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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39권
4. 변업품 ⑦
3. 율의와 불율의의 획득[得]과 버림[捨]
3.1. 율의와 불율의의 획득
1) 세 가지 율의의 획득방식
별해탈율의는 무엇에 따라 획득하게 되는 것인가? 또한 무엇에 따라 그 밖의 다른 두 가지 율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체와 두 가지와 현재에 따라
욕계의 율의를 획득하며
근본업도와 항시(恒時, 즉 3세)에 따라
정려와 무루율의를 획득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 ‘욕계의 율의’란 별해탈율의를 말하는데, 이것은 일체의 근본업도(根本業道)에 따라, 그리고 전후의 근분(近分)에 따라 획득된다.1)
‘두 가지에 따라 획득된다’고 함은, 말하자면 유정과 비유정, 성죄(性罪)와 차죄(遮罪)라는 두 가지 유형에 따라 획득된다는 뜻이다. 유정에 대한 성죄란 이를테면 살생 등의 업을 말하며, 유정에 대한 차죄란 이를테면 여인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것 따위를 말한다. 비유정에 대한 성죄란 이를테면 다른 이의 재물[外財]을 훔치는 것을 말하며, 비유정에 대한 차죄란 이를테면 땅을 파고 살아있는 풀 등을 끊어버리는 것 따위를 말한다. [즉 별해탈율의는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악업처에서 떠날 때 획득된다.]
‘현재에 따라 획득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현세의 온ㆍ처ㆍ계에 따라 획득되고 과거와 미래의 그것에 따라서는 획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이러한 율의는 유정과 유정처(處)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과거와 미래는 바로 유정과 유정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정과 유정처란 이를테면 온갖 유정(즉 유정자신)과, 그리고 그러한 온갖 유정의 의지처(依止處)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현재의 온ㆍ처ㆍ계로서 내적인 것은 바로 유정의 소의(所依)이며, 외적인 것을 일컬어 유정의 소지(所止)라고 한다. 그러나 과거ㆍ미래의 그것은 유정의 의지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따라서는 별해탈율의가 획득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려율의와 무루율의를 획득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다만 근본업도에 따라 획득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선정 중에서는 오로지 근본업도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후의 근분에 따라서는 획득되지 않는 것이다.2) 즉 선정에 든 상태에서는 오로지 근본업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선정에 들지 않은 상태(즉 산심) 중에서는 이러한 율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율의는 유정수(有情數)에 의해 낳아진 차죄에 따라서도 획득되지 않거늘 하물며 비유정수에 의해 낳아진 차죄에 따라 획득될 것인가?3)
그리고 ‘항시(恒時)에 따라 획득된다’고 함은 이를테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온ㆍ처ㆍ계에 따라 획득된다는 뜻으로, 예컨대 이러한 계와 더불어 구유(俱有)하는 마음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4)
이같이 [율의를 획득하는 방법이] 동일하지 않음에 따라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떤 온ㆍ처ㆍ계는, 그것에 따라 오로지 별해탈율의만이 획득될 뿐 그 밖의 두 가지 율의는 획득하지 않는다고 하는 등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즉 제1구는 이를테면 현세의 전후 근분(즉 가행과 후기)과 온갖 차죄에 따르는 [온ㆍ처ㆍ계]가 그러하다. 제2구는 이를테면 과거ㆍ미래의 근본업도에 따르는 [온ㆍ처ㆍ계]가 그러하다. 제3구는 이를테면 현세의 근본업도에 따르는 [온ㆍ처ㆍ계]가 그러하다. 제4구는 이를테면 과거ㆍ미래의 전후 근분에 따르는 [온ㆍ처ㆍ계]가 그러하다.5)
그런데 어떤 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善)의 율의를 바로 획득하는 때에는 현세의 악업도 등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마땅히 4구의 갈래를 달리 설정해야 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어떤 종류의 법은, 그것에 따라 오로지 별해탈율의만이 획득될 뿐 그 밖의 두 가지 율의는 획득하지 않는다고 하는 등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해야 한다. 즉 제1구는 이를테면 현재에 전후의 근분과 아울러 차죄의 원리(遠離)를 획득할 때가 그러하다.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이와 같이 설해야 할 것이다.”6)
그러나 앞에서 분별한 4구에서는 업도 등의 소의처[處]에 대해서도 업도 등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역시 과거ㆍ현재[의 악업]도 방호한다고 할 수 있다. 업도 등이 오로지 미래[의 악업]만을 방호하는 것은 아니니, ‘업도’ 등이라는 말로써 그것의 소의처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업도’라고만 말하였다면), 다만 미래[의 악업]만을 방호하는 율의라고 설해야 할 것이니, 다만 미래의 죄만을 능히 방호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과거ㆍ현재[의 악업]을 방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미 멸하였고 이미 생겨난 율의는 그것에 대해 방호하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2) 율의의 획득범위와 동기
모든 유정은 일체의 유정과 갈래[支]와 근거[因]에 따라 모두 동등하게 율의와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인가,7) 그렇지 않은 것인가?
일체의 유정 등에 따라 동등하게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형태는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율의는 모든 유정에 따라 획득되지만
갈래와 근거는 일정하지 않다고 설하며
불율의는 근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체의 유정과 갈래에 따라 획득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율의는 결정코 조선(調善:調伏의 선이라는 뜻으로, 율의의 이명)의 의요(意樂)에 의해 일체의 유정을 널리 대상[緣]으로 할 때 비로소 획득되는 것으로, 일부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거기에는 악심(惡心)이 수반되기 때문이다.8)
그러나 갈래[支]와 근거[因]는 일정하지 않다. 여기서 ‘갈래’란 업도를 말하는 것으로, 바야흐로 별해탈의 온갖 율의 가운데 일체의 갈래에 따라 생겨나는 것은 이를테면 필추계이며, 네 가지의 갈래에 따라 획득되는 것은 이를테면 그 밖의 율의이다.9)
‘근거’도 일정하지 않다. 여기에는 간략히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인정되니, 첫째는 무탐 등의 세 가지 선근이며, 둘째는 하ㆍ중ㆍ상품의 등기심이다. 여기서 앞의 근거에 따라 분별할 경우, 일체의 율의는 일체의 근거(무탐ㆍ무진ㆍ무치)에 의해 획득된다고 설해야 할 것이니, 그것들은 한 찰나의 마음[一心]에 존재하기 때문이다.10) 또한 뒤의 근거에 따라 분별할 경우, 일체의 율의는 한가지 근거에 의해 획득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 하품 등의 마음은 구기하지 않기 때문으로,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11) 따라서 여기(본송)서는 바야흐로 뒤의 세 가지 근거에 대해 설한 것이다.12)
[그렇다고 할 때] 혹 어떤 종류의 율의에 머무는 자로서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율의를 획득하였으면서, 일체의 갈래에도 의하지 않고 일체의 근거에도 의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하품의 마음, 혹은 중품의 마음, 혹은 상품의 마음으로써 근사나 근책의 계를 받는 자가 그러하다. 혹 어떤 종류의 율의에 머무는 자로서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율의를 획득하였으면서, 일체의 갈래에 의하고 일체의 근거에 의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하품의 마음, 혹은 중품의 마음, 혹은 상품의 마음으로써 필추계를 받는 자가 그러하다. 혹 어떤 종류의 율의에 머무는 자로서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율의를 획득하였으면서, 일체의 갈래와 일체의 근거에 의하여 획득한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하ㆍ중ㆍ상의] 세 품류의 마음으로써 근사ㆍ근책ㆍ필추의 계를 받는 자가 그러하다.13) 혹 어떤 종류의 율의에 머무는 자로서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율의를 획득하였으면서, 일체의 근거에 의하고 일체의 갈래에 의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세 가지 마음으로써 근사ㆍ근주ㆍ근책의 계를 받는 자가 그러하다.
그리고 모든 유정을 두루 대상으로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율의도 획득하는 일이 없으니,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이며,14) 일부의 온갖 유정에 대하여 맹서하고 율의를 받았을 경우, 악심(즉 악의 의요)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 내지 개미의 소의신에 대해 획득된 율의에 차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차별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6]취(趣)는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획득된 율의에는 마땅히 증감(增減)이 있어야 할 것이다.15) 그러나 만약 차별이 없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타승죄(他勝罪)를 범하는 것이고,16) 사람 아닌 이[非人]를 죽이는 것은 오로지 추악한 죄를 범하는 것이며, 방생을 죽이는 것은 타락(墮落)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유정의 경계와 소의신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수지한 계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벌(罰)이나 죄업(罪業)에 차별이 있는 것은 다만 가행(加行,준비단계)이 달랐기 때문으로, 사람을 죽이는 가행과 사람 아닌 이를 죽이는 가행, 나아가 개미를 죽이는 가행이 모두 달랐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예컨대 향기로운 코끼리[香像, 태생]를 죽일 때에는 많은 죄가 획득되지만, 모기(습생)를 죽일 때에는 적은 죄가 획득되듯이, 바야흐로 동일한 취(趣)의 동일한 부류를 죽이는 죄업 중에도 가행의 차이로 말미암아 그 업이 다르거늘, 어찌 하물며 가행에 차별이 있는 다른 취의 다른 부류를 [죽이는] 죄업 중에 경중(輕重)이 없을 것인가?
그러나 율의는 모든 이에 대한 의요에 의해 건립되는 것으로, 이를테면 유정을 두루 대상으로 하여 어떠한 차별도 없이 조선(調善)의 의요를 일으켜야 율의를 획득할 수 있으니, 한 명의 유정에 대해서라도 악의 의요를 버리지 않는 한 별해탈율의를 획득할 수 없다. 따라서 율의를 획득하는 것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이다.
