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불은 깨달음Bodhi을 고통과 쾌락의 양극단을 여윈 중도의 깨달음에 말씀하시고, 12연기법(집성제)은 중도 깨달음의 실참 즉, 보림에 말씀한다. <전법륜경>과 <가전연경> 두 경전을 읽어보면 양극단을 연결하는 문장에서 완전한 다름이 있다. <전법륜경>은 "고락 양극단을 여의는 중도를 깨달았으니"...라고, 반면에 <가전연경>은 관념의 사견 "유무 양극단을 여읜 중中에 의해서 법을 설하다."라고 서술한다. 문장이 다르다.
깨달음과 달리 연기와 법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그대로의 요소(dhatu)이다.
<전법륜경>의 깨달음은
고통과 쾌락의 양극단을 여읜 바 즉, 감각접촉에 연유로 함께 생겨난(반연한) 고통과 쾌락의 느낌(S12:25<부미자경>)을 여의고 '집법즉멸법'의 법안法眼에 받아들인 바르게 견해(정견正見)한 깨달음이다.
고통(과 쾌락)의 감수를 거부하지않고 받아들여 동일한 범주의 법法으로서 청정하게 문지기 sati하는 바에 깨닫는다.
그리고
S12:15 <가전연경>의 정견正見은
'세계(loke)를 있는 그대로에 바르게 보는 자는 (감관)세계의 없음을 관념화 하지 않는 바를 정견正見'에 서술하는데,
이는 눈.코.귀.혀.몸.의근 감각기능 육근이 짓는 세계(loke)를 감각접촉으로 있는 그대로에 바르게 보는 자는 감관의 없음에 견해하지 않고 감각접촉에 있는 그대로의 요소(dhatu,界) 즉, 일어남에 따른 필연 있는 그대로의 그침(연기)에 수관하는데,
나아가 사성제에 확장하면
괴로움苦의 일어남도 역시 계속 괴로우면 괴로움을 인식할 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그침이 있는 그대로(여실지견, 緣起)의 요소이다는 것을 법안에 바른 견해하셨던 것이다.
즉, <가전연경>의 유무 양극단의 여읨은 <전법륜경>에서 고락 양극단에서의 감수를 연기에 정견한 깨달음의 토대로 해서 있는 그대로의 연기 요소들에 살펴 볼 때 중간의 그침中이 있으므로 '집법즉멸법'의 법안法眼이 성립하는 즉, 중中에 의해서(majjhena) 법을 설한다....라는 중도 깨달음의 실참(보림)이다.
그래서 무명이하 '중'의 바른 수관으로 12연기가 집성제에 이르게 된다.
또한, 고락을 여윈 중도의 깨달음을 보리수하 증득하신 후 몇주 혹은 수일 지나서 성도지에서 12연기법 집성제을 완성하고, 집성제를 통해서 멸성제를 정견하고 도성제에 증명하시게 되는데,
태어남集에 연유로 함께 생겨난 늙음죽음의 그침滅의 필연의 연기(S12:20 <조건경>)를 즉, 집에 따른 멸을 정견하시잖아요. 따라서 멸성제가 정견에 도출되고, 멸성제에 도달하는 도성제가 여태 수행하신 호흡관 정정正定에 이른 바의 토대로 해서 팔정도에 설명하시었습니다.
그래서 사성제가 완성하신거죠.
그 뒤의 깨달음 보림이 꼰단냐 존자의 오비구가 처음 부처님이 겪은 고통과 쾌락 양극단의 감수를 동일한 범주의 법안에 깨닫는데, 열심히 탁발 공양하며 허리 통증을 동일한 범주의 법에 문지기 삼아(사띠, 마음챙김) 청정하게 수행한 결과 선정을 얻고,
아나빠나 사띠(호흡관)의 삼매 선정에서 오온 집멸의 경험을 전개하고 오온(특히 형성行)이 위험하므로(오음성고)
오온을 무상無常에 관찰하고 이욕離慾하고 갈애를 내려놓아 벗어나 청정한 문지기 사띠로서
의성신(意成身,yoniso-manasikāra)에 갖춰 고통과 쾌락을 더이상 따라가지 않는 중도를 깨달아 안목, 앎, 반야 지혜, 적정, 사성제 열반 등의 보림에 실참하며 구경열반을 맛 보았다.
이처럼 녹야원에서 오비구가
부처님의 중도 깨달음을 실참하신 보림으로서 "일어나는 법dhamma은 무엇이든 반드시 그친다(niroha)"을 참으로 완전히 깨달았구나!라고 안냐 꼰단냐에 칭찬하셨습니다.
