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황현선생 존영>
<매헌 윤봉길의사와 백범 김구선생,거사전 존영>
문인의 선비정신과 민족관
인묵/김형식
문인은 왜 선비라야 하는가.
선비는 의리와 지조를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의리를 지키고 지조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게 간직할 수 있는 분을 선비라 하지 않는가. 民族觀은 민족에 대한 관점이나 견해를 이름 한다.개화기 이후 선각자라는 가면을 쓰고 외놈에 빌붙어 호의호식 했던자들의 행적을 선비의 눈으로 한번 들어다 보고 우리모두 타산지석으로 삼아 역사의 주인 노릇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 '개화'기를 들어다 보자.
고종이 일본의 압력에 굴복 1876년 부산, 원산, 인천,세 항구를 외국인이 출입할 수 있도록 허용한 이후 한국사는 식민지로 몰락해 가는 급격한 예속의 과정에 놓이게 된다.
※.1876년 김옥균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 개혁당(개혁파)이 주도한 1884년 갑신정변은, 당시 34살인 김옥균을 비롯하여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고종의 대신 여섯과 내시 한명을 살해 한다. 이들은 3일만에 일본으로 도망갔는데,이들의 일본행은 그들이 과거 일본 도야마 육군 학교에서 공부 했었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이때 정변에 참여 했던 서재필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다.
※.김인환에 따르면 한국에서 개화(開化)라는 말을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은 이들 개화당이 아니었다. 1894년 갑오년에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와 육군소장 오시마 요시마사가 군대로 한국 정부를 겁박하여 석 달 동안 208개조의 일본법을 한국에 시행하면서 오토리가 개화라는 말을 쓰면서 부터다.
※.이듬해 1895년 8월 20일 민비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살해 당한다.
※.정병화와 유길준은 가위를 들고 고종의 침전에 들어가 고종과 태자의 머리를 강제로 깎았다.
※.이당시 고종의 내부대신이었던 유길준은 갑신년 정변 때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미국에 귀화하여 필립제 이슨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던 서재필에게 공금 5000원을 부쳐주고 한국에 와서 신문을 만드라고 요청한다.
※.귀국한 서른 한 살 서재필은 1896년부터 1898년 사이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설립하고,서대문 근방에서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迎恩門)을 대체하여 독립문을 세운다.
※.독립신문에는 항일의병이 일괄되게 비도(匪徒)라 기록되어 있다. 한일의병장 유인석을 '나쁜놈'이라 지칭하고 있다.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은 유인석의 막하다.
※.독립신문은 일본의 경제적 조선지배를 공고하게 만든 일본화폐의 유통을 긍정하였고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를 극찬하였다.
※.서재필에 이어 독립신문 2대 사장 윤치호는 이후 조선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에게 은잔을 선물 하였으며 1945년 제국시대 친일 공적으로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된다.
※.유길준이 순종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1907년 유길준이 순종에게 올린 상소문은 ''인지의 몽매와 국방의 허술 함이 조금도 나아지는 기색이 없고 생업의 위축과 잔악 함은 더욱 심하여 한 가지도 안정을 확신하고 기대할 것이 없으니'' 이를 걱정한 이웃나라 일본이 우리를 위해 외교권을 넘겨받고 군대를 해산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상소문은 우리역사의 전면 부정과 침략국 일본에 대한 전면 긍정으로 이루어 졌다.
※.보호국 시기(1905~1910), 최남선은 열아홉 나이에 당대의 중요한 인물로 부상한다.1904년 열다섯 살에 동경 유학을 갔다가 열일곱 살에 당시 동경삼재라 불린 이광수, 홍명희와 교유 하다가 1908년 일본에서 출판용 기계를 가지고 들어와 출판사 '신문관' 설립하고 동년에 조선 최초의 근대 대중잡지 《소년》을 창간, 자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
※.10년 후 1917년 최남선과 동경에서 교유한 두 살 아래 이광수는 《매일신보》에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하는데 이 소설의 말미에서 국권 상실의 시대를 교육,경제,언론, 문학,문명사상에 대장족의 진보를 하였으며...(중략)...우리 땅은 날로 아름다워 간다'' 고 서술 한다.
그 시각은 유길준과 최남선의 시대 진단을 공유 하고 있다.
문명개화론자 이광수는 식민지 시대를 관통하면서 친일의 논리를 체계화하므로서 친일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가 된다.
※. 이광수는 서구 민주주의와 평등을 부정하고 일본의 도의주의를 찬양하였다. 그는 일본의 도의주의를 독일 이탈리아 파시즘과 동일시 했다.
※.이광수는 중일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이 10만 6천 명인데 비해 한국인 전사자가 너무 적은 것을 한탄 했으며
※.이광수는 일본인으로 살 수 있는 행복만 있다면 한국어가 없어지고 한국 이름이 없어져도 좋다고 했다.
●.민족의 대선비를 숭앙한다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 12. 11 ~ 1910. 9. 10)선생과 매헌 윤봉길(1908~1932.4.29)의사의 선비정신을 흠모 해 본다.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매천집] 권5)는 모든 글 중에서 가장 비장한 제목을 가진 작품이다.
“이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되기는 어렵기만 하다(難作人間識字人)”는 마지막 구절은 나라가 속절없이 무너진 상황에 부딪친 지식인의 고뇌를 함축하고 있다.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선생의 [절명시] 중에서-
※.윤봉길은 《소년》이 창간되던 해인 1908년에 태어났다. 이광수가 한글 최초 근대 장편소설 《무정 》을 썼던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 했으나 이듬해 3.1운동에 자극받아 학교 교육을 식민지 노예교육으로 인식하고 자퇴, 한학을 공부 18세 되던 해에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推>를 발간 했다.
※..윤봉길의사의 시는 우리 민족의 침향(沈香)이다.
현대시는 자신의 시대가 시인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한는 시다.
윤봉길의사의 25세의 짧은 생은 그자체가 현대시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태극에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 슬퍼하지 말아라 /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子)가 있고 /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 그의 어머니가 되고”
ㅡ의사의 두 아들에게 남긴 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중에서ㅡ
●.맺은 말
매국노와 친일파가 이완용,김옥균 홍영식,서광범,박영효,유길준,최남선,서재필, 윤치호,이광수 그들 뿐이랴.
설령 이들을 조상으로 둔 후손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작태를 바로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선비의 눈으로 매천 황현선생과 매헌윤봉길의사를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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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매천야록(1910)
*현대시의 눈으로 본 윤봉길 시의 성격 ㅡ 구한말 지성사를 생각하며ㅡ 함돈균 발표문 2018.11.23.
*김인환, 한국현대소설의 계보.기억의 계단 68 ~69쪽. 민음사 2001
*승정원 일기-순종.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95
*이면우.초기일본 유학생들의 학회 활동을 통한 과학문학의 기여 1895~ 1910.문학과 과학1: 자연,문명,전쟁.2013 참조
*류시헌, 최남선 평전.한겨례출판.2011. 11~44쪽
*이광수 <무정>김철교수 문학동네.2003.213쪽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