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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6권. 19세기, Le XIXesiècle 507-788
제1장 일반적 성격들 507-512
1800년 이래 우리시대까지, 사람들은 아주 잘 경계 지워진 3 가지 큰 시대로 구별할 수 있다. [1] 1800년부터 1850년까지는, 폭넓고 구축적인 학설들의 예외적인 개화시기였다. 이 학설은 자연과 역사의 비밀을 폭로했다고, 그리고 인간에게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자기 숙명의 법칙을 알게 했다고, 과신한다. 메스트르(Maistre 1753-1821)과 보날(Bonald 1754-1840)이 18세기에 대한 반동으로 구축한 카톨릭 학설들, 종교적 관점들로 완성된 맨 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의 심리학,피히테(Fichte, 1762-1814), 셸링(Schelling, 1775-1854), 헤겔(Hegel, 1770-1831)의 형이상학들과 같은 - 이들 형이상학들의 모방인 쿠쟁(Cousin, 1792-1867)의 정신주의도 포함하여 – 독일 후기칸트주의의 위대한 형이상학들, 생시몽(Saint-Simon, 1760-1825), 꽁트(Auguste Comte, 1798-1857), 푸리에(Fourier, 1772-1837) 등의 사회학 이론들 등 모든 것들은 예언적 예고의 성격과 계시의 성격은 공통으로 지니고 있다. [2] 반대로 1850년부터 1890년경까지, 새로운 비판적이고 분석적 정신이 있다. 이는 칸트와 꽁디약의 사유를 존경하여 수정하기에 이른다. 순수 문헌학은 역사철학을 추방한다. 비판은 스스로 형이상학을 대체 한다. 물리학과 화학은 자연 철학을 밀어낸다. 실천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학은 예언주의를 승계한다. 르낭(Renan, 1823-1892)과 막스 뮐러(Max Müller, 1823-1900), 뗀(Taine, 1828-1893), 르누비에(Renouvier 1815-1903), 꾸르노(Cournot, 1801-1877)와 신칸트주의자들, 맑스주의자의 사회주의 등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애호적인 학설들로 다윈주의와 스펜서(Spencer, 1820-1903)의 진화론이 있고, 이것의 기계론적인 성격은 18세기의 관념들을 상기하게 한다. [3] 1890년경부터 새로운 시대를 연다. 일반적 방식으로, 이 당시에 정신적 가치들의 실재성은, 사람들이 과학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철학적 결과물들에 대립되어 나타난다. 과학적 인식의 조건들의 분석(과학들의 비판)은 결과들의 제한된 범위들을 보게 한다. 사람들은, 앞선 시대가 마치 착각들과,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했던 이런 정신적 실재성들을 향한 접근의 수단들을 찾는다. [수단들을 찾음에 있어서] 광범위한 학설들로 번역되는 낭만주의 세대들의 보증과 더불어서는 확실히 아니고, 오히려 가장 잡다한 사유와 심지어는 가장 대립되는 사유의 운동들에서 태어나는 불안과 더불어서 이다. (508)
19세기 초에 변화했던 것은 전망이며, 이 전망 아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를 나타나게 한다.헤겔에게서는 자신의 역사철학에서,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 사이에 루소에 의해 행해진 구별보다 더 반감을 갖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치 사람들이 인간의 본질을 무매개적이고 절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처럼 구별하려는 것이고, 그러고 나서 나중에 풍습들을 보태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역사를 책임지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획득된 모든 것으로부터 인류성을 박탈하는 추상화 작업에 의해서는 인류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인류성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만들어가 획득 작업의 법칙 자체에 의해 도달할 것이다.헤겔 사유의 특성은 이 시대에 보편적이었다: 그 인식 전체는 매개적(médiate)이다. 인식은 인식을 생산했던 생성을 반성하면서 일어난다. 그러한 관점들은 새로이 모든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멘 드 비랑에게서, 자아의 연구는 완전히 만들어진 실재성의 확정이 아닐 것이고, 오히려 이루어지고 있는 작동의 재생산이다. 보다 일반적 방식으로, 사람들은 자연도 인간도 이것들의 생성과 독립적으로 연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은 이것들이 지나왔던 상태들의 연속 덕분에, 실재적이고 실체적일 뿐이다. (508)