깨달음을 종결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고락 양극단을 여의는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침止의 안목과 있는 그대로에 대한 앎과 연기법의 반야 지혜와 안목을 실참한 사선정의 적정, 괴로움을 멸한 최고의 지혜(아빈냐) 고.집.멸.도 사성제와 상수멸想受滅하는 구경 열반에 이끌어 주었다."라고 보림에 실참하는 말씀에 모두 칭양 찬탄하시길.
나모 석가모니불(/\)
나모 석가모니불(/\)
나모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12연기법의 보림을 깨달음에 사견하는데, 호흡관의 사마타 수행없이 숨쉬는 이 몸에서 정견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글로서 불교 저변에서 만연한 깨달음과 깨달음의 보림 실참에 대한 무지가 사라지기를...
五蘊의 일어남과 사라짐(集滅)에 대한 무명을 조건으로 (신.구.심)상카라 '형성行들'이 생겨나게 하고(몸身의 형성은 내외입처),
그러한 상카라를 거듭 행하는 조건으로부터 분별하며 아는 '식識'이 생겨나게 하고,
이처럼 분별하며 아는 '식'을 조건으로 근.경.식 감각접촉의 '물질色'에 대한 수.상.사.촉.작의 로서 기우는(nam) '명색名色'이 생겨나게 하고,
이 '명색'의 일어남(M9,마음의 일어남)을 조건으로 감각토대 육입六入이 생겨나게 되고(육입= 감각대상에 대한 육근을 분별),
육입을 조건으로 감각적 접촉觸을 하게 되고,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생겨나게 되고,
이(과거 훈습에 연결된) 느낌을 조건으로 갈구하는 갈애愛가 생기게 되고,
그래서 갈애를 조건으로 (감각적 욕망, 사견, 계율과 의식, 자아와 교리 등에 대한)취작取이 생기게 되고,
취작을 조건으로 (욕.색.무색)계에 대한 의도로서 존재有를 생겨나게 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의 생生을 갖게 되고,
태어나生 (갖게 된 정신작용 오온의 전개)을 조건으로 노사를 '괴로움'에 겪어보게 되므로
따라서, 절망 고통 분노 회한 등의 괴로움을 일으킨다.
ㅡㅡㅡ
붓다의 호흡명상(安盤禪)을 선정 삼매에 공부할 때 큰 도움을 준 성철스님 <백일법문>의 중도 설명에서
[숫따니빠따] 「도피안 품」의 함의를 가르침 전승 아가마 아함 <니까야>에서 찿아 다음처럼 배웠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 변을 알고서, 중간[majjhe]을 더럽히지 않네. 나는 그를 대인이라 부르노니,
그는 여기서 바느질하는 여인을 넘어섰노라.” 라는 [숫따니빠따] 「도피안 품」의 「학인 띳싸 멧떼이야의 질문」을 담은 게 Majjhesutta이고, Majjhesutta에서는 6가지 중간을 밝힌다. 즉,
(AN 6.61 Majjhesutta, 대림스님 「앙굿따라 니까야」 제4권에서,) 장로들이 중도를 공부할 목적으로서 부처님께 제시한 "두 변 및 중간과 바느질하는 여인" 등에 각각 해당하는 6가지 종류는
1. 감각접촉과 감각접촉이 일어남, 감각접촉의 소멸, 갈애(taṇhā); 2. 과거와 미래, 지금 이 순간, 갈애; 3.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갈애; 4. 정신과 물질, 알음알이, 갈애; 5. 여섯 안의 감각장소와 여섯 밖의 감각장소, 알음알이, 갈애; 6. 자기 존재가 있음과 자기 존재가 있음의 일어남, 자기 존재가 있음의 소멸, 갈애 등이다.
ㅡㅡㅡ
세존께서는 모두의 의견이 방편이 된다고 말씀하시며, “양 변을 알고서 중간을 더럽히지 않아, 대인이라 부르며, 바느질하는 여인을 넘어서는 지혜로운 자” 로서 첫 번째 장로의 감각접촉[觸]에 대한 ‘두 변과 중간’을 보이고 “갈애가 그것을 기워서 이런저런 존재로 태어나게 한다.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된다.” 라고 말씀하신다.
