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바람이 불어 시를 쓴다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보리
환은유의 연쇄, 세속적 시의 탄생
『물고기 강의실』 강희안, 『천년의시작』刊
손남훈(문학평론가)
1. 매니악한 세속의 언어조립자
부품판에서 니퍼로 조심스럽게 부품들을 하나 둘씩 떼어내고, 떼어낼 때 생긴 게이트 자국을 가는 사포로 조심스럽게 문질러 없앤다. 부품들은 크기가 모두 제각각이고 모양도 서로 다르기에, 각 부품들이 어느 위치에 어떤 기능으로 작동하게끔 설계되어 있는지를 미리 가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낱 필요 없는 플라스틱 조각일 뿐이다. 하나씩 떼어낸 부품들을 조립설명서에 따라 서로 짝이 되도록 맞추어 조립하고, 그렇게 조립된 파츠를 다른 파츠와 조립하여 더 거대한 하나의 형체가 되게 할 때, 플라스틱 조각은 책상 한쪽에 근사하게 놓이게 될 장식품이 된다. 질료에서 형상으로 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존재론의 세속화된 버전. 소위 ‘프라모델’이라 불리는 플라스틱 조립 모형은 그렇게 탄생한다.
강희안에게 언어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한 작은 부품들이다. 각각의 부품들은 하나 이상의 짝들과 결합하며, 그렇게 결합된 짝은 또 다른 파츠들과 결합하여 하나의 행과 연, 나아가 시를 이룬다. 그러나 그것은 각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완성품’으로 수렴되는 플라스틱 모형 조립과정과 달리, 때로 하나 이상이자 미만이 되는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팔이 붙어야 할 자리에 다리파츠가 들러붙고, 다리가 붙어야 할 자리에 멋대로 머리파츠가 우겨 붙기도 한다. 몸통파츠를 다른 형식과 용도를 가진 모형이 되게도 하며, 팔․다리파츠만으로 하나의 유기적 모형이라 우기며 장식장에 진열하기도 한다. 조립설명서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독특한 상상력으로 매니악하게 프라모델(언어)을 조립하는 시인. 우리가 흔히 시에 붙여두는 ‘서정’이라는 수사로부터, 가장 ‘정상적인 것’이라고 가정하는 시적인 ‘사유―이미지’(들뢰즈)들로부터 철저하게 거리를 둠으로써 나름의 모형, 나름의 시편들을 기괴하리만치 새롭게 우리의 책상 앞에 놓아두는, 언어를 “전횡”하는 시인. 강희안이라는 시인―언어조립자로부터 우리가 만나는 시편은 그와 같이 초과와 미만 사이에서 길항하는 시적인 어떤 것들이다.
그 초과와 미만 사이의 길항을 필자는 ‘세속적’이라는 형용사로 바꾸어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뮤즈로부터 물려받은 언어의 신성한 권위를 부정하고, 기묘하게 조립할 수 있는 사물로서의 언어를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시적인 것’과 결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는 은폐된 신(神)―존재에 의한 받아쓰기도 아니고, 초월로 향하는 존재 양식의 몸부림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서정의 신성성을 여전히 언어로 육화하고 있으며 배분되지 않은 감각을 추앙하도록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노정한다. 하지만 강희안의 시는 감각되지 않은, 감각하지 못했던 언어를 배분함으로써 감각의 세속화를 이끌어 내려 한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서정들이 조율해 놓은 감각의 공리들에 비한다면 초과이거나 미만이다. 벼리고 다듬어 누구도 가 닿지 못하는 초극의 언어 대신, 존재 그 자체의 실재성을 지시하는 초과와 미만의 언어 전략이 그의 시를 서정으로부터 떼어내고 있다.
