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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여정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나야풀에서 시작해서 ABC까지 올라 갔다가 내려올 때는 촘롱에서 지누단다 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지도상에 붉은 선으로 표시한 부분은 자동차로 이동한 것입니다. 나야풀까지 짚차를 이용했고 나야풀에서는 버스를 타고 비레틴티를 거쳐 포카라까지 갔습니다. 본래 계획은 나야폴로 직접 가도록 짜여져있었으나 학교 방문을 위해 비레틴티에 들렸습니다.
이글은 함께 했던 분들과의 추억이 잊혀지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트레킹을 계획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올렸습니다.
2017년 1월 13일부터 23일까지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트레킹에 참여 했던 분들의 글과 사진을 토대로 쓴 것입니다. 특히 사진은 단 한 장도 제가 찍은 것이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혹시 불편한 글이나 사진, 잘못된 표현이나 편견 등이 발견될 때는 즉시 알려주십시오. 사진의 경우는 바로 삭제하고 글은 확인후에 삭제하거나 수정하겠습니다.
1월 10일(화)~1월 13일(금) LA에서 카트만두까지
버켓 리스트의 하나를 해결한다는 기대에 부풀어 상하이까지 어떻게 날아갔는지 모른다. 중국 관리들은 비행기를 바꿔타기 위해 1시간을 머무르든, 2시간을 있든 간에 무조건 입국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지난해 6월에는 그저 간단한 절차만 밟고 다음 비행기 타는 곳으로 가게 해주었는데 사람 성가시게 한다. 작년에 환승객들을 도와주던 창구에는 근무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관리들에게 나는 곧 비행기를 타야한다고 얘기했으나 무조건 줄을 서서 절차를 밟으라고 했다. 결국 타야할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6시 30분에 도착해 8시 30분 쿤밍행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게이트에 도착하니 비행기 문을 닫았다며 다음 비행기를 이용하란다. 오후에 간신히 쿤밍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쿤밍에 도착해서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LA에서 부친 짐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예정된 비행기를 놓쳤으니까 짐은 이미 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히 LA에서 탑승권을 발급하는 직원이 쿤밍에서 짐을 찾은 후 다시 체크인하고 카트만두까지 가는 항공권도 다시 발급받으라고 했었다. 일단 분실신고를 했다. 그리고 카트만두 행 비행기 편을 알아보니 다음날 11시 30분이라고 했다.하루를 쿤밍공항에서 지내야 했다. 이리 저리 누울만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바닥에서 잠시 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11시 30분 비행기도 탈 수 없었다. 차이나 이스턴 항공사 직원들의 부주의로 게이트까지 두 번씩이나 왔다 갔다 했지만 탈 수 없었다. 결국 2시 30분 비행기에 간신히 오를 수 있었다.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다. 네팔 비자를 공항에서 바로 신청했다. $25. 컴퓨터에 자신의 신상을 기록하고 어디 머무를 곳인가를 적으면 된다. 비자를 받고 입국심사를 받자마자 차이나 이스턴 항공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내 짐이 도착했는가 물었다.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내일쯤 도착할 것 같다고 했다.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카트만두 국제공항은 그 시설이 너무 지저분하고 초라했다. 화장실을 가보고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세상에 1960년대 한국의 공중화장실보다도 더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악취는 코를 찌르고 배설물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소변보러 갔다가 그냥 나오고 말았다. 도저히 단 몇 십초도 거기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공항에서 함께 트레킹할 일행을 만났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네팔의 민속 공연을 보면서 네팔 전통음식을 먹었다. 춤추며 부르는 노래는 ‘렌섬 삘리리’ 기분이 좋아 날아가는 것 같다는 내용이라는데 네팔 고유의 옷을 입은 남녀가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추는 춤이었다. 일행 중의 두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 함께 추게 했는데 그들의 춤이 무용수들보다 더 정성이 담겨 있었고 우아하고 멋져 보였다. 식사를 마친 후 호텔로 갔다. 집에서 떠난 지 거의 이틀 만에 잠자리다운 잠자리에 누웠다. 세상모르게 골아 떨어졌다.
네팔의 민속 공연을 보면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팔의 전통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어느새 다 먹었네요.
1월 14일(토)
카트만두-포카라(820m)-나야풀(1070m)-비레탄티(1025m)-힐레
카트만두에서 하루 자고 비행기를 타고 포카라로 향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눈 덮인 히말라야는 장관이었다. 끊임없이 높고 낮은 산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마차푸차레가 아주 가깝게 보인다.그 이름대로 물고기 꼬리처럼 보인다. 네팔 말로 ‘마차’가 물고기, ‘푸차레’가 꼬리라고 한다. 신성하기 때문에 등정을 금지하는 것인지, 등정을 금지했기 때문에 신성해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마차푸차레는 등정을 금하고 있다.
미국에서 부친 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포카라에서 등산 장비를 구입해야만 했다. 꼭 필요한 몇 가지 물품을 구입하고 버스를 타고 나야풀로 향했다. 나야풀에서 포터들과 취사팀을 만났다. 우리 일행 20명의 짐을 운반할 포터가 16명, 취사팀이 9명, 우리와 함께 걷는 가이드들이 4명, 가이드 대장 1명, 총 30명이 우리와 함께 움직인다.
나야풀에서 30분쯤 걸었을까 비레탄티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취사팀이 만든 첫 점심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그 어디에서 먹었던 비빔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완벽한 한국 전통 비빔밥이었다. 나물에 고명에 달걀까지 제대로 얹어 있었다. 산행 기간 중에 모든 식사를 한식으로 한다고 했지만 비슷하게 흉내나 낼 것이라고 예상했던 일행들은 모두 감탄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칠 때쯤 숭늉까지 대령시키는 바람에 다시 또 감탄은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나른한 몸을 주체하지 못해 몸을 비비 틀고 있을 때 검정 개 한 마리가 마당 한 구석에 들어섰다. 사람들은 개에게 관심을 보이며 모여들었다. 먹던 음식을 나눠 주는 사람도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개를 쓰다듬으며 친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검정개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전 일정을 우리와 함께 했으며 하산 길에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사이 취사 팀이 출발했다. 그들은 취사도구 및 장비, 식재료 등을 들고 숙박 장소로 먼저 가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식사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엄홍길 휴먼재단이 설립한 비레탄티 세컨더리 학교를 방문했다. 일행들이 준비해온 학용품을 전달하려고 했는데 토요일이라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네팔은 토요일이 휴일이다. 일요일이 한 주일의 시작이고 학교도 정상 수업을 한다. 그래서 학교 앞의 점포라고 생각되는 집에 학용품들을 학교 측에 전해달라고 맡겼다.
바레탄티에서 힐레로 가는 길은 넓고 평탄했다. 가끔 자동차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서 조금 불편했으나 그리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산행중의 첫 번째 숙소, 네팔에서의 두 번째 밤은 힐레의 롯지에서 맞이했다. 저녁식사는 돼지고기 수육이 나왔다. 상추쌈에 돼지고기 한 점을 놓고 잘 버무려진 맛장을 얹어 먹는 맛이 기가 막히다. 음식 맛에 흠뻑 빠진 일행 중의 한 사람은 주방장을 불러 금일봉을 주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잠깐 대화의 시간이 있었다. 이때 여자 한 분이 일어나서 내게 대놓고 따지듯이 말했다. 오늘 낮에 포카라에서 버스를 세워 놓고 쇼핑하는 바람에 일행들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무조건 죄송하다고 했다. 두 손 모아 사과했다. 그리고 간략하게 왜 많은 분을 기다리게 하면서 쇼핑을 해야 했는지 내 처지를 설명했다.
덕분에 모든 분들이 미국에서 부친 짐을 못 찾았고, 셀폰도 잃어버렸다는 나의 딱한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많은 구호물품이 답지(遝至)했다. 휴지와 물티슈, 각종 간식거리에서 컵라면에 이르기까지 갑자기 행복해졌다. 그 분이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내 처지를 모르고 자신들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음에 불쾌한 감정을 계속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사람 사는 곳에는 대화가 필요하다. 그 분은 내 처지도 모르고 그런 말을 했다며 몹시 미안해 했으나 어찌 그것이 미안해 할 일인가. 단체 생활을 하는데 19명을 기다리게 하고 1명이 자기 편의를 위해 시간을 허비 했으니 당연히 따질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노랫소리와 떠드는 소리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흥겹게들 논다. 부실한 체력을 탓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룸메이트는 코도 비교적 크게 골면서 아주 달게 자고 있다. 코고는 소리는 내게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소리도 상관없다. 자려고 마음만 먹고 머리만 바닥에 닿으면 잔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1월 15일(일)
힐레-팅게퉁가(1540m)-울레리(1960m)-반탄티(2300m)-고라파니(2750m)
옆방이 소란하다. 라면을 끓이려고 부산을 떠는 듯하다. 꼭두새벽에 라면이라. 옆방으로 건너갔다. 포항에서 온 두 사람이 형 동생하면서 수십년 전부터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두 분다 꽤 연세가 들어 보였다. 한국 사람들은 만나면 나이부터 묻지 않던가. 내게 나이를 물었다. 몇살이냐고. 몇년 생이라고 하니까 두 사람이 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형님!'이라고 했다. 두 분은 나보다 한참 젊은이들이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객지 벗은 나이와 무관하다. 오히려 젊은이들과 친구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가? "무슨 소리냐?"고. 그냥 "우린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라면을 먹었다. 두 사람은 아침부터 플라스틱병에 든 소주 큰 병, 한 병 다 비웠다. 아침부터 지나치게 술을 마신다고 생각했는데 아랫층 홀에서 밤새 춤추며 소란스럽게 놀던 분들이 바로 이 분들이었다. 밤새도록 마시고 해장술을 마신 것이었다. ㅎㅎㅎㅎ.