촉(觸)은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化合]으로부터 발생한다. 감각접촉이 첫 번째 변이므로 근.경.식과 감각접촉을 갖추면 두 번째 변으로서의 ‘감각접촉의 일어남’이 있게 되고, 감각접촉에서의 소멸이 중간(majjhe)의 알음알이이며 일어난 모든 법은 반드시 소멸하는 법안(法眼) 즉, ●집법즉멸법(法ㅡ滅ㅡ集)을 갖춘다.
이처럼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이 준 쾌락과 자기 학대가 준 고행을 따르지 않으시고,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의 두 변의 극단을 법(法)으로써 감수(感受)하셨다.!!!!
이때 대상에게로 마음이 기운채의 육근과 육경에서의 두 변을 결박(saṃyojana)이라고 한다.
마음의 개입으로부터 결박되는 두 변에서의 majjha가 발생함을 보인 S35:232 Koṭṭhikasutta에서의 시각과 형상과의 조건으로 생긴 욕탐에 묶인 결박을 majjhesutta의 6가지 안과 밖의 감각장소의 두 변(내외입처)으로 배대한다.
ㅡㅡ내외입처에서ㅡㅡ
시각이 형상을 묶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형상이 시각을 묶고 있는 것입니까? ...중략... 마노가 법을 묶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법이 마노를 묶고 있는 것입니까? 벗 꼿티타여, 시각이 형상을 묶고 있는 것도 형상이 시각을
묶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두변을 조건으로 생겨난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ㅡㅡ
이 Koṭṭhikasutta에서는, “검은 소가 흰 소를 묶고 있는 것도 아니고 흰 소가 검은 소를 묶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 줄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거기에 묶여 있습니다.”라는 묶인 가운데에서의 ‘안목’은 대상에게로 마음이 기운 욕탐입니다.
욕탐에서,
육근과 육근의 두 변의 결박된 가운데(majjha)로부터 알음알이[識]와 수.상.행.식 오온 등의 존재가 태어나 괴로움(오음성고)을 겪게 한다는 것이다.
...중략..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 sati에서의 숨결 닿음을 지속적으로 마음챙겨 나아가면, 육근과 육경의 두 변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결박된 가운데로부터의 입처(내외入處)를 마음챙김[sati]할 수 있다. 들숨과 날숨에서의 숨 쉬는 몸(身)과 대상인 닿음 촉(觸)과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 연기한 알음알이에 대한 표상을 만들고 그 표상의 보호와 지속을 통해서 ‘중간(majjhe)’으로부터 드러난 알음알이에서의 법을 닦는 초기불교 수행체계를 구현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들숨과 날숨에서의 알아차림이 보편적인 수행이므로 이는 Ānāpānasati에서의 majjha가 알음알이라고 직접 설하신 경전이 없었던 바의 이유가 된다. ...
이하부터는 아래의 본문을 참고하시고 생략함.
https://m.cafe.daum.net/mindsati/Sf2i/4?svc=cafeapp
첫댓글 댓글을 읽어보세요.
https://www.youtube.com/live/YcBxVPPx_FI?feature=share
https://youtu.be/4li004R4j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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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개'와 '초선정 오선지'와의 관련성을 '니까야'의 <교리문답의 경>에서 설법을 하십니다.
"도반이여, 초선에서 5가지 덮개 '오개'들이 버려지고 5가지의 '선지'들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 초선정을 증득하는 비구 수행자에게는
감각적 욕망이 버려지고,
악의(성냄, 거부)가 버려지고,
나태(망상)와 졸음이 버려지고,
들뜸과 후회가 버려지고,
의심 등 방해하는 '오개'를 버려야합니다.
수행자는 또한,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 떨쳐버림의
희열과 몸이 경안한 행복과
마음이 한 끝에 집중(심일경)등의 5개 선지를 가지려 노력합니다.
도반이여, 초선정에서 이와 같이 5가지의 '오개'들이 버려지고 5가지의 '선지'들을 갖추게 됩니다."
이때의 '오개(특히 좌선시 허리 통증에 성냄)'를 받아들이고 통증을 내려놓을 때
드디어 수행자는 눈.코.귀.혀.몸 등 5가지 감각기관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계(silla)와 같은 문지기 역활을 잘 하는거랍니다.
담마는 누구에게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한 보통 명사 입니다. 연기는 필연입니다. 즉, 태어나 일어남에 함께 섕겨난 늙어 죽음의●그침이 바로 연기입니다.
반면에 깨달음Bodhi는 고통과 쾌락을 담마에 정견한 각성입니다.
적정은 명상주제에 대한 문지기 확립 즉, 념처의 지속적 수관입니다.
