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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제17권[2]
[명주 굴산 고 통효 대사] 溟州 崛山 故 通曉
염관鹽官의 법을 이었다. 휘는 범일梵日이며, 계림鷄林의 호족인 김金씨이다. 조부의 휘는 술원述元이며, 벼슬이 명주溟州 도독에까지 이르렀는데 청렴 공평하게 시속을 살피고, 너그러움과 용맹으로 사람을 대하니, 밝은 소문[淸風]이 아직도 민요民謠에 남아 있고, 그 밖의 것은 전기에 전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 지支씨는 여러 대를 내려오는 호족 집안으로 세상에서 부녀의 모범이라 불렀는데, 선사를 잉태했을 때 해를 받쳐 안는 길몽을 꾸었다. 원화元和 5년 경인년庚寅年 정월 10일에 선사가 태 속에서 열세 달 만에 탄생하니, 나계螺髻가 있어 자태가 빼어났으며, 정수리에 구슬이 있어 기이한 모습이었다. 나이 15세가 되어 출가할 뜻을 품고 부모에게 말하니, 양친이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전생의 좋은 인연을 심은 결과이니, 그 뜻을 거두게 할 수가 없구나. 네 먼저 제도를 받거든 나를 제도해다오.”
그리하여 속복을 벗고 부모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았다. 나이 스무 살에 서울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는 청정한 행을 두루 닦으면서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여 출가인들의 귀감이 되었고, 동학들의 모범이 되었다.
태화太和 연간에 이르러 혼자서 맹세하기를,
‘중국으로 들어가 구법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조정에 들어 왕자인 김의종金義琮 공에게 그 뜻을 밝히니[披露], 공이 선사의 훌륭한 포부를 소중히 여기는 뜻에서 동행하기를 허락하여 그 배를 빌려 타고 당唐에 도달하였다.
이미 숙세의 원을 이룩했는지라 곧 순례의 길에 올라 선지식을 두루 참문하던 끝에 염관 제안齊安 대사를 뵈니,
대사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선사가 대답했다.
“동국에서 왔습니다.”
대사가 다시 물었다.
“수로水路로 왔는가, 육로陸路로 왔는가?”
“두 가지 길을 모두 밟지 않고 왔습니다.”
“그 두 길을 밟지 않았다면 그대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해와 달, 동과 서가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이에 대사가 칭찬하였다.
“실로 동방東方의 보살이로다.”
선사가 물었다.
“어찌하여야 바로 부처를 이룹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그저 더럽히지나 말라. 부처라는 견해, 보살이라는 견해를 짓지 말라.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니라.”
선사가 이 말에 활짝 깨닫고 6년 동안 정성껏 모시다가 나중에 약산藥山에게 가니,
약산이 물었다.
“요즘 어디서 떠났는가?”
선사가 대답했다.
“강서江西에서 떠났습니다.”
“무엇 하러 왔는가?”
“화상을 찾아왔습니다.”
“여기는 길이 없는데, 그대가 어떻게 찾아왔는가?”
“화상께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신다면, 저는 화상을 뵙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에 약산이 찬탄하였다.
“대단히 기이하구나, 대단히 기이하구나. 밖에서 들어온 맑은 바람이 사람을 얼리는구나.”
그 뒤로 마음대로 행각을 다니다가 멀리 서울[景]에 들르니, 때마침 회창會昌 4년의 사태沙汰를 만나 스님들은 흩어지고 절은 무너져서 동분서주하여도 숨을 곳이 없었다. 때마침 하백河伯의 인도로 산신의 마중을 받아 상산商山에 숨어서 홀로 선정禪定을 닦았다. 그는 떨어진 과일을 주워 배를 채우고 흐르는 냇물을 마셔 목마름을 달랬다. 행색이 바짝 마르고 기력이 부쳐서 걸을 수가 없게 된 채로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꿈에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떠나시지요.”
이에 억지로 걸으려 했으나 도저히 힘이 미치지 못하였는데, 어느 결에 짐승들이 떡과 먹을 것을 물어다가 자리 옆에다 두니, 일부러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주워 먹었다.
훗날 맹세하기를,
‘소주韶州에 가서 조사의 탑에 예배하리라.’ 하고,
천 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조계에 다다르니, 향기 어린 구름이 탑묘塔廟 앞에 서리고 신령한 학이 훌쩍 날아와서 누대樓臺 위에서 지저귀니, 절의 대중이 모두 다음과 같이 수군거렸다.