아침식사도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라면을 잔뜩 먹고 밥도 많이 먹은 탓에 팅계퉁가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숨이 찼다. 등굣길의 학생들을 만났다. 티 없이 맑은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다. “나마스떼”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단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계단이 끝나고 잠시 평지를 걷다보면 바로 계단이 나타났습니다. 지형이 워낙 경사가 심한데 길을 만들어야 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전 일정 동안 하루 일과가 똑 같이 반복되었다. 아침 식사 후에 산행을 시작해서 중간에 한 번 쉬면서 차를 마시고, 다음 롯지에 도착하면 점심을 먹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산행, 중간에 차 마시며 한 번 쉬고, 또 걷는다. 저녁 먹고 롯지에서 잔다. 일행은 취사팀이 요리해서 상을 차려준다. 그리고 포터와 취사팀은 롯지에서 식사를 사먹는다. 그 대가로 롯지에서는 그들에게 하룻밤의 숙박을 제공한다. 물론 우리들은 숙박비를 따로 지불해야 한다.
계단, 계단, 끊임없이 계단이 나왔습니다. 걷고 걷고 또 걸어야 했습니다.
현지에 사는 네팔 사람들은 이렇게 나뭇짐을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계단, 지긋지긋합니다.
반단티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라면이 나왔습니다. 히말라야 산속에서 라면에 김치라. 부러울 것이 없지요. 라면을 거진 다 먹어갈 무렵 밥을 달라고 해서 국물에 말아 먹었습니다. 꼭두새벽에 라면 먹은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나면 꼭 과일이 나왔습니다. 사과, 오렌지, 감귤, 기타 등등 심지어 과일 통조림까지
반단티에서 고레파니까지는 울창한 랄리굴라스 숲이다. 랄리굴라스는 네팔을 상징하는 빨간 꽃이다. 숲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최대한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무사히 ABC까지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인솔자를 비롯해 일행들은 늘 뒤에 쳐져 천천히 걷는 나를 무척 걱정하는 눈치였다. 빨리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리해서 걷다보면 무릎에 통증이 오게 되어 전 구간을 망칠 수 있어 조심스럽게 걸을 뿐이다. 무리해서 그들의 속도에 맞춰서 걸을 이유는 없다.
점심먹고 가다가 또 잠시 쉬었습니다. 쉴 때마다 꼭 뜨거운 차가 나옵니다. 짜이(밀크 티)나 오렌지차.
닭은 어디나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포터들도 쉬었다 갑니다.
고레파니에도 제일 늦게 도착했다. 일행들은 난로 주위에 둘러 앉아 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대부분의 롯지에 난방시설이 없었으나 고레파니의 롯지에는 난로가 있었다. 귀퉁이에 앉았다. 분위기가 엄숙했다. 일행 중 누군가가 갖고 온 박재현 시인의 시집 ‘히말라야’를 돌아가며 낭송하고 있었다.
산 거기에 가고
또 가서 두고 오려고 해도
돌아보면 늘 따라오는
내속의 나 두고 오려는 마음’ -박제현 시인의 시 중의 일부-
고레파니 도착을 알리는 환영문
안나푸르나에서의 일이란
오로지 걷는 일
걷는다는 거
길을 걷는다는 거
道를 닦으며
무심으로 걷는다는 거
-박제현 시인의 시 중 일부-
일행중의 가장 막내인 명인씨가 시를 낭송하고 있습니다. 명인씨는 대학 재학중에 휴학을 하고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복학하기 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볼 겸, 히말라야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20대 중반, 맨 앞에서 날라 다녔습니다.
저녁식사로 나온 닭도리탕
난로가 있어도 춥습니다. 난로 근처만 따뜻할 뿐.
해발 ,2750미터인 고레파니는 푼힐 전망대(3,201미터)를 오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다. 대부분의 롯지에는 난로가 없었으나 고레파니 롯지에는 장작을 때는 난로가 있었다. 식사 후에 난롯가에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방으로 올라와 잠을 청했다. 이틀을 다 이층에서 잤다. 무지무지 하게 추웠다. 옷을 다 입고 침낭에 들어가 발치에 핫팩을 하나 두고 다른 핫팩을 껴안고 자도 새벽이면 추웠다.
이 글 속의 사진은 모두 함께 걸었던 분들이 찍은 것입니다. 그분들이 단톡방에 올린 것이나 제게 보내준 사진을 임의로 사용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히는 바입니다.
푼힐 전망대 1월 16일(월)
푼힐 전망대(3,210미터)에 오르기 위해서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손전등이나 헤드램프를 준비하라고 했지만 도착하지 않은 짐속에 들은 관계로 달빛에 의지해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달빛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사람들의 이마와 손에서 번뜩이는 불빛이 정면으로 나를 향할 때는 눈이 부셔서 불편하게 느껴졌다.
계단이 많고 경사가 심했다. 1시간 30분 정도 걸어 오르니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이 춥기 때문에 단단히 챙기라고 해서 옷을 두껍게 입고 올랐는데 생각보다 춥지는 않았으나, 바람이 손과 뺨에 닿을 때마다 차갑게 느껴져 장갑을 끼고 모자를 써야했다.
드디어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태양 빛을 받으면서 봉우리들은 모두 꼭대기부터 서서히 환하게 타올라 아래로 아래로 그 빛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주변과 비례해서 산의 어둠이 위에서부터 걷히고 있었다.
왼쪽부터 다울라기리, 툭체, 닐리기리, 안나푸르나 남봉, 마차푸차레 등 히말라야의 영봉(靈峰)들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모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안나푸르나 남봉은 구름으로 살짝 가려져 신비함을 더하고 있었다. 때로는 보일 듯 말 듯 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보다 더 매혹적이지 않던가.
한국에서의 일출이 대개 해가 떠오르는 것을 감상하는 것이라면 이곳에서의 일출은 햇빛을 받아 각 봉우리와 산들이 서서히 변화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도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잡기도 한다. 그러나 뜨는 해보다 빛을 반사하는 산들의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누구나 입을 열어 말을 하면 시가 되어 나왔다. 모두가 시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넋도 혼도 다 빠져 버려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호흡도 멎었다. 아름다움은 혼을 빼버린다. 정신 줄을 놓게 만든다. 사람들의 소리가 멎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근사한 찬사는 입을 꼭 다무는 건가 보다. 모두 다 대자연이 펼치는 웅장한 연주를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히말라야에는 뷰포인트가 5곳이 있다고 합니다. 푼힐 전망대, 촘롱, 타다파니, 간드렁, 담푸스. 이중 으뜸이 푼힐 전망대의 일출이라고 합니다. 산 봉우리들이 좌우로 펼쳐져 있어 한 눈에 볼 수 있고 특히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빛에 의해 변하는 산맥의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쉬었다가는 코너-히말라야에서 먹은 음식들
일요일입니다. 산으로 가려다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만 시간을 놓쳤습니다. 오늘은 음식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무리 생각만으로 그때를 기억하며 걷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하루 쉬고 싶네요.
히말라야에서 먹은 음식들에 관해 얘기합니다.
나야폴에서 이번 트레킹 팀의 주방장이 해주는 첫 점심을 먹었다. 네팔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한국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모두 탄성을 질렀다. 그래도 그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열흘 동안 단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단 한 끼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점심으로 나온 수제비가 맛있어 앙콜 요청해서 두 번을 먹었으나 처음 맛이나 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먹었던 수제비 중에 최고였다. 그 기가 막힌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비빔밥, 김치 볶음밥, 심지어 국수까지도 짜지도 않고 맵지도 싱겁지도 않은 그야말로 짱이었다. 매끼를 맛있게 먹었다. 국수, 수제비, 라면이 나오던 때를 빼고는 매끼마다 밥과 국이 빠지지 않았는데 단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라면국물에다 밥도 말아 먹었다.
미역국, 무국, 콩나물국, 된장국, 김칫국, 닭백숙, 돼지 수육, 염소 수육과 탕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각종 나물 무침, 두부 부침, 감자전까지도 완벽했다. 만일 또 히말라야에 간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이 주방장을 섭외해서 모실 생각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제가 직접 찍은 것이 아니며 일행들이 보내주신 것과 단톡방에 올린 것을 임의로 발췌한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앞에서 소개했지요. 첫날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간 식당에서 먹은 음식입니다. 공연을 보면서 먹었지요.
앞에 올렸던 사진을 또 올렸네요.
인솔자 오영철씨가 직접 백숙을 먹기 좋게 만드는 중입니다. 뜨거운 것을 비닐 장갑을 끼고 사람들이 먹기 좋도록 만들었지요.