2. 서정과 은유의 공모
그의 시는 우선, 독백적 발화로서의 시적 주체와 그 권위를 무너뜨리는 전략을 세움으로써 기존의 서정 양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지휘자가 날렵한 젓가락 휘젓는 동안에도 구불구불 몸을 풀지 않았다 그는, 뽀글뽀글 물방울의 기포를 터뜨리는 충동에 시달렸다 객석에서도, 불의 심장을 사사롭게 필사하면서 야채의 면면을 되살린 것이다 지은이는, 관심의 눈길 거두며 퉁퉁 불어터진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는, 꼬들꼬들 꼬드르르 물이 벗어놓은 면발의 그림자나 데쳐놓기 일쑤였다 독자들까지, 어슷어슷 파의 편린과 고추의 추궁에 달걀을 깨뜨린 것이다 지휘자는, 종종 타는 갈증에 잠겨 요리 뜯고 조리 찔러야 생생 끓어올랐다 그의 발가락은, 희고 길지만 음색은 굵고 까다로운 편이다 마침내 관객들도, 냄비의 파열음과 비등점까지 거들떠들 지나치고 말았다
고객과 관객, 그리고 저자까지 주방에서 나무젓가락을 찢자 시장의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 「맛있는 라면 조리법」 전문
이 시는 서로 다른 주어들을 서로 다른 상황에 의한 혼합된 발화로 배치함으로써 기존의 서정이 흔히 보여주었던 서정적 화자의 권위를 무너뜨린다. 이는, ‘악단지휘―글쓰기―라면 요리’라는 서로 다른 상황을 동일한 위상에 올려두고 그 동일성 없는 속성들을 가쁜 쉼표로 이어 놓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악단을 지휘하는 상황과 글쓰기, 라면의 조리 과정은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도 쉼표 앞에 놓인 주어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버린다. 즉 이 시의 주어들은 앞 문장의 주어이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뒷 문장의 주어이기도 한데, 주어의 위상만을 가졌을 뿐 어느 문장의 주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그와 같은 애매한 주어는 폐기되어야 할 군더더기가 되지 않고 되레 문장과 문장, 상황과 상황을 연결하는 중심적인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 서로 들러붙지 않을 것 같은 부품들의 매니악한 조립 양태가 이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상황과 사건의 인과관계나 유비적 추리, 시간적 경과가 이 시의 진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 없는 주어들의 우연적인 개입이 문장들의 연쇄를 지지한다. 거기서 서정의 신성성은 휘발하고 공리의 구속에서 해방된 언어들이 시의 공간을 활보하기 시작한다. 미시물리학의 전자처럼 확률과 우연으로 존재하는 시, 서정적 화자에 의해 제어될 수 없는, 초과와 미만을 길항하는 시가 탄생한 것이다. 한때 탈속성을 지향하던 시인이 세속성을 자기 시의 가치 기준으로 삼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이 시는 강희안의 시적 궤적이 나타내고 있는 인식론적 단절의 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참 슬프기도 하여라
머리통과 다리 사이를 오가다
비로소 주검 앞에서야
불쑥 악수를 청하는, 저
생이라는 질긴
― 「오징어, 질긴」 부분, 『거미는 몸에 산다』(문학과경계사, 2004), 17쪽.
서정은 정서의 가능태이자 욕망의 발현태이며, 공감의 현실태이다. 강희안의 두 번째 시집 『 거미는 몸에 산다』에서는 구체적 사물(“오징어”)에서 관념(“생”)을 발견하고, 이를 시적 정서(“슬픔”)로 승화하는 서정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나’의 ‘슬픔’이 보편적으로 정립 가능한 정서가 아니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나’의 슬픔은 구체적 상황과 단독적인 주체의 심적 상태를 보여주는 언어가 되지 못하고 시적 화자의 단독적인 정서를 서둘러 합일된 언어로 치환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서정이 제시하는 공감 가능한 정서의 제시 방식은 되레 규칙화되고 합의된 언어들로 형상화될 뿐, 그 언어가 궁극적으로 지시하는 ‘이 나’의 정서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서정의 언어가 단독적인 주체들, 곧 규칙 바깥에 존재하는 개개의 타자성을 대리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 타자 없는 주체의 일반적인 발화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강희안 시의 변모가 갖는 시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세 번째 시집 『나탈리 망세의 첼로』에서부터 ‘인간적인’ 서정을 버리고 ‘비인간적인’ 환은유를 본격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빈번히 등장하는 상품설명서 ․ 평문과 같은 일종의 장르패러디, 낯선 기호들의 나열,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언표들의 결합과 배치와 같은 비시적인 진술 방식은 기존 서정에 대한 조롱만이 아니라 서정의 언어가 놓쳐버린 감각의 결들을 쓰다듬는 미학적 태도이기도 했다. 인간적인 정서와 감정이 서정의 일반화되고 특수화된 언어로 표현되는 데 반대하면서, 서정의 언어로부터 벗어난 비인간적인 언어를 통해 ‘이 나’의 단독성을 초과와 미만의 양태들로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번 시집은 환은유의 시적 방법론을 더욱 밀고 나아가, 타자의 타자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데 이른다. 그리하여 비인간적인 언어의 미학적 가능성만이 아니라 시적 윤리의 잠재성까지도 마련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타자성을 배제한, 수렴 가능한 주제로 시의 벡터를 일방적으로 설정하는 서정적 화자의 목소리 대신, 타자의 시적 개입과 욕망의 발견이 가능한 시적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서정으로부터 시를 구출하고 있다.
