 모든 선근 공양으로써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뜻대로 성취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보살이 이미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게 되면 마땅히 공양을 해야 한다. 만일 부처님을 만났으면서도 공양거리가 없다면 심히 기쁘지 않게 된다. 마치 수마제(須摩提)15)[진(秦)나라 말로 묘의(妙意)라 한다.] 보살이 연등부처님[然燈佛]을 뵈올 적에 공양거리가 없었으므로 이리 저리 구하며 돌아다니다가 꽃 파는 여인을 만나 5백전(百錢)의 돈으로 다섯 송이의 푸른 연꽃을 사서 부처님께 공양한 것과 같다. 또 살타파륜(薩陀波崙)16)보살은 스승에게 공양하기 위하여 자기 몸의 피와 살을 팔았었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이미 부처님을 뵙게 되면 마음으로 공양하고 싶어지며 만일 공양거리가 없으면 그의 마음은 허전하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서민(庶民)이 임금을 만날 때 예물(禮物)을 지니지 않으면 불경(不敬)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모든 보살은 공양거리를 구하여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비록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살의 마음이 허전하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농부가 좋은 밭을 만났으나 종자가 없으면 아무리 공력을 더하려 해도 힘을 쓸 수가 없으므로 마음에 몹시 근심되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부처님을 만났으면서도 공양거리가 없으면 설령 다른 물건이 있다 해도 그의 뜻에 맞지도 않고 마음이 곧 허전해지는 것과 같다.
모든 선근(善根)이라 함은 이른바 선근의 과보(果報)로서 꽃ㆍ향ㆍ영락ㆍ의복ㆍ번기ㆍ일산과 갖가지 진기한 보물 등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간혹 어떤 때는 원인[因]으로써 결과[果]를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니, 마치 “한 달 동안에 천 냥(兩)의 돈을 먹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돈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돈으로 인하여 음식을 얻었기 때문에 “돈을 먹었다”고 하는 것이다.
간혹 어떤 때는 결과로써 원인을 말하기도 한다. 마치 잘 그린 그림을 보면서 “참 손재주가 좋다”고 하는 것과 같다. 손재주는 그림은 아니지만 그림이 잘 그려진 것을 보고 손재주가 좋다고 말하는 것이니, 선근의 과보 역시 그와 같아서 선근의 업의 인연 때문에 공양거리를 얻게 되는 것이므로 선근이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직접 꽃ㆍ향 등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원인을 말씀하는 것인가?
【답】 공양거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재물의 공양[財供養]이고, 둘째는 법의 공양[法供養]이다. 만일 다만 꽃ㆍ향 등의 공양이라고만 말하면 법의 공양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선근 공양이라고 하게 되면 재물과 법이 다 함께 포함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공양(供養)이라 함은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보고 듣고 하면서 마음으로 공경하고 존중하고 영접하고 시봉하고 전송하고 몸을 돌고 예배하고 몸을 구부리고 합장하며 그리고 서 계시면 편안한 데로 앉으시게 하고 음식을 권하고 꽃과 향과 진기한 보배들을 올리며 지계(持戒)와 선정과 지혜와 모든 공덕을 갖가지로 칭찬하며 설법이 있으면 그의 가르침을 믿고 받는 것 등이니, 이와 같이 착한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이 바로 공양이다.
존중한다 함은 온갖 중생들 가운데서 덕이 그보다 높은 이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존(尊)이라 하고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부모나 사장(師長)이나 군왕보다도 더 뛰어나며 이익이 중하기 때문에 중(重)이라 한다.
공경한다 함은 겸손하고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기 때문에 공(恭)이라 하고 그 지혜와 덕을 추앙하기 때문에 경(敬)이라 한다.
찬탄한다 함은 그 공덕을 기리는 것이 찬(讚)이요 그것을 기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또 그것을 칭찬하면서 드날리기 때문에 탄(歎)이라 한다.
뜻에 따라 성취한다[隨意成就] 함은 꽃을 구하여 공양하려 할 때 생각하는 대로 그 꽃이 손에 닿는 것이다. 혹은 구하여 얻기도 하고 혹은 구하지 않았는데 얻게 되기도 하며 또는 저절로 나오기도 하며, 혹은 변화로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음악의 공양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문】 보살이 만나게 되면 곧 공양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뜻에 따라 구하고 찾는가?
【답】 복덕은 마음을 좇으므로 애지중지한 것을 가져다 공양하면 복을 얻음이 더욱더 많다. 마치 아육왕(阿育王)이 어렸을 때에 그가 소중히 여기는 흙을 가져다 부처님께 바친 인연으로 염부제의 왕이 되었고 하루 동안에 8만의 탑을 세우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큰 사람이 아무리 많은 흙을 발우에 넣어 준다 하더라도 복은 얻지 못하나니, 소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치우치게 꽃을 귀중하게 여기나니, 그 귀중한 꽃을 가져다 부처님께 공양하면 복을 얻음이 더욱더 많다. 보물도 역시 그와 같다.
또 때에 따라 알맞게 해야 한다. 만일 추울 때면 섶이나 불이나 윗옷이나 따뜻한 방이나 이불이나 음식으로 공양해야 하고, 더울 때는 얼음물이나 부채나 일산이나 시원한 방이나 얇은 옷이나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해야 하며,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는 직접 공양거리를 가져다 주는 등 이와 같이때에 따라 공양한다. 또 토지로써 마땅한 바에 따르고, 받는 이가 구하는 대로 모두 가져다 공양한다.
또 뜻에 따라 공양한다 함은, 어떤 보살은 부처님께서 구하는 것이 없음을 알고 또 모든 물건은 거짓이고 마치 환과 같으며, 그 한 모양이 이른바 모양이 없는 것인 줄 알면서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중생이 국토를 소중히 여김에 따라 인도하려고 공양하기도 한다.
또 어떤 보살은 매우 깊은 선정을 얻고 보살의 신통을 내어 그 신통의 힘으로써 시방의 부처님 앞으로 날아가서 혹 그 부처님 국토에서 하늘꽃을 두루 비처럼 내리기를 원하면 곧 3천의 세계에 가득 차도록 가져다 부처님께 공양하기도 한다. 혹은 하늘의 전단(栴檀)을 비처럼 내리기도 하고 혹은 광명이 산뜻한 진주(眞珠)를 비처럼 내리기도 하며 혹은 7보(寶)를 비처럼 내리기도 한다. 혹은 크기가 수미산만한 여의주(如意珠)를 비처럼 내리기도 하고 혹은 맑고 묘한 음악 소리를 비처럼 내리기도 하며 혹은 수미산만한 몸으로 등불 심지가 되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도 하나니, 이와 같은 것들을 재물의 공양이라 한다.
또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여 법으로써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보살은 초지(初地)의 법을 행하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도 하며, 또한 10지(地)의 법을 행하면서 공양하기도 한다. 때로는 보살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서 자기 자신의 번뇌도 없애고 중생들의 번뇌도 없애 주나니, 이것이 법의 공양이다.
간혹 보살은 10지에 머물러서 신통의 힘으로써 지옥의 불이 꺼지게 하고, 아귀도(餓鬼道)에서는 모두가 배불리 먹게 하며 축생들은 두려움을 여윌 수 있게 하면서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서 점차로 아유월치(阿惟越致)17)의 지위에 머무르게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큰 공덕의 힘 때문에 법의 공양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선근을 성취하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온갖 중생들이 원하는 의복ㆍ음식ㆍ침구ㆍ바르는 향ㆍ탈것ㆍ방사ㆍ평상 및 등촉(燈燭) 등을 채워주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온갖 중생의 원을 만족시키려 함에는 어떤 차례가 있는가?