고도가 높아 가능한한 음주를 삼가하려고 했는데 이날 그만 유혹에 빠졌습니다. 다음날 큰 지장이 없었습니다.
피자는 마지막날 밤에 롯지에서 사먹은 것입니다. 아주 맛있었어요. 직접 구운 것임.
산에서의 마지막날 밤, 염소를 두 마리 잡았습니다. 그 염소 다리를 들고 화이팅을 외치고 있습니다.
열흘 동안 밥을 해준 주방장입니다.
어느날 점심식사 시간입니다.
요것도 점심식사하는 장면이네요.
식사후에 달콤한 휴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어느날 밤
이런 밤도 있었네요. 산에서 마지막 밤입니다.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을 포카라에서 보냈습니다. 이별을 아쉬워 하면서 술을 빠트릴 수 없지요.
삼결살 파티를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 오는데 포항에서 오신 분이 가볍게 한 잔 더 하자고 해서 와인을 한 잔 나누었습니다.
1월 17일(화)
고레파니(2750m)-푼힐전망대(3210m)-데우랄리(2990m)-반탄티(2520m)-타다파니(2590m)-추일레(2060m)
일출을 보면서 받은 감동도 잠시 오늘은 꽤 오랜 시간을 걸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필이 확 왔을 때 글을 남겨남야 하나 보다.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써둬야 멋진 글이 될테니까.
부지런히 롯지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1시간 30분 이상 걸어 올라갔었지만 내려오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모두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레파니(2750m)에서 데우랄리(2990m)까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는 능선길이다. 아침에 일출을 보러 올라갔던 푼힐에서 바라다 보이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히말라야의 영봉을 계속 감상하며 걸었다. 감탄이 그치지 않고 이어진다. 사진기들도 쉴 틈이 없다.
사진기는 고사하고 셀폰마저 분실한 처지이다 보니 사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 너무 좋았다.뿐만 아니라 롯지에만 도착하면 와이파이를 연결하려고 분주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 자유로움을 즐겼다. 셀폰으로부터의 해방, 그래서 다시 돌아가면 전화기를 옛날에 쓰던 똑딱이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참고로 롯지에서 돈을 받고 와이파이를 연결해주었다. 낮은 곳은 100루피, 높은 곳은 150루피를 받았다. 주인이 패스워드를 알려주지 않고 전화기를 달라고 해서 직접 연결해주었다.
1달러가 100루피 보다 많은 액수라고 하는데 편의상 100루피하면 1달러라고 생각하고 사용했다. 나는 조금 손해지만 네팔 사람은 이익이니 큰 불편함이 없었다.
한국에서 16년 살다온 가이드 Biru씨
룸메이트 사진작가 이권훈씨와 가이드 나왕누리. 나왕누리 군은 카트만두 대학교 사진학과에 재학중인 학생이었습니다.
본래 나의 산행 방식이 쉬지 않고 목적지까지 천천히 걷기, 빨리 걷기를 번갈아하면서 걷는다. 걸으면서 쉬는 스타일이다. 쉬었다가 걸으면 더 힘이 들고 다시 페이스를 찾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말라야에서는 휴식시간이 기다려졌다. 뜨거운 차 한 잔에 피로를 날려 버리고 다시 걸을 수 있어 좋았다.
달콤한 휴식 시간/자세히 보니까 어딘가에 저도 있네요.
길 한 복판에 앉아 대나무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네팔 사람들은 대나무를 사용해서 많은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능선길 따라 한참 걷다가 그 경치도 그저 그렇게 보이기 시작할 무렵 계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것도 자꾸 보면 그것이 아름다운지 잊게 마련이다. 원시림이 울창한 가파른 계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음지다 보니 눈이 녹지 않고 덮여 있었다. 또 낮에 녹고 있다가 밤사이에 기온이 떨어져 다시 얼기도 했을 것이다. 미끄러웠다. 한 번 멋지게 자빠졌다. 맨 뒤에 걷다보니 가이드 외에 본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오랜만에 자빠졌다. 언젠가 산에 갔다가 눈길에 자꾸 자빠지던 친구가 생각났다. 미처 아이젠을 준비하지 않았던 까닭에 자꾸 넘어지고 자빠지는 친구를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중학교 동창생, 친구와 연락한지도 꽤 오래 되었다. 돌아가면 친구에게 전화라도 해야겠다.
숙소에 도착해 넘어졌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넘어졌다고 했다. 무릎을 다친 분도 있었다. 몸의 여기 저기 살펴봤으나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다 내려왔다고 생각하면 또 오르막이 시작된다. 내리막과 오르막이 계속되는 계곡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본래 타다파니(2590m)에서 잘 계획이었으나 연결이 잘되지 않았는지 좀 더 걸어야 한다고 했다. 추일레(2060m)까지 걸어야 했다. 예정보다 1시간 이상 더 걸어야 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맘 때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이 심란할 때다. 어려서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놀다가 엄마가 밥먹으러 들어오라고 부를 때, 해질녘.
해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목적지는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고 그냥 터덜터덜 걷고 있자니 왜 여기와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부친 짐도 못 찾고, 셀폰도 잃어버리고 무릎도 시원찮고, 나이도 제법 먹은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식구들은 잘 있나. 회사는 잘 돌아가고 있을까.
어둠은 서서히 찾아 오는 것 같지만 한 번 깔리면 순식간에 세상을 까맣게 덮어버린다. 빛이 힘을 거의 잃어 갈 무렵, 숙소가 보일 듯 말 듯 할 때, 취사팀 몇 사람이 뜨거운 차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맨 뒤에 터덜터덜 걸어 들어가면서 그들을 보며 다 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차를 한 잔 받아 마셨다. 파란 지붕의 롯지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더 천천히 걸었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가이드가 물었다. 백팩을 대신 들고 갈까? 괜찮다고 고개를 흔들고 무릎의 통증과 어깨의 뻐근함까지 즐기며 걸었다. 어둠이 짙게 깔려서야 롯지에 도착했다.
새벽 네시부터 일어나 일정을 시작했으니 열네 시간 반이나 되는 강행군을 한 것이다. 아침, 점심 식사시간과 휴식 시간을 빼더라도 꼬박 열 시간 이상을 걸은 셈이다.
식사를 마치고 인솔자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내일 말을 한 마리 대기 시켜달라고 했다. 마부와 함께. 시작할 때는 걷겠지만 걷다가 못 걸으면 말을 타고 가겠다고했다. 물론 비용은 내가 부담하겠다고. 그러자 인솔자는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타고 가는 것이 그렇게 안전한 것만은 아니라면서 자고 나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가이드 대장인 템바씨도 “잘 걸을 수 있을 거”라며 “만일 걷다가 힘들면 그때 말을 불러도 대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근처에 말을 갖고 있는 자기 친구가 있다는 말도 했다.
사실 말 타고 걸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혹시 모를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인솔자에게 나의 상태를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무릎은 1980년대 중반 지리산에서 다친 이후에 많이 걸으면 통증이 왔으며 마라톤 11번 완주하면서 내 나름대로 조절하는 법을 터득했다. 또, 산길을 걸으며 조절법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지 않았지만 일행에게 피해를 주게 될까봐 말을 준비시키라고 한 것이었다.
숙소에는 방마다 화장실이 있었다. 유일하게 방안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해서 수도꼭지를 틀었다가 찬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기겁을 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나온다는 더운 물은 예정한 시간에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에 샤워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버너로 물을 끓여 사용하자고 했으나 룸메이트만 그렇게 하라 하고 나는 그냥 잤다. 어차피 또 땀을 흘릴 것이고 씻는다고 나아질 것도 없지 않은가.
1월 17일(화)
추일레(2060m)-시프롱(1830m)-구중(2050m)-촘롱(2200m)-시누와(2340m)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가뿐하고 좋은 기분을 갖게 되었다. 어제의 고달픔과 짜증도 사라져 버렸다. 말도 필요없었다.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 룸메이트가 매일 아침 주는 홍삼 액기스가 효험을 발휘하는가 보다.
추일레(2060m)에서 시프롱(1830m)까지는 내리막길로 작은 마을들을 따라 간다. 시프롱에서 구중(2050m)까지는 계곡을 건너 맞은 편 마을을 지나도록 길이 이어져 있었다. 전형적인 네팔의 시골마을들이 드문드문 나와 흘끔흘끌 들여다 보기도 하고 마주치는 사람들과 '나마스테' 인사도 나누며 걷고 또 걷는다.
구중에서 촘롱(2200m) 비교적 편한 길이고 경치가 좋다. 그러나 즐길 시간이 없었다. 부지런히 걸어야 했으니까. 촘롱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의 일정은 계곡 저편에 빤히 보이는 시누와 롯지까지였다. 말로만 듣던 공포의 3800계단을 내려가서 다시 올라가야 한다.
촘롱에서 시누와(2340m) 마을 한 복판으로 난 내리막길로 계곡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반대편 능선위의 마을까지 긴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시누와 롯지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있었다. 하산할 때 가게 될 지누단다 방향이 한 눈에 들어왔고 뒤로는 마차푸차레가 가까이 다가왔다.
저녁식사는 닭백숙이었다. 아주 맛있게들 먹었다.