서정적 태도는 동일성의 언어들로 시의 공간을 울타리 쳐놓고, 그 독아론적인 독백으로부터 만들어진 한 편의 시를 제출함으로써 구현된다. 거기에서 서정은 1인칭 화자에 의한 보편적 소통 가능성의 모색이라는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자아의 확대를 꾀하는 서정의 언어는 타자의 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오직 내성의 언어만을 메아리처럼 반복한다.
왜냐하면 서정의 양식적 특질은 은유이기 때문이다. 은유가 가진 동일성의 욕망은 타자의 절대적인 외부성을 배격하고 내적 통합의 가능 근거로 일부 요소만을 폭력적으로 간취함으로써 서정적인 한 양태를 성립시킨다. 타자(외부)를 상정하지 않는, 단독적인 타자들을 특수한 것으로 환원하는, 보편성을 일반성으로 내성화하는, 타자 없는 주어의 언어=서정.
따라서 서정은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한 폭력적인 1:1 대응의 양식이며, 매개 없는 결과의 신비한 ‘로고스’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 후광에 눈먼 시인은 자아에게 타당한 언어를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가정한 채 시적 언어로 선포하며, 계시적인 상징을 외설적인 규칙으로 형상화한다. ‘있어야 할 것’을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 바깥의 존재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판명한다. 동일시의 외부, 동일성으로부터 휘발되는 비유마저 응결된 내부의 언어로 간주한다. 서정적 자아라는 순수하고 투명한 가상이 거기서 탄생한다. 그리하여, 휘발되는 기체가 응결하기 위해서는 응결핵이라는 비순수가 정초되어야 한다는 모순(데카르트에게 있어 그것은 ‘신’이다.)을 내성의 눈먼 독백 앞에 무력화시킨다.
하지만 기의의 동일성이 아니라 기표의 동일성만을 유사성으로 취한다면? 상상화된 ‘내용’의 동일성이 더 이상 외부를 상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상상과 상징(라캉적인 의미에서)의 경계에 놓인 기표라는 껍질은 상호 유사한 다른 기표의 드러남에 의해 무참하게도 그 껍질이 감싼 내용이 텅 빈 것이었음을 증명해 버리고 말 것이다. 깨어져 버린 알, 사라져 버린 로고스, 기체의 휘발 뒤에 남은 응결핵이라는 더러운 먼지. 이는 강희안의 이번 시집이 겨냥하는 시적 전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3. 기표―은유와 ‘차이’의 시적 도입
은유는 서로 다른 대상을 규합시키는 신비한 힘을 외화한다. 기실, 시적 상상력이란 서로 다른 대상에서 동일한 속성을 발견해가는 인식론적 사건이 아닌가. 그렇다면 은유는 주체와 타자의 적극적인 관계 맺기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은유는 개별 사물들의 속성이 아닌 사물의 원시성, 다시 말해 파르메니데스가 상상한 ‘존재의 본질’로서의 사물과 사물을 잇닿게 한다. 왜냐하면 은유는 외따로 떨어진 대상들의 관계성을 원초적인 형상으로 회복시킴으로써, 사물의 시원(始原)을 지시하는 언어―형상(에이도스)을 상상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사물 그 자체의 가치, 사물과 사물의 차이가 은유의 신성성에 의해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강희안은 은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독특하게도 그에게 은유는 환유와 대립하여 주체의 시적 태도를 내세우는 수사적 전략이 아니다. 다시 말해, 강희안은 타자를 도입하지 않는 서정의 태도, 은유의 아우라를 완전히 배격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은유를 세속화한다. 기의의 동일성을 배격한 은유를 통해, 사물들 간의 동일성을 찾고자 하는 독자들의 시적 욕망을 배반해 버린다.