사성제와 열반은 담마를 깨달음에 보림한 실참 즉, 제법(몸과 마음)의 일어남과 사라짐 漏의 그침입니다.
그래서 기본이 중요합니다.
안으로 뜻은 육근의 안이비설신의 기능은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고,
sati는 주제(성문)에 대한 문지기이고, sati기능은 기억의 통제이다.
satimā는 문지기sati를 가진 것(기억을 한곳에 머뭄)이다.
S10:4
마음챙기는 자는 항상 행운이 함께하고,
마음챙기는 자는 행복을 얻도다.
마음챙기는 자는 더욱 더 나아지나,
결코 증오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하도다.
‘‘Satīmato sadā bhaddaṃ, satimā sukham edhati;
Satīmato suve seyyo, verā na parimuccati.
"새김을 확립하면 어제나 복되고
새김을 확립하면 즐거움을 얻는다.
새김을 확립하여 날마다 잘 지내더라도
증오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내외입처와 명색 등 두 겹의 알음알이(識)를 가진 이 몸[유신견]을 근.경.식.촉.수.상.행.애.심.사[근경식과 오온]에서 갈애를 내려놓아 버리며 얻은 멸성제로부터 생로병사의 연기[형성]에 두려움이 없는 열반을 증득한다.
부미자경 감수, 오개 받아들임, 무상.그침을
문지기sati로서 집법즉멸법을 법수관.
sati의 dvārika, dovārika(gatekeeper) 의미는 오근 감각접촉에서의 集滅에 대한 문(dvāra, door門)지기 이죠,
예시로 <부미자경> "감각접촉觸에 반연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에서,
觸에서의 일어남集과 그침滅의 수관이 없다고 하면 과연 그 느낌은 존재할까요? (이것이 S12:15에서의 세계loke에 의한 정견의 핵심)
중도 깨달음.집법즉멸법의 법안을 12연기 각지들에 확장..이것이 보림이다.
즉, 형성을 집법즉멸법에 문지기 찰나 확립(하는 순간에) 연유로 생겨나는 식을...
식을 집법즉멸법에 문지기 찰나 확립(하는 순간에) 연유로 생겨나는 명색을.
(심.의.식의 ■식은 명색(마음.집,M9)을 넘어가지 못함. 재생연결식)
명색을 집법즉멸법에 문지기 찰나 확립(하는 순간에) 연유로 생겨나는 육입을.
육입을 집법즉멸법에 문지기 찰나 확립(하는 순간에) 연유로 생겨나는 감각접촉을.
감각접촉을 집법즉멸법에 문지기 찰나 확립(하는 순간에) 연유로 생겨나는 느낌을.
...
태어남 찰나 집법즉멸법의 문지기 확립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노ㅡ사를.
<-- 중도 깨달음의 보림.
그러하군요. https://dictionary.sutta.org/ 의 말미에
//増補改訂パーリ語辞典 水野弘元著
sati:[sant の sg.loc.]// 라고 하듯이, 즉, sati를 여성명사 문지기dovāriko에 보지않고
sant의 처격(동사atthi의 현재분사)에 보므로
"태어남이 있을 때 노사가 있다." 가 맞는 해석입니다.
일본 빨리어 사전의 해석도 참조해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태어남이 있다고 할때(즉, 집법즉멸법로서 문지기될 때) 노사.저것이.가 일어난다."라고 의미적인 해석을 첨가 할수도 있지 않을까요?
Sīlaṃ samādhi paññā ca
vimutti ca anuttarā,
Anubuddhā ime dhammā
gotamena yasassinā.
Iti ●buddho abhiññāya
dhammamakkhāsi bhikkhūnaṃ,
Dukkhassantakaro satthā
cakkhumā parinibbuto'ti.
[세존]
“최상의 계행과 삼매와
지혜, 그리고 해탈
이러한 것들을 명성 있는
고따마는 ●깨달았네.
깨달은 님, 괴로움을 종식시킨 님,
스승, 눈 있는 님,
적멸에 든 님은 곧바로 알아
수행승들에게 가르침을 설했네.”(A4:1)
'무엇이 dhamma(法)인가?'
일어나고 반드시 그치는 것이 담마 법이랍니다. M22 에서, "내가 가르치는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그침이다."
고.집 (집성제)가 있다는 것은 고.멸 (멸성제)를 정견하는 것이고,
또 일어남(집)원인과 그침(멸) 결과의 확립을 paticca-sam-uppāda(연기)에 ... 등등을 담마에 말합니다...