추일레에서 묵었던 롯지/밤에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말만 믿고 홀랑 벗고 샤워를 틀었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포터들이 얼마나 힘든가 체험하기 위해 일행 중의 한 분이 직접 짐을 포터식으로 매고 걷고 있습니다.
넓은 마당에서 포터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갈 길은 먼데
이런 다리를 여러 개 건너야 합니다. 출렁다리.
네팔의 미소
네팔의 미소
점심은 볶음밥입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벌써 계단을 저만큼 오르기 시작하는데 구경할 거 다 하고 가는 사람들은 소구경에 빠져 있습니다. ㅎㅎㅎㅎ
양치기 소년
옥수수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달콤한 휴식시간
척박한 땅에 노란 꽃들이 한 겨울임을 잊고 성급하게 피었습니다.
네팔의 주름
계단을 또 오릅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땀이 저 주름 하나 하나에 배어 있습니다.
또 계단
시누와에서의 저녁식사
식사후의 휴식
히말라야의 하루가 이렇게 또 갔습니다.
1월 18일(수)
시누와(2340m)-뱀부(2335m)-도반(2303m)-히말라야 롯지(2920m)
산행 시작 첫날 부터 잠이 잘 오지 않았기에 -닷새 째나 되고 보니-잠자는데 겪는 어려움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오지 않는 잠을 오도록 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해봤다. 그중 가장 좋은 방법은 억지로 자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머릿속이 노는 대로 그대로 놔두고 있다보면 어느새 잠이 든다. 이제는 이 또한 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잠이 안 오는 것 전혀 두렵지 않다. 옆에 룸메이트는 코를 드렁드렁 골며 신나게 잔다. 코고는 소리가 있어 더 좋다. 혼자 이 캄캄한 밤을 뭉갠다면 얼마나 무서웠을까.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노크 소리에 잠을 깼다. 찌아(밀크티)를 들고 포터들이 방마다 돌아다니며 깨우고 있었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아침을 시작한다.
시누와에서 뱀부까지는 완만한 길이 계속되다가 가벼운 오르막길이 나온다. 오르막길 이후는 계곡으로 들어선다. 뱀부라는 마을 자체가 움푹 파인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뱀부에서 도반은 오르막길이지만 그리 심한 경사가 아니다. 도반에서 히말라야 롯지까지도 계속 경사가 계속된다. 그러나 이틀 전의 강행군과 하루 전의 무지막지하게 강행했던 일정덕에 오늘은 널널한 날이 되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고 했습니다. 계단 그 까짓 거
나귀 타고 오는 이 있으니
마차푸차레가 점점 가깝게 보입니다.
도반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점심은 카레 라이스
취사팀은 바쁩니다. 우리가 숭늉에 눌은밥까지 다 먹고 휴식을 취할 때. 부지런히 짐을 싸야 합니다. 저녁 먹을 곳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중간에 우리가 휴식할 때 마실 차를 끓여 놓고 기다려야 합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습니다.
제 뒤에 오는 가이드 나왕누리 군이 제 백팩을 앞가슴에 매고 있네요. 제가 많이 힘들어 하는 줄 알고 대신 들고 가겠다고 자꾸 졸라 주긴 주었는데 오면서 후회를 많이 했지요. 그냥 매고 갈 것을. 다행스럽게도 나왕누리 군은 자신이 제 대신 매고 가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드디어 하룻밤 묵어갈 히말라야 롯지에 도착했습니다. 이 집 이름이 '히말라야 호텔' 입니다.
밤에 화장실에 가야했다. 무지무지 추웠다. 깜깜한 밤이다. 별빛은 별 도움이 안 되고 불빛이라고는 달빛 밖에 없었다. 달빛을 믿고 쭈구려 앉았다. 화장실 문은 활짝 열어 두었다. 꼭 닫을 수도 없게 만들어진 문이었지만 살짝 잡아 당겨 놓을 수는 있었으나 그냥 열어 두었다. 문닫기 싫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둠이 싫었다. 무서웠다.
그때 쥐가 한 마리 휘익 지나갔다. 통통한 놈이다. 거참 이 나이가 되어서도 쥐가 무섭다. 왜 그럴까? 깊은 산중에서 커다란 집쥐가 다닌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나 쥐가 산다고 했다.
이곳의 화장실에는 수도와 바가지 같은 것이 있고 어떤 곳은 대야도 있었다. 볼일을 본 후에 수도에서 물을 받아 변기에 부어야 한다. 그리고 대야 같은 것에 물을 받아 중요부위를 닦는 것은 아닌가 혼자 생각해봤다. 그래서 그런지 휴지가 없었다. 반드시 물휴지와 휴지를 지참해서 가야한다. 일행들로부터 구호물품으로 받은 것 중에 가장 요긴하게 사용했던 것이 바로 물휴지와 휴지였다.
편리함 속에 젖어 살고 있는 나도 불과 50여 년 전에는 저렇게 살지 않았던가? 5.16후 직장에서 쫒겨난 아버지가 서울 변두리에 올라와 자리잡고 살기 시작하던 그때, 우린 빨래골이라는 동네에 살았다. 사람들이 빨래거리를 들고 올라와 빨래하고 가는 그 골짜기에 다 쓸어져 가는 방한 칸 짜리 집에 살았다. 화장실은 보르박쿠라고 부르던 두꺼운 종이박스로 만든 판데기처럼 생긴 것을 둘러쳐 놓은 것으로 집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후에 아버지가 나무로 만든 화장실을 만들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밑에 파 놓은 구덩이에 커다란 드럼통을 놓았기에 비가 오면 물로 가득차서 엉덩이를 들었다 내렸다 조정하며 볼일을 봐야 했던 그런 시절을 까맣게 잊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그때 우리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었다. 우선 힘들게 일하고 얼마되지 않는 돈을 버는 포터들도 모두 셀폰을 갖고 있었다. 그걸로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사진을 찍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올리는 사진 중의 일부는 가이드 Biru씨와 가이드 대장 Temba가 보내준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산속에 있으면서 내게 자신들의 소식을 알려오고 있다. 세상 참 좋아진 건지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다.
1월 19일(목)
히말라야 롯지(2920m)-힌쿠동굴(3100m)-데우랄리(3230m)-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MBC, 3700m)-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 4130m)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십오육 년 전에 친구 두명과 매주 산에 오르면서 다짐했었다. 언젠가 우리도 히말라야 베이스 캠프에까지 갔다 오자. 마운틴 윌슨, 마운틴 발디 등을 3~4년 동안 줄기차게 올라 다녔다. 그 중 한 친구와는 마운틴 위트니 정상 정복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텐트에서 하룻밤 자며 고산병을 직접 경험하고 바로 하산한 바 있으며 그 후에도 산을 찾았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바쁜 사업과 출장 등으로 소홀하게 되었고, 다른 한 친구는 신앙에 귀의하여 목사가 되었다.
결국 혼자 남은 나는 산골고니오 자연림 협회(San Gorgonio Wildness Association)에 등록해서 마운틴 레인저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산행을 즐겼다.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버켓리스트 중에 하나가 오늘 실현되는 것이다. 짐을 못찾고 셀폰도 잃어버리고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은 일정이 빡빡하다. 2900미터에서 4000미터를 뚫고 올라가야 한다. 인솔자는 일행의 산행 속도와 건강 상황에 따라 오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오르지 않고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서 묵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아침에 룸메이트가 홍삼 엑기스를 주면서 필요하면 복용하라고 바이아그라 2알을 주었다.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면 약을 먹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이미 늦다는 것이다. 그때는 무조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약을 받자마자 한 알 먹고 남은 한 알은 잘 두었다.
히말라야 롯지에서 힌쿠동굴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고소에 적응하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진다. 힌쿠 동굴은 긴 천장이 앞으로 쑤욱 나와 있었고 이렇다할 만한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찍은 사진들도 개인 얼굴이 너무 크게 나와 있는 것들이라 여기올리기는 그렇다.
힌쿠동굴에서 데우랄리까지는 가벼운 오르막이다. 1시간 남짓 걸렸다. 데우랄리에서 MBC까지는 오르막길을 따라 몇 개의 작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2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이제 총 다섯 시간을 걸어 온 것이다. 가벼운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들 몇 사람 말고는 다행히 모두들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MBC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 먹은 후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드디어 출발이다! ABC로! 극적인 효과를 더해주려는 듯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3시간 정도를 걸었다.
ABC,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하얗게 눈 덮인 안나푸르나는 아래서 보던 그 산이 아니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ABC에는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안나푸르나는 달빛에 반사되어 더욱 웅장하면서도 신비스런 모습으로 변해갔다.
기어코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눈물은 콧물을 동반했고 주체할 수 없이 가는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고통을 견디고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안나푸르나의 장엄함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다. 또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시간이었다. 거칠게 부는 바람과 간간이 날리는 눈발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스쳐갔으나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네팔의 미소와 주름
보입니다. 바로 저기, 그러나 앞으로도 한참을 걸어야 합니다. 이 사진은 내려 갈 때 찍은 듯 합니다만 일단 올립니다.
이 사진도 내려갈 때 인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은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가 보이기 시작해서 신이나게 걸을 때입니다.
많이 가깝게 왔지요.
이제 다 왔습니다.