푹 퍼진 바지의 줄을 잡다가 슬쩍 당겨본다
꽉 다문 입 없는 말
주루룩 뱃가죽 찢으며 지평선을 열어젖힌다
성기가 터질 듯 부풀기 전에
금속성 이빨들이 일제히 가방에서 뛰쳐나왔다
입 ․ 이것은 안전처리된 미늘인 듯
살갑게 봉인을 풀 때마다 비린내가 물큰했다
누구나 공공연한 전횡을 일삼았지만
자크 ․ 저것은 투명한 데리다의 기표였으므로
누구나 쉽게 개봉할 수 있는 지퍼백
순수한 말의 기원은 없고 혀의 기능만 있다던
질 ․ 그것은 딱딱 맞는 이빨 없이도 완강했다
표표히 유목에 지친 말로 남아 떠도는
사막의 바탕은 바람의 망막이 아니었다
바람에 재편된 사구의 주름을 헤집어보다가
알알이 흩어진 모래
잠시 신기루 펼칠 때 트럭의 범퍼가 닫혔다
이 뜨거운 실린더가 터지기 전에
말 없는 입들이 지퍼를 열고 고비에 당도했다
― 「지퍼의 전횡사」 전문
시인에게 은유는 유사한 소리(기표)의 재현에 의해 희미한 관계로 정립될 뿐이다. “지퍼”―“지평”, “전횡”―전행, “줄”―“주름”, “입 없는 말”―“말 없는 입”, “고비”―고비사막 등이 그것이다. 더욱이 시적 의미 안과 밖에 동시에 위치할 수 있는 ‘전행’이나 ‘고비사막’과 같은 기입되지 않은 언어들은 시어의 환유적 연쇄에 의해 환기됨으로써, 비로소 육신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전행’의 경우, 지퍼의 고른 “금속성 이빨들”의 행렬(‘前行’), 지퍼가 “주루룩 뱃가죽 찢으며” “열어젖”힐 때의 ‘轉行’을 시의 내부에 배치하지 않으면서도 떠올리게 한다. “고비” 역시 “사구”―“모래”―“신기루”라는 일련의 연쇄에 의해 제기되는 고유명, ‘고비사막’에 자연스럽게 “당도”하게 한다. 은유에 눈먼 시인이 아니라 그 아우라를 제거하고 언어 그 자체를 사물화하려는 시인―주체―발화자가 문장들 속에서 다른 양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외부와 내부를 경계 지으면서도 그것을 무화시키는 잠재성을 가진 동일한 가상적 사물, “입”―“자크”―“질”의 상호보완적인 은유 관계는 되레 그것의 차이를 각 연마다 배치하여 드러냄으로써 시적 언술의 논리적 정합성을 정초한다. 차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이라 한다면, 강희안에게서 은유는 동일성의 은유가 아니라 소리의 유사성에서 관계 맺어지는 언어들 간의 차이를 노정시킴으로써, 기의 없는 텅 빈 기표들의 질서정연한 연쇄와 배치(환유)에 의한 언어의 사물화를 끝 간 데까지 밀고 간다.
거기서 언어의 신비성은 탈각된다. 언어는 신적 의지의 신성한 현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차이를 가진 사물일 뿐이다. 사물로서의 “입”은 실재하는 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크”는 자크가 아니라 “입”과의 상관관계 하에서, “질”과의 은유적 ․ 환유적 연쇄와의 관련 하에서, 한 연에서의 위상을 나름으로 차지한다. “딱딱 맞는 이빨 없”는 “질” 또한 “자크”가 아닌데, 그것은 “순수한 말의 기원은 없”는 “자크”가 “입”이 아닌 것과 같기 때문이다. 차이가 사물을, 시어를 정초한다. 타자가 차이의 타자라 한다면, 그것은 기실 타자를 정초하는 것이다. 은유를 사용하되, 타자의 정초가능한 자리를 마련하는 기표―은유, 그리고 환유적 연쇄. 기실 시인이 자주 언급하는 ‘환은유’는 시에 타자를 도입하고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 맺음을 외화하고자 하는 시적 노력의 표현 양식이다. 은유는 주체에 의해서 구현되지만 환은유는 타자성과 함께 도출된다. 그러므로 ‘환은유’는 단순히 시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내성의 독백으로부터 시를 구원하기 위해, 은유의 감각을 세속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시적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구가하는 방법론으로 보인다.