【답】 보살의 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함으로써 한량없는 복덕을 얻고 이 복덕을 가져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니, 이른바 중생의 원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마치 장사꾼의 우두머리가 바다에 들어가서 보물을 캔 뒤에 안온하게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 친척과 아는 이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과 같다. 보살도 그와 같아서 모든 부처님의 바다에 들어가 한량없는 공덕의 보배를 얻고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소왕(小王)이 대왕(大王)에게 공양하여 기뻐하게 하고는 그가 원하는 직위(職位)와 재물과 비단[財帛]을 주면 그의 본국으로 돌아와서 백성들을 이익되게 하며 도적들을 물리치는 것과 같으니, 보살은 모든 부처님 법왕(法王)에게 공양하기 때문에 기별(記別)을 얻고 한량없는 선근의 값진 보배로써 그지없는 지혜의 힘을 얻은 뒤에 와서 중생으로 들어가 착한 사람에게 공양하고 가난한 이에게는 그들이 구하는 것에 따라 공급하며, 악마의 백성과 삿된 소견을 지닌 외도의 무리들을 모두 다 파괴하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다음에는 중생들의 소원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문】 보살은 실로 온갖 중생들의 원을 만족시키는가? 만일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다 만족시킨다면 그 밖의 부처님과 보살들은 무엇을 이익되게 하실 것인가? 만일 그 안의 것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온갖 중생들의 원을 만족시키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
【답】 두 가지의 원이 있다. 첫째는 얻을 수 있는 소원[可得願]이고, 둘째는 얻을 수 없는 소원[不可得願]이다. 얻을 수 없는 소원이라 함은, 어떤 사람이 허공을 헤아리되 그 끝 간 데까지를 다 알려 하고 그리고 때와 방향의 끝을 구하려 하는 것이니, 마치 어린아이가 물속의 달과 거울 속의 형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원은 모두가 얻을 수 없다.
얻을 수 있는 원이라 함은, 나무를 뚫어 불을 구하고 땅을 파서 물을 얻으며, 복을 닦아서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고 아라한과 벽지불의 과위를 얻으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 법왕이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얻을 수 있는 원이라 한다.
다시 얻을 수 있는 원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의 것이고, 둘째는 출세간(出世間)의 것이다. 이 안의 것은 세간의 원이기 때문에 중생의 원을 만족시킬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음식과 평상과 침구에서 등촉 등에 이르기까지 구하는 물건을 모두 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 보살은 무엇 때문에 중생들에게 얻기 쉬운 원은 주면서 어려운 것은 주지 않는가?
【답】 소원에는 하ㆍ중ㆍ상이 있다. 아래의 소원[下願]은 이 세상에서의 즐거운 인연이 이르게 하는 것이고, 중간의 소원[中願]은 뒷세상에서의 즐거운 인연을 주는 것이며, 맨 위의 소원[上願]은 열반의 인연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아래의 소원을 주고, 그 다음에 중간의 소원에 미치며, 그런 뒤에 맨 위의 소원을 주게 된다.
또 중생은 지금의 즐거움에 집착하는 이가 많고, 뒤의 즐거움을 구하는 이는 적으며,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는 이는 더욱더 적다. 만일 많은 것을 말하게 되면 적은 것은 역시 그 안에 포함된다.
또 이 경의 전후에서는 대부분 뒷세상과 열반의 도를 설명했으며, 금생에 이익되는 일은 적게 설명하고 있다.
보살의 법에서는 언제나 중생에게 갖가지 이익을 주는 것이요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처음에는 마음으로 다만 중생들로 하여금 대승(大乘)의 법만을 행하게 하려 할 뿐이나 그 교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그 다음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를 주며, 그것도 할 수 없으면 10선(善)과 4범행(梵行) 등을 주어서 복덕을 닦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이 그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런 중생들을 버려서는 안 되고 이 세상의 이익이나 주어야 되나니, 이른바 음식 등이 그것이다.
또 범부가 비록 사람에게 음식 등을 준다 하더라도 그의 소원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이면 모두가 이 세상의 일이나 뒷세상의 일에 대한 인연이 있어서이다. 성문과 벽지불은 비록 인연이 없이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킬지라도 이롭게 하는 것이 매우 적으며, 보살마하살은 단(檀)바라밀을 행한 업의 인연 때문에 국왕이 되기도 하고 혹은 큰 장자(長者)가 되기도 하여 재물이 풍부하고 한량없으면서 사방에서 중생들이 와서 구하면 모두 다 만족시켜 준다.
빈두거사(頻頭居士)18) 같은 이는 큰 단월(檀越)이 되어 7보로 된 큰 평상에 앉아서는 금강(金剛)으로 다리를 삼아 하늘의 이불을 펴고 적진주(赤眞珠)로 위에 장막을 치고서 좌우에는 각각 8만 4천씩의 시중을 세워 놓고 모두를 기묘하게 장엄한 뒤에 4대문(大門)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마음껏 구하는 이들을 위하여 밤낮 여섯 때 동안 북을 울리고 또 광명을 놓았으므로 시방의 한량없는 중생으로서 북소리를 듣고 광명을 받는 이면 모두 다 오지 않음이 없었다.
이렇게 온 이들이 갖가지의 음식을 얻고자 하면 장자는 그들이 크게 모인 것을 보고 즉시 잠자코 허공을 우러러 쳐다보는데, 이때 공중에서는 갖가지의 온갖 음식들이 비처럼 내리므로 모두는 마음대로 먹게 되었다. 만일 중생들이 스스로 가서 취하지 않으면 좌우에 있던 시중들이 분포되어서 그것을 주었고 충분하게 먹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음식에서처럼 의복과 침구와 보물 등을 구하는 이에게도 모두 역시 그렇게 했으니, 중생들이 바라는 것을 마음껏 충족시킨 연후에야 법을 설하여 4식(食)을 여의고 모두를 아비발치(阿鞞拔致)의 지위에 머무르게 했다. 이와 같은 등의 보살은 신통의 힘으로써 중생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었다.
【문】 부처님께서 계실 때에는 오히려 굶주림이 있었고 하늘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서 중생들은 곤액을 받았었다. 부처님도 오히려 온갖 중생들의 소원을 다 채워주지 못하셨는데 어떻게 보살이 그 소원들을 채워준다는 것인가?
【답】 보살은 10지(地)에 머물러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어가 삼천대천세계에서 때로는 처음에 뜻을 일으켜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아비발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혹은 일생보처(一生補處)로써 도솔천(兜率天) 위에서 모든 하늘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도솔천 위에서 내려와 정반왕(淨飯王)의 궁전에 태어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출가하여 성불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대중 가운데서 법륜(法輪)을 굴리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열반에 들어가서 7보의 탑을 일으켜 두루 모든 국토의 중생으로 하여금 사리(舍利)에 공양하게 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때로는 법이 도통 없어져서 다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보살이 이익되게 하는 일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부처님이겠는가. 그리고 부처님의 몸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진신(眞身)이고, 둘째는 화신(化身)이다. 중생이 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하면 원마다 만족하지 않음은 없다.
부처님의 진신이라 함은, 허공에 두루하고 광명이 시방을 두루 비추며 설법하는 음성 역시 시방의 한량없는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하므로 그 안에 가득 찬 대중은 모두가 함께 법을 듣고 그 설법은 쉬지 않으며 같은 때에 저마다 듣는 것에 따라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
겁(劫)이 다하여 마치면 중생은 그가 행한 업의 인연 때문에 큰 비가 끊임없이 쏟아지므로 3대(大)는 제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오직 겁이 다할 때에만 있는 시방의 바람이 일어나 서로가 다시 상대하면서 이 물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법성신(法性身)의 부처님은 설법하는 것이 있지만 10주(住) 보살을 제외한 3승(乘)의 사람은 모두가 지니지 못하게 되며 오직 10주 보살만이 불가사의한 방편의 지혜 힘이 있으므로 모두 듣고 받을 뿐이다.