S56:11은 법에 말합니다.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든 반드시 그친다(집법즉멸법)'.라고요.
이때의 집멸의 확립을 챙기는 바를 념처(satipaṭṭhānā) 이라고 합니다.
즉, 몸 [느낌, 마음, 법]에서 몸[느낌, 마음, 법]을 (일어나고 반드시 그치는 담마에)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긴다. (satipaṭṭhānāsutta)
사념처에서 '념처satipaṭṭhānā'의 뜻은 ●집멸하는 법들(samudayavayadhammā[SN. vol.5. p.183.])을 확립하고 ■문지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할때 고짜라gocara가 드러납니다.[SN. vol.5. p.149]
즉,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자신의 gocara(고유의 영역= 집멸의 념처)가 아닌 다른 visaya(對境 혹은 다른 영역)을 돌아다니지 말라
Vinaya Piṭaka, mahāvaggapāḷi, 1. mahākhandhako, 1. bodhikathā
atha kho bhagavā etamatthaṃ viditvā tāyaṃ velāyaṃ imaṃ udānaṃ udānesi —
“yadā have pātubhavanti dhammā.
ātāpino jhāyato brāhmaṇassa.
athassa kaṅkhā vapayanti sabbā.
yato pajānāti sahetudhamman”ti.
Netti. [PTS145]
열심히 선정 수행하는 바라문에게 법이 명백해질 때
그의 모든 의심은 사라진다. ●원인滅을 지닌 법을 잘 알기 때문에..
atha kho bhagavā etamatthaṃ viditvā tāyaṃ velāyaṃ imaṃ udānaṃ udānesi —
“yadā have pātubhavanti dhammā.
ātāpino jhāyato brāhmaṇassa.
athassa kaṅkhā vapayanti sabbā.
yato khayaṃ paccayānaṃ avedī”ti.
열심히 선정 수행하는 바라문에게●법이 명백해질 때
그의 모든 의심은 사라진다 조건의●그침을 알았기 때문에
“yadā have pātubhavanti dhammā.
ātāpino jhāyato brāhmaṇassa.
vidhūpayaṃ tiṭṭhati mārasenaṃ.
sūriyova VAR obhāsayamantalikkhan”ti.
열심히 선정 수행하는 바라문에게 ●법들이 명백해질 때
마라의 군대를 쫓아 버리고서 그는 서있다.
해가 하늘을 빛으로 가득 채우듯.
<<== 율장] Mahāvaggapāḷi[대품] 1. Mahākhandhako[큰 부분] . 1. Bodhikathā[깨달음 이야기
@행복한 포교사 감각적 욕망
pañcime, bhikkhave, kāmaguṇā. katame pañca?
cakkhuviññeyyā rūp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sotaviññeyyā saddā ... pe ... ghānaviññeyyā gandhā... jivhāviññeyyā rasā...
kāyaviññeyyā phoṭṭhabb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ime kho, bhikkhave, pañca kāmaguṇā.
비구여, 5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다…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다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다.
비구여, 이것이 5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다.
evameva kho, bhikkhave,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행복한 포교사 vā ime pañca kāmaguṇe
gathitā mucchitā ajjhopannā anādīnavadassāvino anissaraṇapaññā paribhuñjanti,
te evameva kho, bhikkhave,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ime pañca kāmaguṇe
gathitā mucchitā ajjhopannā anādīnavadassāvino anissaraṇapaññā paribhuñjanti,
te evamassu veditabbā—‘anayamāpannā byasanamāpannā yathākāmakaraṇīyā pāpimato’.
비구여, 예를들면 숲속 사슴이 묶인 채 올가미 더미에 누워있다면,
그는 불행을 만났고 재난을 얻었고 사악한 [마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사냥꾼이 오더라도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여겨는 것과 같다
비구여, 그와같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들 5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묶이고 홀리고 빠져서 재난을 보지 못하고 벗어남에 대한 통찰지가 없이 그것을 즐기는 자들은
'불행을 만났고 재난을 얻었고 사악한 [마라]의 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라고 알아
@행복한 포교사 야 한다.”
evameva kho,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andhamakāsi māraṃ apadaṃ,
vadhitvā māracakkhuṃ adassanaṃ gato pāpimato.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尋과 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M111 16개에 사띠 위치)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일러 마라를 눈멀게 했고, 마라의 눈을 발판이 없도록 그렇게 빼버려
그 사악한 [마라]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갔다.'라고 한다
<== 성스러운 구함 경[聖求經] 810) Ariyapariyesanā Sutta(M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