“이러한 상서는 실로 처음 있는 일이다. 필시 선사가 오신 징조일 것이다.”
이때 고향에 돌아와 불법을 펼 생각을 내어 회창會昌 6년 정묘년丁卯年 8월에 다시 뱃길에 올라 계림정鷄林亭에 돌아오니, 정자 위를 비추는 달빛은 현토玄兎의 성에 흐르고, 교교皎皎한 여의주如意珠의 빛은 청구靑丘의 경계境界를 끝까지 비추었다.
대중大中 5년 정월正月에 이르러 백달산白達山에서 연좌宴坐하고 있노라니, 명주溟州의 도독인 김공金公이 굴산사▼(山+窟)山寺에 주석할 것을 청하였다. 한 번 숲 속에 앉아 들어가 산 지 40여 년 동안 줄지은 소나무로 도를 행하는 행랑을 삼고, 평평한 돌로써 좌선하는 자리를 삼았다.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의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여섯 대가 지나도 잃은 적이 없느니라.”
“어떤 것이 대장부가 힘써야 할 일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부처의 계단을 밟지 말고, 남을 따라 깨달으려 하지 말라.”
함통咸通 12년 3월에는 경문 대왕大王이, 광명廣明 원년에는 헌강憲康 대왕이 모두 특별히 모시는 예를 다하여 멀리서 흠앙하였고, 국사에 봉하기 위해 모두 중사를 보내어 서울로 모시려 했으나선사가 오랫동안 곧고 굳은 덕을 쌓았기에 끝내 나아가지 않더니, 갑자기 문덕文德 2년 기유년己酉年 4월 말에 문인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곧 먼 길을 떠나려 하니, 이제 너희들과 작별을 고하노라. 너희들은 세상의 감정으로 공연히 슬퍼하지 말라. 다만 스스로 마음을 닦아서 종지宗旨를 추락하지 않게 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는 5월 1일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대고 발을 포개고 굴산사의 윗방에서 입멸하니, 춘추는 80세요, 승랍은 60세며, 시호는 통효通曉요, 탑호는 연휘延徽이다.
[보화 화상] 普化
반산盤山의 법을 이었고, 진주鎭州에서 살았다. 행장을 보지 못해 그의 생애는 알 수 없다.
선사가 저자를 지나가다가 마보사馬步使를 보고, 얼른 덮치려는 시늉을 하자, 마보사가 다섯 방망이를 때렸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비슷하기는 하지만 옳지는 않다.”
선사가 항상 밤에 무덤 사이에서 자고 낮에 거리를 헤매었는데, 손에 방울을 들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밝음이 와도 때리고 어둠이 와도 때린다.”
임제(林際:臨濟) 화상이 이 소식을 듣고 시자를 시켜 선사의 경지를 시험하게 하였는데, 시자가 선사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을 때의 일은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내일 대비원大悲院에 재가 있느니라.”
시자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전하니, 임제가 기뻐하면서 말했다.
“어찌하여야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선사가 스스로 임제원으로 오니, 임제가 기뻐하면서 음식을 마련해 마주 앉아 먹었다. 그런데 선사가 발우 밑에 고인 찌꺼기까지 몽땅 먹어 버리니, 임제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화가 음식을 먹는 꼴은 마치 한 마리의 나귀와 같다.”
그러자 선사가 얼른 자리에서 내려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나귀 소리를 내니, 임제가 말을 못했다. 이에 선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구간지기인 임제는 겨우 외짝 눈알을 가졌구나.”
나중에 어떤 사람이 장경章敬에게 이야기하니, 장경이 임제를 대신하여 말했다.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까?”
그리고는 또 보화를 대신하여 임제의 따짐에 대꾸하였다.
“장로長老의 그 한 물음을 받고 보니 당장에 얼큰해지는구나.”
임제가 또 물었다.
“대비大悲보살은 몸을 천백억으로 나눈다는데, 스님께서도 나누어 보십시오.”
이에 선사가 땅을 “쾅” 하고 구른 뒤에 우뚝 서서 춤추는 시늉을 하고는 “흠흠” 하더니, 이내 떠나 버렸다.