이 시에서 1연과 5연이 수미쌍관으로 ‘당김―헤집음, 다묾―흩어짐, 열림―닫힘, 부풂―터짐, 뛰쳐나옴―당도함’의 상호 대응하는 서술어를 갖는 것 역시 유사한 문장 구조에서 빚어지는 서로의 차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한편으로, 시인이 강박적일 정도로 은유와 환유로 연쇄되는 언어적 배치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여기서 시인은 ‘환은유’가 환유의 무한연쇄에 의한 비유기성이 자칫 언어―놀이에 갇혀 폐쇄적인 자기 지시성으로 빠질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동시에 은유의 유기적 동일성이 타자성을 배격하는 무한한 자아의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을 제어하고자 하는 미적 전략을 드러낸다.
4. 타자성의 정초와 반복되는 환은유
시인의 전략은 「고양이 야마카시」에서 환은유적 언어 배치를 이미지의 배치로까지 확대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론적 맥락을 산출한다.
회색 배관과 로프를 타고 담을 뛰어넘는
저 물찬 환영들이 떼를 지어
후루룩 번화가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고도의 탄성과 근력으로
크고 작은 건물과 건물 사이
고공점프하며 날뛰는 고양이과 동물들이
도심 곳곳에서 속출하기 시작했다
게임은 보통 3마리 이상의 고양이가 모여
300m 정도의 둥근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정해진 텍스트의 목표대로
각각의 동작을 선보이는 식으로 진행된다
언젠가 고양이 셋이 번개팅으로 만나
새 빌딩을 기어오르다가 추락사한 적이 있다
TV와 신문에서는 한결같이
그들이 삼각관계에 걸려들었다고 전했다
강인한 영혼, 강인한 신체
뭐 그런 것을 표방한다고 해서
좀 특별한 성적 담론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고공점프의 높이, 동작의 속도
몸짓 하나하나의 예술성에 이르기까지
기계체조, 암벽등반, 낙법 등
여러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평가된다
다운타운에 새로 들어선 건물을 탈 때는
노련한 고양이들도 주의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표절한 적 없지만
종종 건물에서 큰 손이 튀어나와
저 낯선 환영들을 구겨 던지기 때문이다
도심의 건물들이 하나같이
야생의 발톱을 기피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 「고양이 야마카시」 전문
이 시에서는 극단적인 이미지의 배치가 나타난다. 먼저, ‘고양이 야마카시’라는 시어가 지시하는 도심―야생의 이분화된 이미지(“도심의 건물들이 하나같이/야생의 발톱을 기피하려는 경향”)가 그것이다. 병치은유를 통해 의미론적 변용을 꾀하는 시인의 이와 같은 의미―효과의 전략은 “도심”에서 “야마카시”를 행하는 “고양이”들의 ‘사라짐―속출하기 시작함’, ‘기어오름―추락―던져짐’과 같은 동작이미지의 연쇄로 인해 역동성과 비극성을 함께 도출하며, 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건물벽을 타고 오르내리거나 건물 사이를 뛰어넘는 “강인한 영혼, 강인한 신체”, “물찬 환영들”은 언제나 “낯선 환영들”로 “구겨 던”져질 수 있기 때문에 “야마카시”는 마르크스가 썼던 표현 그대로 ‘목숨을 건 도약’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게임’이 그 플레이어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음에도 행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게임에 대한 보상에 관해서는 시인이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다른 효과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시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회색 배관”, “로프”, “담”, “크고 작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문명화된 도심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고공점프” 가능한 “야생”의 한 공간으로 재배치해 버리는 게임의 수행, 그 자체이다. “고양이”들의 “고공점프”가 목숨을 건 도약인 이유는 그와 같은 게임 수행이 도시를 밀림으로 바꾸어 버려, 환은유적 이미지의 공간이 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텍스트의 목표”, 즉 게임 수행의 규칙이라는 환은유적 공간과 무관한 듯 보이는 외부 그 자체의 절대적 잠재성이 “야마카시”를 행하는 행위자에 의해 문명의 한복판 안에서 수행됨으로써, 환은유의 미끄러지듯 연쇄되는 진술을 이끌어 내며, 이는 게임이 수행되는 모든 공간들을 새로운 존재론적 변용태로 바꾸는 결과를 산출한다. 