거기에서 대체로 사물들을 보자면, 18세기에 표시 되었던 취향의 축소와 분석 능력의 축소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18세기 말에 사람들은 루소에게서와 많은 계시주의자들에게서, 해체하는 지성에 대한 일종의 피곤함에 주목했다. 사람들은 지성을 넘어서는 탐구 수단들에게, 즉 신앙에게, 본능에게, 의식에게, 감정에게, 지적인 직관에게, 역사적 생성의 제도에게 호소했다. 이런 광범위한 운동의 실재적 통일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들의 대표자들은 종종 서로 서로를 무시하는 데, 종교 철학의 새 소식과 사람들이 역사에 속성을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범위사이에 연결성을 강조해만 한다. 나는(je), 크리스트교 독단이 온우주에 대해 본질적적으로 역사적 관점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미 주목하였던 기회를 가졌으며, 그 독단이 시간의 과정 속에서 비판적 관점들을 표시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이런 관점들은 인간적 숙명의 의미를, 즉 창조, 타락, 속죄, 부활 등을 근본적으로 변형한다. 이 독단들 주위에 일찍이 묵시록들이, 즉 종말들을 지배하는 계시들이 형성된다. 온정신[성령]의 지배에 관하여 사회적 경향성들에서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이단들은 서로 병합되어 있다: 즉 계시와 신앙에 의해서만 알려진 내적이고 역사적 깊이에서, 그리고 통제하는 인간적 수단들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서로 병합되어 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관점은 자연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생각될 수 있다. 한편사람들은, 인간의 개인적이고 사회적 숙명이 자기의 지성을 넘어서는 역사적 생성 속에서 개인의 불가사의한 이유를 갖는다. 그리고 거기에 볼떼르의 각 국민의 풍습들과 정신론(Essai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에서 보쉬에의 보편사 담론(Discours sur l'histoire universelle, 1681)으로 되돌아가는 메스트르와 전통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다른 한편사람들은 인간이 감당했던 깊은 변형작용[진화작용]들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졌던 미래의 약속들에 관하여 행동할 수 있다. 거기에 마치 역사와 예언들에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하나의 틀과 같은 것이 있다. 예언들은 전적으로 실증적으로 주어지고, 그리고 그 예언들은 그러나 매우 새로운 메시아적인 강조점을 가지고 진보에 관한 18세기의 합리주의자의 논제들을 재결합한다. 그러면서도 예언들은 결국 본질적으로 추론[합리주의]적 논제들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예언들은 「묵시록」처럼 인류가 근거로 할 최종 상태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크리스트교 독단의 둘째 국면에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뉘앙스를 갖는다: 마치 발랑쉬(Ballanche, 1776-1847), 셸링(Schelling, 1775-1854), 헤겔(Hegel, 1770-1831)의 학설들처럼 이 국면에서 가장 내밀하게 충실한 면을 생각하는 학설들 이래로, 마치 생시몽(1760-1825), 푸리에(1772-1837), 꽁트(1798-1857)의 학설처럼 학설들의 일반적 영향을 또 효과적인 생성의 용어를 간직하고서도, 일부러 서로 멀리하는 학설들에 까지 이다. (509)
