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손을 건네시는 하느님
세상과 ‘관계’하시는 분
주님의 성탄은 하느님의 강림(incarnatio) 사건으로서 ‘하느님의 위대한 공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주님의 공현(公現)은 ‘세상을 향해 손을 건네시는 하느님’으로 ‘관계하시는 하느님’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따뜻한 것 같으면서도 냉정하다. 사람들은 아무나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마음이 편한 사람을 찾지만, 꼭 마음이 편안한 사람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격’이 안 맞는다고 회피하는 사람들, 자기에게 ‘이익’이 될까? 아니며 ‘유익’할까? 고려한다. 그래서 좀 불편해도, 껄끄러워도 때로는 그들로부터 말도 안 되는 핀잔이나 갑질을 당해도 애써 참으며 그 ‘무리’에 끼려고 애쓴다. 그들은 어떤 사람일까? 관계에 대한 대가와 보상은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따르고 시장 원리에 따른다.
그런데 오늘 하느님께서는 나약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신다. 나약한 어린아이, 그래서 어떤 인간이든 모두 다 받아들이고 환영하겠다는 하느님의 선언처럼 보인다. 하느님께 발길을 돌리는 자, 누구든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학력과 학벌을 따지지 않으며 재산이 많은지 적은지, 열심히 살았는지 게을렀는지 따지지 않겠다는 ‘개방’ 그 자체로서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손길’은 어느 사람도 소외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개방하심’으로 비롯한 ‘세상과 관계하시는 하느님’ 그 위에 멀리 동방에서 온 신비로운 사람들은 황금과 유향 그리고 몰약을 바친다. 임금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황금), 어두운 이 세상을 환히 비추시어 당신의 거룩함으로 다시 채워주시고(유향),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죄의 상처로 신음하는 당신 백성들을 치유-구원(몰약)하여 주시리라.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주님의 백성’은 알지 못하지만, 동방에서 온 ‘이방인’에 의해 아기 예수님은 세상에 드러난다.
세상을 향해 손을 건네시는 하느님,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어떤가? 세상을 향해 손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현현(顯現, 기념하다)하고 있는가? 높고 화려한 건물,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권위를 표현하기에는 매우 안성맞춤이다. 그러면 공동체는 보잘것없는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곳일까? 대개 교회 공동체는 여전히 사제 중심, 성직자 중심의 공동체로 아직도 권위적이며 학문 중심적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사목은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을 우선 선택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본당은 관리와 유지 나아가 확장을 복음화의 주요 사업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사회의 약자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다. 지금 우리 가톨릭교회는 품격을 유지하며 어느 정도 먹고 사는 중산층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난하면 교회 공동체에 이바지할 방법이 별로 없고 지나치게 부자인 사람은 은근히 도덕적 비난에 놓이게 된다.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하고 어정쩡한 교회의 태도에서 ‘주님 공현(公現)’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이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권위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자각과 성숙한 인식이 필요하다. 교회의 전례는 엄숙하게 치러지면서 신적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 모든 신자는 성직자를 포함하여, 전례에 의해 현현되는 신적 권위 앞에 순종과 믿음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다만 그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를 그 전례가 지닌 엄숙함과 동일시하여 ‘사제’ 자체에 권위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제는 그 전례를 주례함에서 신성하고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지 사제 자신이 거룩하고 신성한 존재는 아니다. 사제는 거룩하고 신성한 직무에 합당한 자로서 그의 존재성이 일반 신자와 다른 정체성을 가질 필요는 있으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에서 존재의 동등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직무상의 차별성과 존재의 동등성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고대로부터 제사장은 신성시되었다. 무당, 샤먼, 제사장 등 신적 영역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에 대해 사람들은 신성시하며 그들을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여겼다. 물론 성직자, 수도자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과 친절이 나쁜 것은 아니나, 마치 엄숙한 전례와 그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를 동일시하는 관성적 생각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사제 자신도 별다른 성찰 없이 관성적으로 자신의 권위와 존재성을 신성시하는 분위기에 편승해 왔다면 이를 다시금 되돌아볼 일이다. 신성시되고 권위적 존재로 추앙되는 것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두렵지 않은가? 이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이사 11:6)
지금 우리에게는 ‘부정의 영성’이 필요해 보인다. 자기 생각과 태도에서 잘못된 부분을 알아차리고 ‘부정’할 줄 아는 신앙, 믿음이다. ‘우리 중 누구도 억압받는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라는 시민 의식이 날로 성숙해져 가는 현대사회에서 낡은 권위적 사고에 젖은 교회는 위험하다. 민주 시민 의식으로 점차 성숙해져 가는 현대의 대중 사회에서 교회는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따뜻하다. 감히 얼굴도 들지 못했던 모세, 신발을 벗어야 했던 하느님 앞이었는데, 그런 하느님께서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아기’로 세상에 손을 건네신다. 가난한 목동, 밤을 새워가며 거친 야수와 싸워야 했던 가난한 이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오직 자신의 몸뚱이 하나 달리 의지할 곳이 없던 그들이 빛을 본 것이다. 빛이 세상에 오자, 어둠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어둠 속에 신음하고 있던 자들의 정체가 밝아졌다. 그들은 어둠에서 벗어났고 그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는다. 이것이 공현 축일을 통해 교회가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모두에게 모든 것으로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손길, 그 개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