즉 율의를 획득하는 자는 반드시 보특가라(有情)와 갈래[支]와 처소[處]와 시간[時]과 조건[緣]을 각기 개별적으로 관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17) 이를테면 [율의를 획득하는 자는] 결정코 ‘나는 특정[某]의 유정에 대해서만 살생 등에서 떠날 것이다’거나, ‘나는 결정코 특정한 갈래의 계만을 능히 수지할 것이다’거나, ‘나는 특정한 처소에서만 살생 등에서 떠날 것이다’거나, ‘나는 오로지 그 같은 한달 등의 시간동안만 [능히 살생 등을 떠날 것이다]’거나, ‘전쟁 등의 조건을 제외하고서만 능히 살생 등에서 떠날 것이다’고 개별적으로 관찰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계를 수지하는 자는 율의를 획득하지 못하며, 단지 율의와 유사한 묘행(妙行) 만을 획득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유정신의 차별로 말미암아 계가 차별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또한 자신에 대해서는 근본업도에 포섭되는 별해탈율의를 획득하지 못하며, 사법(思法) 등이 스스로를 살해함에 따라 무간업 등에 포섭되는 죄업을 성취하는 것도 아니다.18) 즉 [그들] 권속에 포섭되는 [율의를] 획득하였다는 것은 이치상 부정할 수 없으니, 이를테면 최초에 그 밖의 다른 온갖 죄업 등에서 떠났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수지되는 별해탈율의는 능력이 미치는 경계[能境]와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경계[不能境]를 모두 대상으로 하여 획득되는 것으로, 오로지 능력이 미치는 경계만을 대상으로 하여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19) 이러한 [별해탈] 율의는 요컨대 유정을 두루 대상으로 하여 해손(害損)시키거나 괴롭히지 않겠다는 의요(意樂)를 일으켜 획득하는 것으로, 그 밖에 달리 획득할만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니, 잠이 들었거나 기절[睡悶]하였을 때에도 다 살생할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능히 해칠 수 없는 유정을 대상으로 한] 율의는 획득되지 않는다”고 할 경우, 만약 그가 깨어나 본래의 마음을 획득하고 나서 다시 살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경우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율의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경계[非所能境, 즉 不能境]는 바뀔 수 있을 뿐더러 능력이 미치는 경계[能境]가 되고 나면 다시 살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오로지 능력이 미치는 경계에 대해서만 이러한 [별해탈]율의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율의에 마땅히 증감이 있어야 할 것이니, 능력이 미치는 경계와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경계인 두 종류의 유정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다고 한다면 별해탈율의는 획득과 사기(捨棄)의 연(緣)을 떠나 획득되고 버려지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20)
이는 성립할 수 없는 힐난이니, 경계가 바뀔 때에는 이러한 율의를 획득하고 버리게 되는 인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능력이 미치는 경계[所能境]와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경계[非所能境]가 그 후에 바뀌어 [각기]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경계[不能境]와 능력이 미치는 경계[能境]가 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율의를 버리거나 획득할 리가 없으니, [그 때에도] 다 능력이 미치는 경계를 대상으로 하여 율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만약 능력이 미치는 경계와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경계가 [그 후에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경계와 능력이 미치는 경계로] 바뀌었기 때문에 필시 버리거나 획득하는 계가 있으며, 그런 즉 율의에 증감의 과실이 성취되는 것이라면, 어찌 풀도 본래 없었지만 생겨나는 일이 있으며, 온갖 유정도 영원히 원적(圓寂)에 드는 일이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경주의 반론)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오로지 능력이 미치는 경계에 대해서만 율의를 획득하는 것이라면]마땅히 율의를 버리고 획득하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앞에서 [말한 대로] 계(戒)가 증가하고 감소하는 과실을 역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설한 [‘별해탈율의는 능력이 미치는 경계[能境]와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경계[不能境] 모두를 대상으로 하여 획득된다’고 하는 주장에는] 이치상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럴 경우] 과거의 각각의 여래와 그에 의해 교화된 중생들은 원적에 들었기 때문에 그 뒤의 부처님은 그들을 대상으로 하여서는 율의를 획득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째서] 뒤[의 부처님(현재불)]의 율의는 앞[의 부처님(과거불)]의 율의보다 감소하였다는 과실이 없는 것인가?(유부의 반증)
율의는 각각의 유정의 각기 다른 상속에 대향하여 개별적으로 낳아져[別發]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앞의 부처님과 뒤의 부처님의 계의 갈래[戒支]는 동등하기 때문에 [감소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모든 율의는 무탐 등을 근거[因]로 하여 개별적인 종류의 갈래[支, 즉 업도]로 차별되어 낳아지게 된 것으로,21) 각각의 갈래는 각기 동일한 무표로서 그것들은 모두 일체의 유정처를 대상으로 하여 획득된다. 이와 같은 무표는 이미 세분할 수 없는 것으로, 이를 분석하여 적어졌다거나 많아졌다고 할 수 없거늘 어떻게 뒤[의 부처님]의 율의가 앞[의 부처님]의 율의보다 감소하게 되는 과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일체의 부처님은 모든 유정들을 두루 대상으로 하여 일체의 모든 갈래의 율의의 무표를 갖추고 있으니, [율의의] 갈래 수(數) 등에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의 부처님의 계가 앞의 부처님의 계보다 감소하게 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22)(경주의 해명)
3) 불율의의 획득방식
이상 그것(즉 본송)에 따라 온갖 율의의 획득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은 결정코 일체의 유정과 업도(즉 갈래)에 따르는 것으로, 일부의 경계(유정)만을 대상으로 하거나 갈래[支]를 모두 갖추지 않은 불율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정코 일체의 근거[因]에 따라 획득되는 일은 없으니, 하품 등의 마음이 동시에 생기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즉 어떤 한 존재가 하품의 마음에 의해 불율의를 획득하고 그 후 시간을 달리하여 상품의 마음에 의해 중생의 목숨을 끊었다면, 그는 단지 하품의 불율의를 성취하고, 또한 역시 살생이라고 하는 상품의 표업 따위를 성취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중품과 상품의 마음에 의해 [불율의를 획득하고 중생의 목숨을 끊는] 경우도 이러한 예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양을 죽이는 등의 일에 있어서는 오로지 한가지 일(악업) 만을 수지하고서 불율의를 획득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한가지 일(악업)을 수지하면 역시 [불율의를] 획득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23)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불율의는 일체의 업도에 따라 획득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율의를 획득할 때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근거(즉 상ㆍ중ㆍ하품의 마음)에 따라 불율의를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인가?
비록 살생 등으로 차별되는 표업 중에도 일찍이 [하품 등의 마음에 의해] 한가지를 수지하고 나서 그 후 다시 [상품 등의 마음에 의해 다른 표업을] 별도로 수지한다고 할지라도 불율의가 다시금 새로이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찍이 일체의 유정 모두에 대해 거리낌 없이 손해(損害)를 끼치려는 의요를 일으켜 생활[活命]하였기 때문에 불율의를 수지하게 되었던 것인데, [다른 표업을 수지하였다 하여] 그가 지금 다시 무엇을 획득하겠는가? 따라서 이것(불율의)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체의 근거에 따라 획득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율의 중에서는 근사로부터 근책의 계를 받으며, 근책이 다시 필추율의를 받을 경우, 각각의 율의를 수지할 때 수지되는 업도의 권속이 다르기 때문에, 서원[要期]이 다름에 따라 일찍이 획득하지 않았던 것을 획득하게 된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율의는 일체의 근거에 따라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어떠한 이를 일컬어 불율의[를 획득하는] 자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양을 죽이고, 닭을 죽이고, 돼지를 죽이고, 새를 잡고, 물고기를 잡고, 짐승을 사냥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형을 집행하고[魁膾], 감옥을 지키고[典獄], 뱀을 잡고[縛龍], 개를 삶고, 그리고 그물이나 덫을 놓아 짐승을 잡는[罝弶] 따위의 온갖 일을 하는 이를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따위’라고 말한 것은 간악한 말로 헐뜯고 욕하며, 비방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살피고 구하며, 다른 이의 비위를 즐거이 말하고, 비법(非法)을 추구하여 그것으로 생활하는 자, 나아가 왕(여기서는 인민을 억압하는 악왕)과 형벌을 담당하는 자, 단죄하고 탄핵하는 관리 등의 종류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오로지 항상 해코지하려는 마음[害心]을 갖는 이를 불율의[를 획득하는] 자라고 이름한다. [혹은] 이와 같은 종류[의 악업]에 따라 불율의에 머무르기 때문에, 불율의를 갖기 때문에, 불율의를 행하기 때문에, 교묘하게 불율의를 짓기 때문에, 자주 자주 불율의를 익히기 때문에 ‘불율의[를 획득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여기서 ‘양을 죽인다[屠羊]’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생계[活命]를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항상 양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그 밖의 다른 불율의에 대해서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1) ‘불율의는 일부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서도 획득된다’는 경부 설 비판
양을 죽이는 모든 이는 오로지 온갖 양에 대해서만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며, 그 밖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데, 어찌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불율의를 획득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일체의] 유정계를 두루 대상으로 하여 온갖 율의를 획득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그럴 수 있으니, [그것(율의)은] 널리 이익 되고 즐겁기를 바라는 뛰어난 아세야(阿世耶)로 말미암아 수득(受得)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양을 죽이는 등의 불율의를 행하는 자들도 자기와 절친한 이에 대해서는 결코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신명(身命)을 구호해 주는 인연에 대해서도 역시 죽이려 하지 않거늘 어떻게 일체의 유정을 두루 대상으로 하여 불율의를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24)
이것도 역시 그럴 수 있으니(다시 말해 불율의도 역시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획득되니), 불율의[를 획득하는] 자는 [일체의] 유정을 널리 대상으로 하는 선한 의요(意樂)가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실제] 이러한 일(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는 일)은 없다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이] 가설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설혹 온갖 유정이나 부모 등 일체의 모든 유정이 양의 모습으로 나타날지라도, 양을 죽이는 자는 그들 모두를 두루 소연으로 삼아 해코지하려는 생각을 품을 것이다”고.
즉 그는 오랫동안 불율의의 마음을 익혔을 뿐더러 나아가 자기와 절친한 이에 대해서도 역시 뒤돌아보는 마음이 없을 것이니, 살아가기[活命]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설혹 자기와 절친한 이가 지금 바로 변화하여 양이 될지라도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품었을 것인데, 하물며 목숨을 마친 후 실제로 양의 몸을 받았을 경우 어찌 그에 대해 능히 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인가? 즐거이 불율의를 [행하는] 자는 악계를 받을 때 반드시 다음과 같은 흉포한 의요를 일으킨다. “설혹 내 어머니 등의 몸이 바로 양이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역시 마땅히 죽일 것인데, 하물며 그 밖의 다른 생류를 죽이지 않을 것인가?”