중생으로서 그 법신불을 본 이면 3독(毒)이 없게 되고 많은 번뇌와 춥고 덥고 하는 모든 고통이 모두 다 소멸되면서 원마다 만족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마치 여의주(如意珠) 같은 것도 오히려 중생으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모두 얻게 하는데 하물며 부처님이겠는가. 여의주는 온갖 세간의 원을 이루어 주고 부처님은 온갖 출세간의 원을 이루어 주나니, 만일 “부처님은 중생의 소원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말은 옳지 못하다.
또 석가모니부처님은 왕궁에 몸을 받으면서 인간이 받는 법으로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과 잠을 자는 등이 있고 모든 비방과 늙고 병들고 죽는 일 등을 나타 내시면서도 속마음의 지혜와 신령한 덕은 참 부처님의 바른 깨달음[正覺]과 다름이 없으셨다.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키려 하여 모두 다 만족되게 하는데도 만족해하지 않는 이는 헤아릴 수 없는 세계로부터 오면서 중생으로서의 옷과 밥에 대한 원은 만족하나 괴로움을 면치 못했으므로 이제는 다만 열반무위(涅槃無爲)의 상락(常樂)으로써만 그들을 이익되게 하나니, 마치 사람이 친한 이를 가엾이 여기어 독이 섞인 맛있는 음식을 주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세간의 원이란 모든 결사(結使)를 내고, 또 그것을 여읠 때에는 마음에 큰 고통이 생기는 것이므로 요긴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미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켰는데도 중생들 스스로가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부처님께서 발가락으로 땅을 어루만지자 즉시 국토가 7보로 장엄되었다. 우리의 불국토가 이렇건만 원해(怨害)가 많은 이들이 되면 불국토의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 마치 용왕은 평등한 마음으로 비를 내리지만 사람에게는 물이 되고 아귀(餓鬼) 몸 위에서는 모두 숯불이 되는 것과 같다.
【문】 만일 모든 중생들의 소원을 다 만족시킬 수 있다 한다면 중생은 끝이 있고, 이들은 모든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을 받는 이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의 소원을 다 만족시켰기 때문이며, 고통을 여의고 쾌락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답】 모든[一切] 중생을 다 만족시킨다고 할 때의 모든[一切]이란 진실로 모든 것은 아니다.
마치 『법구경』에 이러한 게송이 있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은 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폭력의 아픔[杖痛]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없나니
자기를 용서하듯 남에게도 비교하면서
죽이지도 말고 폭력을 휘두르지도 말라.
비록 “모든[一切] 것은 폭력의 아픔을 두려워한다”고 말하기는 하나, 마치 무색계(無色界)의 중생은 몸이 없기 때문에 폭력의 고통이 없고, 색계(色界)의 중생은 비록 몸이 있기는 하나 역시 폭력의 고통이 없으며, 욕계(欲界)의 중생 또한 폭력의 고통을 받지 않는 이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이란 말은 폭력을 당하게 될 이를 염두에 두면서 ‘모든’이라 한 것일 뿐 진실로 ‘모든’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모든’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가능한 이에 대한 말이다. 그러나 보살의 마음은 제한이 없으므로 복덕의 과보도 역시 한량이 없건만 단지 중생이 한량없는 아승기겁(劫)에 지은 죄의 두꺼운 장애 때문에 얻지 못할 뿐이다.
마치 사리불의 제자 나빈주(羅頻周)비구와 같다. 그는 계율을 지니고 정진하면서 걸식을 했으나 6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므로 7일째가 되어서는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같은 도반(道伴)이 걸식하여 가지고 와서 그에게 주었으나 새가 밥을 차고 날아가 버렸다.
이때 사리불이 목건련에게 “당신의 큰 신통력으로 이 밥을 수호해서 그로 하여금 먹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으므로, 즉시 목련은 밥을 가지고 가서 그에게 주었는데 처음 막 밥을 입으로 가져가려고 하자 그만 진흙으로 변해버렸다.
그리하여 또 사리불이 걸식한 밥을 가져다주자 이번에는 그의 입이 저절로 붙어버렸다. 마지막에 부처님께서 오셔서 밥을 가져다 그에게 주었더니, 부처님의 한량없는 복덕의 인연 때문에 그는 비로소 밥을 먹게 되었다. 이 비구는 다 먹은 뒤에 마음에 기쁨을 내면서 더욱더 믿고 공경하게 되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유위(有爲)의 법은 모두가 괴로움의 모양[苦相]이다” 하시며, 그를 위하여 4제(諦)를 말씀하시자 바로 그때 그 비구는 번뇌가 다하고 뜻이 풀리면서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그런데 박복한 중생으로서 죄가 이보다도 더 심한 이도 있나니, 이는 부처님도 구제할 수가 없다.
또 중생은 얻을 수 없음을 아시고, 깊이 법성을 통달하셨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이는 제도할 수 있다, 이는 제도할 수 없다”고 기억하거나 분별함이 없으시고 마음이 항상 고요히 사라져서 뜻에 더하거나 덜함이 없나니, 이 때문에 보살이 온갖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키려 하나 그의 죄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은 보살에게는 아무 허물이 없다.
음식(飮食)이라 함은 간략하게 말하면 거칠거나 미세한 두 가지가 있나니, 떡ㆍ밥 등의 온갖 음식이 그렇다. 경에서는 비록 “4식(食)으로 중생이 오래 머무른다”고 말씀하나 이것은 다만 단식(段食)을 말할 뿐이며 그 밖의 것은 형체가 없으므로 상대에게 줄 수가 없다. 만일 단식을 보시하면 세 가지 밥[三食]을 주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단식으로 인하여 세 가지 밥이 더욱 늘기 때문이다. 마치 경에서 “단월이 밥을 보시하면 받는 이에게 다섯 가지 일의 이익[五事利益]을 준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음료[飮]라 함은 통틀어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는 풀과 나무로 만든 술[草木酒]이니, 이른바 포도와 사탕수수 등과 그리고 모든 곡식으로 만든 술이다. 둘째는 풀과 나무로 만든 즙[草木漿]이니, 사탕수수의 즙, 포도의 즙, 석밀의 즙[石蜜漿], 안석류의 즙[安石榴漿], 배와 능금의 즙, 파로사(波盧沙] 과일즙 등과 그리고 모든 곡식에서 짠 즙 등이다. 이러한 것을 합하여 인간 안에서의 음식이라 한다. 그리고 하늘의 음식에는 이른바 수타감로미(修陀甘露味)와 하늘의 과일과 밥 등이며 마두마타바(摩頭摩陀婆)의 즙 등이 있다.
중생들이 각각 먹고 있는 음식이라 함은, 혹은 곡식을 먹는 이들이 있고 혹은 고기를 먹는 이들이 있으며 혹 깨끗한 음식과 깨끗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이도 있는데, 이들이 와서 모두 배불리 먹게 된다.
의복(衣服)이라 함은, 의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솜ㆍ비단ㆍ털ㆍ가죽 등이다. 둘째는 혹은 풀과 나무에서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베ㆍ가는 모직ㆍ나무껍질 등이다. 모든 하늘들의 옷도 있나니, 이 옷에는 날과 씨가 없고 저절로 나무에서 나오며 빛이 나고 가볍고 보드랍다.
침구[臥具]라 함은, 평상ㆍ이부자리ㆍ장막(帳幕)ㆍ베개 등이다.
바르는 향[塗香]이라 함은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전단나무[旃檀木] 등을 문질러 몸에 바르는 것이요 둘째는 갖가지 향을 찧어서 가루를 만들어 그 몸에다 바르거나 또는 옷에다 쪼이고 땅이나 벽에 바르는 것이다.
탈것[乘]이라 함은 이른바 코끼리ㆍ말ㆍ수레 등이다.
방사(房舍)라 함은 이른바 흙과 나무와 보물로써 이루어진 누각(樓閣)ㆍ전당(殿堂)ㆍ궁관(宮觀) 등이니, 추위와 더위와 바람과 비, 도적 등속을 막기 위해서다.