이리하여, 이 시기에 모든 철학적 문제들을 변형시키는 역사와 발전의 의미는 역사의 불가사의한 원동력을 믿는, 즉 인간의 반성에 초월적인 원동력을 믿는, 또한 메스트르의 회복(réparation)의 법칙, 헤겔로부터 실현되는 온정신의 법칙, 꽁뜨의 인류성의 법칙을 믿는 신앙에 연결되어 있다.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와 끼네(Edgar Quinet 1803-1875)와 같은 역사가들 그들 자체도 불가사의하고 도달할 수 없는 힘들에 도달하는 것을 마치 자신들의 임무처럼 생각한다. 특히 국민성의 감정이 또는 종족의 감정이 사건들의 직접적인 힘들처럼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로부터 이다. 각자가 자기 속에서 그 힘들을 마치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구성하는 것처럼 재발견하는 것이다. 역사는 과학보다 더 많은 신앙이 되고, 호기심 보다 더 많은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헤겔 같은 이 또는 꽁트 같은 이는, 이들이 역사를 생각하는 대로 발전의 계열 속에서 들어가지 않는, 예를 들어 선사시대 또는 극동의 제국들과 같이 계열 속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사건들을 마치 역사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재빨리 물리치게 하였다. (510)
“인민의 정신”, 민족, 종족, 인류와 같은 역사적 힘들이 실현하는 학설들에게, 자연과 자연적 힘들 속에서 안정되고 영속적인 실재성을 보는 자연 철학이 상응한다. 거기에서 또한 사람들은 통일성을 흩어짐에, 역동론(le dynamisme)을 기계론과 자동주의에 대립시킨다. 그러나 특별한 종류의 역동론은 사람들이 라이프니츠에게서 또는 뉴턴에게서 이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동력학]과는 매우 다른 것인데, 이들에게서 힘들은 계산에 복종되어 있는 동력학(un dynamisme)이다. 중요한 것은 거대한 저장고라는 것인데, 여기서 자연의 존재들은 자기들의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즉 우주의 영혼 즉 삶의 의지를 길어 올린다. 어째거나 역동론을 가지고, 르네상스의 생기론과 비슷한 진실한 생기론을 만드는 생물학적 질서의 본징을 길어 올린다. (510)
인간 지성의 반성적 조합들을 향한 불신과, 불신을 넘어서려는 불가사의한 실재성에 대한 믿음, 이러한 것들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특징들이다. 믿음은 인간적 무능과 도달해야만 할 것의 높이[상층] 사이의 대조로부터 다소 신중하게 고생스럽기도 하지만, 감정 없이, 의심들 없이 나아가지 않는다. 열광주의자들과 메시아들[구원자들]에 마주하여, 세낭꾸르(1770-1846) 같은 이, 뮈세(1810-1857), 같은 이, 비니(1797-1863) 같은 이의 부서진 심장들과 “세기의 어린이들”과 절망하는 자들이 있다. 이런 자들의 사유에는 끊임없이 철학을 스쳐가면서도, 철학의 임무의 난점에 대해 마치 연속적 경고처럼 철학이 있어야만 한다. 이미 세낭꾸르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사람들이 체득하는 것과 사이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제공되는 것의 연약함과 사람들이 스스로 제안했던 것의 폭[확장] 사이에, 대립 속에서” 자신의 영속적 지겨움의 원인을 찾았다.했다. 세낭꾸르의 진실한 잘못은 확고한 찬동[신봉]을 할 수 없는 의지의 연약함이다. “믿는다는 것, 그것이 도대체 의지에 의존했던가?” 그는 빠스깔의 도박 논증에 반대했다. 열기 없음[무사태평]으로, 그는 반대 체계들에 의해 유혹을 받는 체 남아있었다. 그가 비난에 대한 대답으로 쓰기를 “거기에 모순은 전혀 없다. 내가 당신에게 체계들을 마치 가설들처럼 줄 뿐이다. 내가 이것들 둘 다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이 체계도 다른 체계도 실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그는 절망에 상당히 가까운 일종의 스토아주의에 이르렀다. 이 스토아주의는, 강조하지 않더라도,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 1797-1863)의 것에 매우 가깝다. (511)
만일 당시에 이런 사유의 요청들이 절망과 부인을 대척점으로 삼는다면, 또한 이 요청들은 계시주의, 야바위 짓(charlatanisme), 모든 거짓 열광주의의 발전을 허용해 준다.이 시기에 사람들은 수많은 사회적 만병통치약(la panacée)의 판매자들, 곡해된 천재들, 자신들의 매우 높은 신앙을 고백하는 개종자들을 본다. 침묵 속에서 지내는 것이 편하지 않는 어둠[그림자]들도 거기에 있다. 허약한 의지의 존재인 오베르만 다음에, 야망을 지닌 위선가이며, 강한 의지를 지닌 서민인 줄리앙 소렐이 온다. 그는 자기 용모의 최소한의 몸짓에까지도 조심하면서 믿음의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511)
