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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좋은 일을 하고 살아보고 싶구나(2111.2021.11.28)
막14:6-9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버리시지도 않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주시고 살게 해주시는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상한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함을 주시고 삶에 지치고 문제 있는 것이 예배중에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11월15일 삼남연회 협성동문 회장으로서 코로나19 때문에 아무 행사도 못하고 지나갈뻔 했는데 다행이도 행사하나를 은혜중에 잘 마쳤습니다. 동문모임을 갖지 못한 것이 4-5년 되었다고 합니다. 동문회 모임을 창녕 화왕산 억새밭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30여명이 참석하여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손소독을 하고 서로가 조심하면서 일부는 등산을 하여 산으로 올라가고, 무릎들이 아프셔서 동참을 했지만 산에 등산을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는 집사람이 커피숍에서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제목처럼 회장으로서 좋은 일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임원들 모여서 의논하고 각지방 지방장들에게 전화를 하여 소식을 전하고 점심과 저녁 그리고 간식도 5천원씩 짜리로 잘 준비를 해서 대접도 하고 집에 갈때에는 1만원씩 커피값도 드리고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행사 며칠전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누군가가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백만원을 드릴테니 이름을 밝히지 말고 목사님이 알아서 쓰시라고 하여 동문회 서기목사님에게 통화하면서 연회안에 비젼교회 10교회를 알아보라고 하고 특별히 그날 참석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하면 좋으니 파악해 달라고 했습니다. 서기목사님이 잘 파악을 해서 그날 동문모임에 참석한 동문들 중에 비젼교회 10교회를 선택을 해서 내년도 달력 하시라고 10만원씩 드렸는데 드리면서도 참 기분은 좋았습니다. 동문회비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하는 것으로 밝혀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남을 돕는 것도 쉽지 않구나 했습니다. 10교회 나누어드렸는데 나중에 한분이 저를 찾아와서 형님 누구가 참 어려운데 교인이 2명밖에 없는데 더 도와주실 수 있나요 해서 여기 참석했느냐 했더니 참석했다고, 누구냐고 000이라고 하여 그 목사님은 내가 북성교회 시절에 초등학교 때 가르쳤던 학생이었는데 알았어요 하고는 그 다음날 교회와서 그분에게 전화를 하여 안부를 물었더니 대화중에 자기가 삼남연회 동문회에 20년 넘게 참석을 했는데 이런일이 처음이라고 감동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0만원 보낸다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하고 앞으로도 상주교회에서 일년동안 돕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 손에 들려주신 그분을 위하여 하나님은 만배로 채워주실 것을 믿고 축복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추수감사절이라고 하여 여러분들의 마음을 강단을 꾸미면서 이것저것 골고루 좋은 것들로만 챙겨오셔서 준비하는 동안에 마음이 기쁘셨지요. 너무 많이들 하시면서 내색들을 안하고 그냥 내일 처럼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받으신줄 믿습니다. 억지로 하신분이 한분도 없는줄로 믿습니다. 모두가 기분 좋은 일로 여기고 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 교회에서도 신앙생활 잘하는 여러분을 격려하기 위하여 교회 이름으로 사과를 한상자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좋은 일 많이 하고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강합니다. 인정하십니까? 남자보다 7,8년 더 오래 삽니다. 몸에 좋은 것을 남편하고 자식에게 다 먹이고도 제일 건강하게 오래 삽니다. 남자들은 착합니다. 고생시켜 미안해서 몇 년 편하게 살라고 먼저 가줍니다. 사랑하는 사람 먼저 보내기 싫어 본인이 먼저 갑니다. 자살도 덜 합니다. 강한 척 한 남자는 힘들다고 자살 많이 합니다. 여자는 어떤 어려움도 다 이겨냅니다. 이겨내면서 자식들 양육하고, 교육하고, 결혼시키고 살아서 세계여행까지 합니다. 우리 연세드신분들 맞지요. 우리 코로나19 잘 풀리면 성지순례도 한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말을 얼마나 잘합니까? 말로 여자를 이길 남자는 몇 안 됩니다. 저도 못 이깁니다. 특별한 은사가 있으신 분은 여자를 말로 이기기도 합니다. 남자는 하루에 생성하는 단어가 일 만개이고 여자는 이만 오천개입니다. 그러니 말로 여자를 이기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자에게는 드라마 50분짜리 보고 몇 시간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요,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씩 이야기 할 능력을 갖춘 분들이 여성분들입니다.