등불과 초[燈燭]라 함은 기름[肥膏]ㆍ소유(蘇油)ㆍ옻칠[漆]ㆍ밀[蠟]ㆍ명주(明珠) 등이다.
모든 물건[諸物]이라 함은 온갖 중생들의 필요한 물건들이니, 다 자세히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요약하여 “모든 물건”이라고 말한 것이다.
【문】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사르는 향[燒香]과 예쁜 꽃[妙華]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답】 “모든 물건”이라고 하게 되면 모두가 그 안에 다 포함된다.
【문】 그렇다면 간략히 “음식ㆍ의복ㆍ꾸미개[莊嚴具]”의 이 세 가지만을 말해야 된다.
【답】 이 모든 물건들은 바로 필요한 것들이다. 중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데는 음식이 우선이 되고, 그 다음에는 의복이다. 몸의 때[垢]와 악취 때문에 바르는 향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침구가 되며, 추위와 비에 대비하여 방사가 필요하고, 캄캄한 데서 등불과 초가 필요하게 된다.
【문】 꽃과 향도 역시 악취를 제거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꽃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속이 시들어지며 이익이 적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사르는 향[燒香]은 추울 때에는 필요하지만 더울 때는 고통거리이다. 바르는 향은 추울 때나 더울 때에 다 통용하는데 추울 때에 침수향(沈水香)을 섞고 더울 때에는 전단향(栴檀香)을 섞어서 몸에 바르게 되나니, 이 때문에 다만 바르는 향을 말할 뿐이다.
【문】 만일 단(檀)바라밀을 행하여 한량없는 과보를 얻게 되면 온갖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킬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중생의 원을 만족시키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먼저 이미 “반야바라밀과 화합하기 때문에 단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는다”고 설명했는데, 이제 다시 말하겠다.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켜야 할 것은 하나의 국토나 하나의 염부제를 말한 것이 아니며 모든 시방세계의 6취(趣) 중생의 소원을 다 만족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다만 보시만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로써 가깝거나 먼 모양을 깨뜨려야 하고, 온갖 중생이라는 모양과 온갖 중생이 아니라는 모양을 깨뜨리면서 모든 장애를 제거하기 위하여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사이에 한량없는 몸으로 변화하여 두루 시방으로 가서 온갖 중생들의 소원을 만족시키는 것이니, 이와 같은 신통의 이익은 반드시 반야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이 온갖 중생의 원을 만족시키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의 중생을 단(檀)바라밀 가운데19) 세우고자 하고, 시라(尸羅)ㆍ찬제(羼提)ㆍ비리야(毘梨耶)ㆍ선(禪)ㆍ반야바라밀 가운데 세우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이 이치의 차례에는 어떤 인연이 있는가?
【답】 이익에는 세 가지의 이익이 있나니, 이 세상의 이익과 뒷세상의 이익과 마지막의 이익[畢竟利]이 그것이다. 다시 세 가지의 즐거움이 있나니, 이 세상의 즐거움과 뒷세상의 즐거움과 출세간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앞에서는 이 세상의 이익과 즐거움을 설명했고 여기서는 뒷세상과 세간 밖의 이익과 즐거움을 말했다. 이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6바라밀에 머무르게 한다.
보살은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염려하기를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는 것보다 더하여 그 자비로운 마음이 골수에 사무치나니, 먼저 음식으로써 그의 몸에 충복시키어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을 제거하고 그 다음에 의복으로써 그의 몸을 장엄하여 즐거움을 받을 수 있게 한다. 보살은 그래도 마음에 부족한지라 다시 생각하기를 “중생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은 얻었다”고 하고, 다시 생각하기를 “뒷세상의 즐거움을 얻게 해야겠다”고 한다.
만일 세간의 6바라밀로써 그를 가르치게 되면 인간과 천상의 즐거움을 얻게 되지만 오랜 뒤에는 도로 생사의 윤회를 받게 될 것이므로 다시 “세간 밖의 6바라밀로써 무위(無爲)의 상락(常樂)을 얻게 하리라”고 한다.
또 먼저 의복과 꽃과 향으로써 그의 몸을 장엄하고 지금은 공덕으로써 그 마음을 장엄하게 한다. 만일 세 가지의 장엄이 있으면 구족되어서 보다 더 지나가는 것이 없으리니, 첫째는 의복과 7보(寶) 등이고, 둘째는 복덕이며, 셋째는 도의 법[道法]이다. 보살이 이 세 가지를 두루 갖추어서 중생을 장엄하려고 하기 때문에 앞에서는 공덕의 과보를 말하고 지금은 공덕의 인연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 앞에서는 비록 큰 보시가 있다 하더라도 중생들이 지은 죄 때문에 모두 얻지 못함을 설명했나니, 마치 『아귀경(餓鬼經)』20)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비록 그 음식이 있다 하더라고 먹을 수가 없고 변하여 숯불이 되기도 하며 깨끗하지 못한 물건이 되어 버린다.
또 보살은 온갖 중생을 버리지 않고 마땅히 방편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온갖 밥의 이익을 얻게 해야 하나니, 이 때문에 복된 업을 닦도록 가르치면서 스스로 행하여 스스로 얻게 한다. 그리고 보살은 인연을 잘 알고 있으므로 억지로 가르쳐서 얻게 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차례로 중생들을 가르치면서 6바라밀에 머무르게 한다.
【문】 보살의 뜻과 원은 시방의 온갖 중생들로 하여금 6바라밀에 머무르게 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만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의 중생’이라고만 말씀하는가?
【답】 법을 듣게 되는 이들이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것을 듣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 새로 뜻을 낸[新發意] 보살에게 끝이 없고 한량없어서 많고 많다고 하게 되면 산만해지지만, 만일 큰 보살이라면 항하의 모래같이 많다 해도 수(數)로 여기지 않는다.
또 “항하사 같다”고 말하면 이것은 끝이 없고 한량없는 수량이니, 후품(後品)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또 항하사 같다고 함은 이미 ‘시방의 모든 세계’라고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역시 ‘하나의 항하사 같다’고 말하지는 않나니, 힐난하지 않아야 한다. 이 때문에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수의 세계’라 해도 허물은 없다.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의 뜻은 먼저 설명한 것과 같다.
중생(衆生)이라 함은 5중(衆)과 18계(界)와 12입(入)과 6종(種)과 12인연(因緣) 등의 많은 법 가운데서 가정하여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소다. 이것은 말이다”라는 식으로 중생의 이름을 붙인 것들이다.
중생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움직이는 것과 조용한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몸과 입의 업(業)을 내게 되고 조용한 것은 그렇지 못하다. 빛깔이 있는[有色] 중생과 빛깔이 없는[無色] 중생, 발이 없거나 두 발 달린 것, 네발 달린 것, 여러 발이 있는 중생, 세간과 세간 밖의 중생, 큰 것과 작은 것, 현인과 성인과 범부, 사정취(邪定聚)ㆍ정정취(正定聚)ㆍ부정취(不正聚)의 중생이 있다.
또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중생, 상ㆍ중ㆍ하의 중생과 배울 것이 있고[學] 배울 것이 없고[無學] 배울 것이 있는 이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이도 아닌[非學非無學] 중생, 생각이 있거나[有想] 생각이 없거나[無想]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非有想非無想] 중생,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중생이 있다.
욕계의 중생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선근(善根)에서 상ㆍ중ㆍ하가 있기 때문이다. 상은 6욕천(欲天)이고, 중은 인간 세계에서 부귀를 누리는 것이며, 하는 인간 세계에서의 비천한 사람이다. 얼굴들이 같지 않기 때문에 사천하(四天下)가 구별되고 다르다. 착하지 않은 것에도 세 품류가 있다. 상은 지옥이고, 중은 축생이며, 하는 아귀이다.
