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선녀로 변신한 중국과 한국의 비천상
2,000여 년 전 불교가 인도로부터 동점(東漸)의 길을 따라 중국에 전래될 때 비천도 그 뒤를 따랐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둔황석굴의 벽화를 보면 비천과 중국 고유의 신선들이 한 화면에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 둔황석굴 제305굴 벽화에는 불교의 제석천(帝釋天)에 비견되는 동왕공(東王公)과 그의 비(妃)인 서왕모(西王母)를 호위하며 하늘을 나는 수많은 비천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외래의 불교사상과 중국 고유의 신선사상이 병존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둔황석굴 벽화에 그려진 비천은 이미 인도신화의 건달바나 긴나라의 괴이한 형상에서 벗어나 도교설화의 선녀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해 있다. 상반신은 나신이고 하반신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속옷 차림이어서 신체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표정은 요염하며 손의 동작은 유연하고 섬세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이미 페르시아 등 서역의 귀족적인 풍모가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중국 둔황석굴 벽화의 비천상
가운데의 동왕공을 수많은 비천들이 호위하며 하늘을 날고 있다. 중국 고유의 신선사상과 외래의 불교사상이 병존하고 있는 그림이다.
중국 비천상의 도상적인 특징은 양 팔뚝에 표대(飄帶) 또는 박대(博帶)라고 하는 넓고 긴 띠를 걸치고 있다는 것이다. 바람을 타고 휘날리고 있는 이 띠가 바로 허공 이동의 수단이다. 양팔 사이에 걸친 표대의 중간 부분은 날아올라 머리 위에서 원형을 그리고 있으며, 양끝은 이동하는 반대 방향으로 바람결을 따라 흐르면서 경쾌하고 율동적인 곡선을 연출하고 있다.

상원사 범종의 비천상
허공에서 수공후와 생황을 연주하고 있는 주악비천상으로, 우리나라 범종에 새겨진 비천상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중국에서 매력적인 선녀의 모습으로 변신한 비천상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불교와 함께 수입되었다. 고구려 고분에서부터 시작하여 불교미술에 수용된 비천상은 약간의 양식 변천을 거치면서 한국적인 비천상으로 정착되었다. 현존하는 비천상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을 꼽는다면 단연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 범종의 비천상일 것이다.
상원사 범종은 725년에 제작된 신라의 종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종이다. 국보 제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보존 차원에서 사용하지 않는 대신 복제품을 만들어놓고 예불 시간에 맞추어 타종하고 있다. 상원사 범종의 규모는 별로 크지 않지만, 수많은 비천상이 종 표면의 요소요소에 새겨져 있어 비천의 군무(群舞)를 연상케 한다. 특히 종복(鐘腹)의 앞뒤에 각각 새겨진 한 쌍의 비천상은 매우 정교하여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종에 새겨진 비천은 각기 무릎을 세우고 허공에 뜬 채 수공후(竪箜篌)와 생황(笙簧)을 연주하고 있는데, 상승 기류를 타고 위쪽으로 휘날리는 천의 자락이 매우 가볍고 유려한 느낌을 준다. 천의의 띠 끝부분은 인동(忍冬) 모양을 하고 있어 장식적인 효과를 한층 더해준다. 그런데 비천이 연주하고 있는 수공후는 우리 고유의 악기가 아니라 서역 계통의 악기이다. 이렇듯 상원사 범종에 수공후가 등장하는 것은 비천상의 형식이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 종복의 비천상만 보고 자리를 뜨는 경우가 많지만 종 표면의 도처에 숨어 있는 비천상도 그냥 지나쳐볼 것이 아니다. 상대(上帶)에는 반달 모양의 권역(圈域) 속에 피리와 쟁(箏)을 연주하는 2구의 작은 비천상이 종의 둘레를 돌아가며 촘촘히 새겨져 있고, 하대(下帶)에도 피리 등의 취악기와 장구, 비파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유곽(乳廓)의 띠 아래 부분과 좌우에도 생황과 요고(腰鼓)를 가진 비천상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모든 비천상들이 동시에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면 실로 환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실상사 범종의 비천상
상원사 범종의 비천상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비천상이다. 결가부좌한 비천이 피리와 생황을 연주하고 있다.
상원사 범종의 비천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실상사 범종에 새겨진 비천상이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실상사 범종은 1967년 실상사 경내에서 파편으로 출토되었는데, 새겨져 있는 한 쌍의 비천상이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다.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종의 파편을 보면, 결가부좌한 한 쌍의 주악비천상이 서로 마주 보며 피리와 생황을 연주하고 있다. 둘 다 보관(寶冠)과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를 갖추었는데, 상반신은 나신으로 천의를 휘날리고 있으며 천의 사이에는 각 2조의 영락(瓔珞 ; 구슬 장식)이 있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신라 선림원 종의 비천상 또한 유명하다. 이 비천상은 구름 위의 연화좌에 앉아 천의 자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하늘을 날고 있다. 그러나 상원사와 실상사 범종의 비천상에서 볼 수 있는 영락은 찾아볼 수 없으며, 향(向) 좌측의 비천은 횡적(橫笛)을 불고 있고, 우측은 양손을 크게 벌려 요고를 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범종의 비천상은 모두 주악비천상이지만 국립경주박물관 뜰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은 공양비천상이다. 보상화(寶相華)가 구름같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구름 위에 있는 연화좌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천상의 바람에 옷자락과 영락을 휘날리면서 두 손 모아 공양하는 자태이다. 이 종에 공양비천상을 새긴 것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덕대왕신종의 공양비천상연화좌에 앉아 두 손을 모아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성덕대왕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만든 종이기 때문에 공양비천상을 새겼다.

용주사 범종의 공양비천상
비천상의 머리 위로 흩날리며 무중력 상태를 느끼게 하는 표대가 인상적이다.

송광사 대웅전의 비천상
목조 조각품으로는 화성 용주사 대웅전 천장과 완주 송광사 대웅전 천장에 매달려 있는 비천상이 유명하다. 그밖에 연꽃봉오리를 들고 있는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등의 비천상과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의 비천상,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경복궁 소재)의 지붕돌 밑면에 새겨진 비천상, 경북대학교 박물관 석조부도의 비천상 등 적지 않은 비천상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영덕 장륙사 대웅전 천장의 비천상이 유명하다.

신륵사 보제존자석등의 비천상
석등의 화사석 8면에 하늘을 날며 공양하는 환상적인 모습의 비천상을 새겼다.
장륙사 대웅전 천장의 비천상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의 환상적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비천상은 표대라고 하는 넓고 긴 띠를 두르고 있는데, 하늘을 날 때 이 띠를 사용한다.
ⓒ 유남해
비천상의 아름다움과 그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