그리고 생활력이 얼마나 강합니까? 만 원짜리를 오천원에 사는 능력도 있습니다. 남자는 오천 원짜리를 만원에 사는 희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이 벌어 온 돈을 자기 돈처럼 쓰는 능력이 있습니다.
남편은 자기가 벌고도 용돈을 타 쓰고 많이 주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합니다. 이 기회에 용돈 조금씩 더 올려주시는것도 좋습니다. ㅎㅎㅎ남편을 말 잘 듣는 사람, 순하고 착한 사람,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제자훈련을 잘하는 능력이 여성분들에게는 있습니다. 남자들은 착합니다. 남자들이 오죽하면 그렇게 살겠습니까? 남자는 오직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일 신기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로 저렇게 단체로 웃을 수가 있을까? 입니다. 살이 쪘다고 웃고 빠졌다고 웃고, 먹었다고 웃고, 안 먹었다고 웃고 신비롭습니다. 듣고 있으면 도저히 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여자가 남자보다 강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재질이 다릅니다. 남자는 흙으로 만들고,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어서 그럽니다. 뼈가 흙보다 훨씬 강합니다. 가지고 노는 것이 다릅니다. 남자는 나무젓가락 가지고 놀지만 여자는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놉니다. 남자는 나이 들수록 집 밖으로 안 나가려 합니다. 여자는 나이 들수록 집 밖으로만 나가려고 합니다. 이분들 몇 분 모이면 세계여행도 다녀온다고 합니다.
보는 것이 다릅니다. 여자는 출산할 때 피를 보았습니다.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내가 애도 몇명 났는데 이걸 못 이겨 하고 이겨냅니다. 무서운 분들입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혀 십자가 질 때 다 도망갔습니다. 여자들은 십자가 밑에 까지 따라와서 울고 함께 하였습니다. 바로 이렇게 여성분들이 좋은 일을 많이 했다라고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준비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붓습니다. 한 옥합은 300데나리온입니다. 노동자의 300일치 품삯, 약 1년 동안의 품삯입니다. 일당이 십만 원이면 삼천만원 정도의 가치입니다. 막14:3절‘매우 값진 향유’라고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이 장면을 보고 있던 어떤 사람들이 화를 냈습니다.
4절‘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화를 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비싼 향유를 허비한다는 것입니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왜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향유가 허비고 낭비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예배시간과 헌금, 몸 드려 하는 봉사와 섬김이 낭비일까요? 주님 때문에 참고 인내하고 견뎌내는 것이 과연 허비일까요? 드리는 한 여인은 기뻐서 드리는데, 드리지 않고 보고 있는 사람들이 허비한다고 화까지 냅니다. 생각의 다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향유를 받으신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막14:6-8절‘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힘을 다하여’ 하셨다고 평가하셨습니다. 낭비, 허비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가만 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도 좋은 일을 하고 삽시다. 사람은 한번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납니다. 인생은 되풀이해서 살 수 없고, 한번 가면 이 세상에서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인간답게 또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그리스도의 빛을 비춰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따지고 빼앗고 가지려고 노력하며 쌓아 두려고 합니다. 무너지면 막을 길도 없는 비극을 알면서도 탐욕을 따라 쌓아 올립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중대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예루살렘 지역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위한 유월절 전날, 예수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평소 때와 같이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분이 하시는 모든 말씀에 마음을 집중시켰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주님께 무엇인가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은 이제껏 그 가정을 위해 많은 것을 해주셨습니다.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살리셨고, 그들 삼 남매가 모두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고아였던 그들을 큰사랑으로 사랑해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 주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통하여 얻은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고, 주님께 받은 사랑의 빚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목사님도 여러분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데 부족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목사님을 많이 사랑해주시고 존경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마리아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여기 ‘나드’라는 ‘향유’는, 멀리 인도의 히말라야산맥에서 자라는 어떤 식물의 뿌리에서 뽑아낸 물질로 만든 향유입니다. 그리고 먼 나라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순전하다’는 것으로 보아 순도 100%의 향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향유를 손에 들고 있던 마리아가 갑자기 옥합을 깨뜨리더니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로 어리둥절하고 있었으나, 방안에는, 최고의 헌신이 발하는 향기로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이시고 메시아이신 그분께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을 주님을 위해 바쳤습니다. 가장 고귀하고 사랑이 가득 담긴 헌신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는 순수한 사랑과 희생적인 헌신에는 생명이 있고, 부활이 있고, 기적이 있고, 부흥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기념될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평생에 한가지만이라도 기념될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신천집사, 권사, 장로가 되면 교회에 기념될만한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교회 역사에 기록해 둡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질의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오늘 잔치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였기 때문에 가장 맛있는 것으로 예수님께 대접하려고 했고, 오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아주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였고,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지난주 추수감사절기를 그렇게 맞이한 줄로 압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하신줄 믿습니다.