또 욕계의 중생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3악도(惡道)와 인간과 여섯의 하늘[六天]이 그것이다.
지옥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열(熱)지옥과 한(寒)지옥과 흑암(黑闇)지옥이 그것이다. 축생에도 세 가지가 있나니, 공중으로 다니는 것[空行]과 육지로 다니는 것[陸行]과 물속에서 다니는 것[水行]이 있으며, 낮에 다니는 것과 밤에 다니는 것과 밤낮으로 모두 다니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은 등의 차별이 있다.
귀신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폐귀(弊鬼)와 아귀(餓鬼)가 그것이다. 폐귀는 하늘[天]들과 같이 즐거움을 받으나 다만 아귀와 같이 살면서 곧 그들의 주인이 된다. 아귀의 배는 마치 산골짜기같이 크면서도 목구멍은 바늘만큼 하며 오직 검은 피부와 힘줄과 뼈의 세 가지가 있을 뿐이며 수 없는 세월동안 음식이라는 이름조차도 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볼 수가 있겠는가.
또 귀신에는 입에서 불을 내뿜는 것이 있는데 날아다니는 나비들이 그 불에다 몸을 던지므로 그것을 음식으로 삼는다. 또한 똥ㆍ눈물ㆍ침ㆍ고름ㆍ피 및 그릇을 씻은 찌꺼기를 먹으며, 혹은 제사 지낸 음식을 먹기도 하고 혹은 아이를 낳은 뒤의 부정(不淨)한 것을 먹기도 하나니, 이러한 등의 여러 가지 아귀가 있다.
6욕천(欲天)이라 함은 4왕천(王天) 등이며 이 여섯 하늘의 중간에 또 다른 하늘들이 있나니, 이른바 지영락천(持瓔珞天)과 희망천(戱忘天)과 심에천(心恚天)과 조족천(鳥足天)과 낙견천(樂見天)이 그것이다. 이 모든 하늘은 모두 여섯의 하늘에 속해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계의 중생에게는 마땅히 열한 가지가 있어야 한다. 먼저 5도(道)를 설명했고 이제 아수라도(阿修羅道)를 더했기 때문이다”고 한다.
【문】 아수라는 곧 5도에 속해야 할 것이다. 이 아수라는 하늘[天]도 아니고 사람[人]도 아니며, 지옥은 고통이 많고 축생과는 형상이 다르므로 귀신의 세계[鬼道]에 속해야 할 것이다.
【답】 그렇지 않다. 아수라는 힘이 삼십삼천(三十三天)과 똑같다. 왜냐하면 모든 하늘들을 격파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치 경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아수라에게 격파를 당하면 네 가지 병사들은 모두가 연뿌리의 구멍으로 들어가 숨는다고 한다. 5욕락(欲樂)을 받는 것이 하늘들과 비슷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 등의 이러한 위력이 있는데 어떻게 아귀에 속할 수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6도가 있어야 한다.
또 아수라ㆍ견타라(甄陀羅)21)ㆍ건답바(乾畓婆)22)ㆍ구반다(鳩槃茶)23)ㆍ야차(夜叉)ㆍ나찰(羅刹)ㆍ부타(浮陀)24) 등의 큰 신[大神]들은 바로 하늘과 아수라들의 백성들이어서 즐거움은 누리되 모든 하늘들보다는 적으나 위덕으로 변화를 마음대로 하게 된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의심하면서 말하기를 “이 수라(修羅)는 수라(修羅)진(秦)나라 말로 크다(大)는 뜻이다.가 아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들과 같아서 이 아수라는 수라가 아니므로 아수라도라고 처음에 이름을 붙인 것이니, 그 밖의 것과 모두가 동일한 세계[道]이다.
【문】 경에서는 5도(道)가 있다고 말씀하는데 어떻게 6도라고 하는가?
【답】 부처님께서 가신 지 오래되고 법이 전해진 지 5백년 뒤에는 많은 다른 것들이 있어서 부파마다[部部] 동일하지 않았다. 혹은 5도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6도를 말하기도 한다. 만일 5도를 말하는 이도 부처님의 경에서 글을 끌어다 말했을 것이요 6도를 말하는 이도 부처님의 경에서 글을 끌어다 말했을 것이다. 또 마하연(摩訶衍) 중의 『법화경(法華經)』에는 “6취(趣) 중생이 있다”고 말씀하셨나니, 모든 이치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마땅히 6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선악을 분별하기 때문에 6도가 있다. 선(善)에는 상ㆍ중ㆍ하가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선도(善道)가 있나니, 하늘ㆍ사람ㆍ아수라가 그것이다. 악(惡)에도 상ㆍ중ㆍ하가 있기 때문이니, 지옥과 축생과 아귀의 도가 그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악에는 세 가지 과보가 있으나 선에는 두 가지 과보가 있게 되어, 이 일에서도 서로 어긋난다. 만일 6도가 있다 한다면 이치에 있어서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문】 착한 법에도 역시 세 가지 과보가 있나니, 아래는 사람이요 중간에는 하늘이며 맨 위는 열반이다.
【답】 여기서는 열반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중생이 과보로서 머무를 곳만을 분별해야 하나니, 열반의 과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착한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37품(品)으로는 열반에 이르게 하고, 둘째는 뒷세상의 즐거움을 내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만 몸을 받는 착한 법을 말할 뿐이요 열반에 이르는 착한 법은 말하지 않는다.
세간의 선(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위 갈래[上分]의 인연 때문에 천도(天道)의 과보가 있고, 중간 갈래[中分]의 인연 때문에 인도(人道)의 과보가 있으며, 아래 갈래[下分]의 인연 때문에 아수라도(阿修羅道)의 과보가 있다.
【문】 그대 자신도 “아수라는 하늘들과 힘이 같고 즐거움을 누림이 하늘들과 같아서 다르지 않다”고 말했는데 어찌하여 이제는 “선의 아래 갈래로서 아수라의 과보를 받는다”고 말하는가?
【답】 사람 가운데서는 출가하여 계율을 받고 도(道)에 이를 수가 있으나 아수라도에서는 결사(結使)가 마음을 가리워서 도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 모든 하늘들은 비록 결사를 따른다 하더라도 마음이 곧고 도를 믿게 되지만, 아수라들은 마음이 삿되고 굽은 일이 많고 때때로 도에 가까이하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아수라는 비록 하늘과 비슷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도에 가까이하기가 어려우므로 사람의 아래에 있다. 마치 용왕과 금시조가 힘이 비록 세고 또한 변화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축생의 세계에 있는 것처럼 아수라의 세계도 역시 그와 같다.
【문】 만일 용왕과 금시조가 힘이 비록 세다 하더라도 오히려 축생의 세계에 포섭되어 있으므로 아수라도 역시 아귀의 세계에 포섭되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6도로 만드는가?
【답】 이 용왕과 금시조는 비록 즐거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몸을 뉘고 다니며 형상이 축생과 동일하기 때문에 축생의 세계에 속한다. 지옥과 아귀는 비록 사람과 비슷하다 하더라도 큰 고통을 받기 때문에 사람의 세계에는 들지 못하며, 아수라는 힘도 세고 형상이 사람과 하늘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따로 여섯째의 세계로 세우는 것이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며 욕계의 중생과 색계ㆍ무색계의 중생에 대해서는 후품(後品)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단(檀)바라밀 가운데 세운다 함은, 보살이 모든 중생들에게 말하기를 “보시를 행해야 한다. 가난은 큰 고통이요, 없고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나쁜 행을 짓고 3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모든 나쁜 행을 짓고 3악도에 떨어지게 되면 구제될 수가 없다”고 하면, 중생들이 들은 뒤에 간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단바라밀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후품(後品) 중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과 같다.