연기가 부족하다며 타박을 받아가면서 잡은 포즈입니다.
드디어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를 떠나서 ABC를 향합니다. 드디어!
두 작가들이 비슷한 장면을 잡았군요. 어느 쪽이 더 근사한지는 여러분이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전 일정을 함께한 검정개가 함께 즐기며 오르고 있습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숙소에서는 제 방 앞에서 주무셨고 아침에 일어나니까 어디론가 사라져버렷습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타운뉴스 깃발을 짐으로 부치지 않고 백팩에 넣어 오기를 정말 잘했습니다.
전체 일행들이 함께 했습니다. 타운뉴스 깃발과
저녁식사
디저트는 복숭아 통조림
일찌감치 자려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답답하다. 룸메이트는 귀에 셀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잠들었다. 코골이가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깊은 잠에 들지 않은 듯하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화장실에 가야할 일이 생겼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에 물휴지와 휴지를 움켜쥐고 화장실을 찾아 나서는데 오마이갓,하늘이, 온통 별들로 덮여 있는 하늘이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 한 동안 입을 벌리고 쳐다보다가 임무수행을 위해 쪼그려 쏴를 하기위해 앉았다. 화장실 문을 열었으나 안탑깝게도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일행 중의 몇 사람이 나와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달님도 거기 있었다. 반달, 쏟아지는 별들과 달빛이 비치는 산봉우리, 그리고 눈이 녹아 드러나 있는 지붕과 마당에 쌓인 눈, 아름다움에 빠져 한 동안 그렇게 있었다. 너무 추웠다.
자리로 돌아와 발치에 있는 핫팩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른 하나를 가슴에 끼고 다시 잠을 청했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언제 잠들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1월 20일(금)
ABC(4130m)-MBC(3700m)-데우랄리(3230m)-히말라야 롯지(2920m)-도반(2505m)-뱀부(2335m)
아침 일찍 포터들이 밀크티를 들고 와서 방문을 두드렸다. 오늘은 567이다. 매일 아침 567이냐 678이냐에 따라 1시간 일찍 일어나고 1시간 늦게 일어나고가 정해졌다. 5시에 일어나 6시에 밥먹고 7시에 떠나는 것이 567이다.
푼힐 전망대 올라가는날만 4시에 일어났고 나머지 날은 둘 중에 하나였다. 아침 잠이 별로 없는 탓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던 시절, 국민학교 4학년때부터 어머니는 4시에 깨워 공부를 시켰다. 밤 9시면 무조건 취침. 어려서부터 훈련된 탓에 평생을 아침에는 새벽부터 일어나 다녔다. 대체적으로 밤에는 일찍 잠자리에 드는 편이다.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식사를 일찍 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남겨 두었던 바이아그라 한 알을 먹었다. 약의 본래 기능을 얻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다른 기능으로 이용하는 것이 바이아그라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제 팔자가 그런 걸.
누군가가 일출이 시작되었다고 외쳤다. 모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눈덮인 안나푸르나 일봉과 남봉이 불타 오르기 시작했다. 전날 간간이 눈발이 날려 일출을 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푼힐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면서 얘기했던 것처럼 이곳의 일출은 해뜨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해가 서서히 올라오면서 그 빛이 산봉우리에 반사되면서 변화되는 빛의 반사를 즐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색의 변화와 서서히 어둠이 걷히는 장면들, 날씨가 흐리면 볼 수 없다. 구름이 심하게 껴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복 받은 사람들이다. 맑은 날씨 탓에 마음껏 아름다운 태양과 산봉우리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현란한 움직임을 즐길 수 있었다.
서서히 밝아지고 있네요.
날이 밝았습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의 롯지가 보이고 산이 보이죠.
하산,
MBC를 지나 이틀 전에 하룻밤 묵어갔던 히말라야 롯지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른다. 올라갈 때 산사태의 위험이 있다며 산기슭을 피해 강 건너편으로 가서 강을 건넜었다. 내려 올 때는 산기슭으로 내려왔으나 다행히 별 일은 없었다. 일행은 올라 갈 때와 같은 길로 오느라고 한참 돌아오고 있었다. 모처럼 앞서게 되었다.
그후로 줄곳 선두에 서서 걷게 되었다. 사람들은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매일 맨 뒤에서 힘들게 따라오던 사람이 앞에 서서 걷는 것이 이상한가 보다.
가이드 대장 Temba, 가이드 Biru, 가이드 나왕누리
템바는 한국말을 참 잘합니다. 유머가 풍부했으며 사람들을 즐겁게해주었습니다. 미국에 와서도 연락하며 살고 있습니다. 카톡으로.
나이 어린 포터들입니다. 체구는 왜소해도 힘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하산한다고 입가에 웃음기가 떠돌기 시작합니다.
하산한다고 내려가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서서히 내려가지요.
네팔의 야생화
집 담장에 놓은 꽃장식
네팔 사람들은 꽃을 잘 가꾸고 있었습니다. 화단에 집 담장에
아빠 품에 있으면 행복하죠. 아이도 아빠도.
엄마는 두말 하면 잔소리죠.
네팔은 밤이 춥습니다. 실내에는 난방시절이 되어 있지 않고요. 그래서 밤사이에 추위에 떨다가 해가 뜨면 나와 해를 쬐며 얼었던 몸을 녹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사용했던 참빗이 보입니다. 앞에서도 소개했던 사진 같지만 다시 올립니다.
고단한 삶이지만 잔잔한 미소가 아름다운 네팔 여인이 햇빛을 쬐며 즐기고 있습니다.
뱀부까지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맨 앞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오느라고 그랬을 거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걸었으니 무얼 제대로 봤겠는가?
뱀부에서 하룻밤 잤다. 밤은 여전히 추웠다.
1월 21일(토)
뱀부(2335m)-시누와(2340m)-촘롱(2200m)-지누단다(1780m)
내리막길에 산행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시누와에서 점심을 먹고 촘롱을 지나 지누단다에 도착할 계획이었으나 일행의 컨디션이 좋은 까닭에 산행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누단다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오늘은 더 이상 걷지 않는다. 여기서 하루 자고 간다.
주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 되었으나 가끔 이렇게 오르기도 해야 했습니다.
한 번 소리를 질러 보라고 했습니다. 사진사의 요청대로 소리를 지릅니다. 아-------------------------
계단을 오르는데 한 번 쳐다보라고 하길래 고개를 돌리자마자 잡혔습니다.
즐거운 휴식시간
달콤한 휴식시간
이 계단을 오르면 휴식시간이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가이드 대장 템바가 약초를 정성스럽게 캐고 있었습니다. 남자에게 좋은 거라고 했습니다. 템바에게 한 번 먹어보라고 했습니다. 쓰다면서 먹더라고요. 그래서 한 뿌리 달라고 했지요. 와우, 써서 못 먹겠더라고요. 저는 버렸습니다. 숙소 휴지통에.
점심은 시원한 물국수, 물국수가 싫으신 분을 위해 비빔국수도. 양념한 물을 넣으면 물국수, 비빔장을 넣고 비비면 비빔국수
점심식사 후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빨래를 하는 분들도 있었고, 피로를 풀기 위해 낮잠을 즐기는 분들도 있었다. 나는 온천욕을 택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노천온천을 보지 않고 간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언제 또 다시 와보겠는가? 하나라도 더 보고 가야한다는 내 철칙에 따랐다.
숙소에서 계단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가 있었다. 온천을 들어가는 입장료가 일인당 100루피. 우리 돈으로 천원이었다. 마침 돈을 내고 있던 일행 중의 한 분이 내 것까지 냈다며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한참 내려가야 했다. 온천욕을 하고 올라오는 사람을 만났다. 한국 사람이었다.
“괜찮아요?”
“아니요. 괜히 갔어요. 이렇게 한참 가는 줄 알았으면 안 갔을 거예요.”
길따라 계곡으로 계속 내려가니 물이 콸콸콸 흐르고 있었고 그 옆에 노천온천이 있었다. 그저 따뜻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탕을 만들어 모아 두었을 뿐, 별다른 시설은 없었다. 아마 별다른 시설이 없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에 실망하고 아까 올라간 한국 사람은 실망을 한 것이리라. 그러나 미국의 노천 온천에 비하면 훨씬 더 잘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내가 예전에 가끔 갔던 노천 온천은 그냥 자연 그대로의 구덩이일 뿐 별다르지 않았다. 물을 모아 두려는 시도를 한 흔적조차 없다. 그리고 그 노천 온천은 모두 홀랑 벗어야 한다. 젊은 남녀가 모두 나체로 왔다 갔다 한다. 혹시 가고 싶은 분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모시고 가겠습니다.
세 개의 탕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맨 아래가 가장 따뜻하다고 먼저 온 사람들이 얘기해줬다. 그리고 중간에 옷을 벗을 수 있도록 간이 탈의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서 옷을 벗어 백팩에 넣고 탕으로 들어가기 전에 샤워를 했다. 마침 비누가 있었다. 머리도 감고 오랜만에 비누칠을 했다.
탕으로 들어갔다.
사진 이렇게 게재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얼굴이 뚜렷하게 보여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에 알려진 사진이기에 큰 탈은 없을 거라 믿고 올립니다.