열심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희생하여 드렸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처럼 기쁨과 헌신이 충만한 자리에서 시비를 거는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곳이나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시비를 걸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다. 서기관이나 제사장도 아니었고, 정치인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였던 것입니다. 그는 도적이라 훔치기 위해서 착복하고 유용하기 위해 탐욕을 부렸던 것입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데 시비거는 사람이 누구냐면 교회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 하기도 하고 가져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열심히 하고도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억울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남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여인의 행한 일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낭비라고 시비를 걸든 말든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를 기꺼이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향유는 노동자의 1년간의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평생 모은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이 돈을 모으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고, 또 각고의 노력도 했을 것입니다. 또 이 향유는 근동지방의 여성에게는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을 주님께 기꺼이 드렸습니다. 드리면서도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는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드리면서도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드리면서도 기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상주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마음의 옥합이 깨어드려야 합니다. 마음이 깨어질 때 눈물의 향유가 쏟아집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눈물을 뿌리는 것은 마음이 깨어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곁에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옥합을 깨뜨려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옥합 속에 든 향유보다 더 값진 눈물을 쏟은 것입니다. 눈물이 없는 신앙은 주님이 받으실만한 향유를 드리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사랑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눅 19:41). 죄 가운데 살면서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죄를 먹고 마시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설 줄 모르는 이스라엘, 곧 멸망당할 줄도 모르고 불법과 불의와 탐욕과 불신 속에 살아가는 우매한 백성들을 생각하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 바울은 사역의 눈물을 흘렸습니다(행 20:31). 바울은 주를 섬기고 성도들을 양육할 때 수도 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눈물의 편지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눈물의 설교입니다. 바울의 일생은 눈물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성군 다윗은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히스기야는 기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눈물을 보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눈물을 흘립시다. 바울처럼 일을 하면서 눈물을 흘립시다. 다윗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베드로처럼 통회의 눈물을 흘리고, 히스기야처럼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의 눈물을 흘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몸의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헌신의 표시입니다. 향유를 바친 것은 물질을 바친 것이요, 눈물을 흘린 것은 마음을 바친 것이며, 그 발에 입을 맞춘 것은 몸을 바친 것입니다. 여자에게 머리털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걸레 삼아 주님의 발을 씻은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주님을 위해 바친 헌신입니다. 주님은 피흘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몸을 순교의 제물로 주 앞에 드려야 합니다. 몸을 드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몸을 드려 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하고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몸을 드려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바랍니다. 몸을 드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항상 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몸을 드려 전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류 역사에 가장 고귀한 헌신은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좋은일을 하였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면 나도 좋은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우리들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1.마리아는 예수께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막14:6절‘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26:10절에도 꼭 같은 말을 예수께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에게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설명하기를 막14:8절‘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행한 좋은 일은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더운 지방에는 향유나 향수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풍부하지 못한데다가 몸에 땀이 많이 흐르게 되는 경우 냄새를 제거하는 훌륭한 재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손님이 찾아왔을 때나 식탁에 앉았을 때 그 사람의 발에나 머리에 몇 방울의 향유를 뿌려 쾌감을 주는 것은 당시에 흔한 예우적 습관이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투명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옥합에 담긴 나드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옥합은 병 전체가 둥글며 목이 길었고,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용할 때는 병의 목을 자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옥합을 깨뜨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막 14:3). 한번 깨뜨려지면 전혀 복구가 불가한 것이 옥합 병이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값진 향유라고 하였습니다. 순전한 나드라고 하였습니다(막 14:3). 그 값은 무려 300데나리온 이상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막 14:3). 당시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액수라고 생각할 때, 적어도 마리아는 건강한 노동자가 1년 동안 일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고가의 나드 향유를 주님께 아낌없이 부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최고의 것, 제일의 것, 섞임이 없는 순전한 나드를 주께 쏟은 것입니다. 그것은 ‘힘을 다하여’ 한 것이라고 주께서 높이 평가하였습니다(막 14:8). ‘지극히 비싼 향유’(요 12:3)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실로 진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섞임이 없는 순전한 나드였습니다. 이 나드는 북인도와 히말리야 산맥에서만 재배되는 핑크빛 꽃으로부터 축출되는 원액이었습니다.
