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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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倡女女良家(창녀여량가) 기생집의 여인과 양갓집 여인에게 其心問幾何(기심문기하) 그 마음 어찌 다른지 물어볼거나 可憐栢舟節(가련백주절) 가련치만, 지켜가는 이내 절개는 自誓死靡他(자서사미타) 하늘에 맹세코 죽는대도 딴 뜻 없다네
위 한시는 고려시대 팽원(彭原,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의 기생 동인홍(動人紅)이 지은 ‘스스로 읊다(自敍)“입니다. 비록 남들이 천하게 보는 기생이지만 절개를 지키려는 마음은 양갓집 여인네와 다름이 없다는 뜻을 “하늘에 맹세코 죽는대도 딴 뜻 없다네”라는 구절이 잘 드러내고 있지요. 정절을 지키려는 마음에는 신분의 차이는 없는데도, 세상은 그렇게 봐 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인홍(動人紅)”이란 기생의 이름에는 사람의 얼굴을 벌겋게 만든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허튼 짓을 하는 엉뚱한 사내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들만큼 동인홍의 절개는 아무도 범접을 못합니다. 자기 한 말을 밥 먹듯 뒤집는 사람도 많고, 아무 변병도 없이 자신의 가던 길을 헌신짝 버리듯 하고 변절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요즘 동인홍은 따끔한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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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속풀이 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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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김밀화주의 제자, 장학선(張鶴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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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풀이에서는 평양의 기성권번을 방문한 다나베 일행의 기행을 이야기 하고 있는 중이다. 기성권번은 엄격한 교육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기생 교육소로는 매우 이름이 난 곳이었다는 이야기, 경술국치(한일합병) 뒤에는 기생을 일본식으로 생각해 천시하는 경향이 많았으나 평양 기성권번의 기녀들은 일반교양은 물론, 예의범절이 반듯했다는 이야기, 다나베 일행이 기성권번을 방문했을 때, 기녀들과 학기(기녀수업을 받고 있는 여인)들은 노래와 연주, 춤을 보여 주었는데, 특히 4인의 검무와 2명의「승무」가 일품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기녀들은 예능 이외에 일반적 교양도 갖추고 있고 예의범절도 반듯해서 일본의 2류 이하의 예기와는 구별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대부분의 일본 예기들은 일반적 소양이 없기 때문에 손님이 그녀들을 우습게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는데, 이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도 평양의 기생학교 제도는 크게 참고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다나베 일행이 기성권번을 방문한 날은 1921년 4月 10日이었고 다음날에는 대동강에서 배를 타고 평양 경관에 감탄한 느낌이나 기녀들이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며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대동강주유기(大同江舟遊記)에는 이들 일행이 대동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들을 적어 놓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4월 초의 날씨로는 매우 추웠던 모양이다. 동경 근처에는 벚꽃이 한창 피고 있을 시기, 조선의 북부는 아직까지도 추워서 겨울옷을 입고 뱃놀이를 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다나베는 평양을 미인의 고장이라 할 정도로 평양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이 매우 좋았던 모양이다.
예를 들면 “조선에서 진짜 미인을 보고 싶다면 평양으로 가라”는 말이나 “일본에서도 드물 만큼 예쁜 사람이 많다”, “예부터 미비(美妃)는 평양에서 뽑는다” 등등의 말을 인용하면서 평양의 미인담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또 실제로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인이라도 아주 예쁜 사람이 많다고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조선의 아름다운 건축물에 대해서도 놀라고 있다. 가령 을밀대(乙密台)에 올라가서는 옛날의 성곽이나 망루, 성문을 보면서 여러 형태의 아름다운 곡선으로 어우러진 건축물을 극찬하고 있으며 고색이 창연한 고 건축물에서 조선의 건축기술이나 조형미 등 건축 문화에 탄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조선에 와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건축물, 음악이나 춤 등 당시 조선의 문화를 대하며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대목이 기행문 도처에 나타나고 있어서 의례적인 칭찬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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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뱃놀이에 동행을 하게 된 기생들은 4인이었다. 이들은 대개 16세와 17세 전후의 꽃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평양의 유명한 기녀들로 함께 뱃놀이하는 사진 밑에 그녀들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어 더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그 기녀들의 이름은 문기화(文奇花), 김경심(金瓊心), 이행화(李杏花), 장학선(張鶴仙) 등으로 특히 60년대 말,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서도소리의 초대 예능보유자였던 고 장학선 명창의 이름이 보이고 있어 반갑기 그지없다.
국가는 60년대 초, 무형문화재를 발굴 선정하면서 그 기능이나 예능을 담당할 보유자들을 인정하였다. 당시 평안도나 황해도의 소리, 즉 서도 지방의 소리(서도소리)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그 예능 보유자로 장학선을 인정해서 그 보존이나 보급, 전승활동을 맡겼던 것이다. 그래서 국악계에서는 장학선이 서도소리의 대표적 명창으로 잘 알려진 이름이다. 본명은 현길(賢吉)이고 장학선은 예명이다.
그녀는 평양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선교 사업으로 가산을 모두 날리게 되자, 이모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고, 10살 때 평양 관우물소리방이란 곳에 들어가 노래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14 살부터는 평양의 기성권번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서도소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의 스승이 바로 그 유명한 김밀화주(金蜜花珠) 명창이다.
김밀화주의 제자들로는 장학선 외에도 이반도화(李半島花), 이정렬, 이부용, 장금화 등 쟁쟁한 명창들이 많았다. 장학선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0년 평양 모란봉에서 기성권번이 주최한 경연에서 장원을 하면서부터이다. 그 이후 서도의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콜롬비아와 빅타 레코드회사 등에서 서도소리 음반 취입도 활발하였다.
장학선은 1959년에 8도명창대회에서 1등을 하여 서도소리의 1인자 자리에 올랐고, 1969년 9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서도소리의 최초 예능보유자가 되었던 인물이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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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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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김영조 ☎ (02) 733-5027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5가길 3-1. 영진빌딩 703호 koya.egreennews.com, pine9969@hanmail.net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