또 어느 날 임제가 상당하자 선사가 모시고 섰는데, 어떤 스님이 그의 앞에 서니, 선사가 그를 갑자기 밀쳐서 임제 앞에다 쓰러뜨렸다. 이에 임제가 주장자를 들어 세 차례 내리치자 선사가 말했다.
“마구간지기인 임제가 겨우 왼쪽 눈알만 갖추었도다.”
또 임제가 선사와 함께 성승聖僧을 구경하던 끝에,
임제가 물었다.
“저 이는 범부凡夫인가요, 성인인가요?”
선사가 대답했다.
“성인입니다.”
이에 임제가 할을 하고 “예끼” 하니, 선사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선사가 어느 날 관 하나를 얻어 들고 담장을 돌면서 사람들에게 하직을 알렸다.
“내가 지금 열반에 드노라.”
사람들이 동쪽 문 밖으로 구름같이 몰려나오자, 사람 앞에 나서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좋지 않으니, 내일 남쪽 문 밖에서 떠나리라.”
사흘째에는 서쪽 문 밖이라 했으나 사람들은 차츰 적어져서 믿지 않게 되었는데, 나흘째 되는 날에 북쪽 문 밖으로 나오니,아무도 따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관 뚜껑을 닫고 입적하였다.
[숭엄산 성주사 고 양조 국사] 國師嵩嚴山 聖住寺 故 兩朝
마곡麻谷의 법을 이었으며, 호는 무염無染이요, 경주 사람이며, 속성은 김金씨이다. 무열武烈 대왕의 8대손으로서 조부의 이름은 주천周川이니, 품계가 진골眞骨이었고, 벼슬은 한찬韓粲에 이르렀다. 고조와 증조는 모두 정승과 장수를 역임했고, 아버지의 이름은 범청範淸이니, 족품族品을 진골眞骨에서 한 등급 내려서 살았으므로 향리의 비난을 받았다.
어머니 화華씨는 꿈에 팔이 긴 하늘 사람이 연꽃을 주는 것을 보고서 잉태하였다. 또 어느 때 어머니는, 호도인胡道人이 10계戒를 주면서 태교로 삼으라는 꿈을 꾼 뒤 열 달이 지나 선사를 낳았다.
12세에 설악雪嶽의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머리를 깎았는데, 법성法性이라는 선사가 일찍이 거기에서 능가楞伽 법문을 펴고 있기에 몇 해 동안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장경長慶 초에 당에 들어가서 불상사佛爽寺에 이르러 여만如滿에게 도를 물으니, 강서江西의 법인으로 인가하면서도 부끄러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많은 사람을 겪었으나 이 같은 동국인東國人을 본 적은 드물다. 뒷날 중국에 선법이 없어지면 동이東夷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또 마곡麻谷 보철寶徹 화상에게 가서 일을 보되 가릴 것이 없이하여 남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은 반드시 맡아서 쉽게 해치우니,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스승, 마조馬祖께서 나에게 예언하시기를,
‘만일 동쪽 사람으로서 눈에 뜨이게 두드러진 이를 만나거든 그를 길거리로 보내라. 지혜의 강물이 사해에 넘치게 되리니, 그 공덕이 적지 않으리라.’ 하셨는데, 스승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구나.
나는 그대가 온 것을 기꺼워하나니 동토에서 으뜸가는 선문禪門을 세우기를 바라노라. 가거라. 기꺼이 가거라.”
이렇게 마곡麻谷에게 마음 구슬을 얻고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서 대중大中 원년에 처음으로 숭엄산 성주사聖住寺에 머무르니, 모여든 스님이 천 명에 이르렀고 온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이로부터 선사가 숭엄사嵩嚴寺 안에서 구슬을 토하고 조사의 근기에 따라 인가를 주니, 이 까닭에 두 왕조의 군주는 천관天冠이 땅에 기울어지도록 예를 다하였고, 온 나라의 신하들은 머리가 발부리에 닿게 절을 하였다. 선사는 선정을 닦는 여가에 법을 구하러 오는 기연機緣에 응대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혀가 없는 국토에는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는데, 어찌하여 서천의 28조와 당唐의 6조祖는 조사의 등불을 서로 전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모두가 세상에 떠도는 소문일 뿐, 바르게 전한 것은 아니니라.”
