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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수요일 예배의 근원
1. 수요일 예배의 기원
인터넷에서 읽은 내용인데 “수요일 예배는 성경에 없다 외국에서는 공식 수요일 예배가 없는데 우리나라에서 선교사들이 공식 예배가 아닌 기도회로 모였던 수요 기도회를 수요일 예배라 한다” 했다.
이런 잠정적인 문제 때문에 의식적으로 수요일 예배를 경하게 생각하는 성도도 없잖아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요일 예배는 우리나라에서 기원했다. 수요일 예배는 어떤 역사적인 기록이 구체적으로 없다. 먼저 복음을 받은 영국이나 기타 다른 나라에도 공식적으로 수요일 예배가 없다. 그러나 미국의 극소수의 교회와 또는 한국에 선교사들이 나름대로 수요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어느 시대이든지 선교지에 가서 처음부터 제도적인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 복음이 정착 되는 대로 예배 생활도 정착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의 신앙 사상대로 드려지기 때문에 형태가 동일하지 않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도 신분은 같지만 신앙이나 선교 형태는 각각 다르다. 우리나라가 복음이 비교적 잘 받아 드려진 나라이기에 개신교 선교사들 가운데 교회 생활의 기초를 놓으면서 좀 더 적극적이고 철저한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알았기에 저녁 예배를 드려지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기독교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에서는 공식 적으로 예배생활이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래서 주일 예배 외에 저녁 시간을 활용했다. 그리하여 주일학교나 다른 모든 교회 신앙 행사는 공휴일이나 저녁시간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수요일 예배는 우리나라가 인본주의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기 전에는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 편의주의 신앙으로 기울어지면서 예배 생활에 부담을 가지면서 불평하게 되고 심지어 의문이 제기 되기도 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 자주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결코 선한 일이며 신앙적으로 유익되기 때문이다.
수요예배를 드려지게 된 동기는 삼일 기도회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초대교회 당시 우리나라는 농경 사회로서 일을 많이 해야 생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일날은 오전 예배 외에는 저녁에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수요일 예배를 드렸다.
또한 전기가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는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저녁시간이 많았다. 그러기에 저녁에는 모여서 술과 화투놀이 그리고 다른 오락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악용되는 시간을 성경 공부나 기도시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저녁 기도회이고 수요기도회 였다.
초대 일곱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나오디게야 일곱 교회도 신앙 형태가 동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칭찬한 교회도 있고 책망만 한 교회도 있다. 그것은 신앙 생활이 동일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로마에도 영국에도 미국에도 없는 수요일 예배가 우리나라에서 기원하여 드려졌다는 것은 자랑스러울 일이며 결코 하나님 앞에서 성경적으로 볼 때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수요일 예배 기원은 선교 초기 선교시대부터 시작 되었다면 한국에 개신교 최초 교회가 소래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볼 때 수요 예배 기원은 1983년경이라 할 수 있다.
2. 수요일 예배의 성경적인 증거
성경에 기록이 없는 수요일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한 생각이다. 수요일 예배가 성경에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예배는 성막생활을 이해 못하고서는 예배 생활도 바른 이해 할 수 없다. 우리의 예배 생활은 구약 시대에 성막 생활의 영적 생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예배는 구약에 성막 생활이 원형이 된다. 구약 성막 생활의 완성이 신약의 예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배는 구약 성소생활의 영적 생활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속으로 대속의 의를 이루셨다. 그리고 세례를 받음으로 결례식 즉 의를 이루셨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례로 의로움을 입어 만인 제사장이 되어 성소 생활을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예배생활이다.
제사장들의 성소 생활은 크게 4가지이다. 성소는 칸 막이를 해서 지성소와 성소를 구된다. 지성소는 대 제사장이 1년에 한번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속죄를 받아 선포하고 말씀(계시)을 받아 선포한다. 성소에는 떡상과 등대와 향단이 놓여 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열두 지파가 가져온 12덩이 떡을 매주일 떡상에 진설하는 일이며 등대에 기름을 채워 등대를 비추는 것이며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향단에 분향하는 것이다.
전술 했지만 수요일 예배는 구약의 자원제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고 수요일 기도는 구약에 성소 생활에 분향단의 생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번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어지고 결례는 그리스도의 세례로 이루어지고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도의 생활인 것이다.