외부(규칙)에 의한 내부(도시에서 밀림으로 바뀌는 공간)의 정초 과정. 그것은 타자에 의한 내부 규칙의 일신 과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시에서 이미저리의 노련한 환은유적 배치에 의해 조금씩 잠식당하는 문명의 자리와 위태로운 야생의 공간이 동시에 재현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그것은 기존의 서정 양식의 은유에서는 현현될 수 없었던 타자성의 은밀한 노정을 환은유가 마련할 수 있다는 것, 그로 인해 새로운 인식론적 절차들의 양식화(세속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서정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정의 내성성은 ‘나’의 규칙만을 정립할 뿐, ‘타자’의 규칙은 인식하지 않는다. 서정은 시적 화자의 감각과 호흡에 따라 형식과 내용을 정초하는, 단일 규칙의 우주적 적용 가능성을 실험한다. 그러므로 서정은 나=우주의 무한정한 자아의 확장을 궁극적인 시의 목적으로 둔다. 동일시 가능한 자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대의 서정은 ‘공감 가능한 것’이라는 이데아를 플라톤식 ‘분유’의 환속화된 버전으로 지상에 유포함으로써 서정성이라는 환상을 심는다.
그런데 강희안 시인이 제안하는 은유와 환유의 연쇄적 배치의 양식인 환은유는 그 배치가 한 편의 시에서 수미쌍관의 형태든, 유사 문장의 배치든, 시적 이미저리의 대비든 간에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반복은 규칙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반복은 동일한 패턴의 반복이 아니라 유사한 패턴의 반복이다. 유사성은 동일성을 이르는 다른 말이 아니다. 유사성은 차이를 전제할 때 구출되며, 동일성은 차이를 부술 때 소급된다. 언어들의 반복적 배치는 차이를 전제한 유사성을 발산하며, 반복되는 언어들 간의 의미론적 변용을 일으킨다. 새로운 규칙은 거기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반복에 의해 발견되는 규칙은 시적 공간 내부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규칙은 언제나 사후적으로만 발견되며, 사후적인 규칙은 시가 쓰여지기 이전, 잠재성의 장(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에 이미 있던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규칙은 내부이자 동시에 외부인, 그 자체로 타자성이다.
강희안 시의 환은유가 정초하는 규칙은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의 시는 독자로 하여금 암묵적으로 합의된 규칙을 전제한 채 감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합의를 무효화하고 시적 공간 안에서 스스로 규칙을 찾는 체험에 이르도록 이끈다. 왜냐하면 반복에 의해 도출되는 규칙은 시인이 제시한 것에만 그치지 않고 독자들로 하여금 사후적인 발견을 통해 스스로 세워가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강희안의 시는 놀이적 감성으로 충만해 있다. 규칙을 함께 찾아가고 만들며 한 편의 시로 준수할 뿐 아니라 새롭게 규칙을 변경해 나가고자 하는 욕망이 거기에 있다. 일방적으로 규칙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서정의 동일자로부터, 그의 시는 규칙을 함께 만들어 가는 참여자들을 호출하고자 한다. 그것은 시인이 한 편의 시를 통해 규칙을 공표하고 이를 적용하는 역할을 자임하지 않고 단지 규칙을 입안(立案)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하는 자임을 뜻한다. 시인은 유일한 발화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발화자이며, 유일한 청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청자이다.