오마이갓, 시원하다. 정말 좋았다. 야만에서 문명의 세계로 들어온 느낌, 그때 한 분이 맥주를 꺼냈다. 한 모금씩 마시며 돌렸다. 아, 그 맥주의 맛! 따뜻하다. 정말 좋다. 오래 오래 있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나는 수영복을 입지 않고 팬티를 입고 있었다. 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집을 떠나면서부터 입었던 팬티를 입고 공동 탕 안에 있다니. 도저히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얼른 일어났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탈의실에서 팬티를 벗은 후 바지를 입었다. 노팬티다.
그리고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최대한 천천히, 나른함을 즐기며,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씩 불러내어 그들의 복을 빌었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를 기원했다. 아들 장가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아들이 올해 안에 꼭 혼인하기를, 집을 팔려고 애쓰고 있는 이로부터는 집팔았다는 소식을 빨리 전해달라고. 또, 내 가족들의 소원도 빌었다. 아들, 딸, 며느리, 손자, 손녀...... 회사 직원들.
가능한 한 땀이 나지 않도록 천천히 걷다보니 내 뒤에 출발한 일행들이 나를 앞서 가며 대단히 미안해한다. 아마 내가 몸이 불편해서 그러는 줄 아나보다. 뒤에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나의 속도를 유지하며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매표소 앞에서 한 노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경사가 심한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 나를 오래 전부터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불쌍하다는 듯이 애처롭다는 듯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점점 그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가능한 한 그와 눈길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었다. 그를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고 나를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내가 비슷하게 서있게 될 무렵, 그가 말했다. “나마스떼!”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나도 자동으로 두 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마스떼!”
그가 의자를 가리키며 “잠깐 앉았다가라.”고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가 그러면 잠깐 그대로 서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무릎을 구부려 앉은 자세로 내 정강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왜 그러냐고 괜찮다고 했으나 잠시만 그대로 있으라고 하면서 넓적다리로 옮겨가며 주무르고 있었다.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잠시 생각하다가 어떻게 하나 보기로 했다. 그는 오른편 왼편을 옮겨가며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주물렀다. 나는 그대로 서있었다. 시원하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는 돌아가고 있었다. 돈을 약간 드려야 하나. 아니면 내가 주물러 드려야 하나. 일단 중지시키기로 했다. 고맙다고 하면서 이제 그만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도 손을 모으며 내 인사를 받았다.
그분의 따뜻한 마음에서 나오는 그 손길을 오늘도 잊지 못하고 있다. 정말 고맙다. 그분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따뜻한 그 마음만 기억할 뿐.
나른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신나게 잤다. 달콤한 잠은 아무리 자도 물리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저녁은 염소를 잡는 날이다. 그것도 두 마리나. 연락이 왔다. 내려와 저녁 먹으라고.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한 마리는 흑염소, 한 마리는 흰염소, 한 마리는 저희가 먹고 다른 한 마리는 포터와 가이드들이 먹기로 했죠.
주방장과 가이드 대장 템바씨가 염소 머리를 먹기 좋게 손질하고 있습니다.
염소 내장과 머릿고기도 맛이 좋았습니다.
화이팅을 힘차게 외칩니다.
시키지도 않는데 노래를 불렀습니다. 산천에 눈이 쌓이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에 질세라 노랫가락이 이어집니다.
룸메이트가 러브샷을 제안했습니다. I love you.
히말라야의 밤은 여전히 추웠지만 우리의 따뜻한 마음은 그날 밤의 추위를 녹이고도 남았습니다.
1월 22일(일)
지누단다(1,780m)-뉴브릿지(1,340m)-씨울레바잘(1,170m)-나야풀(1,070m)-포카라(820m)
지난 밤, 술을 많이 마신 룸메이트는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천국행 열차에 탑승했다. 나는 모처럼 편히 앉아서 자연의 부름을 해결하고 치아를 깨끗이 닦고 침대에 누워 세계 평화를 즐겼다. 천국행 열차소리는 다른 날보다 더 씩씩하게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아름다운 밤이었다. 눈감으면 그대로 나도 그 열차에 편승해서 달릴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고도를 많이 내려왔기에 다른 롯지에 비해 덜 추웠다. 온천욕도 하지 않았는가. 노인으로부터 아주 잠깐이기는 하지만 마사지도 받았고. 숙면을 취했다.
이른 새벽, 아침식사를 서둘러 하고 지누단다를 출발해 1시간 30분 정도 걸어 뉴브릿지에 도작했다.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을 더 조심해야 한다.사실 이때쯤에는 8박 9일간의 산행으로 누구나 지쳐있기 마련이다. 무릎에 통증도 있고 다리는 무거울 거다. 따라서 누구나 발을 디디는데 조심하게 된다. 앞으로 3시간 30분 정도만 걸으면 씨울레바잘에 도착한다. 거기에 우리가 타고 갈 짚차가 기다리고 있다.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습니다. 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말들이 없어졌습니다. 모두 산행이 막바지로 치닫으면서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을 겁니다. 모두들
뒤돌아 보니 산은 거기 언제나처럼 그렇게 있었습니다. 내 마음을 빼앗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어디서나 여인들은 아침이 바쁘기 마련이죠. 90도로 허리를 구부리고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 저 허리를 필지 가슴이 아픕니다.
고양이도 어디나 있더군요.
사람 사는 곳에 닭이 없을 리 없지요.
휴식 시간입니다. 말도 쉬고 사람도 쉬고 세월도 쉬고
티없이 맑은 아이의 웃음에서 밝은 네팔의 내일을 기대합니다.
닭은 닭끼리 모여 있어야 하는데 사진작가가 다른 모양입니다. 똑 같은 닭인데..
염소 염감이 어젯 밤을 무사히 넘긴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식사시간입니다. 말들이 식사하는 동안 마부는 한 마리, 한 마리 말들을 살펴야 합니다. 이상이 있나 없나. 세련된 마부입니다. 머리칼에 모양을 낸 것이 멀리서도 보이네요. ㅎㅎㅎㅎㅎ.
씨울레바잘에 도착하기 30여분 전부터 커다란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선두에 서서 걷던 가이드 말에 의하면 자동차가 더 높은 곳까지 올라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길을 뚫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사람 하나가 지날 수 있는 길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유심히 살펴보니 나무를 베어 내고 산을 깎아 길을 넓히기 위해 불도저가 산을 밀어내고 굴착기로 땅을 파는 소리였다. 여기도 찬반의 생각들이 부딪히고 있으리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히말라야를 만들고 산속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소하려는 노력이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연의 파괴라는 측면은 무시하기로 했다.
드디어 씨울레바잘에 도착했다. 점심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방팀이 준비한 마지막 식사는 김치볶음밥이었다.
그동안 매 끼니를 다른 메뉴로 맛깔스럽게 차려준 노고에 감사하며 그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나는 식사기도를 따로 하지 않는다. 아니 모든 기도를 따로 형식을 빌리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 내킬 때 마음속으로 빌고 기도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따라 주는 숭늉을 마시고 대기하고 있던 짚차에 탔다. 뒷자리에 앉으려 하니 인솔자가 덩치 크신 분은 앞에 타야 한다며 나를 앞좌석으로 인도했다. 다른 분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언제나 일행들이 베푸는 따뜻한 배려가 느껴진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나야풀까지 우리를 싣고 달렸던 짚차
나야풀로 가기 전에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학용품을 전달하기 위해 들렀다가 쉬는 날(네팔은 토요일이 공휴일)이라 학교 앞 점포에 학용품을 맡겨놓고 왔던 엄홍길휴먼재단이 설립한 비레탄티 세컨더리 초등학교를 다시 찾았다. 네팔은 일요일이 한 주일의 시작으로 정상 수업을 하고 있었다. 명예교장겸 미술교사로 봉사하고 있는 김규현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학생 수가 자그마치 200명이 훨씬 넘는다고 했다. 산골짜기에 있는 학교에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니 모두들 놀랐다. 우리가 가져간 학용품이 그리 많지 않아 학생당 한 개씩 돌아갔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했다. 일행 중의 몇 분이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김규현 명예교장에게 금일봉을 전달했다. 김교장이 놀라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보게 되었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사양하는 김교장의 주머니에 억지로 넣어 드렸다.
수업 전경
수업전경2
앞에 앉은 사람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규현 교장입니다. 왼쪽 두 번째에 앉은 학생이 그린 벽화 앞에서 찍은 겁니다. 그 학생은 대구의 한 방송국의 초청을 받아 5월에 한국에 간다고 합니다.
어디나 어린이들은 맑고 예쁩니다. 착한 눈동자 속에 담긴 평화가 세계 평화로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학교 방문을 마치고 트레킹 시발점이었던 나야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포카라로 간다. 나야풀에서 포터와 주방팀과 헤어지기 전에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나왕누리와는 그곳에서 작별을 나눴다. 그는 한국에서 오는 다른 팀을 만나 또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는 순박한 스물 두 살의 청년, 힘들어 하는 내게 짐을 달라며 앞가슴에 메고 걸으며 그는 즐거워했다. 약한 사람(?)의 짐을 들어주는 기쁨을 즐겼으리라. 그의 앞날에 그가 믿는 신의 가호가 항상 함께 하기를 빈다.