바로 이와 같은 의요로 말미암아 불율의를 획득하게 되는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이와 같은 의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다만 마땅히 처중(處中, 즉 비율의비불율의)의 죄를 획득할 뿐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비록 절친한 이가 현재는 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에 대해서도] 역시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두루 악계를 획득하게 되게 되면, 비록 성자가 미래 양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 일은 없을지라도 절친한 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서도 역시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품는 것이다.25)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이 같은 예(例)로서 말하고 있다.
“만약 현재의 절친한 이 등을 미래의 양 따위로 관찰하고서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현재의] 양 따위도 미래세에 역시 절친한 이 등이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그러한 양 자체에 대해서도 결정코 해코지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그러한 즉 마땅히 현재의 양에 대해서도 미래의 절친한 이 등으로 관찰하여 악계를 획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26)
이와 같은 등의 예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에게는 선한 의요가 없기 때문이며, 악한 의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는 바로 불율의를 받을 때, 조복(調伏)의 선한 의요를 올바로 사유하여 ‘나는 마땅히 일체의 유정을 해치지 않으리라’고 하지 않고, 흉포한 의요를 삿되게 사유하여 ‘나는 마땅히 일체의 유정을 널리 해치리라’고 하였다. 그것이 비록 양을 위주로 한 것일지라도 그러한 마음은 관대하여 [모든 유정에] 두루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성자나 절친한 이를 미래의 양으로 관찰하여 그들에 대해서도 역시 악계를 낳을 수는 있어도 현재의 양의 몸을 미래의 성자나 절친한 이로 관찰하여 그것에 대해 악계를 낳지 않는 일은 없는 것이다.
혹은 애써 논쟁할 것도 없이 [양과 절친한 이 모두에 대해 불율의를 획득한다는 것은] 이치상 마땅히 동일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바야흐로 양을 죽이는 한 가지 [불율의를] 수지한 어떤 이가 비록 일생토록 주지 않은 물건을 취하지 않고, 자신의 처첩에 대해서만 지족(知足)하는 마음을 가질 뿐더러 벙어리여서 능히 말을 할 수 없어 어업(語業)의 네 가지 허물(양설ㆍ망어ㆍ악구ㆍ기어)을 갖지 않을지라도, 양을 죽이는 일로 인해 선한 아세야(阿世耶)를 허물었기 [때문에] 일곱 갈래[支]의 불율의의 죄를 모두 획득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절친한 이 등에 대해 비록 해코지하려는 마음이 없을지라도 양을 죽이는 일로 인해 선한 아세야가 허물어졌기 때문에 [일체의] 유정계를 두루 대상으로 하여 불율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27)
그러나 만약 일찍이 서원[要期]하여 선한 학처(學處, 즉 율의)를 수지하고, 그 뒤에도 선한 아세야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았지만, 별도의 인연을 만나 오로지 살생의 업을 수지하였다면, 이러한 이는 처중(處中)의 죄를 획득할 뿐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28) 다만 불율의를 획득한 경우에만 필시 마땅히 선한 아세야를 완전히 손상시키기 때문에, [살생의 불율의를 획득하는 경우] 일곱 가지 갈래의 악계를 모두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부(經部)의 여러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편벽되게 주장하였다.
“기약[期限]한 바에 따라 7지를 모두 갖추었거나 갖추지 않았거나, [유정] 전체를 대상으로 삼거나 일부를 대상으로 삼거나 간에 모두 불율의를 획득할 수 있으며, 율의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의 수량에 따라 선과 악의 시라(尸羅)의 성상(性相)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모순되고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8계(즉 근주계) 만은 제외된다.”2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불율의를 받은 자도 역시 근사(近事)라고 말해야 할 것이며, 모든 근사도 역시 불율의를 [획득한]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30) 어떻게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이치가 궁할지라도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한다. 즉 양을 죽이는 이는 이와 같이 “나는 비록 살아가기[活命] 위해 양을 죽이는 [불율의]를 수지할지라도 그 밖의 다른 불여취(不與取)에서 떠나는 계는 받으리라”고 맹서해야 할 것이며, 혹은 여러 근사들도 “나는 결정코 살생을 떠나는 계를 수지할 것이지만, 살아가기 위해 오로지 훔치는 [불율의] 등은 수지하리라”고 맹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치는 없을 것이니, [그럴 경우] 하나의 상속(즉 유정) 중에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아세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치상으로는 마땅히 그와 같다고 해야 한다.(경부)
그 까닭이 무엇인가?
“불율의[를 획득한]자가 만약 이러한 사실[處]에 대한 아세야가 허물어지면, 오로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율의만을 갖지 않는다. 근사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만약 이러한 사실에 대한 아세야가 허물어지지 않으면, 오로지 이러한 사실에 대한 불율의만을 갖지 않을 뿐이니, 그것의 수량[量]에 따라 선과 악의 시라(尸羅)의 성상(性相)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모순되고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각각의 계에 대한 불율의를 획득한다면, 그것은 바로 능히 일체의 선계를 전체적으로 부정한 것이며, 나아가 각각의 계에 대한 선의 율의를 획득한다면, 그것은 바로 능히 일체의 악계를 전체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불율의[를 획득한] 이를 역시 근사라고 말하는 일은 없으며, 나아가 불율의[를 획득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근사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경부의 해명)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앞에서 설한 바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비록 양을 죽이는 이가 살아가기[活命] 위해 다만 살생의 업을 수지하였을지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일체의] 유정에 대한 의요가 허물어졌기 때문에 역시 마땅히 불여취 등의 온갖 불율의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이치에 따라 투도(偸盜, 즉 불여취) 등에서 떠난 자 역시 마땅히 살생의 불율의를 막았다[遮止]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경부)의 뜻이 “양을 죽이는 자라고 할지라도 다른 이의 물자에 대한 의요(다시 말해 다른 이의 물자를 취하지 않으려는 의요)를 허물지 않았다면, 마땅히 그것에 대한 불율의를 획득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면, 어찌 “또한 투도 등을 떠난 자라고 할지라도 양에 대한 의요(다시 말해 양을 죽이지 않으려는 의요)가 이미 허물어졌다면, 마땅히 살생의 불율의를 막았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다고 한다면, 도리어 마땅히 앞에서의 과실을 면하지 못한다고 해야 한다. 즉 “만약 이러한 사실[處]에 대한 선한 의요를 갖는다면, 오로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선한 시라만을 획득할 것이며, 아울러 이러한 사실에 대한 악한 의요를 갖는다면, 오로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악한 시라만을 획득한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그것의 수량에 따라 선과 악의 시라가 서로가 서로를 막는 것이라고(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곧 수지한 선악의 시라는 각각의 갈래를 능히 두루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의 뜻이 “선한 율의(즉 善戒)도 [신(身)3 어(語)4의] 갈래를 모두 갖추어 [받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이를테면 어떤 이가 근사ㆍ근주ㆍ근책의 율의를 받을 때, 비록 [신3 어4의] 갈래를 모두 갖추어 [받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역시 그러한 결여된 갈래를 포섭하는 계를 획득하듯이, 불율의를 받을 때에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이러한 예(例)는 동일한 경우가 아니니, 율의와 불율의는 애써 노력[用功]하여 [획득하고] 애써 노력하지 않고 [획득하는 등] 그것의 획득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든 선계는 획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요컨대 애써 노력할 때 [생겨나는] 선한 아세야에 의해 비로소 능히 수득(受得)할 수 있으니, 이치상으로도 필시 마땅히 한 가지를 수지할 때 일체의 선계를 모두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악계는 획득하기가 어렵지 않기 때문에 애써 노력하여 [생겨나는] 악한 아세야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능히 수득할 수 있으니, 이치상으로도 필시 마땅히 한 가지를 수지함에 따라 일체의 악계를 모두 획득할 수 있다. 즉 욕계에서는 불선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악한 아세야는 저절로 일어날 뿐더러 온갖 중죄의 악을 지을 때에도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 선한 아세야는 쉽게 훼손되고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악계의 경우] 그 중의 한 가지 종류만 수지하면 바로 그 밖의 다른 악계도 모두 획득할 수 있지만, 선계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예는 동일한 경우가 아닌 것이다.
지금 바로 보더라도 잡초[穢草]는 애써 노력하지 않더라도 생겨나지만 아름다운 화초[嘉苗]는 요컨대 힘들여 수고하여야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정으로서 불율의를 받는 사람은 ‘나는 목숨을 다할 때까지 매일 낮에, 혹은 한밤중에, 혹은 한 달에 한번 양 등을 도살하리라’고 기약[要期]하고서도 역시 불율의를 획득하니, 불율의는 쉽게 수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욕계에서는 불선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비록 항상 행하지 않을지라도 악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온갖 유정으로서 출가의 율의를 받고자 하는 이가 만약 ‘나는 목숨을 다할 때까지 매일 낮에, 혹은 한밤중에, 혹은 한 달에 한번 살생 등에서 떠나리라’고 기약하였다면 선한 율의를 획득할 수 없으니, 선한 율의는 수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욕계에서는 선법의 힘이 저열하기 때문에 항상 수지하고 있지 않으면 선계를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니, [앞서 언급한 바는] 예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부의 논사들은 뿌리도 없는 하찮은 허물을 피하려다가 도리어 뽑기 어려운 허물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지자(智者)라면 마땅히 살펴 전도됨이 없이 취사(取捨)해야 하는 것이다.
4) 불율의와 처중(處中)을 획득하게 되는 조건
그러한 것(유정ㆍ갈래 등)에 따라 불율의를 획득하는 방식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불율의와 아울러 그 밖의 무표(즉 처중인 비율의비불율의)를 획득하는 데에는 어떠한 방편이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아직 논설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모든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은
짓거나 맹서하여 받는 것에 의해서이며
그 밖의 무표를 획득하는 것은
전(田)과 수(受)와 중행(重行)에 의해서이다.31)
논하여 말하겠다.
