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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영농·생활수기 가작<일반부분> 파란만장한 나의 귀농일기 심경연 (49ㆍ경남 진주시 상평동)
올해로 결혼 28주년을 맞은 시골 아낙네입니다. 여고를 졸업하고 입사한 첫 직장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신입사원인 저를 틈틈이 도와주는 회사 선배였습니다. 그는 짧은 머리에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항상 웃고 있었습니다. 그 밤톨처럼 야무지고 단단한 모습이 제 가슴에 들어왔고 우리는 불 같은 사랑을 했습니다.
그는 “콩나물장사를 하더라도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업을 하자면 세무회계에 밝은 제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결혼자금으로 남편 고향에 있는 아주버님네 아래채에 작은 공장을 차렸습니다. 2년이 흘렀습니다. 공장은 남편의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 덕분에 그럭저럭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제가 한솥밥을 먹으며 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걸러 술을 마시는 아주버님은 매일같이 형님과 싸워 집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아주버님이 “내 집이니 당장 나가라”며 벼락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땐 주저앉아 마냥 울고만 싶었습니다. 할 수 없이 원래 있던 빚도 다 갚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부채를 가득 안고 공장 터를 마련해 기계를 옮겼습니다. 그렇게 새 공장 자리를 잡았지만 정작 우리가 살 살림집은 형편없었습니다. 방문턱이 낮아서 방 안으로 빗물은 물론이고 거미·지네·뱀 같은 곤충들이 들어와 뉘어놓은 갓 돌 지난 아들을 괴롭혔습니다. 그 와중에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공장 기둥에 아들을 묶어놓고 일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만큼 아들에게 미안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열심히 영업하고 거래처도 늘리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과의 가격경쟁에서 밀려 주문량이 조금씩 줄더니 급기야 공장문을 닫게 됐습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몰라 아들딸만 끌어안고 멍하니 살다가, 아주버님네가 도시로 나가게 되는 바람에 우리는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공장을 처분해 대출도 다 갚지 못한 상태였고 1년을 빈손으로 마냥 놀았기에 살아갈 일이 걱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어차피 고향을 지키며 살 거라면 귀농해서 부지런한 농사꾼이 되자”고 제안했습니다. 사업할 땐 힘들어도 사모님 소리 들으면 어깨가 으쓱했는데 농사꾼의 아내가 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울적해졌습니다. 경험도 없이 농사지어서 아이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됐습니다. 귀농은 도중에 포기하면 안한 것만 못하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마음의 준비가 다 됐다며 시설하우스에서 고추농사도 짓고 나아가 마을이장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계획까지 번듯하게 세우고 공부하고 있는 남편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 없었기에 “당신이 앞에서 끌면 뒤에서 밀며 당신만을 믿고 따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농민신문>을 구독해 농사 관련 정보를 스크랩하며 공부했고, 모르는 것은 이웃에게 물어보러 다녔습니다. 남편은 영농후계자부터 가입하고 인근 대학에서 최고 영농과정을 밟으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사업을 완전히 접고 초보 농사꾼이 됐습니다. 처음엔 시설 원예작물인 고추농사를 지으며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눈만 뜨면 비닐하우스에서 살았습니다. 사랑과 정성을 쏟으니 농사가 잘됐고, 자연스럽게 수입도 늘어났습니다.
공장을 운영할 땐 약속어음에 시달렸는데 수확한 고추를 공동판매장에 갖다 내기만 하면 경매 후 바로 통장에 현금이 들어오는 게 무엇보다 좋았습니다. 매월 말일 거래처에 다니며 결제해달라고 굽실거리며 애걸복걸하지 않아도 돼서 더없이 좋았습니다.
농사에 재미를 붙이면서 남편은 마을이장까지 맡아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2006년 여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고추농사가 잘돼 홍초가 주렁주렁 매달린 그때, 태풍 ‘에위니아’가 한반도 남부지방을 강타한 것입니다. 태풍이 올라오기도 전에 비가 억수로 쏟아진 날 밤, 하천 제방이 터질 듯 강물이 갑자기 불어났습니다. 남편은 비를 맞으며 제방둑을 둘러보고 마을회관으로 나가 모두 힘을 모아 제방둑을 쌓아올려야 한다고 방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천둥·번개가 치는 칠흑 같은 밤에 마을주민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나와 제방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모두의 노력에도 퍼붓는 비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제방이 터졌고 누런 황토물이 범람해 들판은 거대한 호수가 됐습니다. 비닐하우스는 물에 잠겨 흔적도 없어졌고 전봇대 꼭대기만 간신히 보였습니다. 비닐하우스는 오뉴월 엿가락 늘어지듯 뒤엉켰고 떠밀려온 쓰레기더미와 온갖 오물들은 마을 전체를 쓰레기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애지중지 키웠던 작물은 모두 사라졌고 어디가 자신의 비닐하우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성공적이었던 첫 고추농사는 그렇게 한방에 무너져버렸습니다.
우리 농사를 걱정할 새도 없이 남편은 마을 복구작업에 뛰어다니느라 늘 온몸이 땀범벅이었고, 땀띠 때문에 따가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을이장네인 우리 집은 마을이 정리된 후에야 복구작업을 했습니다. 논엔 병해충이 가득했고 마을 소독과 병충해 방제로 여름 내내 농약 냄새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래도 힘을 합쳐 막혔던 배수로와 용수로를 뚫고 길도 정비하면서 마을은 조금씩 본모습을 찾아갔습니다.
그해 재해를 겪으면서 농사는 농부의 노력에 더해 자연이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욕심부리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우리 먹거리를 지킨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안타깝고 먹먹했던 그해 여름도 이제는 다 지난 일이 됐습니다. 그간 10년 가까이 시설하우스에서 고추를 재배하면서 억대 수입을 올렸고 올해 6월엔 농협의 ‘새농민상’도 받았습니다. 고품질 작물을 재배하며, 앞서가는 기술로 농가소득 증대에 이바지하는 신지식인 농민이 됐습니다.
시골에 온지 어느덧 20년이 넘은 지금, 흙과 함께한 세월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땅을 품고 하늘을 이고 사는 농부라는 직업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바람이 있다면 남편과 함께 새 생명을 키워내는 삶에 감사하며 가족·이웃과 행복을 꿈꾸는 뿌리 깊은 나무로 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