성소의 생활 중에 등대(영적 빛 된 생활)의 생활, 떡상(영적 나눔의 생활)의 생활. 분향 단(영적 기도의 생활)의 생활, 인 것이다. 그중에 분향단의 생활은 매일 매일 분향하는 생활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생활은 매일 매일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된다.
요한 계시록에 향로에 피워지는 향연은 성도들의 기도라 했다.
(계 8:3-5)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신약 시대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매일 매일 하루에 3번씩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 3시(오전 9시) 6시( 12시) 그리고 9시(오후 3시)이다.
(행 2:15)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행 10: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시더라
[행 3:1-2]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기도 시간을 최대한 지켰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시간에 각박한 때가 아니기에 얼마든지 가능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 시간들이 박해 때문에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고 그 긴긴 박해 가운데 이 신앙이 묻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독교 전성시대인 로마 시대에 다시 부활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초대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수요일 예배를 시작 할 때 그러한 성경적 배경을 충분하게 헤아렸을 것으로 본다. 왜냐 하면 초대 교회시대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신앙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3. 삼일 기도회 수요일 예배.
수요일 예배를 수요일 기도회라고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초대 수요일 예배를 삼일 기도회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도회이기에 목사의 설교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초대 시대에 교회 시에 좀더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또는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 주일이 아닌 날 평신도들이 모여서 보통 장로나 집사들이 인도하여 설교는 없었고 찬송가 부르고 성경을 읽고 했다. 그런데 왜 공식 예배가 아닌 기도회가 수요일 공식 예배가 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수요일 예배라 함보다 수요 기도회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초대 교회시대는 목사님들이 소수였다. 그래서 목사님 한분이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도 했고 행정을 했다. 그러기에 주일 예배 시간에서 목사님이 없을 때에는 장로님들이 또는 집사님들이 사회도 했고 설교도 했다. 그리고 교회가 설립되면 거의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이 예배 인도를 했다. 지금 선교지에는 거의 다 그렇게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
수요일 기도회는 설교가 없고 성경만 읽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설교를 잘 이해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를 해야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는 그 모임에 들어야 할 성경 말씀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 못하기 때문에 그 성경을 해설하는 것이지 설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해석이 아닌 어떤 설교도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목사도 성경을 대신 전하는 직분이다. 그러나 직분 자가 아니라도 성도는 누구나 성경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실례가 초대 교회 빌립 집사님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초대교회 빌립 집사님은 교회 재정을 담당하는 직무였다. 구제하는 일을 사도들이 맡아서 하기 때문에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점염하지 못하게 되므로 말씀을 전무하게 하기 위해서 구제하는 일을 전무 할 수 있는 집사직분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핍박이 일어나 핍박을 피해 사마리아도 가서 거기서 사도들이 했던 전도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성령께서는 에티오피아에 내시에게 보냄을 받게 되고 그에게 성경을 가르쳤고 세례를 주었다. 이 사실을 어느 사도나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들의 의식대로 하면 목사님만이 가르치는 설교를 빌립이 했고 목사님 만이 베푸는 세례를 빌립이 베풀었다
다만 목사남이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 함부로 또는 자유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복음을 훼손하기 때문에 신학을 하고 성경을 배운 목회자에게 위임 한 것이다. 예배 시간에 성경을 읽어 주는 것은 그 교회의 당회장이 인정한 성도가 예배 시간에 성경을 읽는 것은 바로 목사의 대행인 것으로 설교인 것이다.
[마 18:19-20]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 성도가 모이는 어떤 곳이든 간단하게라도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은 교회(모임)를 통하여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교회라 함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敎會)는 모이는 집이다. 교회의 뜻은 에클레시아(ejkklhsia)인데 불러낸 자들의 집단이란 말이다.
[마 18:18-19]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기도회는 찬송을 부르고 대표 기도하고 성경을 잃고 찬송하고 마친다. 그러기에 예배라 해야 한다. 초대 교회는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회를 모이게 되었는데 기도회 모임도 반드시 예배 시간을 이용하여 기도 시간을 가진 것이다. 왜냐 모든 것이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시대와 역사와 함께 점진적인 발전으로 정착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도 족장 시대에는 돌 제단에서 선민의 출범한 출애굽 시대에는 성막으로 선민의 정착 시대에는 성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이루시고 짐승을 희생시켜 드리는 제사는 폐지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릿돌이 도시므로 신약 시대에 교회로 발전한 것이다.