작별을 아쉬워 하며/일부는 짚차로 옮겨 타기 전에 헤어졌고 여기까지 함께 온 포터와 취사팀과 작별하는 시간입니다. 뒷줄 왼편의 첫 번째가 가이드 나왕누리 군입니다. 사진 속에서도 저는 그에게 팔을 걸쳐 의지하고 있네요. 그는 우리가 헤어진 곳에서 다른 팀을 맞이해서 가이드 일을 하러 다시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포카라 호텔에 투숙하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세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룸메이트와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가이드 대장 템바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함께 있던 비루도 같이 갔다. 걷다가 보이는 첫 번째 마시지 삽에 들어갔다. 우선 가격표를 봤다. 한 사람이 90분에 5,000루피였다. 50달러가 조금 안 되는 돈, 한국 돈으로 5만 원 정도. 템바가 뭐라고 하니까 3 000루피만 달라고 했다. 그래서 네 사람 분을 내려고 하니 템바가 자기들은 차라리 그 돈으로 무얼 사먹고 있는 편이 더 낫다고 했다. 그것도 옳은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가지라고 하고 둘이 들어갔다.
오마이갓, 너무 춥다. 무슨 마사지 삽이 이렇게 추운가. 콧물이 질질 흐르고 몸이 으실으실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몇차례 휴지를 달라해서 콧물을 닦고 코를 풀어댔다. 그리고 난로를 켜달라고 요청했다. 조그만 전기 난로를 가지고 왔으나 전혀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만 그런가? 룸메이트도 춥다고 컴플레인 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사지 하는 아가씨도 코를 훌쩍이며 코를 풀기 시작했다. 오마이갓, 마사지를 받으러 온 것인지 코를 풀러 온 것인지 모르겠다. 도저히 못견디겠다. 추워서. 그만 하라고 했다. 그리고 룸메이트와 그집을 나왔다. 온천욕을 하고 올라오다가 만난 노인에게 서서 받았던 그 손길이 진정으로 나의 피로를 풀어주는 마사지였다. 아, 그때 좀더 참고 있었어야 했는데....
호텔로 돌아와 잠깐 누웠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산마루’라는 한국음식점으로 걸어서 갔다. 삼겹살을 먹었다. 일행 중의 특수교육학과 출신 동창생으로 현재 특수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는-우리가 독수리 4형제라고 이름 붙인- 선생님들이 맥주 값은 지불한다는 안내가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소주가 먹고 싶다고 했다. 인솔자는 소주 값이 엄청 비싸다며 주저했다. 그러자 룸메이트가 자신이 지불할테니 마음껏 드시라고 했다. 아름다운 밤이다.
삼결살 무제한 리필/주류 무제한 리필
삼결살을 시키고 또 시켜서 배터지게 먹었다. 이렇게 삼결살을 많이 먹은 적이 없었다. 룰룰랄라 노래부르며 룸메이트와 호텔을 향해 걷는데 포항에서 온 두 분 중의 한 분이 자기가 살테니 입가심으로 한 잔 더하자고 했다. 아까 소주를 찾을 때 룸메이트가 선뜩 마시자고 한 그것에 대한 답례를 겸한 요청같았다. 그래서 마침 가까이에서 걷고 있던 여선생님까지 넷이 이차를 위해 마땅한 집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와인 한 병과 브랜디 작은 것 2병을 더 마셨다.
이별의 아쉬움은 밤이 깊도록 그칠 줄 몰랐습니다. 여선생님은 기침을 자주 했으며 몸이 불편한 듯 했습니다. 늘 맨앞에서 열심히 걷던 분인데 감기 몸살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위험한 밤길에 먼저 가시라고 할 수도 없어서 빨리 끝나기만 기다렸습니다.
딸딸딸 해져서 걷는데 여 선생님은 몸이 좋지 않다며 호텔로 먼저 가겠다며 들어가시고 셋이 호텔 앞에 있는 통닭집에서 맥주를 시켜 또 마셨다. 치맥... 밤이 깊어가며 술도 함께 깊어갔다.
통닭집에서 나와 바로 앞에 있는 호텔로 들어가려는데 포항분이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발동이 걸린 것이다. 더 이상은 아니다. 극구 사양하고 숙소로 들어가 그대로 꿈나라로. 물론 치아와 중요 부위를 깨끗이 닦고. 포근한 이불 속에서.
오늘도 천국행 기관차 소리-드르렁 드르렁-를 들으며 네팔의 깊어가는 마지막 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1월 23일(월)
포카라(820m)-카트만두(1324m)
어제 저녁식사를 마치기 전에 인솔자가 “내일 아침 사랑곶 일출을 보겠냐?”고 물었다. 일정에 없는 곳인데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모시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경비를 따로 걷지 않고 특별히 만든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푼힐 전망대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일출을 봤는데 또 무슨 일출이냐고 그냥 자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볼 것은 하나라도 더 본다는 나의 여행 준칙에 따라 무조건 가겠다고 했다.
십여 명이 5시에 모여 승합차를 타고 출발했다. 포카라의 아침은 여인들이 열고 있었다. 어둠이 가시기도 전, 대부분의 집 마당을 여인들이 쓸고 있었다. 포장도로 옆의 비포장 길에서 먼지가 이는데도 꼭두새벽부터 부지런히 비질을 하고 있었다. 다시 먼지가 앉을 것임을 알면서도 비질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었다. 집 안팎을 깨끗이 하며 하루를 시작하려는 여인들의 마음이 바로 네팔의 밝은 내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40여 분만에 사랑곶에 도착했다. 제법 걷는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한 상점 앞에서 멈췄다. 가이드 대장 템바가 주인에게 옥상에서 일출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일인당 50루피를 내면 옥상을 이용해도 좋다며 찌아(네팔의 국민차, 밀크티)를 한 잔씩 제공하겠다고 했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가까이서 멀리서 지겹도록 봤기에 지칠 만도 한데 다시 펼쳐 놓고 보는 히말라야 영봉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엷은 안개로 가려진 봉우리들이 새로운 히말라야를 느끼게 해주었다. 선명하게 보일 때와 희미하게 보일 때, 어느 것이 더 나은가하는 물음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다 좋으니까.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네팔에서의 일출은 ‘뜨는 해를 기다리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서서히 솟아오르면서 그 빛이 히말라야 영봉을 비칠 때 펼쳐지는 쇼를 감상하는 것’이다.
서서히 밝아지고 있습니다.
뜨는 해
아침식사를 하고 포카라 공항으로 이동했다. 10시 30분에 떠날 예정이었던 카트만두행 비행기는 계속 출발시간이 지연됨을 알리고 있었다. 만일 비행기가 뜨지 않으면 버스로 여섯 시간을 가야 한다. 4시 30분에 쿤밍행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과연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다행히 출발하기는 했다. 2시가 넘어서. 그래도 불안하다. 국내선 공항에서 국제선 공항으로 이동하는 시간도 있으니까. 에잇, 기왕 버린 몸 다부지게 버리자는 생각도 들었다. 또 놓치면 다음 비행기를 타면 되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을 정하니 아주 편한 마음이 되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 대장 템바가 공항직원에게 사정을 얘기하자 자동차에 타라고 했다. 일행들과 작별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차에 올라탔다. 템바가 동행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국제공항으로 갔다. 국제공항에서는 가이드 Biru가 찾은 짐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Biru는 오늘 새벽에 버스를 타고 미리 와서 찾은 짐을 받아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들과 다음 일정을 진행해야 하는 템바는 타고 온 택시를 타고 국내선 공항으로 떠났다.
네팔에서 샀던 것들 대부분을 Biru에게 가방 째 주었다. 그리고 찾지 못했던 짐 속에 들었던 라면과 기타 약품 등도 줬다. Biru는 다 주시면 어떡하냐며 사양했으나 그렇게 주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그가 내게 행한 친절과 보살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쿤밍해 비행기를 제 시간에 탔고, 예정대로 상하이를 거쳐 32시간 만에 1월 24일 LA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긴 여정의 막을 내린다.
후기
미국인들의 어려서 꿈은 디즈니랜드에 가보는 것이다. 또, 성인이 되어서는 하와이, 좀 더 나이 들어서는 알라스카에 가고 싶어 한다. 실제로 만난 미국 사람들 가운데 하와이나 알래스카에 갔다 온 사람들, 그리 흔치 않았다.
미국에 와서 디즈니랜드가 있는 Anaheim이라는 도시에 살았다. 디즈니랜드에서 불꽃놀이를 위해 하늘을 향해 쏘아대는 대포 소리를 매일 저녁 들었다. 또, City of Orange에 있는 비디오 가게를 운영할 때(1993년~1999년)는 매일 저녁 가게 문 닫고 집으로 가면서 디즈니랜드의 불꽃놀이를 공짜로 즐겼다. 거기다가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모시고 가는 코스인지라 어쩔 수 없이 드나들었다. 그러니 디즈니랜드의 꿈은 자연스레 이룬 셈이다.