불율의를 [획득하는] 이에는 모두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불율의를 [가업으로 삼는] 집에 태어나는 자이며, 둘째는 그 밖의 다른 집에 태어나 그 후에 이러한 업을 수지하는 자이다. 즉 불율의를 [가업으로 삼는] 집에 태어난 온갖 유정으로서, 만약 처음으로 살생 등의 가행을 현행시키는 경우 이러한 사람은 ‘짓는 것에 의해 불율의를 획득한다’. 그러나 만약 그 밖의 다른 집에 태어나 그 후에 바야흐로 맹서하기를 ‘나는 마땅히 이러 저러한 사업을 지음으로써 재물을 구하여 나 자신을 양활(養活)하리라’라고 한다면, 처음으로 맹서하는 바로 그 순간에 악계를 낳게 되니, 이러한 사람은 ‘받는 것에 의해 불율의를 획득한다’.
그 밖의 무표는 세 가지 종류의 원인에 의해 획득된다. 여기서 ‘그 밖의 다른 무표’란 이를테면 율의도 아니고 비율의도 아닌 것을 말하니, 처중(處中)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또한 ‘세 가지 종류의 원인에 의해서’라고 함은, 첫째는 ‘전(田)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이와 같은 공덕을 갖는 복전[有德田]에 처음으로 시여된 원림(園林) 등에서 선한 무표가 바로 생겨나는 것을 말하는데, 유의(有依)의 온갖 복업사(福業事)에 대해 설한 바와 같다.32)
둘째는 ‘수(受)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스스로 맹서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금부터 부처님이나 승중(僧衆)에게 공양하지 않고서는 결코 먼저 식사 등을 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혹은 “재일(齋日)과 반 달, 한 달, 그리고 일 년 동안 항상 음식 등을 베풀 것이다”는 서원을 세울 경우, 이로 말미암아 선한 무표가 속생(續生)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중행(重行)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이와 같은 은근하고 중대한 작의를 일으켜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맑고 깨끗한 믿음이나 혹은 사납고 예리한 번뇌[纏]로써 선이나 악을 지을 때 능히 무표가 낳아져, 장시간 상속하여 믿음과 번뇌의 세력이 다할 때까지 이르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33)
3.2. 율의와 불율의의 버림
1) 별해탈율의의 버림
이와 같이 율의 등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율의 등을 버리는 것[捨]에 대해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별해탈율의를 버리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별해탈의 조복(調伏)을 버리는 것은
고의로 버리거나, 목숨을 마치거나
이형(二形)이 동시에 생겨나거나
선근을 끊거나, 밤이 다함에 의해서이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중죄를 범함에 의해,
다른 어떤 이는 정법이 멸함에 의해서라고 설하지만
그러나 가습미라의 비바사사는 설하기를
범하고 지니는 두 가지는 부채와 재산과 같다고 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말한 ‘조복(調伏, vinaya)’은 율의의 이명(異名)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에 따라 능히 [6]근(根)을 조복시키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별해탈율의는 다섯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버리게 된다.
첫째는 고의로 버리는 것이다. 이는, 이를테면 [버리고자 하는] 아세야(즉 意樂)로 말미암아 율의에 대해 더 이상 흔모(欣慕)의 마음을 품지 않으며, 학처를 버리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有解人]에게 [율의를 받을 때와는] 상반되는 [어]표업의 차별을 발설하는 것을 말한다.34) 즉 [별해탈율의는] 다만 학처를 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버려지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마치 율의를 획득하고자 하는 마음에 [획득의] 공능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며, 꿈속에서는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다만 [어]표업의 차별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니, 분노하거나 미쳐서 [일으킨 어표업] 등으로는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다만 이 두 가지(버리고자 하는 마음과 어표업의 차별)로 말미암아 버려지는 것이 아니니, [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방생(傍生, 예컨대 소) 등에 대해 [어]표업을 발설하더라도 [결코]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먼저 율의를 버리고자 하는 의요를 일으켜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에게 어표업을 발할 때 그것을 버리게 된다.]
둘째는 목숨을 마침으로써 [버리는 것이니], 이를테면 중동분(衆同分)의 증상의 세력이 율의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35)
셋째는 의지(依止, 소의신)에 이형(二形)이 동시에 생겨남으로써 [버리는 것이니], 이를테면 소의신이 변이할 때 마음도 따라 변이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형은 증상(뛰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6)
넷째는 율의의 근거가 되는 선근을 끊고 멸함으로써 [버리는 것이니,] 이를테면 표업과 무표업을 일으키는 마음[等起心]이 끊어졌기 때문으로, 이는 바로 이러한 율의의 인연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수지하는 계[盡壽戒]는 이상의 네 가지 인연에 의해 버리게 된다.
그리고 근주율의는 역시 또한 밤이 다함으로써 버리게 된다. 즉 근주계는 이상의 네 가지 인연과 아울러 밤이 다함으로써 버리게 되니, 그것의 기한이 지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밤이 다하였다’고 함은 이를테면 동이 터 밝음의 조짐이 나타날 때를 말한다.
모든 궤범사(軌範師)들은 대개 이와 같은 율의를 버리게 되는 다섯 종류의 인연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37)
(1) 경부 등의 4바라이(波羅夷)에 의한 사계(捨戒) 설 비판
그런데 어떤 다른 부파[有餘部]에서는 주장하기를 “[지옥에] 떨어지는 극중죄(極重罪)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범할 때 출가계(出家戒, 즉 근책과 필추의 율의)를 버리게 된다”고 하였으며,38) 또 다른 부파에서는 주장하기를 “정법이 멸할 때 능히 별해탈율의를 모두 버리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 때에는] 모든 학처(學處)와 결계(結界)와 갈마(羯磨)와 존재하던 성교가 모두 종식되어 소멸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39)
그러나 그러한 때에는 비록 아직 획득하지 않은 율의를 획득하는 일은 없을지라도 일찍이 획득한 율의를 버리는 일이 없다.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정리(正理)와 성교(聖敎)를 마음에 간직하고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근본죄(즉 4바라이법) 중의 한 가지를 범하였을 때에도 일체의 율의를 모두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극중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두 가지 명칭이 있으니, 첫 번째 명칭은 ‘시라(즉 계)를 갖춘 자[具尸羅]’이며, 두 번째 명칭은 ‘계를 범한 자[犯戒者]’이다. 따라서 만약 [계를 범하였을지라도] 범한 죄를 드러내어 참회하여 제거하면 오로지 ‘계를 갖춘 자’라고 이름할 뿐이다. 이는 마치 재산이 많은 자가 다른 이에게 빚을 졌을 때, 그를 일컬어 부자이고 부채자라고 하지만, 부채를 갚고 나면 다만 부자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이 경우 역시 마땅히 그러하기 때문에 계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40)
[가습미라국의 비바사사는] 어떠한 정리와 성교를 마음에 간직하였다는 것인가?
바야흐로 마음에 간직한 정리에 대해 먼저 분별하리라. 이를테면 각각[의 계]를 받을 때 [일체의] 율의를 두루 획득하는 것이 아니듯이, 각각[의 계]를 범할 때에도 일체의 율의를 두루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즉 일찍이 일체 유정의 처소를 대상으로 하여 율의를 수득(受得)하였기에 지금 한 가지 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일체[의 계]를 버린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그대의 뜻이 ‘출가(근책과 필추)의 율의는 반드시 개별적으로 받는 일도 없고 또한 개별적으로 획득하는 일도 없다’는 것이라면, 어떻게 ‘[각각의 계를] 개별적으로 받을 때 [일체의] 율의를 두루 획득하는 것이 아니듯이, 한 가지 계를 범하였을 때에도 일체의 율의를 두루 버리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앞서 언급한] 예(例)는 [주장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경부의 힐난)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그대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이기 때문이다.41) 이를테면 그대들도 “재가의 율의는 근본[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바로 일체의 율의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는 사실을 역시 인정하고 있다. 혹은 그대들 스스로도 “별해탈율의를 개별적으로 받을 때, 받은 만큼[爾所]을 또한 획득한다”고 인정하였으니, 이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율의를 범하였을 때에도 범하고 버린 [각각의] 계에 따라 일체의 계를 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받은 계가 실재[有]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로서, 한 가지 계를 버릴 때 일체의 계를 단박에 버리는 것이 아니다. 필추와 근책계에 관한 이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으로, 설혹 [극]중죄를 범하였을 때라도 [출가계를] 모두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혹은 이미 앞에서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다는 것인가?
“율의를 결여하였더라도 근사라고 이름할 수 있다면, 필추와 근책의 율의를 결여하였더라도 역시 [필추와 근책을] 성취해야 한다”[고 논설하였다].42) 따라서 근사로서 율의를 결여한 자는 없으며, 그가 [각각의 계를] 개별적으로 범하였을지라도 일체의 계를 버리는 것은 아니듯이 필추와 근책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여기에 어떤 이치가 있기에 네 가지 [극]중죄 중의 한 가지를 범할 때 일체의 출가의 율의를 단박에 버린다는 것인가? [나머지] 세 종류[의 극중죄]에 대해 선한 의요를 갖지 않은 자라도 자신의 신명(身命)을 구호해 주는 인연에 대해서는 역시 범하려고 하지 않기에 일체의 계를 버리는 것은 아니니, 그대의 종의에서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에 대해 설한 것과 같다.4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네 가지 중죄를 범한 자는 필추라고도 말할 수 없고, 사문이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석가의 제자[釋迦子]도 아니다. 필추의 체성(본질)을 파괴하고 사문의 본성을 해손ㆍ괴멸하여 타락하였으니, 타승(他勝)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설한 것인가?44)(경부의 힐난)
승의의 필추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서 이와 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45) 바야흐로 그대들은 마땅히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이유에서 중죄를 범하면 바로 일체[의 계]를 버리고, 그 밖의 죄를 범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그 밖의 다른 죄를 범하였을 경우에는 참회하여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밖의 다른 죄를 범하였지만 아직 참회하여 제거[悔除]하지 않았을 때에도 필추의 체성을 상실하지 않는다면, 참회하여 제거하였을 때 이익 되는 바는 무엇이며, 나아가 무슨 이익을 얻고자 하여 그렇게 하는 것인가?
이는(다시 말해 그 밖의 다른 죄를 범하였을 때 참회하여 제거하는 것은) 필추의 체성이 결여되거나 허물어[缺漏]지지 않게 하며, 쇠퇴[朽]하지 않게 하며, [염오법과] 뒤섞이지 않게 한다.