또 보살이 중생들의 앞에서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비유로써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면서 간탐하는 일을 헐뜯는 것이다. 간탐하는 이는 자기 몸에 필요한 것조차도 아까워서 쓰지 못한다. 구하는 이를 보면 마음이 흐려지고 얼굴빛이 변하면서 곧 몸에 소리나 빛이 추악하게 나타난다. 또 뒷세상의 나쁜 업을 심기 때문에 누추한 형체를 받게 되며, 먼저 보시의 인연을 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받은 몸은 가난하고 천하다. 또 재물을 아끼고 집착하면서 많이 구하기만 하고 쉬지 않는지라 모든 죄의 문이 열리어 오로지 나쁜 일만을 짓기 때문에 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한편 생사의 윤회에서 이익되는 일로서 보시보다 나은 것은 없다. 이 세상과 뒷세상에서 마음대로 되는 몸의 일은 모두가 보시에서 얻는 것이니, 보시는 좋은 길잡이어서 천상과 인간과 열반의 이 세 가지 즐거움을 열어주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명성이 널리 퍼지므로 8방에서 다 믿고 좋아하며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대중 가운데 있을 때에도 두려움이 없으며 죽을 때에는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재물을 좋은 복밭에 심었으므로 인간 천상의 즐거움과 열반의 문을 반드시 얻게 되리라. 그것은 왜냐하면, 보시는 간탐하는 번뇌를 깨뜨리고 받는 이를 사랑하며 성을 내는 고뇌를 없애고 질투하는 마음을 쉬게 하기 때문이다. 받는 이를 공경하면 곧 교만심이 없어지고 결정된 마음으로 보시하는지라 의심의 그물이 저절로 찢어지며 보시의 과보를 알므로 곧 삿된 소견이 제거되고 무명(無明)이 소멸된다”고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모든 번뇌가 파괴되면서 곧 열반의 문이 열린다.
또 비단 세 가지 즐거움만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한량없는 부처님의 도와 세존(世尊)의 처소가 열리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6바라밀은 바로 부처님의 도이고, 단(檀)은 그의 첫 문이며, 그 밖의 행은 모두가 다 그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시에는 한량없는 공덕이 있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중생들을 단바라밀 가운데 서게 하는 것이다. 단바라밀의 이치는 마치 먼저 단(檀)에서의 설명과 같다.
시라(尸羅) 가운데 세운다 함은, 보살이 중생들 앞에서 계행을 찬양하면서 “그대들 모든 중생은 지계(持戒)를 배워야 한다. 지계의 덕은 3악취(惡趣)와 인간 세계의 하천(下賤)에서 구제해 주고 천상과 인간의 존귀(尊貴)를 얻게 하며 부처님의 도에 이르게까지 한다.
계율은 온갖 중생들의 쾌락의 근본이니 마치 큰 창고에서 모든 값진 보배가 나오는 것과 같다. 계율은 크게 보호하는 이가 되어 많은 두려움을 없애 주나니 마치 큰 군사로 도적을 깨뜨리는 것과 같다. 계율은 장엄이 되므로 마치 영락을 붙이는 것과 같고 계율은 큰 배가 되므로 나고 죽는 큰 바다를 잘 건너게 한다.
계율은 큰 수레[大乘]이어서 중한 보배를 열반의 성에 이르게 하고 계율은 좋은 약이어서 번뇌의 병을 깨뜨려 주며 계율은 선지식(善知識)이어서 세상마다 따라다니며 멀리 여의지 않고 마음을 안온하게 해 주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우물을 팔 때 물기 있는 진흙을 만나게 되면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다시는 더 근심함이 없는 것과 같다.
계율은 모든 행을 성취시키고 이익되게 하는 것이 마치 부모가 여러 아들들을 기르고 자라게 함과 같고 계율은 지혜의 사다리이어서 무루(無漏)에 잘 들게 한다. 계율은 모든 번뇌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마치 사자가 많은 짐승을 거느리고 조복되게 함과 같고 계율은 온갖 덕의 근본이어서 출가한 이의 요무(要務)이다. 청정한 계율을 닦는 이는 소원을 뜻대로 이루게 되는 것이 마치 여의주(如意珠)가 생각하는 대로 얻게 됨과 같다”고 한다.
이렇게 갖가지로 계율의 덕을 찬탄함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기뻐하고 마음을 내면서 시라(尸羅)바라밀에 머무르게 한다.
찬제(羼提)에 머무르게 한다 함은, 중생들 앞에서 인욕(忍辱)을 찬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는 것이다.
“인욕은 온갖 출가한 이들의 힘이 되어서 모든 악(惡)을 조복하고 대중 가운데서 기특한 일을 나타낼 수 있게 하고, 인욕은 수호자로서 보시와 지계로 하여금 헐리지 않게 하며, 인욕은 큰 갑옷이어서 많은 병사들이 해치지 못하게 하고, 인욕은 좋은 약이어서 나쁜 독을 제거시켜 주며, 인욕은 착하고 뛰어난 것이어서 나고 죽는 험한 길을 갈 때 안온하면서 근심이 없게 한다.
인욕은 큰 창고가 되어서 가난하여 고통 받는 사람에게 끝없이 큰 보배를 베풀어 주고, 인욕은 큰 배가 되어서 나고 죽는 이 언덕을 건너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며, 인욕은 숫돌이 되어서 광채를 내면서 모든 덕을 밝힌다. 만일 사람이 악을 가하면 마치 돼지가 금산(金山)을 닦으므로 더욱더 그 광명이 일어남과 같아서 부처님 도를 구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이익되는 그릇이라 인욕은 가장 미묘한 것이 된다.”
수행하는 이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내가 만일 성을 내면서 상대방에게 갚으면 나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된다. 또 전생에 자신이 이런 죄를 지었으므로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반드시 그 보상을 받아야 한다. 만일 이 사람에게서 받지 않으면 그 밖의 다른 이가 또한 나를 해치리니, 다 같이 면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성을 낸단 말인가.’
또 중생은 번뇌에 끌려서 모든 나쁜 일을 일으키면서도 자유롭지 못하나니, 마치 사람이 비인(非人)에게 홀려 용한 의사에게 욕설을 퍼부으면 그 의사는 이때 다만 귀신을 없애 줄 뿐 그의 욕설은 미워하지는 않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중생이 자기에게 악을 가하면 그의 성냄을 미워하지 않고 다만 그의 번뇌만을 제거시켜 준다.
또 인욕을 행하는 사람은 앞에서와 같이 욕설을 퍼붓는 이를 보면 마치 부모가 젖먹이를 보듯 하면서 그가 성을 내어 욕하는 것을 보고는 더욱더 사랑하게 여김이 깊어져야 하며, 또 다시 생각하기를 “저 사람이 나에게 악을 끼치는 것은 바로 업의 인연이어서 전세에 나 자신이 지은 것이니, 이제 당연히 받아야 한다. 만일 성을 내면서 갚으면 다시 뒷날의 고통을 만드는 것이 되는데 언제 풀리게 되겠느냐. 만일 지금 참지 않으면 영영 괴로움을 여의지 못한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 성을 내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 성을 내는 일을 꾸짖고 자비로운 마음을 내면서 중생인(衆生忍)으로 들어가나니, 중생인에 들어간 뒤에 생각하기를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가 나가 없고 내 것[我所]이 없으며, 다만 모든 법이 화합하여 임시로 중생이라고 부를 뿐이다. 마치 나무 사람과 같으니, 비록 동작을 한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주인이 없는 것처럼 이 몸도 역시 그와 같아서 다만 피부와 뼈가 서로 지탱하면서 마음의 바람을 따라 움직일 뿐이며,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면서 무상하고 공하고 고요하며 짓는 이도 없고 욕하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에 다만 뒤바뀌고 거짓일 뿐인데 범부들이 마음에 집착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곧 중생이 없고 중생이 없고 나면 법에 딸린 데도 없으며 다만 인연(因緣)이 화합했을 뿐이므로 자성도 없다. 마치 중생이 화합한 것을 억지로 이름 붙여 중생이라고 하는 것처럼,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곧 법인(法忍)을 얻게 되며, 이 중생인과 법인을 얻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데 하물며 그 밖의 이익이겠는가. 중생들은 이런 일을 듣고 나면 찬제바라밀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비리야(毘梨耶)에 세운다 함은, 중생들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것이다.