찬송가도 족장 시대에는 없었다. 다윗 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솔로몬 시대에 정착하였었다. 그리고 성경 어디에도 찬송가가 기록된 곳이 없고 곡이 기록 된 것이 없다. 교회의 생활 역사 속에서 은혜 받은 자들이 애창하는 것을 선별하여 예배찬송으로 공회에서 수집한 것이다. 교회의 예배도 시대와 함께 역사와 함께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정착 되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수요일 예배는 성경에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나라에 실현 되었다는 감사한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수요일 예배를 귀하게 여기든 소흘하게 여기든 그것은 신앙인의 자유이므로 가인의 제사를 드리든지 아벨의 제사를 드리든지 드리는 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기도와 예배는 별개가 아니라 예배 속에 기도가 속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예배 없는 기도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자원제(自願祭)인 수요 예배
레위기이 기록된사 5대 제사 제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사가 있고 내가 하나님께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가 있다. 순종하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여 드리는 제사이며 자원 제는 내가 원해서 하나님께 약속하고 그 약속에 순종하는 제사이다.
[레 7:16-18]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레 22:17-2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거류하는 자가 서원제물이나 자원 제물로 번제와 더불어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19)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20)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민 29:39)너희가 이 절기를 당하거든 여호와께 이같이 드릴지니 이는 너희의 서원 제나 낙헌제로 드리는 번제, 소제, 전제, 화목제 외에 드릴 것이니라.
삼일 예배는 자원 제에 속한다고 볼수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시지 않은 때 자원하여 드리기 때문이다.
신앙에는 율법 적인 신앙과 복음적인 신앙이 있다. 기독교는 복음적 신앙이다. 그렇다고 율법을 조금이라도 경히 여기지 않는다. 다만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신앙은 양심에 자유이기 때문에 예배는 자신이 드릴 수도 있고 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 잘 드릴 수도 있고 잘 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 가인처럼 드릴 수도 있고 아벨처럼 드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누가 무어라 할 사람이 없다.
또 같은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를 드려도 잘 드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예배드리는 형식은 같아서 드리는 사람에 따라서 동일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예배를 주관한다면 동일 하지만 인간의 종교심과 신앙의 자유를 통해서 자율적인 신앙이기 때문에 형태가 다른 것이다. 문제는 누가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인정 하는 예배를 드리느냐가 다른 것이다. 가인의 제사를 인간 마음대로 드리는 제사였고 아벨의 제사는 아버지로 하여금 배운 대로 말씀 따라 드린 제사였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창 4:3-창 4:5]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신앙의 본질이 자율이기 때문에 아담 하와가 타락하게 된 것이다. 인류가 타락하게 된 것이다. 자율이 아니면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자께서 종교심을 주시고 양심의 자유를 주신 것이다.
(전 3: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기에 기도회도 드리는 사람들이 같은 교회의 교인일지라도 드리는 사람이 있고 드리지 않은 사람이 있다. 수요일 예배도 드릴 수 있고 드리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누가 무어라 말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기도회도 드리지 않은 사람보다 드리는 사람의 신앙이 인정받게 된다.
복음시대 신앙생활은 율법에 매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에 감사하여 하는 것이며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성경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야곱의 제사를 생각해 보자
[창 28:16-19]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집을 나와 하란 광야에[ 이르러 허허 벌판에 돌 하나 세우고 혼자서 제사를 드렸고 기도했다. 이 야곱의 제사와 기도가 제사인가 기도인가 ? 그 제사 드린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드린 것도 아니고 공식 제사 드리는 날도 아니다. 꿈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서원한 제사이며 기도이다. 그러기에 제물도 없기에 기름을 부어 드렸다고 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와 주일날에 드리는 예배가 성경에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초대 교회 시대 신약 성경에 보면 모여 기도 했다. 예수께서 가르치셨다.