능히 이와 같이 하였을 경우(필추의 체성이 결여되거나 허물어지지 않게 하였을 경우), 어떠한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만약 이와 같이 하였다면, 하늘[天]에 태어날 수 있게 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모든 하늘은 지계자(持戒者)에 대해 마땅히 지극한 공양을 베풀어야 할 것이니, ‘시라를 어기거나 범하지 않은 자는 오로지 거기에 태어나기를 희구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교(聖敎)에서는 오로지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필추 등으로 하여금 계를 청정하게 수지하라고 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참회하는 것은 오로지 하늘에 태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계를 범하지 않은 자는 바로 출세간의 공덕을 증득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추로서 그 밖의 죄를] 참회하여 제거한 자는 참회하여 제거하지 않는 자와 다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앞서 인용한 경설이] 출세간의 공덕에 대한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참회하여 제거해야 할 죄에 대해 아직 참회하여 제거하지 않았을 때라도 그는 역시 필추의 체성을 완전히 파괴한 이가 아닌 것이다.46)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중죄를 범한 필추를 인정하지 않은 것인가?
결코 제거할 수 없는 타승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즉 [타승죄를 범한 이는] 비록 그 밖의 율의를 성취할지라도 필경 출세간의 공덕을 담을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필추가 아니다’는 등으로 말한 것이다.
또한 제거할 수 있는 죄(다시 말해 네 가지 중죄 이외의 죄)의 경우, 그것에 대해 아직 참회하여 제거하지 않았을 때라도 어떻게 [제거하였을 때와는] 다른 필추의 체성을 갖는다고 하겠는가? 그러한 [참회하여 제거하지 못한 죄는] 모두 정성이생(正性異生)에 들거나 그 밖의 다른 무루의 공덕을 획득하는데 능히 장애가 되는 것으로, 부정관(不淨觀) 등을 닦기 위해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住]하게도 할 수 없거늘 하물며 [그러한 출세간의 공덕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와 같은 종류에 [정성이생의 견도에 들 수 있는] 필추의 체성이 존재한다면, 응당 [나] 스스로도 귀의 예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이와 같은 필추(참회하여 제거하지 않은 비구)는 중죄를 범한 이와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47)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중죄를 범한 필추는, 마치 자식으로서의 공능을 갖지 않은 자식을 ‘자식도 아니다’고 말하고,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갖지 않은 사람을 ‘사람도 아니다’고 말하며, 무형(無形, 남근을 갖지 않은 이)의 남자를 ‘남자가 아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필추로서 해야 할 일을 능히 성취할 수 없다고 인정해야 하니, 비록 그 밖의 다른 율의를 지닐지라도 ‘필추가 아니다’는 등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설하였다고 하여 의미상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 [4바라이죄를 범한 필추도] 별해탈계를 능히 수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성교에 대해서도 약간의 성취한 바가 있으니, 이러한 율의에 의해서도 과보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부처님의 뜻은 과보를 갖는 것을 싫어하여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憎背]으로, 결여됨이 없이 계를 지닐지라도 [이 같은 부처님의] 마음[情]을 헤아리지 못하거늘 하물며 중죄를 범한 자가 어찌 능히 부처님의 뜻에 이를 것인가? 마치 자식이 부모의 뜻을 어기듯이 부처님의 뜻을 어겨 본래 기약하였던 [필추로서] 해야 할 사업을 헤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라 ‘필추가 아니다’는 등으로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경의] 말은 ‘[네 가지 극중죄 중의 한 가지를 범하였을 경우 일체의] 율의를 버리게 된다’는 주장을 논증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즉 비바사사는 바로 이와 같은 이치를 마음에 간직하고서 이러한 [‘필추가 아니다’는 등의] 말에 대해 “승의의 필추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서 이와 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고 결택 분별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48)
“이 같은 말(‘승의의 필추에 근거하여 밀의로서 설하였다’는 비바사사의 해명)은 대단히 잘못된 해석[凶勃]이다.49)
무엇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인가?
이를테면 세존께서 요의(了義)로 설하신 것을 별도의 뜻으로 해석하여 불요의(不了義)라고 하였으니, [그럴 경우 이러한 설은] 번뇌가 많은 자로 하여금 중죄를 범하게 하는 인연이 되고 말 것이다.50)
이 말이 바로 요의설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율장 중에서 [불타] 스스로 해석하기를, ‘네 종류의 필추가 있으니, 첫째는 명상필추(名想苾芻)이며, 둘째는 자칭필추(自稱苾芻)이며, 셋째는 걸개필추(乞匃苾芻)이며, 넷째는 파혹필추(破惑苾芻)이다’고 하였다.51) 여기(앞서 언급한 박가범의 말씀)서 ‘필추가 아니다’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백사갈마(白四羯磨) 즉 한번 아뢰고 세 번 갈마하여 구족계를 받은 필추(즉 파혹필추)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한다. 즉 이 같은 필추는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일찍이 승의의 필추였지만 그 후 중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필추 아닌 자가 된 것’이 아니다.52) 따라서 이러한 [계경의] 말씀은 바로 요의설임을 알아야 한다.”
어찌 오로지 백사갈마하여 구족계를 받은 필추만이 중죄를 범한다고 하겠는가? 삼귀의를 세 번 설하여 구족계를 받은 필추 역시 중죄를 범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떠한 이치에서 이같이 삼귀의를 [세 번 설하여] 구족계를 획득한 자는 중죄를 범하지 않기에 ‘필추 아닌 자’가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인가? 설혹 이 말이 바로 요의설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오로지 백사갈마하여 구족계를 받은 자가 만약 중죄를 범하여 ‘필추 아닌 자’가 되었을 경우, 이러한 필추는 성법(聖法)을 낳는데 필추로서의 공용(功用,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필추가 아니다’고 말한 것이지 [일체의] 율의를 버렸기 때문에 필추라는 호칭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광론자(廣論者, 즉 비바사사)는 이와 같이 판별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승의의 필추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서 이와 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고. 이는 선설(善說)이니, 중죄를 범한 이는 성도를 낳는 필추로서의 공용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바로 요의의 말씀이다’고 주장함으로써 능히 우리의 종의에서 결택 판별한 이취(理趣)를 능히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다같이 시라를 범하였음에도 그 중의 어떤 이는 계를 상실하고, [어떤 이는] 계를 상실하지 않으며, [어떤 이는] 필추이고 [어떤 이는] 필추가 아니라고 한 것인가? 따라서 대법종(對法宗)을 떠나 기쁨을 낳게 할만한 이치는 없는 것이다.
[그(경주)가] 비록 이같이 “[불요의로 해석할 경우] 번뇌가 많은 자로 하여금 중죄를 범하게 하는 인연이 된다”고 비방하였을지라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니, 누가 능히 중죄를 범하는 인연을 지었을 것인가? ‘비록 한 가지 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 밖의 나머지 계에 대해서는 부지런히 수호해야 한다’고 말한 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미 한 가지 계를 범하였다면 그 밖의 나머지 계도 모두 상실하여 저절로 악을 짓게 된다’고 말한 자라고 해야 할 것인가?
대법자가 이같이 결택하여 판별한 말(‘네 가지 중죄를 범한 자는 필추 등이라 이름하지 않는다’는 경설에 대해 이는 ‘승의의 필추에 근거하여 밀의로서 설한 것이다’는 결택의 말)은 적어도 생천이나 해탈이라는 참으로 애호할만한 과보를 장애하는 말이 아니다. 오로지 시도(示導)하여 그들(네 가지 중죄를 범한 자)로 하여금 [생천이나 해탈의] 원인을 닦게 한 것임에도,53) 어찌하여 다른 이에게 중죄를 범하도록 권유한 것이라고 비방하여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나(중현)는 다만 “한 가지 계를 범하였을 때에는 그 밖의 다른 계는 버리지 않으니, 마땅히 다른 계에 대해서라도 한결같이 전념하여 호지(護持)하라”고 훈계하여 말하였을 뿐으로, 이와 같은 말이야말로 진실로 다른 이가 중죄를 범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한 가지 계를 범하면 단박에 일체의 계도 버리게 된다”고 설하였으니, 이 어찌 한결같이 중죄를 범하게 하는 인연을 지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중]죄를 짓게 한 인연은 그대에게 있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비록 이와 같이 “이러한 필추는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일찍이 승의의 필추였지만 그 후 중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필추 아닌 자가 된 것’이 아니다”고 설하였다고 할지라도54) 이러한 말은 거칠고 천박하다. 그것은 비록 일찍이 [견도를] 증득하지 않았을지라도 당래(미래)에 증득할 공능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니, 만약 후(당래)에 [견도를] 증득할 공능을 갖지 않았다면 이 역시 ‘[승의필추라는 명칭을] 상실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이 세간과 천(天)을 관찰하건대 방일하면 성혜(聖慧)로부터 퇴실(退失)하게 된다”고 설한 것과 같다.55)
또한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던 것인가?
“그(타승죄를 범한 이)는 [비록 그 밖의 율의를 성취하였을지라도] 영원히 출세간의 공덕을 담을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승의에 근거하여 [세존께서는] ‘필추가 아니다’는 등으로 말한 것이다”[고 하였다].