이때에 사탄은 돈궤를 맡은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마리아에게 집중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그는 분을 내면서 무슨 의사로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이것을 허비하느냐고 마리아를 책망하였습니다. 모든 제자들도 여기에 동감을 하였습니다. 서로 분내어 말하는 것을 가룟 유다가 선동한 것이었습니다(막 14:4-5). 저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가기 위한 내심을 선으로 가장한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요 12:6). 이때 예수님은 막14:6절에서‘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멋있는 일, 아름다운 일, 선한 일, 아니 매력적인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에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그 좋은 일 곧 매력적인 것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믿음으로 환난 중에 기뻐하고 내가 내 믿음으로 감사할 수 없는 중에 감사하고, 내 믿음으로 슬픔을 당해도 기뻐하고, 감금을 당하여도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고 풍성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내가 세상을 이기며 믿음으로 남모르는 평강을 누리고 살며 믿음으로 시간마다 하나님께 간구하며 믿음으로 주님께 헌신하며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분명히 축복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오직 믿음으로 기쁨과 감격과 평강이 있어야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본주의적 행동입니다. 막14:6절‘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다니에서의 저들의 잔치 자체가 예수 중심이었습니다. 요12:2절‘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라고 하였습니다. 그 잔치는 예수께 대한 보은의 잔치였습니다. 문둥이었던 시몬이 주의 은혜를 입고 고침 받은 일에 대한 보은이었습니다(막 14:3). 또 죽었던 나사로가 주의 은혜로 다시 부활을 얻은 일에 대한 보은이었습니다(요 12:2). 나사로와 시몬이 예수와 함께 앉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요 12:2).
저들이 예수께 받은 은혜에 보은하고 감사하는 것이 그 잔치의 중심이었습니다. 바로 이 자체가 ‘좋은 일’, 곧 ‘아름다운 일’, ‘선한 일’이었습니다. 죄인 된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일, 곧 좋은 일, 매력적인 일이 있다면 그것은 구주 예수를 위한 보은과 감사의 행위입니다. 그것이 그를 향한 예배요, 기도요, 찬양이요, 헌신이요, 봉사요, 희생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는 그 어떤 일도, 그것은 좋은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좋은일 좀 하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최고, 최귀, 최상의 희생적 사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최고의 것, 최상의 것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희생적인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느끼고 삽시다. 그 사랑을 가지고 하루하루 힘을 내 봅시다. 주님을 위하여 사랑을 드려봅시다. 바로 그것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것, 3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 나드 향유를 예수께 붓는 것이었습니다(요 12:3, 막 14:3). 옥합의 병을 여지없이 깨뜨려 값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붓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그 무슨 조건이나 값으로 계산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도적인 가룟 유다가 볼 때 마리아의 이러한 행위는 실로 무모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만이 지닐 수 있는 영예요, 특권이요, 자랑입니다. 아니 사랑만이 나타낼 수 있는 칼로스(kalov"), 곧 매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자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주께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지니고 있는 매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주어진 한번만의 기회를 선용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와 그를 동조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에게 행할 선의 기회는 여러 번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지만 막14:7-8절‘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절‘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마리아의 ‘좋은 일’이 자신에게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적절한 시기에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 예언적 행위라고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미리 알고 그렇게 준비했는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마리아의 이 착한 일을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관계시키면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당시에나 지금에나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시신에 향재료를 넣고 바르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대한 것은 마리아가 기회를 선용한 것이 멋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비극 중에 하나는 바로 예수를 향한 선한 일, 착한 일, 아름다운 일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이것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억눌러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선하신 예수에게 받은 사랑의 충동, 감사의 충동을 받을 때 바로 그 시간에 지체없이 옥합을 깨뜨리는 ‘행동하는 사랑’이 멋이라는 것입니다. 매력이라는 것입니다.