5. 세속적 놀이=시의 윤리
강희안의 시에서 시인이 제안하는 규칙은 단일한 하나의 규칙만이 아니다. 환은유의 언어와 이미지의 연쇄는 대등한 위상을 가진 몇 가지 규칙을 시편에 함께 입안한다.(이는 세 번째 시집에서는 찾기 어려웠던 시적 전략이다.) 독자들은 그 규칙을 발견하고 참여할 뿐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다.
치타의 송곳니 사이로 새어나오는
아말리아의 파두 들은 적 있는가
쿡쿡 지르는 조련사의 막대기
단호한 구령의 마법에서 풀린다면
바다로 뾰족하게 내민 곶
그 간절한 기슭에 닿을 수 있겠다
누구도 바다의 악보 찢지 못하리라
통속에 젖은 기타의 줄을 끊어버렸으니
멀고 먼 리스본 뒷골목에서
치타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까지 꺼냈으니
그대, 허랑허랑 파도치는 짚시의 발목을 잡겠다
함부로 기타의 통 속에서 뛰쳐나오는
치타의 발목을 본 일이 있는가
등을 보인 조련사의 기타
그 서슬픈 현을 튕기다 보면
남방으로 하얗게 뿜어올린 젖
그 따뜻한 물결의 무덤에 깃들 수 있겠다
아무도 기타의 윤곽 잡지 못하리라
부지불식 솟는 치타의 이빨을 뽑았거나
여기저기 군락을 이룬 마을에서
조련의 손길 거부한 붉은 눈빛이었으니
그대, 유랑유랑 떠도는 바다의 잔등에 오르겠다
― 「따뜻한 파두」 전문
이 시에서 우리는 “송곳니”―“곶”, “통속”―“통 속”, “허랑허랑”―“유랑유랑”과 같은 연쇄되는 언어적 결절점들뿐 아니라 야생성―“조련”, “파두”―“기타”, “조련사”―기타리스트와 같은 연쇄되는 이미지의 결절들, 죽음―생명, 속박(“치타”)―해방(“짚시”)과 같은 연쇄되는 상징성의 결절들과 만날 수 있다. 서너 개 정도의 서로 다른 의미론적 맥락들이 서로 상충하고, 길항하며, 화해할 뿐 아니라, 결별하는 양상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규칙들이 이 한 편의 시 안에서 함께 내재되어 있으며 동시에 발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시인은 그와 같은 규칙을 마치 미로찾기 게임처럼 제시하고 해석하여 정답을 제출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되레 시인이 제시한 규칙을 독자 스스로 읽고 새로운 규칙을 내려주기를 요청한다. 시인조차 발견하지 못한 규칙들, 발견해 내지 못한 반복의 패턴과 결절들을 읽어내도록 적극적으로 타자의 타자성을 승인하고 타자로 하여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시인은 놀이로서의 시를 제안하고 있다. 참여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규칙이 발견되고 생산되며 변경되기를 바라는 시=놀이, 시인이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이 참여자들을 내포독자로 규정하는 형식의 소통이 아니라 참여자가 규칙을 정하고 만들어 내는 새로운 소통 형식으로서의 놀이=시. 성스러운 것으로부터 세속적인 것으로의 이행하는 시라는 놀이는 서정의 일방통행적 소통 양식으로부터 타자의 타자성을 적극적으로 정초하는 시적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물속에 들어가 연신 뻐끔 담배를 피운다
일조량과 산소량이 부족하다고 투덜대며
불쑥불쑥 검은 물 밖으로 뛰쳐나올 태세다
물밑 작업하던 강에는 문명이 시작되기 전인 듯
검푸른 바벨의 언어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녀가 봉긋한 C컵 브래지어를 곧추세우며
잠시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살랑거린다
‘신’의 이름에서 ‘ㅅ’을 슬쩍 빠뜨린 그녀는
저녁놀의 입술에 빨려든 빛의 나이트장에서
날렵한 꼬리지느러미로 부킹을 시도하고 있다
저마다의 라벨에 따라 조합된 물의 강의실
거들을 입다가 그만 터져버린 부레가 나뒹군다
힘센 물질로 파랑의 동고선을 그린 대가란
바닥까지 샅샅이 들추어내는 무리를 자초한 일
그녀는, 뻐끔뻐끔 붉은 혀를 말아올리며
조만간 아벨의 문법에 맞춰 손사래를 치리라
한밤 내내 난파된 물결 속을 돌아 나와 보면
꼬부라진 캔과 포크, 물고기의 낡은 비늘이