대사(大師, 부처님)에게 이러한 은밀한 뜻이 있음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여기서는 오로지 승의에 근거하여 ‘그(중죄를 범한 이)는 필추가 아니다’고 말하였을 뿐이지만,56)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다시 “사문(沙門)에는 네 가지가 있을 뿐 더 이상 다섯 번째는 없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57) 이 경설은 율의를 범한 오도사문 또한 사문의 일종이기 때문에 극중죄 중의 한 가지를 범한 비구도 일체의 율의(곧 비구의 체성)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경증으로, 극중죄를 범한 비구를 오도사문이라고 해야 함에도 계경에서는 밀의(密意)로서 “필추가 아니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오로지 승의에 근거하여 ‘필추가 아니다’고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그러한 보특가라를 [다른 곳에서는] 오도사문(汚道沙門)이라 이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견]도를 증득한 후에 더러워진 것이 아니거늘 어떻게 [다음과 같은] 경주(經主)의 해석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이러한 [경]설이 있을지라도 그(즉 오도사문)는 오로지 여타의 사문의 모습만을 띠고 있기 때문에 ‘사문’이라 이름한 것일 뿐이니, 이는 마치 ‘불에 탄 목재’ ‘거짓 앵무새 부리’ ‘마른 못’ ‘썩은 종자’ ‘불 바퀴[火輪]’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58)
그러나 이는 다만 [그럴듯한] 말일뿐이니, 인용한 온갖 비유는 모두 어떠한 [논증의] 공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온갖 목재로서 불에 조금 태워진 것을 세간에서는 ‘불에 탄 목재’라고 말하지만, 완전히 타 재가 된 것은 ‘불에 탄 목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완전히 탄 것이든, 일부가 탄 것이든 두 가지를 모두 ‘불에 탄 목재’라고 말한다면, 비유와 [비유가 지시하는] 법이 확정되지 않아 비유는 비유되어 진 것에 대해 어떠한 논증의 공덕도 없다.59)
[또한] 마른 못 중에도 약간의 물이 있을 수 있지만 다만 못으로서의 공용이 없기 때문에 ‘마른 못’이라고 말한 것일 뿐이다. 설혹 물이 완전히 없을지라도 역시 ‘마른 못’이라고 이름한다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범위가] 확정되어 있지 않아 [극중죄를 범한 필추는 필추가 아니라는 주장을] 논증하는데 어떠한 공능도 없는 것이다.60)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썩은 종자’와 ‘죽은 사람’의 경우에 대해서도 이미 부정한 셈이다. 이를테면 비록 종자로서의 약간의 공능을 가졌을지라도 세간에서는 역시 그것을 ‘썩은 종자’라고 말한다. 혹은 비록 부패하지 않았을지라도 [싹을 틔울 수 있는] 공능이 손상되어 더 이상 싹을 틔울 수 없는 것도 역시 ‘썩은 종자’라고 말한다. 또한 죽음과 동일한 법을 가진 이에 대해서도 역시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니, 그래서 계경에서는 “방일한 사람은 늘 죽어있는 자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 앵무새 부리’라고 하거나 ‘불 바퀴’라는 두 가지 비유도 다 “사문에는 네 가지가 있을 뿐 더 이상 다섯 번째는 없다”고 한 경설에 위배된다.61) 만약 오로지 형상만으로 사문이라 이름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세상의 어떤 사람이 모름지기 사문의 모양새를 하고서 교만하게 방편을 설하여 사문의 흉내를 낼 경우에도 마땅히 사문이라 이름해야 할 것이며, [계경에서는] 그러한 이를 다섯 번째 [사문]이라고 설하였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거짓 앵무새 부리’나 ‘불 바퀴’를 [실제의] 부리나 바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여타의 모양새도 실제와 같지 않을뿐더러 부리나 바퀴는 그것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의 흉내를 내는 이를 다섯 번째 [사문]으로 설정하였어야 하지만, “[사문은] 네 가지로 다섯 번째는 없다”고 설하였으니, 이와 같은 모양새의 사문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인용한 온갖 비유는 모두 [극중죄를 범한 필추는 출가계를 버리게 된다는 주장을] 논증하는데 어떠한 공능도 없는 것이다.
또한 경주(經主)는 부처님이 이와 같은 뜻으로 설하였음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네 가지 중죄를 범한 자는] 필추라고도 말할 수 없고, 사문이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석가의 제자도 아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62)
어찌 누차에 걸쳐 자세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권유하지 않았던가? 어찌 한 가지 경문에 따라 그토록 완고히 주장하는 것인가?
또한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었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사문(즉 중죄를 범한 사문)을 [다른 곳에서는] 오도사문(汚道沙門)이라 이름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오로지 승의필추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서 ‘필추가 아니다’는 따위로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문도] 일체의 율의를 단박에 버리는 것이 아니며, [그럴 때] ‘필추가 아니다’고 말한 이치는 지극히 잘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문은] 오로지 여타의 사문의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문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는 마치 불에 탄 목재나 앵무새의 부리 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함은 이치상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세존께서는 “그러한 이는 마땅히 범계필추(犯戒苾芻)나 악필추(惡苾芻)라고 말해야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이는 일체의 율의를 단박에 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한 이는] 다만 ‘시라를 갖지 않은 이[無尸羅]’ 등으로 말했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범계필추’나 ‘악필추’라는 말로 나타내었던 것인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상좌(上座)는 이와 같이 힐난하고 있다.
“만약 [일체의 율의를 단박에 버린 이를 다만 ‘시라를] 갖지 않은 이’라고 말할 경우, 어떠한 시라를 갖지 않았다는 것인가? ‘시라’라고 하는 말은 역시 또한 자주 익힌 선계(善戒)와 악계(惡戒)를 의미하는 것으로, 외도 역시 ‘이것은 선한 시라이다’거나 ‘이것은 악한 시라이다’고 말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으니, 이와 같이 [‘범계필추’나 ‘악필추’로] 설한 것이 어찌 이치에 위배된다고 하겠는가?”63)
그러한 이를 마땅히 ‘시라를 갖지 않은 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일체의 모든 이들이 익히는 시라이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이를 ‘시라를 갖지 않은 이’라고 말하였을 경우, 그러한 이는 정계(淨戒)의 시라를 결여한 자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의 힐난에는 깊은 이치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묻고 답하고 있다.
“만약 중죄를 범한 이를 필추가 아니라고 한다면, 마땅히 [중죄를 범한 이로서] 학처를 수여할 필추는 아무도 없어야 할 것이다.64)
[계경에서는] 중죄를 범한 이가 모두 타승죄(他勝罪)를 성취한다고는 설하지 않았으며, 다만 타승죄를 성취한 자만이 결정코 필추가 아니라고 설하였을 뿐이다.”65)
대법(對法)의 모든 논사라면 어찌 마땅히 말하지 않겠는가? 경부(經部)는 결정코 지극히 잘못 해석한 사람들[兇勃人]이라고.
무엇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인가?
이를테면 [그들은] “중죄를 범한 자라고 할지라도 타승죄를 성취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설하였지만, 세존께서는 “네 가지 중죄를 범한 자는 필추라고 이름하지 않으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이는 부장심(覆藏心)에 머문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필추 등이 아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중죄를 범한 필추는 필추로서의 뛰어난 공능을 갖지 않았을 뿐으로, [그들에 대해] ‘필추 등이 아니다’고 말한 것은 일체의 율의를 단박에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나라(카슈미르)의 모든 논사들은 “중죄를 범한 모든 이로서 필추 아닌 이가 없다”고는 설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 범하지 않은] 그 밖의 다른 계는 지니고 있으니, 일찍이 수득하였던 일체의 율의 중 한 가지를 범할 때 그 밖의 것도 단박에 버리는 것은 아니다”고 설할 뿐이니, 그대의 종의에서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에 대해 설한 것과 같다.66)
경주는 여기서 정리(正理)를 배척하고자 하여 [이같이] 말하였다.
“저들(비바사사)이 설한 ‘하나의 극단적인 죄[一邊, 즉 4근본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일체의 율의를 모두 버리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 말은67) 바로 대사(大師, 즉 세존)를 힐난하는 것이니, 대사께서는 거기서 이와 같은 비유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라수(多羅樹)의 위 둥치[頭]를 잘라내게 되면 필시 더 이상 생장하여 광대해지지 못하는 것처럼 [필추 등이 중죄를 범하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즉 이러한 비유의 뜻은 한 가지 중죄를 범할 때 그 밖의 다른 계도 필시 더 이상 생장하여 광대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계행의 근본[戒根]이 이미 끊어졌으면 이치상 [일체의 율의를] 모두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68)
그러나 그는 비유의 뜻에 대해 능히 잘 해석하지 못하였으니, 이러한 비유는 다만 그 밖의 다른 [계(戒)로의] 생장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비유는 마땅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같은 비유의 뜻을 분명하게 관찰하였다. 이를테면 [네 가지 중죄] 이외 다른 학처는 그러한 [다라수의] 가지나 잎과 같아서 비록 [그것을] 어길지라도 다른 율의를 획득할 수 있지만, 네 가지 중죄는 [다라수의] 위 둥치와 같아서 만약 그 중의 한 가지라도 범하게 되면 필시 다시는 그 밖의 다른 율의를 획득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결정코 견도 등에 드는 일도 없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시라에 의지할 때 비로소 능히 수승한 지관(止觀)으로 나아가 닦을 수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비유에 대한 해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그대가 종의로 삼는 바는 [무엇인가]? 네 가지 중죄의 학처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다라수 위 둥치와 같다는 것인가, 하나의 다라수 위 둥치가 [각기] 하나의 학처에 비유된다는 것인가? 만약 네 가지 학처를 전체적으로 하나의 [다라수] 위 둥치에 비유한 것이라면, 마땅히 [네 가지 학처 중] 한 가지를 범할 때 일체의 학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일부의 다라수 위 둥치를 자를지라도 그 밖의 위 둥치는 방해받는 일없이 생장하는 것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의 학처가 하나의 다라수 위 둥치와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한 가지 학처를 범할 때 일체의 학처를 버리는 것이 아니니, 하나의 다라수 위 둥치를 자를지라도 그 밖의 다른 위 둥치는 이에 방해받지 않고 생장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
앞에서 무엇을 설하였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여기에 어떠한 이치가 있어 한 가지 중죄를 범함에 따라 [일체의] 율의를 단박에 버린다는 것인가?69) 나머지 세 가지는 지키고 있기에 일체[의 율의]를 버리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마치 다라수 위 둥치 중의 하나를 자를지라도 그 밖의 나머지는 존재하는 것과 같다. 이미 세간의 다라수 위 둥치의 일부분을 자를지라도 그 밖의 나머지 부분은 여전히 생장하는 것을 관찰하였고, 네 가지 중죄는 전체적으로 다라수의 위 둥치와 같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네 가지 중죄 중] 한 가지를 범하더라도 나머지 세 가지는 손상되는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온갖 다라수의 하나의 위 둥치가 잘려지면 한 그루만 생장하지 않을 뿐 그 밖의 나머지 그루는 그렇지 않지만, 그대는 [네 가지 극중한] 시라 중 하나의 상속이 끊어지면 다른 시라의 상속도 역시 끊어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다라수의] 비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상좌(上座)가 설정한 비유도 역시 부정될 수 있으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나무는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 만약 뿌리가 잘려지면 그 모두가 말라 죽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계(戒)의 근본(4바라이) 중의 하나를 범하게 되면 바로 일체의 율의를 단박에 허물게 된다.”