하와이는 한국살 때, 선생님들과 다녀왔고, 알래스카도 1987년 여름에 Camp Gorsuch에 International Camp Staff으로 미국 보이스카우트 연맹 초청을 받아 다녀온 바 있다. 캠프에서 한 달 가량 생활하면서 알라스카 전 지역에서 4박 5일 야영 들어오는 보이스카우트 대원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며 지냈다. 태극기에 대해 설명해 줬고 한국의 보이스카우트 대원들의 활동상을 소개하면서 그들과 함께 카누도 타고 달리기도 하고 밤이면 배구도 하며 지냈다. 알라스카의 여름은 밤 열두시도 한 낮처럼 환하다.
한 달간 텐트에서 생활했다. 텐트라고는 하지만 실내와 같이 꾸며져 아주 훌륭했다. 침대도 쿠숀이 있었고, 제법 넓어서 거동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고 금요일, 월요일에 입소한 대원들이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고 나면 캠프의 전 스텝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캠프가 텅 비게 되는 관계로 그들 중의 한 사람을 따라 가서 민박을 하게 되었다.
그때 캠프에서 의사로 봉사하는 친구 집에서 묵게 되었다. 이름도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그의 대머리 벗겨진 얼굴은 뚜렷하게 기억난다. 지금은 많이 벗겨졌을 테지만 그때는 약간 벗겨진 상태였다. 몰몬교도인 그 친구는 이혼했고 딸을 전 부인이 키우고 있었다. 이혼한 부인과 딸을 만나서 함께 식사도 했고 딸과 함께 영화도 봤다. 전부인은 딸을 친구에게 맡기고 집으로 갔다. 자꾸 얘기가 한데로 새나가고 있다. 원래 하려던 얘기로 돌아가겠다.
이 친구가 장비를 챙기고 트럭을 타고 어딘지 기억나지 않는 어느 Glacier로 데려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더니 트럭 뒷문을 열고-트럭이지만 위에 캡이 씌워져 있었다- 운동화 속에 자동차 열쇠를 넣어두며 ‘차키가 여기 있으니까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왜 그랬는지 현장에 도착해서 알 수 있었다. 빙벽을 타고 올라가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안전장치를 했지만 얼음을 믿고 내 도구와 연장을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거다. 아무튼 그가 실습을 몇 차례 시키더니 그만 하면 됐다고 나와 그의 몸을 묵고 먼저 올라가며 따라 오라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때까지 올라갔다. 그러더니 웃통을 훌렁 벗더니 자기를 찍어 달라고 했다. 그 사진, 아무리 찾아도 없다. 틀림없이 내게도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내 사진만 몇 장 그때를 추억하게 해준다.
미국인들이 꿈꾸는 세 가지를 다 해봤는데 그럼 미국에서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첫째로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산 마운틴 위트니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다. 두 번째가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다녀 오는 것, 셋째가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마운틴 위트니는 비록 실패로 그쳤지만 이번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트레킹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마운틴 위트니 실패의 원인을 곰곰이 따져 보면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쉬지 않고 오래 걸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마운틴 위트니 트레일 시작하는 곳에 자신의 배낭 무게를 재는 저울이 있었다. 그때 무게를 달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무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텐트도 내가 들었고, 2박 3일 먹을 모든 식량이 내 배낭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짐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둘째로 아스피린을 너무 많이 먹었다. 친구가 아스피린을 먹어야 한다면 바이엘아스피린을 주었는데 처음에 대여섯 알을 먹었고 자기 전에 또 세 알 정도를 먹었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샜다. 그리고 아침에 걸음을 걷자니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철수한 것이다.
그래서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행을 결심하기 전에 철저한 조사가 필요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짐을 포터들이 들어다 준다는 것이다. 포터들이 짊어지고 온 짐을 롯지에 도착하면 짐 주인이 묵는 숙소 앞에 딱딱 대령시켜 놓고, 아침에 짐을 숙소 앞에 놓아두면 다시 짊어지고 다음 롯지까지 운반해준다.
둘째로 인솔자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다. 이것도 해결했다. 지난해 11월 고국 방문길에 직접 만났다. 그와 만나 점심식사를 하면서 그의 얘기를 들으며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믿음이 생기긴 했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그에게 물었다. “만일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느냐?” 그럴 경우 가이드 중의 한 사람을 남겨두어 돌봐주게 하고 롯지에서 식사를 챙겨주게 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는 답을 듣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결정하기는 했지만 1월은 네팔에서도 겨울인데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눈동냥, 귀동냥을 하며 조사해 보니 네팔의 1월은 건기로 비나 눈이 별로 오지 않으며 기온도 그리 심각할 정도로 춥지는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은 경비가 문제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항공비가 포함된 경비였고, 나는 미국에서 출발하니까 항공료를 제외한 금액을 내야하니까 어떻게 상정하는가를 인솔자에게 물었다. $1330을 내라고 했다. 그것도 현지에 도착해서. 이 돈에 카트만두에서 포타라까지 가는 항공료 왕복과 카트만두 호텔비, 포카라 호텔비, 그리고 트레킹 중에 묵었던 롯지의 숙박료, 전 여행중의 식비가 다 포함된 금액이다.
항공료는 가장 싼 것을 끊으니 China Eastern 항공이었다. 왕복 요금 $630, 상하이에서 갈아타고 쿤밍에서 또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과 바로 연결되지 않을 경우 시간이 많이 허비된다. 갈 때 38시간, 올 때 32시간이 소요되었다. 기다리는 것을 잘 못 참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으면 얼마든지 좋은 자신에게 맞는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들은 경비는 항공료 $630+$1330=$1960이다.
다녀온 뒤의 후유증
1.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옷을 다 입고 잔다. 심지어 자켓도 입고 자고 있었다. 그리고 잘 씻지 않는다. 예전에는 아주 잘 씻던 사람인데 다녀온 뒤로는 잘 씻지 않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깍지 않고 면도도 잘하지 않으며 옷이나 신도 대충 입고, 신고 다닌다. 주로 히말라야에서 입지 못하고 찾지 못한 짐에 있었던 바지, 히말라야에서 신었던 신을 주로 애용하고 있다. 양말도 등산양말을 신는다. 지금도 등산양말을 신고 있다.
심지어 지난 목요일 라미라다 시 플래닝 커미셔너 회의에 양복을 입고, 신은 그 신을 신고 있었다. 옆 자리에 앉은 커미셔너 친구가 내 신을 가리키며 웃어서 알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를 위로하려는 생각에서 인지 자기도 똑 같다면서 옷을 살짝 들어서 자기 양말을 보여주었다. 하얀 양말을 신고 있었다. 함께 웃었다.
2. 온몸이 아프다. 왼손 손가락 3개는 계단을 올라가다 넘어질 때 다쳤다. 아직도 불편하다. 골프채를 바로 잡지 못할 정도라 다음 주 수요일에 있는 고교 동창회 골프대회 참가가 어렵다고 통보했다. 어깨. 허리. 팔다리, 목은 물론 무릎, 발목, 다리도 아프다. 기운이 없다. 매사에 의욕이 없다. 정신이 없다. 멍 때리기를 자주 한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다 오케이다.
3. 다시 또 가려는 마음이 생겼다. 처음에는 다시 가나보다 했는데 다시 가고 싶어졌다. 갔던 데 또 가기는 싫고 이번에는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EBC)까지 가려고 한다. 티벳에서 가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가기 때문에 거의 걷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내를 모시고 가기로 했다. 내년1월 6일 출발이다.
4. 앞에서 밝혔듯이 셀폰을 예전에 사용하던 똑딱이로 하려고 했는데 큰딸과 아내의 반대로 먼저 쓰던 것(아이폰 7플러스)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880내고 샀습니다. 보험이 들어 있지 않아 전액을 다 내야했습니다. 절대로 셀폰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보험 꼭 들으십시오. 이번에는 보험에도 가입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이 번 여행 사진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 입니다. 널어 놓은 담요를 유심히 보지 않으면 히말라야 산자락의 어느 귀퉁이인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고국의 산야와도 흡사하게 보이니까요.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지도 모릅니다. 옷들은 부지런한 아낙이 틀림없이 찬물에 손 담그고 빨았을 겁니다. 담요는 빨은 것이 아니고 밤사이 덥었던 것을 볕에다 말리면서 일광소독을 하는 걸 겁니다. 그때는 옆에 빨래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앉았지만 사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사진 부지런히 기회될 때마다 찍어 두세요.
어떤 분이 찍어서 보내 준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제가 무언가 적고 있는 것을 찍었네요. 사실 여행기를 쓰는데 기록해 놓은 노트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올려준 사진과 일정표, 그리고 저보다 먼저 올려 주신 분들의 글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어느 롯지에서 쉬었다 갈 때일 겁니다. 빨래를 말리고 있는 한 켠에서 나그네는 그날을 기록하고 있었나 봅니다.
다시 한 번 함께 했던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기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댓글로도 괜찮고 이메일, 쪽지도 괜찮습니다. 제가 아는 한도에서 성심 성의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입산 허가서
트레커들이 트레킹 기간 중에 소지해야 할 신상명세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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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통해서 뵙는 Seamaker님은 정말 생동감이 넘치네요^^
잘 지내시죠? 정말 많은 도움 받았습니다. 영원히 우리가 함께 했던 날들을 잊지 못할 겁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참 자세하게 적어 놓으셨네요
다음에 가시는 분들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한 하루하루 만드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