“하나의 조사에 두 가지 국토가 갖추어져 있습니까?”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앙산仰山이 말하기를,
‘두 입에 하나의 혀도 없다’ 하였나니, 이것이 곧 우리 종의 종지宗旨니라.”
“하나의 조사에게서 두 가지 국토를 볼 때는 어떠합니까?”
“선법禪法을 바르게 전하는 근기는 법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스승도 필요하지 않나니, 이것이 혀 없는 국토[無舌土]요,진실에 맞추어 법을 구하는 사람은 임시적 이름인 말로써 설명을 하나니, 이것이 혀 있는 국토니라.”
그리하여 효강孝康 대왕이 스승으로 섬긴 뒤에 정강定康 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앞의 예규에 따라 받들어 맞이하였으나 나이가 이미 90세인지라 대궐에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선사는 문덕文德 원년 창월(暢月:11월 27일)에 입적하니, 시호는 대랑혜大郞慧 대사요, 탑호는 백월보광白月葆光이다.
[천룡 화상] 天龍
대매大梅의 법을 이었으나 행장을 보지 못해 생애를 기록하지 않는다.
[정원 화상] 正原
오설五洩의 법을 잇고, 구산龜山에 함께 살았다. 속성은 채蔡씨이며, 선주宣州의 남릉현南陵縣 사람이다. 정원貞元 15년에 고향의 자산藉山에서 머리를 깎고 원화元和 정유년丁酉年에 건주建州 건원사乾元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선사는 신령한 싹이 간단히 나듯 도기道器를 혼연히 이루었으니, 계수나무의 순은 어려서부터 향기를 뿜고, 송백松栢은 새싹 때부터 절개를 보인다. 어릴 적부터 벗들과 희롱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회계會稽의 총림을 찾아 오설五洩의 비밀한 법인을 은밀히 깨달았다.
선사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바다가 몇 번이나 뽕밭으로 변했던가?
허공만은 언제나 담연湛然하도다.
이미 언덕을 건넌 이는 뗏목을 생각하지 않겠지만
아직 건너지 못한 이는 마음대로 배를 기다리라.
또 다음과 같이 송했다.
스승을 찾아 마음의 근원을 깨달으니
양쪽 언덕 모두 현묘하여 한쪽만으로는 온전하지 않다.
그대로가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구해 무엇 하리오.
이로부터 모든 말을 잊노라.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욕선忍辱仙이 숲 속에서 좌선을 할 때
일찍이 가리왕歌利王에게 사지를 갈기갈기 찢겼네.
하물며 우리 성군聖君, 그런 일이 없으시어
그저 도 닦는 것을 그만두라 하시니 무슨 슬픔 있으랴?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은 본래 티끌이 끊겼으니 무엇 하러 씻으며
몸 안에 병이 없으니 어찌 의원을 구하랴.
그대로가 부처요 몸이 아님을 알려면
밝은 거울 높이 달려 비치기 이전이라.
선사의 춘추는 78세요, 법랍은 54세이며, 시호는 성공性空 대사요, 탑호는 혜관惠觀이다. 그 뒤 천우天祐 2년 용집龍集 을축乙丑 8월에 민왕이 탑을 세웠다. 그곳은 나라에서 기도를 하면 생민에게 감응이 내려지는 성지로서 지금까지 향기로운 향과 등이 하늘에 솟았고, 하늘과 용이 옹호하고 많은 백성들이 우러렀으니, 사람들이 구산龜山의 두 진신이라 불렀다. 양의 개평開平 4년 경오년庚午年에 이르러 성형省邢이 비문을 지었다.
[부용 화상] 芙蓉
귀종歸宗의 법을 이었고, 복주福州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영훈靈訓이며, 복주福州의 후관현候官縣 사람으로서 성은 위危씨이다.
처음에 귀종을 뵙고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이 대답했다.
“그대에게 말해 준다면 그대가 믿겠는가?”
선사가 말했다.
“화상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귀종이 말했다.
“믿으면 그것이 곧 부처요, 바로 그대가 부처니라.”
“어떻게 보임保任하오리까?”
귀종이 대답했다.
“한 점의 먼지가 눈에 가리면 허공 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선사가 이렇게 현현한 진리를 깨달은 뒤 곧 부용원을 창설하여 주석하니, 그 주지하는 법도가 엄정하여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입적한 뒤에 시호를 홍조弘照 대사라 하였고, 탑호를 원상圓相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