누가 여기서 그 밖의 계가 허물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던가? [네 가지 근본 계 중] 한 가지를 범하면 그 밖의 나머지 계도 수승한 공능을 갖지 않는다고 이미 논설하였다. 즉 [그러한 이는] 필시 능히 견도 등에 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같은 비유에 근거할지라도 [일체의] 율의를 상실하는 것은 아니니, 세간에서도 혹 어떤 나무는 네 갈래의 뿌리가 가지런하게 깊고도 견고하게 뻗어 내렸으면 하나의 뿌리를 자를지라도 [나무의] 모든 부분이 말라죽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부분만이 손상되듯이, 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별도의 다른 나무에 근거하여 논의할지라도 앞의 경우에 준하여 말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설정한 비유도 입증해야할 사실에 대해 어떠한 공능도 없는 것이다.
경주(經主)는 이러한 사실(극중죄 중의 한 가지를 범하더라도 일체의 율의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이같이 설하였다.
“이같이 아무런 이익도 없는[無義] 이(즉 극중죄 중의 한가지를 범한 이)를 애써 구원하여 뭣할 것인가? 그럼에도 만약 이와 같은 자에게도 여전히 필추의 체성이 존재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이와 같은 유형의 필추에 대해 귀의하고 예배해야 할 것이다.”70)
그러나 이러한 언설은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는 것으로, 부처님께서도 그들을 역시 사문이라 설하였으니, 비록 오도사문이라는 명칭을 획득할지라도 시라를 갖기 때문이다. 경주는 이에 대해 마땅히 이같이 설하였어야 하였다. “이같이 아무런 이익도 없는 이를 어찌 애써 구원할 것인가? 만약 이와 같은 자에게도 여전히 사문의 체성이 존재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이와 같은 유형의 사문에 대해 귀의하고 예배해야 할 것이다.”71)
그(오도사문) 밖의 다른 상(相)의 사문을 ‘필추 등이 아니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파한 바와 같으며, 역시 이미 해석하여 회통시켰으니, 이러한 이치에 따라 그가 인용한 그 밖의 온갖 성교에도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만한 공능이 없다는 사실을 성취하여 드러낸 셈이다.
또한 그는 오로지 [네 가지 극중죄 중] 한 가지만 범할지라도 일체[의 율의]를 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할만한 어떠한 정리(正理)도 능히 설하지 못하였다. 또한 아무런 이익도 없는[無義] 이를 헛되이 따지고 헤아려, 진실로 그들도 율의를 지녔음에도 ‘이미 [일체의 율의를] 버렸다’고 강변하여 이미 [한 가지 계를] 범한 자로 하여금 마음대로 악을 짓게 하였으니, 어찌 [정]법을 지녀 유정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중죄를 범한 이에게도 그 밖의 계(율의)가 남아있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필추중(衆) 밖으로 배척하여 쫓아내는 것인가?(경부의 힐난)
이와 같이 [성도(聖道)의] 세용(勢用)을 갖지 않은 이가 청정한 [필추]중 중에 남아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신속하게 배척하여 [쫓아내는] 것이 차라리 좋은 일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중죄를 범함에 따라 [일체의] 율의를 버리게 된다면, 마땅히 이형(二形)이 생겨날 때 능히 [일체의 율의를]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니,72) 어두움과 밝음의 관계처럼 [법]성(法性)이 상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율의를 범하였을 때에도 마땅히 다시 받을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고, 무참(無慚)과 무괴(無愧)도 시라를 영원히 장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것을 버린 이는 [다시는] 계를 받을 수 없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73)
따라서 중죄는 [그 밖의 다른] 계와 함께 획득될 수 있지만, 시라를 더럽힘으로 말미암아 다시 받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하니, 이미 [성도에 대한] 뛰어난 공용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배척하여 쫓아내야 하는 것이다.
상좌(上座)는 이에 대해 다시 여러 가지 다수의 말을 하였지만, 앞서 [논설한] 정리와 성교에 따라 이미 대체적으로 비판 부정하였으니, 여기서는 문장이 번잡해질까 염려되어 별도로 탄핵하여 물리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견고한 번뇌가 마음을 얽어매어 자신의 논(論)에서 글을 짓고 송(頌)을 짓는 중에 추악(麤惡)한 말을 설하여 성현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까닭 없이 스스로를 상하게 하였으니, 심히 연민할만한 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여러 성자(카슈미르 비바사사)들은 이미 혹업(惑業)을 제거하였을 뿐더러 제정한 법언(法言)도 참된 정리와 성교에 근거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극히 흉악한 자[兇勃]로서 [교]법을 비방하고 [그것을 설한] 이[人]를 훼손하여 심대한 죄를 지었으니, 당래 지극한 괴로움을 초래하게 될 것인데, 내 어찌 그에 대해 다시 앙갚음의 말을 베풀 것인가? 오로지 당래 그 같은 악업에 과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2) 정려율의와 무루율의의 버림
정려와 무루의 두 가지 율의는 어떻게 할 때 마땅히 버려지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려에서 생겨난 선법을 버리는 것은
지(地)를 바꾸고 물러나는 것 등에 의해서이며
성법(聖法)을 버리는 것은 성과(聖果)를 획득하거나
근을 단련하거나 물러나는 것에 의해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정려지에 계속(繫屬)되는 선법은 두 가지 인연에 의해 버리게 된다. 즉 첫째는 지(地)를 바꿈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하지로부터] 상지에 태어나거나 [상지로부터 몰하여] 하지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74) 둘째는 물러남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이미 획득한] 뛰어난 선정[勝定]에서 물러날 때가 그러하다. 그리고 중동분(衆同分)을 버리거나 이염(離染)할 때에도 역시 버리게 되는데, 난법(煖法) 등과 [순]퇴분정(順退分定)의 경우도 여기에 포섭시키기 위해 [본송에서] 다시 ‘등’이라는 말을 설하게 된 것으로,75) 경주(經主)의 해석 중에서는 마땅히 ‘이염’이라는 말을 더하였어야 하였다.76)
그리고 지(地)를 바꾸는 것과 물러남에 의해, 그리고 이염 등 세 가지 인연에 의해 색계 선법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색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77)
무루의 선법을 버리는 것은 세 종류의 인연에 의해서이다. 첫째는 성과(聖果)를 획득함에 의해 이전의 성도를 모두 버리게 된다.78) 둘째는 근을 단련함[練根]에 의해 [이전의] 둔근(鈍根)의 도를 버리게 된다. 셋째는 물러나 상실함[退失]에 의해 온갖 수승한 도를 버리게 되는데, 이러한 도는 혹 어떤 경우에는 과도(果道)에, 혹 어떤 경우에는 승과도(勝果道)에 포섭된다.79)
나아가 경주(經主)는 이러한 [세 종류의 인연을] 마땅히 두 가지 인연으로 설하였어야 했으니, ‘성과를 획득한다[得果]’는 말에는 ‘근을 단련한다[練根]’는 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근을 단련하는 상태에서는 반드시 다시 성과를 획득하여 [이전의] 둔근과 과도와 승과도를 버리기 때문이다.80)
[이제] 내가 이에 대해 간략하게 분별해 보면 [이와 같다]. 만약 견도(見道, 즉 예류향의 도, 勝果道)나 도류지(道類智, 즉 예류과의 도, 果道)를 버렸다면, 이는 다만 성과를 획득함에 의한 것이지 물러남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81) 그러나 만약 부동법(不動法)의 무학과 함께 하는 무소여(無所餘)의 무루[율의]의 경우라면, 두 가지 종류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82)
3) 불율의의 버림
이와 같이 온갖 율의를 버리는 인연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불율의는 어떻게 버려지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계를 버리는 것은, 죽음에 의해
계를 획득하거나 이형이 생겨남에 의해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모든 불율의는 세 가지 인연에 의해 버리게 된다. 첫째는 죽음에 의해서이니, 소의신을 버렸기 때문이다.83) 둘째는 계를 획득함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별해탈율의를 수득(受得)하거나, 혹은 정려율의를 획득함에 따라 악계는 바로 버려지는 것으로, [계 즉 별해탈율의는] 대치의 힘이 뛰어나 불율의를 버리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상속신에 이형(二形, 남여 양성)이 동시에 생겨남에 의해서이니, 그 때에는 소의신이 변이하기 때문이다.
악계에 머무는 자가 비록 혹 어느 때 [악업을 짓지 않으려는] 선한 의요(意樂)에 의해 칼이나 그물 등을 버렸을지라도, 만약 율의(계)를 획득하지 않았다면 끝내 악계를 버린 것이 아니니, 지금 바로 보더라도 비록 병을 일으키는 온갖 인연을 피하였을지라도 양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병을 끝내 치유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율의를 지닌 자가 근주계를 받고 밤이 다하여 율의를 버리게 되었을 때, [다시] 불율의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처중(處中, 율의도 아니고 불율의도 아닌 것)의 [무표를 획득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다시] 불율의를 획득하니, 악한 아세야를 영원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뜨거운 쇳덩이를 가만히 놓아두면 붉은 색이 없어지고 푸른색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84)
또 다른 유여사는 말하기를, “만약 다시 짓지 않는다면 그로 하여금 불율의를 획득하게 하는 인연은 없으니, 불율의는 표업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 중에서] 앞의 설이 이치에 맞는 것이니, 앞서 [근주]계를 받을 때 악한 아세야를 영원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전의 표업에 근거하여 악계를 다시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4) 처중(處中) 무표의 버림
다시 처중(處中)의 무표는 어떻게 버려지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처중을 버리는 것은, 받으려는 마음과 세력과
작업과 사물과 목숨과 근(根)이 끊어짐에 의해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처중의 무표는 여섯 가지 인연에 의해 버리게 된다.