여기서 [다음의] 모든 것이 성립된다: 체계들의 발명자의 메시아적 오만, 전통주의자의 열성(la ferveur), 믿을 수 없는 인간의 절망, 새로운 신앙 주위에 선전(la réclame), 영혼과 직관의 영역에서 지성의 그 위에 또는 그 아래 항상 있는 의지. 이것은 대조를 이루는 격렬한 감정들의 일체이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들을 낭만주의라, 즉 사람들이 문학적 이론으로 잘못 취급하였을 일체의 운동이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사유와 감정의 모든 방향들에 감화시켰다. 그리고 운동의 깊숙하고 집중화된 열기를 가지고, 운동의 토대적인 중요성의 감정을 가지고, 체계들의 무게를 가지고, 시대의 철학적 운동은 낭만주의 없이는 그래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당시에 번창하던 낭만주의의 접근에서, 쓰라린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히 분명한 표본을 본다. 이 표본은 사유의 진화에서 진동의 법칙의 표본인데, 까자미앙(Cazamian. 1877-1965)은 영국 문학의 역사에 관해서 이런 사유의 진화를 표현했다.반성과 비판적 분석이 한 시대의 지배적인 특성들이었을 때, 다음 시대는 그 감정, 무매개적 직관, 행동과 꿈의 취향, 보편적 체계의 열망 등을 위한 시대의 편애(la prédilection)를 표시한다. 감정, 꿈, 행동, 이런 것들은 괴테(Goethe, 1749-1832)가 지식에 의해 메말라진 그의[파우스트의] 영혼을 다시 젊게 하는 파우스트를 제시하는 근원들이다. 마술적 예술은 자연의 최고의 권능들에, 즉 온어머니들(les Mères)에 도달하면서, 모든 변신작업들을 조작하여 스스로 할 수 있게 하면서, 그 마술적 예술이 그 시인[괴테]의 상상작업에서 표면에 남아있는 죽은 지식을 대신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의 계속적인 두 드라마에서, 평범성이 박탈되어 간결하면서도 여러 스타일들로 되었던 시대의 모든 경향성들이 나타나는지를 안다. (512)
새로운 경향성들에 새로운 문학 형식들이 나타난다. 디드로의 날개달린 듯 한 경쾌함, 볼떼르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스타일, 대중들에게로 방향잡은 많은 작품들에서 분명함과 간결함의 탐구, 이러한 모든 것은 상위 정신의 표시로서 나타난다. 샤또브리앙(Chateaubriand, 1768-1848)또는 괴테와 같은 선량한 작가들은 철학자들에게서 적어도 예외적인 것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이 찰나에 철학은 착한 선전의 목소리의 음색을, 특히 프랑스의 영향 하에서 16세기 이래로 획득했던 기술(le technique)에 대한 경멸을, 상실한다. 거북함(la gêne, 당혹), 고생(l’effort, 노력, 분발), 새침함(le gourmé), 상투적인 것(le convenu)등은 편안과 자연적인 것을 대체했다. 사람들은 멘 드 비랑의 영속적인 강압(la contrainte, 강제)을 고려하는 것도, 아마도 그의 편에서는, 그의 사유가 다음을 끊임없이 회피하려 할 것도 같다: [그 다음이란] 즉 제국의 대학 교육에서 혁명적인 과장법에서 나온 빅토르 꾸쟁의 수사학도 회피할 것이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서 노발리스(Novalis 1772-1801)이래로 오귀스뜨 꽁트에까지 도덕적 개혁 또는 역사의 철학에 대해 사회적인 유행을 탄[깃털을 단] 모든 저자들에게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예언적이고 묵시록저인 말투도 회피할 것이다. 볼떼르, 디드로, 루소는 그들의 작품들 속에서, 그들 자신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을 사건들[혁명들]을 위한 분위기를 창조했던 반면에, 반대로 우리의 철학자들은 아직도 도달하지 못했던 사건들을 확신을 가지고 알렸다.그 철학자들은 그들의 거칠한 학설들과 더불어, 상당히 미약하고 또한 적어도 범위가 좁은 무매개적인 영향을 일반적으로 행사하였다. 도처에서 역사적 숙명의 관념이, 저항들이 스스로 역할 하는 내재적 법칙의 관념이, 인간적 의지들의 반성적이고 합리적인 주도권 속에서 신앙을 대체하였다. 이 운명, 즉 마치 꽁뜨, 생시몽, 푸리에처럼 보날 또는 메스트르 각각도 이 운명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또한 18세기의 철학자들과 반대로 그들은 종종 행동하는 인간들이라기보다 더 사변적 철학자들이이었고, 선전가들 또는 팜플랫 출판자들이라기보다 더 골방의 철학자들이었다. (512) (5:30, 57QKHI)
** 인명 및 고유명사
1623 파스칼 (Blaise Pascal, 1623-1662)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공기의 기압을 실험하기도 하였다. 쟝세니스트로서 크리스트 신비주의에 빠졌다. 이상하게도 그의 글은 다른 철학자들의 글과 마찬가지로 로마 교황청의 금서목록에 계속 올랐었다.
