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이 무슨 날인가요?’ 인터넷에 올라온 질문이다. 실제로 지난 해 한국교총이 조사한 설문에서는 초・중・고생의 40%가 3.1절을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3.1절에 소홀한 건 학생들만이 아니다. 정부가 주관하는 3.1절 행사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한때 학생들이 학교에서 만세 부르며 기념식하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운동장에서 수만 명이 모여 3.1절 기념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옛 신문 지면을 통해 지난 시절의 3.1절 행사를 10년 단위로 살펴보았다. | |
1946년 27주년
이날 신문은 3.1절 기사가 1면 톱이다. 기사에서 소개하는 기념 식순은 이렇다. 개회사 이승만 박사, 독립선언문낭독 오세창 씨, 축사 김구 씨, 타종 각 정당 대표 합동타종 7회,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만세삼창에 선창 김규식 박사, 그리고 폐회. 이 날 행사에서 축사를 했던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탄 4발을 맞고 순국하였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국민은 마음 편히 3.1절을 기념하지 못했다. 신탁통치 찬반을 계기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갈라져 싸웠기 때문이다. 평양역전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는 김일성에 대한 수류탄 투척 사건이 있었다. 47년 제주도에서 열린 기념행사는 제주 4.3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1948년 정부 수립 때까지 3.1절, 광복절 등을 좌우 양진영이 따로 치렀다. 3.1절이 국경일과 공휴일로 지정된 건 1949년 10월 1일이다.
1950년 31주년
1면 톱은 국정감사보고 관련기사다. 사설로 3.1절을 다뤘다. 행사 기사는 지면 안쪽에 배치했다. 3월 1일은 한국전쟁 발발을 약 넉 달 남겨둔 시점으로 나라가 어수선했다. 1948년 남북이 갈라진 후 1950년 6.25전쟁 전까지 남북은 팽팽한 긴장상태였다. 1949년 1월부터 1950년 6월 전쟁 직전까지 양쪽 사이에 벌어진 전투횟수는 총 874 차례나 된다.
1958년 39주년
위 사진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기념행사다. 연단 앞을 지나가는 무개차를 따라 풍물패가 공연을 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대한문과 멀리 숭례문이 보인다. 이 날 1면 톱은 한일회담 관련기사. 3.1절은 사설로 다루었다.
1959년 40주년
아래 사진은 밤에 열린 기념행사 사진이다. 장소는 확실하지 않다. 정부의 오전 공식행사는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은 사회분위기가 살풍경했다. 반독재데모가 벌어졌고 정부는 언론탄압을 강화했다. 4월 30일에는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1959년 10월에 정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위해 3선 개헌을 추진했다.
1963년 44주년
횃불을 든 신사들이 3.1절을 기념하고 있다. 장소는 알 수 없다. 그 주위에 있는 까까머리 학생들의 모습이 귀엽다. 이날 신문 1면 톱은 서울운동장서 정부 주관 3.1절 경축식이 열렸다는 내용이다. ‘기념사를 낭독하는 박정희 의장’의 사진이 나와 있다. 군복에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서울운동장에는 2만의 시민이 모이고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 의장, 김현철 내각수반, 조진만 대법원장이 참석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1963년 1월까지는 군정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나라는 검거와 투옥이 이어지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1970년 51주년
1970년 3월 1일 기사엔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동쪽 광장에서 경축식이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과 3부요인, 주한외교사절, 독립유공자 및 유족들과 해외교포, 시민, 학생 등 3만여 명이 참석했다. 정오엔 보신각종이 서른세 번 울려 퍼지고 오후 2시엔 파고다 공원에서 32인 합동 추도식, 저녁 7시엔 시민회관에서 기념예술잔치가 열렸다. 이 해 4월에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다. 11월 13일에는 전태일이 분신했다. 고속성장의 상징인 경부고속도로 개통, 반독재투쟁의 선봉장인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이 발표된 것도 모두 1970년의 일이다.
1980년 61주년
1면 왼쪽 상단에 관련기사를 올렸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10.26사태 후 정부가 국민적 화합을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다”면서 “국민화합으로 민주사회 건설하자”고 강조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였고 8월 16일에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되었다.
1990년 71주년
관련기사가 1면 중앙에 나왔다. 노태우대통령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촉구했다. 3부요인과 재경 광복회원, 3.1운동희생선열유족 등 4천여 명 참석했다. 사진에는 유관순 열사의 후배들인 이화여고 학생들이 남산국립극장 앞에 있는 동상 앞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장면이 있다.
2000년 81주년
매년 신문 1면을 장식하던 3.1절 기사를 2면에 배치했다. 크기도 작아졌다. 시대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종문화회관서 열린 기념식에서 “지역주의는 3.1정신을 거역한 죄악”이라고 규정하고 “지역주의를 선거에 악용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강조하였다. 광복회원, 국가유공자, 3부 및 헌법기관 주요인물 각계 대표와 일반 시민들 3,600여 명이 참석했다.
2010년 91주년
3.1절 기사를 3면에 배치했다.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열린 91주년 기념식에는 이명박 대통령 내외, 김영일 광복회장, 김형오 국회의장, 이용훈 대법원장, 이강숙 헌법재판소장 등이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강조했다. 신문은 ‘세종시 문제를 통합 차원에서 풀어줄 것을 정치권에 주문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3.1절 기념행사는 신문의 단골 기사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기념행사 소식보다는 ‘아파트 단지 태극기 게양률 20%’ 라는 기사가 더 크게 보도된다. 신문에서 3.1절 기사가 차지하는 면적은 그 시절의 3.1절에 대한 인식의 크기를 보여준다. 3.1절 뭐하는 날이냐고 묻는 아이들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심지어 6.25를 2002년 우리나라와 독일의 월드컵 4강전이 열린 날로만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 3.1절에는 집 앞에 태극기라도 꼭 달아보자. 92주년 3.1절 기념행사는 세종문화회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