“그대는 게으르지 말라. 만일 잘 정진하면 모든 착한 공덕을 다 얻기 쉽지만 만일 게으르게 되면 나무에 불이 있는 것을 보면서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는가. 이 때문에 정진하기를 권하는 것이니, 만일 사람이 방편을 따르면서 정진하게 되면 원마다 얻지 못함이 없다. 뛰어난 법을 얻음에도 인연 아닌 것이 없으니, 모두가 정진에서 생기는 것이다.
정진에는 두 가지 모양이 있다. 첫째는 모든 착한 법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나쁜 법을 없애는 것이다. 다시 세 가지 모양이 있나니, 첫째는 일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고, 둘째는 힘써 나아가면서 짓는 것이며, 셋째는 쉬지 않는 것이다.
다시 네 가지 모양이 있나니, 이미 생긴 나쁜 법은 끊어서 소멸시키는 것이요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쁜 법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며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생겨나게 하는 것이요 이미 생긴 착한 법은 더욱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 등을 정진하는 모양이라 한다.
이렇게 정진하기 때문에 온갖 착한 법을 돕고 이루나니, 마치 불이 바람의 도움을 얻으면 더욱더 훨훨 타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세간에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이 산을 건너고 바다를 잘 건너는 것처럼, 도의 법에 정진해야 비로소 부처님의 도를 이룰 수 있는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는가.”
중생들은 이 말을 듣고 나면 모두 정진바라밀을 세우게 된다.
또 보살이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지 못한 이가 있는 것을 보면 그를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찬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모든 법 가운데서 맨 첫째이며 지극히 존귀하다. 온갖 것을 이익되게 하면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속이지 않는 법을 얻게 하고 큰 자비가 있으면서 온갖 지혜와 금빛 몸매의 제일 미묘한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과 3달(達)의 걸림이 없음[無礙]을 갖추며, 온갖 법에서 막힘이 없이 해탈한 이러한 일을 얻은 이면 온갖 중생 중에서 가장 으뜸가고 높으신 이이므로 마땅히 온갖 세간의 공양을 받아야 한다.
만일 사람이 다만 마음으로 부처님을 염(念)하기만 해도 오히려 한량없고 그지없는 복덕을 얻게 되는데 하물며 정진하고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고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예배하는 이이겠는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이러한 일을 말해 주면서 “그대들은 마땅히 위없는 도의 마음[無上道心]을 일으켜야 한다. 부지런히 닦고 정진하면서 법대로 행하는 이면 그것을 얻음에 어렵지 않다”고 하나니, 중생들이 이런 일을 들은 뒤에는 곧 위없는 도의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만일 마음을 일으킨 이면 다만 공연히 그렇게 얻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므로 마땅히 단(檀)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단바라밀을 행한 다음에는 시라(尸羅)바라밀을 행하고 찬제(羼提)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반야(般若)바라밀을 행하나니, 이 다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면 이것이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이다.
만일 대승(大乘)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땅히 벽지불의 도로써 가르쳐야 하고, 만일 벽지불의 도조차 없는 이면 성문의 도를 행하도록 가르치며, 만일 성문의 도조차 없으면 빛깔[色]을 여의고 무색계의 선정[無色定]의 고요히 사라진 안락을 받도록 가르치며, 만일 무색계의 선정조차 없으면 욕망을 여의고 색계(色界) 갖가지 선정의 즐거움을 받도록 가르친다.
그러면서 말해주기를 “스스로 게으르면서 공연히 얻는 것이 없게 하지 마라. 가난하고 하천하면서 갖가지로 애쓰고 고통을 받음은 매우 근심할 만하다. 게으름은 가장 나쁘고 못쓰며 이 세상과 뒷세상의 이익과 착한 길을 파괴하는 것이다”고 하면, 중생들은 듣고 나서 모든 착한 법을 쌓으면서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게 된다.
선(禪)에 세운다 함은, 보살이 중생들 앞에서 선정의 청정한 즐거움[淸淨樂]과 마음의 즐거움[內樂]과 자재한 즐거움[自在樂]과 죄를 여의는 즐거움[難罪樂]과 이 세상과 뒷세상의 즐거움[今世後世樂]과 성인이 누리게 되는 즐거움[聖所受樂]과 범천왕의 즐거움[梵天王樂]과 온몸으로 느끼는 즐거움[遍身受樂]과 깊고 두텁고 묘한 즐거움[深厚妙樂]을 찬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는 것이다.
“그대 모든 중생들은 어찌하여 5욕(欲)의 청정하지 못한 즐거움에 집착하여 짐승들처럼 모든 죄 되고 때가 낀 즐거움을 받으면서 이 묘한 즐거움을 버리는 것인가.
만일 그대들이 이 작은 즐거움을 버린다면 곧 큰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 그대들은 농부가 조그마한 종자를 버리고는 뒤에 큰 수확을 얻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마치 사람이 왕에게 조그마한 물건을 바치고 큰 과보를 얻는 것과 같고 마치 적은 낚싯밥으로 큰 고기를 얻는 것과 같나니, 버린 것은 아주 적으면서도 얻는 것은 크고 많은 것이다.
지혜로운 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세간의 즐거움을 버리고 매우 깊은 선정의 쾌락을 받으며 이미 이런 즐거움을 얻으면 도리어 욕락(欲樂)은 심히 부정(不淨)한 것이라고 관하나니, 마치 감옥에서 나온 것과 같고 마치 병이 나은 뒤에는 다시는 약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 선정은 진실한 지혜[實智]의 첫 문이라 한다. 지혜가 맑고 고요하면서 모든 법을 비추게 함은 마치 등불이 밀실[密室]에 있으면서 그 광명이 효용을 얻는 것과 같다. 만일 선정에 의지하여 4무량(無量)과 배사(背捨)와 승처(勝處)와 신통(神通)과 변재(辯才) 등 매우 깊은 모든 공덕을 얻어 모두 다 두루 갖추게 되면 기와와 돌을 변화시켜 여의보주(如意寶珠)가 되게 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는가.
뜻대로 하게 되어 못하는 것이 없나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물과 같이 하고 물을 밟는 것을 땅과 같이 하며 손으로 해와 달을 잡으면서도 몸은 타거나 차지지도 않고 변화로 갖가지 날짐승ㆍ길짐승의 몸이 되면서도 그의 법을 받지 않는다.
혹 때로는 몸을 변화시켜 허공에 가득 채우기도 하고 때로는 몸이 작은 티끌같이 되기도 하며 혹은 가볍기가 기러기 털만큼 되기도 하고 혹은 무겁기가 태산(太山)과 같이 되기도 하며 혹 때로는 발가락으로 땅을 누르면 천지가 크게 진동하는 것이 마치 풀잎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신통 변화의 힘은 모두가 선정에서 얻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러한 일을 듣고 나면 선(禪)바라밀을 세우게 된다.
반야(般若)바라밀을 세운다 함은 보살이 모든 중생들을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는 것이다.
“마땅히 지혜를 배워야 한다. 지혜라 함은 그 총명이 제일이어서 혜안(慧眼)이라 한다. 만일 혜안이 없으면 비록 육안(肉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경이어서 비록 눈이 있다 하더라도 축생과 아무 다를 것이 없다.