1627 보쉬에(Jacques-Bénigne Bossuet, 1627-1704), 프랑스 주교, 루이 14세의 아들 가정교사, 보편사 담론(Discours sur l'histoire universelle, 1681)
1694 볼테르(Voltaire, 본명 François-Marie Arouet, 1694-1778) 계몽주의 사상가. 정의와 관용의 철학자. 민족들의 정신과 풍습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
1712 룻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프랑스 18세기 절대왕정 시대, 사회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니고, 인민의 자아의식의 성장을 직감했던 계몽의 철학자.
1713 디드로 (Denis Diderot, 1713-1784), 계몽주의시기 프랑스 백과전서파 철학자.
1714 꽁디약(Etienne Bonnot de Condillac, 1714-1780) 감각론자. 인간 인식의 기원에 관한 시론(Essai sur l’origine des connaissances humaines 1746)
1724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현재로는 폴란드보다 더 동쪽에 있는 쾨니히스베르그 출신의 프러시아 공화국의 철학자이다. 인간의 표상적 인식의 조건을 규정하고, 도덕적 이성의 신에게 종속을 요청하고, 미적으로 신의 작업의 숭고함에 경건하게 기도하는 듯이 긍정한 프로테스탄트 철학을 구성하였다.
1749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의 고전주의 성향 작가이자 철학자, 과학자이다.
1753 메스트르(comte Joseph de Maistre 1753-1821), 프랑스 정치가, 보날과 함께 프랑스혁명의 반대자였다.
1754 보날(Louis Bonald 1754-1840), 프랑스 철학자. 그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 루소처럼 계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했다.
1760 생시몽(Comte de Saint-Simon, Claude Henri de Rouvroy de Saint-Simon, 1760-1825)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 역사는 지속적으로 진보한다는 역사의 발전적 전개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비산업 계급과 산업 계급이 투쟁하던 과거를 개선, 양자가 협력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하였다.
1762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독일 관념론 철학자.
1766 맨 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은 ‘自我의 哲學者(philosophe du moi)’이다 {멘느 드 비랑 프랑스 유심론 철학자}
1768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vicomte de Chateaubriand, 1768-1848),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이다. 《무덤 너머의 회상》
1770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프랑스 혁명에서 인민의 자유를 너머 멀리서 바라보면서 인간의 정신이 신의 인격에 이를 것으로 만든 또 하나의 토마스 주의자로 철학을 하였다. 그는 프러시아 통일의 영광을 만들기 위하여 루터파 교리에 맞추어 신의 절대성을 강조한 근대판 교부 철학자이다. 역사철학 강의(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1822–1831, 1937년 출판), fr. La Philosophie de l'histoire.
1770 세(스)낭꾸르(Étienne Pivert de Senancour, 1770-1846) 프랑스 초기 낭만주의 작가. 루소를 열광했다. 소설(Oberman, 1804)(영어제목? 과도한 인간?)
1772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 프랑스의 사상가(1772~1837).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자유로운 생산자의 협동조합인 팔랑지(phalanxes)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4운동의 논리》, 《산업적 조합의 신세계》
1772 노발리스(Friedrich von Hardenberg, Novalis 1772-1801), 밤의 찬가 Hymnen an die Nacht(1800).
1775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 독일의 철학자 우리나라에서 헤겔에 가리워 잘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이다. 그는 자연철학에서 정신철학으로 나아가면서 브루노와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결합하려는 경향이 있다.