첫째는 받으려는 마음이 단괴(斷壞)됨으로 말미암아 버리게 된다. 이를테면 일찍이 ‘항상 일정한 시간에 제다(制多, caitya, 塔廟를 말함)를 공경하여 예배하고 찬송하리라’고 맹서하고서 그것(처중의 무표)을 수지하였지만, 이제 ‘이후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때 그 같은 [앞서의] 아세야는 바로 종식되니, 그는 본래의 의요(意樂)를 버렸기 때문이다. 혹은 다시 별도로 지은 의요의 세력이 보다 강성해져 일찍이 현행하였던 업과 서로 모순될 때 [그러한 제다에 공경 예배하는] 사업(事業)의 본래 의요가 종식되고 무표는 바로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세력이 단괴됨으로 말미암아 버리게 된다. 이를테면 [처중의 무표는] 청정한 믿음과 번뇌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인기된 것으로, 그러한 두 가지의 세력이 단괴될 때 그것의 무표는 바로 버려지니, 시위를 떠난 화살이나 옹기장이가 돌리는 물레의 바퀴와 같다.85) 그래서 궤범사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처중의 무표는] 등기(等起)의 힘에 의해 인발(引發)된 것이기 때문에 비록 가행이나 아세야를 버릴지라도 그것의 무표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수전할 수 있으며, 나아가 지극히 맹리한 번뇌[纏]를 일으켜 짐승을 타격하는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혹은 일찍이 기한을 정하여 맹서하였을 경우, 그러한 시간이 경과하였다면, 이제 기한동안의 세력이 다하여 그것의 무표는 바로 끊어지게 된다.”
셋째는 작업(作業)이 단괴됨으로 말미암아 버리게 된다. 이는 즉 비록 근본[업도]를 수지하려는 마음(예컨대 제다에 공양하려는 선한 의요)을 버리지 않았을지라도 더 이상 수지하려고 하였던 바에 대해 업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86) 다만 잊고서 짓지 않은 것은 예외로 한다. 즉 이러한 무표는 가행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가행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것의 무표는 바로 버려지게 되는 것이다.
넷째는 사물(事物)이 단괴됨으로 말미암아 버리게 된다. [여기서 사물이란] 시여된 제다(制多, 탑묘)나 원림(園林, 절), [짐승을 잡으려고] 설치된 덫이나 그물 등의 사물을 말하는 것으로, 본래 그 같은 사물로 말미암아 [처중인 선악의] 무표가 인기되어 낳아졌기 때문에 그러한 사물이 허물어질 때 [처중의] 무표는 바로 버려지게 되는 것이다.87)
다섯째는 수명이 단괴됨으로 말미암아 버리게 되니, 이를테면 [무표의] 의지(依止)가 되었던 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무표의] 소의가 된 근(根)이 단괴됨으로 말미암아 버리게 된다. 이를테면 가행을 일으킨 선ㆍ악의 근을 끊을 때 그러한 근에 의해 인기된 각각의 무표를 버리게 된다. 그러나 선근을 끊지 않았을지라도 정려를 획득할 때 [선근에 의해 인기된 무표는] 바야흐로 버려지게 되니, 처중인 선ㆍ악의 무표는 [정려율의의 무표에 비해] 이열(羸劣)하기 때문이다. 즉 [정려율의의] 가행을 일으킬 때 바로 처중인 선ㆍ악의 무표를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어찌하여 경주(經主)는 이러한 [처중의 무표가 버려지는 인연]에 대해 설하면서 여섯 번째로 ‘선근(善根)을 단괴함으로 [말미암아 버리게 된다]’고 말하였던 것인가?88) 만약 이와 같이 설할 경우 선근을 끊는 가행도 역시 선근을 끊은 것이라고 하여 여섯 번째 인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정려의 가행도 역시 정려라고 하여 [처중의 무표를 버리게 되는] 일곱 번째 인연이 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정려의 가행 중에서도 악의 무표를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송에서] 말한 ‘근’은 선근과 악근 모두와 통하며, 또한 거기서 설한 ‘끊어짐’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무표의] 가행(즉 선ㆍ악근)을 끊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무표의] 소의가 된 근(根)이 단괴됨으로 말미암아’는 여섯 번째 인연이 될 수 있으니, 본송을 이같이 해석할 때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5) 비색(非色)의 선ㆍ염오법의 버림
다시 욕계 비색(非色)의 선법이나 그 밖의 다른 일체의 비색의 염오법은 어떻게 버려지는 것인가?89)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 비색의 선법을 버리는 것은
근(根)이 끊어지고 상계에 태어남에 의해서이며
대치도가 생겨나는 것에 의해
온갖 비색의 염법을 버리게 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일체의 비색(非色)의 선법은 두 가지 인연에 의해 버리게 되니, 첫째는 선근을 끊는 것이며, 둘째는 상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선법은 염오법을 떠나는 것에 의해서도 역시 버려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예컨대 우근(憂根) 등과 같은 비색의 선법이 그러하다.
3계의 일체의 비색의 염오법은 한 가지 인연에 의해 버리게 되니, 이를테면 대치도를 일으킬 때 [버려진다]. 즉 만약 이와 같은 품류의 번뇌를 능히 끊을 만한 도가 생겨나면, 이러한 품류의 번뇌나 그 조반(助伴)을 바로 버리게 되는 것이다.
3.3. 선ㆍ악의 율의를 성취하는 유정
그렇다면 어떠한 유정에게 선ㆍ악의 율의가 존재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계는 인취에만 존재하지만, 북구로주와
두 가지 황문(黃門)과 이형자(二形者)는 제외되며
율의는 역시 천취(天趣)에도 존재하지만
오로지 인간만이 세 종류 모두를 갖추고 있다.
욕계천과 색계에 태어날 때
정려생율의를 지니며
무루율의는 아울러 무색계에도 존재하지만
중간정과 무상정은 제외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불율의는 오로지 인취(人趣)에만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로지 북구로주를 제외한 세 주(남섬부ㆍ동승신ㆍ서우화주)에만 존재할 뿐이며, 세 주 중에서도 다시 선체(扇搋)나 반택가(半擇迦),90) 이형(二形)을 갖춘 자는 제외된다.
나아가 율의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이를테면 인취 중에서는 앞에서 제외한 것을 제외하며, 아울러 천취 중에도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율의는 두 취(趣)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선체 등이 소유한 상속신은 율의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인가?
경과 율에서 진실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대명(大名, Mahānāma, 摩訶男)에게 고하기를, 집에 머무는 백의(白衣)의 남자이면서 남근을 성취한 온갖 유정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였던 것이다.91) 또한 비나야(毘奈耶) 중에서도 역시 “그대는 마땅히 이 같은 색(즉 선체 등)의 종류의 사람을 제외해야 한다”고 설하였다.92) 그래서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율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치에서 그들에게는 율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두 가지 소의(즉 남ㆍ여근)에 근거하여 일어난 번뇌가 하나의 상속 중에서 함께 증대하여 두드러졌기[增上] 때문이며, 올바른 사택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탐욕을 일으켜 상속할 때 능히 그것을 굴복시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계를 [수지할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맹리(猛利)한 참괴심(慚愧心)이 존재하여 현전하는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만이 비로소 능히 계의 의지(依止)가 되지만, 그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참괴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율의의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들에게 악계(불율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들의 상속에 존재하는 악한 아세야(阿世耶)는 그 성질이 이열(羸劣)하기 때문이며, 견고하게 지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선체 등에는 음애(婬愛)가 다수 현행하면 잠시라도 그것을 굴복시켜 제거할만한 대치도가 없기 때문에 맹리한 [음]애를 자주 일으키는 자들도 능히 유정들에 대해 지극히 맹리한 악의 의요를 일으켜 그것으로 하여금 지금 바로 나타나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설혹 [맹리한 악의 의요를] 잠시 낳을 수 있을지라도 역시 견고하게 지속하지 않으니, 신체적으로 [그것을 행할만한] 능력이 없을뿐더러 정신적으로도 역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종류의 몸에는 역시 악계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아 그들의 몸에는 선한 아세야도 저열할 뿐더러 견고하게 지속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강성하고도 견고하게 지속하는 악심(惡心)이 있어야 비로소 악계가 있을 수 있으며, 강성하고도 견고하게 지속하는 선심(善心)이 있어야 비로소 선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두 가지가 모두 결여되었기 때문에 두 가지의 계를 모두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형(二形)이 생겨난 자는 탐욕이 지극히 증대하여 강성[增上]하기 때문에 선계(즉 율의)와 악계(즉 불율의)의 두 근거를 버리게 된 것이지만, 선체(즉 無根) 등을 성취한 이들은 선ㆍ악의 율의를 버린 것이 아니니, 두 가지의 근거를 일으킬지라도 탐욕이 극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이미 북구로주[에 선악의 율의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해석한 셈이다. 즉 두 가지의 아세야가 맹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삼마지(선정)에 따라 [율의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선ㆍ악의 율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악취는 능히 사정(邪正)의 이치를 깨달을 수 없으며, 또한 맹리한 참괴심의 소의도 될 수 없다. 요컨대 이러한 참괴심과 상응하거나 손괴(損壞)하려는 자라야 비로소 선악의 율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악취 중에는 선ㆍ악의 율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선체 등은 마치 짠 갯벌과 같아서 능히 선계도 악계도 생겨날 수 없으니, 세간을 현견하건대 짠 갯벌에는 이로운 곡식도 해로운 잡초도 능히 자라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계경 중에서 “난생(卵生)인 용은 반월(半月) 팔일마다 용궁으로부터 인간세계로 나와 8지(支)의 근주 재계(齋戒)를 받기 희구한다.”고 말한 것인가?
이는 묘행(妙行)을 획득하는 것일 뿐 율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93) 그렇기 때문에 율의는 오로지 인취(人趣)과 천취(天趣)에만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인취 중에만 세 종류의 율의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테면 별해탈과 정려와 무루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만약 욕계 천취에 태어나거나 색계에 태어난 이라면 그들은 모두 정려율의를 지닐 수 있지만, 무상천(無想天)에서는 다만 [다른 지에서 획득한 것을] 성취할 수 있을 뿐이며, 무색계에 태어난 경우에도 그것(정려율의)은 필시 존재하지 않는다.94)
그러나 무루율의는 무색계에도 역시 존재한다. 즉 욕계천 중에 태어나 머물거나, 색계 중에 태어난 이로서 중간정(中間定)과 무상천을 제외한 모든 이는 무루율의를 지닐 수 있지만,95) 무색계 중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오로지 [하계의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 뿐이니, 거기에는 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필시 무루율의를 직접적으로 바로 일으킬 수 없으며, 상계에 태어나면 하계에서 [획득한 바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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