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없는 실체의 자리를 보라”
<45> 부추밀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①-2
[본문] 다만 알음아리를 아는 그 마음 위에 나아가서 살펴보십시오. 또한 장애를 합니까? 장애하지 않습니까? 능히 알음아리를 아는 마음 위에는 또한 허다한 것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과거의 큰 지혜를 가진 선비들이 모두 다 알음아리로써 도반을 삼지 아니함이 없으며, 알음아리로써 방편을 삼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알음아리 위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며, 알음아리 위에서 모든 불사를 지어가되 마치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한 것과 같습니다. 마침내 이것으로써 괴로움을 삼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다만 알음아리가 일어난 곳을 알기 때문입니다.
[강설] 알음아리를 아는 마음이란 알음아리가 본래로 없는 텅 빈 자리를 뜻한다. 그 자리에 무슨 장애가 있겠으며 알음아리라 한들 어디에 있겠는가. <반야심경>의 가르침에도 “몸도 없고 마음도 없는 텅 빈 실체의 자리를 바로 보면 일체의 문제는 다 사라진다”라고 했다.
먼저 모든 존재의 텅 빈 경지를 터득하고 나면 아무리 알음아리와 번뇌 망상이 난무하더라도 그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번뇌와 망상들이 깨달음을 얻고 지혜를 얻는 훌륭한 벗이 되고 선지식이 된다. 또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법을 전하는 훌륭한 방편이 된다. 알음아리가 일어난 곳, 즉 본래로 텅 빈 자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 자리 바로보면 일체 문제 사라져
번뇌망상 난무해도 장애 되지 않아
[본문] 이미 알음아리가 일어난 곳을 알았다면 곧 이 알음아리가 바로 해탈의 도량이며, 생사를 벗어난 곳입니다. 이미 해탈의 도량이며 생사를 벗어난 곳이라면 그 알음아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적멸할 것입니다.
알음아리가 적멸하다면 능히 알음아리를 아는 사람도 적멸하지 않을 수 없으며, 보리와 열반과 진여와 불성도 적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무슨 물건이 있어서 장애를 할 것이며, 다시 어느 곳을 향하여 깨달아 들어감을 구하겠습니까?
[강설] 알음아리가 일어난 곳, 즉 몸도 마음도 본래로 텅 빈 그 자리를 알았다면 그 자리가 곧 해탈이며, 그 자리가 곧 삶과 죽음을 벗어난 곳이며, 그 자리가 곧 알음아리가 텅 비어 적멸한 곳이며, 그 자리가 곧 보리와 열반과 진여와 불성이 텅 비어 적멸한 곳이다.
선불교의 경지는 한편 이와 같은 공무(空無)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불교의 수많은 사상 중에서 이처럼 공사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사상으로서 불교의 궁극이라 한다.
[본문]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업은 마음으로부터 생겼으므로 마음이 환영과 같다고 말하나니, 만약 이러한 분별을 떠나면 곧 모든 있음의 갈레가 적멸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강설] 경전에 있는 예문을 들었다. 선한 업이든 악한 업이든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란 환영과 같다. 분별심만 끊어지면 따라서 온갖 삶의 갈레가 다 소멸한다. 마음이란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다. 모든 세상 모든 존재를 다 그린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것은 텅 비어 없는 것이다.
[본문] 어떤 스님이 대주(大珠)화상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대열반입니까?” 대주화상이 말했다. “생사의 업을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입니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생사의 업입니까?” 대주화상이 말하였다. “대열반을 구하는 것이 생사의 업입니다.”
[강설] 다시 대주화상의 말씀을 이끌어 왔다. 불교는 생사를 초월하고 열반을 얻는 것을 일종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생사와 열반의 문제에 대해서 많이 언급한다. 의상조사의 법성게에는 “생사와 열반이 서로 함께한다”라고 했다.
즉 생사와 열반이 하나라는 뜻이다. 생사가 곧 열반이므로 생사에서 열반을 보아야 한다. 대주화상은 생사의 업을 짓지 않는 것이 열반이라고 하였으니 그 견해의 우열을 가만히 생각해 볼만 하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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