그녀의 방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담배 연기에 그을은 벽에 신의 권세 대신
바벨을 들어 올린 역사의 이름을 휘날려 써본다
아침마다 성경책을 필사하던 그녀의 일과는
팽팽한 브래지어 와이어의 압력에 따라
밑 빠진 음모를 더듬어 보는 일로 바뀌었다
교정 구석구석에는 물의 책을 찢고 나서야
다시 문맹을 알리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 「물고기 강의실」 전문
시인이 제시하는 놀이=시는 기존의 신성한 것, 가질 수 없는 것, 보편화되지 않은 것에 대한 미학적 물음표이다. “문명”과 “문맹”, “신”과 ‘인(人)’, “강의실”과 “나이트장”과 같이, ‘성(聖)’과 ‘속(俗)’의 이분화된 관념의 틀이 무너지고 있는, 그리하여 신성성을 세속성으로 끌어내리고 세속성을 신성성과 나란히 배치하는 이중화 작업을 통해 이 몇 겹의 의미론적 다양성의 장이 되어버린 공간에서, 시인은 독자(=타자)들을 초대하여 함께 놀기를 제안하고 있다. 여기서 독자들은 “바벨”과 “아벨”, 다시 “바벨”로 연쇄되는 기표-은유들에서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역사”, 혹은 “문맹”에서부터 “문명”이 되었다가 다시금 “문맹”이 되어가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발견해도 좋겠고, 빈번히 등장하는 성적 메타포들을 입구 삼아 “그녀”가 누구이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실재적으로 상상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모든 논리와 상상, 감각적 경험들이 이 놀이=시를 구성하는 하나의 규칙이 될 것이며, 이 시를 세속화하는 방식이 되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자기 반영적 해석을 통해 시 자체의 의미가 아닌 독자 스스로의 욕망의 궤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이 지적한 바와 같이 놀이가 성스러운 것을 세속화하는 아주 선명한 방식이라 한다면, ‘서정’이라는 성스러운 보좌로부터 걸어내려 오게 한 세속화된 놀이로서의 시는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 독아론적 태도로부터 타자성을 마련하는 새로운 미학적 가능태를 꿈꾸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냄비들의 후일담」이나 「오늘 저녁엔 뭘 먹을까?」와 같은 정치 풍자의 놀이판=시나 「자블라니에 대한 논란」이 보여준 신문기사 ․ 음모론 등을 짜깁기한 놀이판=시는 함께 사용 가능하고 참여 가능한 ‘세속적’인 시의 양태를 넘어 현실로 용출하는 시의 벡터까지도 그려볼 수 있는 정치―미학적 가능태마저 상상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놀이는 현실과 절연된 자족적 세계를 구성하는 데서 끝나기 쉽다. 그러므로 시를 놀이판으로 바꾸는 비서정의 상상력은 자족적인 형식 실험에 그쳐버릴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강희안의 세속적인 시는 서정의 단단한 벽을 구멍낸 ‘참여’의 가능태를 더 적극적으로 구현함으로써 미학의 윤리를 넘어 윤리의 미학으로까지 추동할 수 있어야 한다. ‘참여’는 곧 새로운 규칙의 도입이며 놀이의 지속성에 대한 보장이다. ‘환은유’는 타자에 의해 계속 쓰여지는 시를 탄생시켰다. 시인이 제시한 ‘맛있는 라면 조리법’은 조리의 예일 뿐, 강요된 조리법이 아니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기 위한 더 많은 타자들의 조리법을 시인은 요청하고 있다. 이 시집이 부품판에도, 매뉴얼에도 없는 새로운 부품들에 의한 새로운 조립모형의 완성 과정을 이미 한 권 이상의 분량으로 채운 이유인 것이다.
손남훈 문학평론가
2008년 《부산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비평계간지 『오늘의 문예비평』 편집위원. 공저로『지역이라는 아포리아』(산지니, 2009), 『일곱 개의 단어로 만든 비평』(산지니, 2010),『불가능한 대화들』(산지니, 2011)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