1776 발랑쉬(Pierre-Simon Ballanche, 1776-1847) 종교적 사회적 철학자. 그는 낭만주의적 저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19세기 초엽 프랑스 사상에 중요한 역할을 함. (en.Wiki 반혁명가로 소개됨)
1792 쿠쟁(Victor Cousin, 1792-1867) 프랑스의 철학자. 절충주의자이다.
1797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 1797-1863), 프랑스 시인 「늑대의 죽음(La Mort du loup, 1843)」(스토아주의 장편 시).
1798 꽁트(Auguste Comte, 1798-1857), 프랑스 대혁명과 그리고 18세기 혁명의 과정에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체험하고,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며 역동적인 조직의 변화를 설명하는 사회학을 창설하였다. 그런데 한 여인에 사랑에 빠져 이 사회학을 종교화하려 했다.
1798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 프랑스 역사가, 실증사가. 혁명사 전문
1801 꾸르노(Antoine Augustin Cournot, 1801-1877), 프랑스 수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수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철학에서 본질과 우연과 다른 자연현상 속에서 요행과 우연에 대한 방식을 수학적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이 법칙 없는 현상이 합리적 사유로 불합리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률과 개연성의 개념을 설명한다.
1803 끼네(Edgar Quinet 1803-1875) 프랑스 작가, 역사가. 철학자, 공화파, 반성직자주의자.
1810 뮈세(Alfred de Musset, 1810-1857),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1815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 1815-1903)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의 작품이 있다.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유태인 출신 독일 철학자. 인간의 자의식이 자유 절대성이라 믿기보다, 사회라는 공시태가 발전하면서 역사적으로 자유를 점점 더 실현한다고 보았다. 이 공시태의 변화를 노동과 생산을 중심으로 한 생산양식의 변화라 하며, 최종 양식이 공산주의이다. 인민이 이런 변화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루소 다음으로 낙관적이다. 그의 철학은 신과 관념에 의존하지 않는 자연주의 전통에 선 생성 철학이다.
1820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영국의 종합철학자, 진화론의 개념을 창안
1823 르낭(Joseph-Ernest Renan, 1823-1892) 프랑스의 사상가, 종교사가, 언어학자. 프랑스 실증주의 대표자의 한 사람. 그리스도교 기원사, 7권, 1863~1883).
1828 뗀느(Hippolyte Taine, 1828-1893) 프랑스 철학자 역사가 비평가이다.
1823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 독일 문헌학자, 동방학자. 인도연구 및 비교 신화학 연구자.
1875 앙드레 까자미앙(André Cazamian, 1875-1944), 프랑스 시인. .
1877 루이 까자미앙(Louis Cazamian, 1877-1965), 프랑스 작가, 문학비평가, 앙드레의 동생.
1884 Louis Cazamian (1877-1965)의 부인 마들렌(Madeleine Cazamian, née Clédat, 1884- 1979)도 영국문학전공자, 특히 19세기 영어권 문학 전공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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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 1808, 1832파우스트(Faust) 괴테(1749-1832)의 두 편의 극작품(1808 et 1832)이다. 그는 1773 et 1775에 초기 파우스트(Urfaust, Faust primordial)를 썼고 1790년에 파우스트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1808년에 비극 파우스트 I를 1832년에 유고로서 파우스트 II를 냈다. - 파우스트 작품을 크리스트교 심화의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이경우는 파우스트 I과 II의 종합을 의미할 것이고, 후기에와서 괴테가 자연주의에서 멀어지고 관료주의의 안락을 즐겼다고 하는 것과 일치할 것이다.
1804 소설(Oberman, 1804)(영어제목? 과도한 인간?), 프랑스 초기 낭만주의 작가인 세(스)낭꾸르(Étienne Pivert de Senancour, 1770-1846)의 작품이다.
1830 쥘리앙 소렐(Julien Sorel, 1830): 스땅달(Stendhal, Henri Beyle, 1783-1842)의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 1830)의 주인공. (3:04, 57QKF) (3:18, 57QKH)
(8:07, 57QKH)
* 제1장에는 참고문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