3. 좋은 일은 기념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누구나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것을 ‘공명심’ 이라고도 하고 ‘명예욕’ 이라고도 합니다. 산에 가면 나무나 바위에다가 자기의 이름을 새겨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언제 그 산에 왔다는 기록을 누구에겐가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공명심은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안될 때에는 힘으로, 또는 돈으로라도 권력을 얻어서 자기의 이름을 내보려고 합니다.
막14:9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타낸 마리아의 ‘이 좋은 일’은 기념비적 사건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이 마지막 종지부를 찍고 끝나버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남긴 십자가의 사건은 ‘복음’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죄인들에게 들려질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때 자신의 기쁜 소식과 함께 마리아의 ‘좋은 일’(kalo;n e[rgon)이 말하여져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의 삶에 마리아가 기념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구원의 복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한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마리아의 좋은 일과 같은 수많은 새로운 좋은 일이 교회 중에 일어나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거대한 무덤들이 말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릴지라도, 예수님을 향한 그 마리아의 좋은 일은 사라져 버릴 줄 모르고 오늘 우리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어 재현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를 향한 ‘좋은 일’ 곧 매력적인 일은 결코 사라져 버리거나 중단되어 버리거나 없어져 버릴 수 없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칭찬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의 무릎 앞에 앉아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마리아는 이것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0:42). 여기에 나타난 ‘좋은 편’이란 ‘아가도스’(agaqov")를 뜻하였습니다. 정신적이요, 내면적이요, 영적인 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여기에 ‘좋은 일’(kalo;n e[rgon)은 행동하는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시각적인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일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장사)을 위하여 생의 최고의 옥합을 깨뜨려 순전한 나드를 주께 쏟은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최고, 최귀, 최상을 드리는 희생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없어지거나 사라질 수 없는 기념비적인 사건 곧 매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복음이 죄인들의 가슴에 재현될 동안 이 마리아의 좋은 일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재현되어야 할 기념비적인 매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자기에게 칼로스한 일, 즉 좋은 일(kalo;n e[rgon)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사랑의 시위, 행동하는 사랑은 정지하거나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가 지닌 고유의 멋이요, 맛이요, 매력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해타산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행동하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한 유용성이나 기복성이 결코 아닌 아름다움을 주는 행동하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칼로스한 행위는 사랑의 낭비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의 힘이요 매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습니다. 시골 농장에 불이 나자 주인이 재빨리 소방서에 신고했다고 합니다. 잠시 후 낡고 허름한 소방차가 도착해서는 겁도 없이 불길로 휩싸인 농장 한가운데로 달려들어가서는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불길 속에서 뛰어내린 소방수는 미친 듯이 물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용기에 감동한 농장주는 소방수에게 500달러를 내놓았습니다. 이를 취재하러왔던 기자들이 그 소방수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용감하군요. 기증 받은 돈은 어디에 사용할 건가요’ 그러자 소방수가 씩씩거리며 화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우선 이 고물 소방차의 브레이크부터 고칠 겁니다’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소방수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불 속 깊은 곳에 들어가서 살기 위하여 열심히 물을 품었지만 결과는 소방수로서 목숨걸고 사명 감당한 것처럼 되어 선을 행한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일상 생활을 하는 도중에 억지로 본의 아니게 선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할 때 손해 봤다는 생각을 가지지 말고 더욱 너그럽게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마5:41절‘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주님은 억지로 선을 베풀게 한 경우 베풀었으면 더욱 너그럽게 베풀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롬15:2절‘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딛1:8절‘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선행은 자손에게 까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약4:17절‘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여러분이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하십시오. 착한 일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마음을 주고, 손길을 보내고, 발길을 내딛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고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