만일 지혜가 있으면 스스로 곱고 추함을 분별하면서 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지만 만일 지혜가 없으면 사람을 따르면서 이리저리 허덕이는 것이 마치 소와 낙타의 코를 꿰어서 사람을 따라 다니게 하는 것과 같다. 온갖 유위의 법 가운데서는 지혜가 으뜸이 되며 성인들이 친하고 사랑하는 바며 유위의 법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경에서 말씀한 것과 같아서, 모든 보배 가운데서는 지혜의 보배가 맨 첫째이고 온갖 날카로운 기구 가운데서는 지혜의 날카로움이 맨 첫째로서 지혜 산의 꼭대기에 머무르므로 근심 걱정이 없고 모든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관찰하면서도 모두 다 보지 않음이 없다.
지혜의 칼은 끝없는 때로부터의 번뇌와 생사의 연결된 쇠사슬을 끊게 되며 지혜의 칼이기 때문에 6바라밀을 갖추어 불가사의하고 한량없는 부처님의 도를 얻으면서 일체지(一切智)를 이루게 되는데 하물며 성문과 벽지불이나 그리고 세간의 뛰어난 일이겠는가. 이 지혜가 더욱 자라고 청정하면서 무너뜨릴 수 없으므로 바라밀이라 한다.”
중생들은 이런 말을 듣고 나면 반야바라밀에 머무르게 된다.
또 보살이 때로는 입으로써 가르치지 않고 혹은 신족(神足)과 광명을 나타내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6바라밀에 머무르게 하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갖가지 인연을 나타내기도 하며, 꿈속에서까지도 그들을 위하여 인연을 지으면서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중생들을 6바라밀에 머무르게 하나니, 이 때문에 경에서 “중생으로 하여금 6바라밀에 머무르게 하려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어느 한 선근(善根)을 부처님의 복전(福田)에 심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기까지 다하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선근이라 함은 세 가지의 선근이 있는데 탐욕이 없는[無貪] 선근이요 성냄이 없는[無瞋] 선근이며 어리석음이 없는[無癡] 선근이다. 모든 착한 법은 모두가 세 가지 선근에서 생기며 더욱 자라는 것은 마치 약나무와 초목이 뿌리[根]가 있음으로 인하여 나고 이루어지고 더욱 자라게 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모든 선근이라 한다.
지금 선근이라는 말은 선근의 인연으로 공양하는 거리[具]이니, 이른바 꽃과 향과 등불이며 그리고 법으로 공양하고 계율을 지니고 경전을 독송하는 것 등이다. 원인[因]에서 결과[果]를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향과 꽃은 일정하지 않지만 착한 마음으로써 공양하기 때문에 선근이라 한다. 보시는 곧 그것이 복은 아니지만 모든 간탐을 파괴하면서 착한 법의 문을 여는 선근이므로 복이라고 할 뿐이다. 마치 바늘이 실을 인도하면서 옷을 깁지만 기워지는 것은 바늘이 아닌 것과 같다.
어느 하나[一]라 함은, 꽃이나 향이나 등불이나 또는 예배 공경하고 경전을 독송하고 계율을 지니고 선정을 닦고 지혜 등으로써 낱낱이 공양하고 그리고 법으로 공양하면서 모든 부처님의 밭 안에 심는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밭[佛田]이라 함은 시방과 3세(世)에서의 모든 부처님이니, 그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시거나 또는 형상이나 또는 사리(舍利)나 또는 부처님을 염[念佛]하기만 해도 된다. 심는다[殖] 함은 마음을 거기에만 오로지 굳게 쓴다는 것이다.
【문】 경전에서는 “갖가지 복전(福田)”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유독 “부처님의 밭에 심는다”고 하는가?
【답】 비록 갖가지 복전이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으뜸가는 복전이다.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18불공법(不共法) 등의 한량없는 부처님 법을 두루 갖추고 모시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유독 “부처님의 밭에 심는다”고 한다.
법보(法寶)는 비록 부처님의 스승이라 할지라도 만일 부처님께서 그 법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마치 비록 좋은 약이 있다 할지라도 좋은 의사가 없으면 그 약은 소용이 없는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법보는 비록 윗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 앞에 불보(佛寶)를 말씀하고 있는데 하물며 승보(僧寶)이겠는가.
또 부처님의 밭에서는 한량없는 과보를 얻게 되지만, 그 밖의 것은 비록 “한량이 없다”고 말하더라고 차등이 있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의 밭은 첫째이다. 다하지 않는다[不盡] 함은 모든 부처님은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 안에 복을 심으면 그 복도 또한 다함이 없게 된다.
또 부처님의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고 수 없고 견줄 데가 없기 때문에 복을 심는 이의 그 복도 역시 다하지 않는다.
또 부처님은 보살로 계실 때 온갖 중생을 반연하셨나니, 마치 중생이 한량없고 끝이 없기 때문에 복도 역시 다함이 없는 것과 같다.
또 부처님의 밭은 청정하여 애욕 등의 모든 번뇌의 더러운 풀을 뽑아내 버린다. 청청한 계율을 평지(平地)로 삼고, 큰 자비를 아름다운 것으로 삼아 모든 악하고 삿된 소금 흙[醎土]을 제거하며, 37품(品)을 봇도랑[溝淃]으로 삼고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無礙智)를 담장으로 삼아 3승(乘)과 열반의 과보를 생기게 하나니, 이 위없고 견줄 데 없는 밭에 씨를 심는 이는 그 복이 다함이 없을 것이다.
【문】 온갖 유위의 법은 무상(無常)한 모양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함[盡]에 돌아가고 복은 인연에서 생기는데 어찌하여 다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답】 역시 “항상 다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부처님이 되기까지의 그 중간에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온갖 유위의 법은 비록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고 한다하더라고 서로 이어지면서 끊어지지 않고 과보도 잃지 않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치 등불이 불꽃마다 나고 없어지고 한다 하더라도 꺼졌다[滅]고는 말하지 않으며 기름이 다하고 심지가 없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꺼졌다고 하는 것처럼, 복도 역시 그와 같아서 깊은 마음으로 좋은 밭에 심었기 때문에 법이 다하기까지는 역시 다하지 않는다.
또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아나니, 마치 열반이 다하지 않는 것처럼 복덕도 모든 법의 실상에 들기 때문에 역시 다하지 않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열반이 다하지 않으므로 복덕도 역시 항상 다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부처님이 되기까지 그 중간에 다하지 않는다”고 말씀하는가?
【답】 이 복덕은 지혜의 힘 때문에 이 공덕으로 하여금 마치 열반이 필경공(畢竟空)이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과 같게 하나니, 이 때문에 비유하여 열반과 같다고 하는 것이지 그것이 곧 열반은 아니다. 만일 그것이 열반이라면 비유로 삼지 않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바로 열반이라면 어떻게 과보로 성불하면서 다하지 않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3해탈문(解脫門)이 공(空)이요 모양이 없으며[無相] 조작이 없는[無作] 것과 같다. 마치 해탈과 같은 것은 필경공의 모양이라 이 공의 해탈문으로 세간을 관찰해도 역시 필경공이고, 마치 해탈과 같은 것은 모양이 없는 모양이라 이 모양이 없는 해탈문으로 세간을 관찰해도 역시 조작이 없는 모양이니, 이 때문에 “어느 한 선근을 부처님의 복전에 심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다하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한 것이다.
15)
범어로는 Sumati.
16)
범어로는 Sādaprarudita. 의역해서 상제(常涕)라고도 한다.
17)
범어로는 Avaivarti. ‘불퇴전(不退轉)’을 의미한다. 아비발치(阿鞞跋致)라고 음역하기도 한다.
18)
범어로는 Bindu.
19)
해당하는 범어는 dānapāramitayāṃ, 곧 처격(Loc.)이다.
20)
범어로는 Pretasūtra.
21)
범어 Kiṃnara의 음역어. 반인반수의 뿔 달린 귀신이다. 긴나라(緊那羅)ㆍ견다라(甄陀羅)를 말한다.
22)
범어 gandharva의 음역어. 건달바(犍闥婆)를 말한다..
23)
범어 kumbhāṇḍa의 음역어.
24)
범어 bhūta의 음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