사도가 설교 했다. 사도들이 병자를 고쳤다. 그리고 바울이 선교했다. 예루살렘 교회가 모였다. 등의 기록은 있지만 구적으로 어디에 모여 누가 사회하고 기도하고 어떻게 찬양하고 어떻게 헌금하고 하는 기체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모임 속에서 그 교회의 질서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하기에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정착되었다.
구약 시대에 특히 신앙의 원조를 이루고 이는 족장 시대에 안식일에 제사 드렸다는 기록이 없다. 안식일이 기록된 곳은 창세기 2장 1절-2절에만 있다. 아담이 안식일에 제사 드렸다던가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제사 드렸다는 기록만 있지 안식일에 드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 이후 노아도 제사 드렸다는 기록이 한번 나온다. 그리고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모두 제사 드렸다는 기록은 있어도 안식일에 제사 드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것은 기본 적으로 창조 때부터 안식일이 있었지만 지키지 않았는지 기록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켰다는 기록은 없다.
반면 이방 나라들은 바알 신을 섬겼다. 족장 시대에 신전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바알 신전은 담무스 신의 거대한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축제일에는 모든 백성이 모여서 제사를 드렸지만 평일에는 사제들이 신전에 거주 하면서 제사를 했다.
아브라함 당시 하나님을 섬기는 부족이 없었다. 바벨론 종교에 잠식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가정 데라 만이 여호와의 종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여호와의 종교의 씨로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유목 생활을 하면서 안식일을 지킬 수 없었든지 아니면 지키지 않았던지 했다고 본다. 유목 생활이라서 이리저리 옮겨 생활하기에 적은 수의 부족으로서는 가질 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백성이 형성이 된 후 모세로 하여금 그 백성으로 정착하게 하시면서 구체적인 율법과 성막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안식을 일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가나안 정착 후 성막은 없어지고 법궤가 한 제사장에게 위임되고 제사장은 산당에 머물면서 제사를 했다. 법궤의 시대로 사사시대를 거쳐 엘리 시대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다윗을 통하여 법궤가 예루살렘 시온 산에 모셔지게 되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때부터 성전 시대의 전정 시대를 이룬다. 이때에 제사와 찬양이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왕정 시대에 신앙이 급속히 타락하게 되고 결국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가 없이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신앙의 자유는 잃게 되고 자연이 안식일을 자유롭게 지킬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계획된 75년이 되어 다시 민족들이 귀국하게 되고 수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게 되지만 이방 나라의 문화에 젖은 신앙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선지자도 없는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다보니 신앙은 이미 신앙이 아니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스룹바벨 성전이 헤롯 성전으로 개축되고 예수님 당시에 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신앙은 질책 하셨고 성전은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장사하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질책을 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나 기독교는 출범 하면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세상과 합하여 박해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리저리 쫓기면서 교회를 세우고 목숨을 바쳐가면서 복음을 전하여 세계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교회는 로마의 거대한 제국으로 하여금 무자비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것도 숨어서 비밀리에 들여야 했다. 비밀리에 지하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기독교인들은 안식을 철저하게 지킬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었다.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숨어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래도 지킬 수 있었지만 생활하는 기독교인들은 드러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밖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숨어 있는 교회를 도와가면서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켜야 했다.
기독교는 출범시작부터 300여 년간을 박해 속에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의 황제가 되면서 박해가 종지부를 찍고 기독교 신앙은 수면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 이후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어 급성장하게 되고 1000년 동안을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때에 이루어진 모든 예배가 정착되어 오늘에 이루기 된 것이다.
위의 기독교 역사를 말하는 것은 성경에 공적인 수요일 예배가 없는데 왜 수요일 예배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시되기 때문에 한 말이다. 기독교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닌 로마에서 전성기를 이룬다. 또한 성경 중심의 신앙은 로마가 아닌 영국에서 시작하여 미국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신앙의 발전사이다.
그러므로 로마에 없었던 수요일 예배가 영국에 없었던 수요일 예배가 미국에 별로 없었던 수요일 예배가 우리나라에서 발전하여 장착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며 귀한 일이다. 신앙 적으로 볼 때 잘한 일이지 잘 못된 일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수요일 예배를 귀하게 여기며 지켜야 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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