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복중 더위에
건강하시기를 바라오며
한 여름의 더위를 가시게 해 줄
옛 그림을 찾아 갑니다.
표암 강세황 (1713~1791)
《송도기행첩》 중 〈영통동구도〉조선 1757년 추정 / 종이에 수묵담채 32.8×53.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 1757)
- 강세황이 송도의 명승고적을 돌아보며 사경(寫景)한 진경산수 그림이다.
- 1757년 당시 개성 유수인 오수채(1692-1759)의 초청을 받아 함께 유람하며 그린 것을 모아 송도기행첩을 만들었다.
- 송도 기행첩에는 개성과 북쪽 지역을 여행한 후 그린 16개의 작품이 들어있다.
- 해주 오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더 것으로 정식 명칭은 《표암선생유적》이라 되어 있었다.
- 그릴 당시에는 《무서첩》無暑帖 이라하여 한 여름의 더위를 없애주는 화첩이라 불렸다고 한다.
- 화첩 속 16점의 그림은 모두 여름 풍경으로 송도시내의 정경부터 오관산, 천마산, 성거산 등 명승지를 사생한 것이다.
- 완숙기인 45세에 제작한 이 그림은 실재하는풍경을 남종문힌화풍과 서양화풍을 혼합하여 현장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 그의 아버지 강현과 오수채의 부친인 오도일이 친한 사이였으므로 선대의 우정을 되새기는 의미가 있는 만남이었다.
- 영통동은 황해도 개평군 개성 부근의 오관산(五冠山) 부근에 있다고 한다.
그림에 적혀있는 강세황의 화제를 보면
靈通洞口 亂石壯偉 大如屋子 蒼蘇覆之 乍見駭眠
俗傳龍起於湫底 未必信然 然環偉之觀 亦所稀有
"영통사 계곡에 어지럽게 흩어진 바위들은
정말 굉장해서 크기가 집채만큼씩하며 시퍼런 이끼로 덮여있다.
처음 대했을 땐 눈이 다 휘둥그레졌으니, 전하는 말로는 저 아래 연못에서
용이 나왔다고하지만 믿을 말은 못된다.
그러나 그 주변 웅장한 구경거리는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화가는 놀랄 것 다 놀라면서도 제 정신만은 내내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말고 낙천적인 기분이 편안하게 작품 전체에 녹아있다.
-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그림 71쪽 -
" 서양화법을 받아들여 자신의작품 속에 녹여 낸 사람으로는 강세황을 따를 자가 없었다.
특히《송도기행첩》은 산뜻한 색채표현과 두드러진 입체감을 통해 강셰황이 서양화법을
이해하는 수준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보여 주는 수작이었다."
- 가을 풀입에서 메뚜기가 떨고 있구나 / 조정육 고래실 328쪽
- 강세황은 계곡 입구의 거대한 바위들을 강조하고 멀리 있는 산이 한 눈에 들어오게 한 구도로 작품을 만들었다.
- 당시 도입된 서양화법을 용용하여 바위를 검푸르게 채색하면서 수묵과 담채를 활용한 대답한 처리와 입체감이 돋보인다.
- 단순한 화면 구성과 청, 녹, 황, 갈색의 맑은 담채와 수묵의 필법 등은 설익은 듯하면소 명랑하고 신선한 감각과 함께 당시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묘법을 보여준다.
- 나귀를 타고 시동과 함께 샛길을 오르는 작가와 비교해 보면 바위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강세황 자화상》1782년 비단에 채색 88.7×51cm /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보물 590호
(진주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기탁)
- 오사모를 관복위에 쓰지 않고 야복인 도포 위에 쓴 것이 특이한데 이것은
마음은 산림에 있으나 이름은 조정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적고있다.
- 70세에 그린 강세황의 자화상은 좌우에 찬문이 적혀있다.
" 저 사람이 누구인고? 수염과 눈썹이 새얗다.
머리에는 사모쓰고 몸엔 평복을 걸쳤구나.
오라, 마음은 시골에 가 있는데 이름이 벼슬아치 명부(名簿)에 걸린게라
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내 재미삼아 한번 그려 봤을 뿐인데
노인네 나이 일흔이요, 노인네 호는 노죽(露竹)인데
자기 초상 제가 그리고 그 찬문도 제 지었으니
이 해는 바로 임인년 이라."
* 강세황은 다른 글에서 자신을 이렇게 평했다.
" 체격이 단소하고 인물도 없어서 잠깐 만나 본 이들은
그 속에 탁월한 학식과 기특한 견해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만만히 보고 업신여기는 자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싱긋이 웃어 넘길 따름이었다. "
◈ 표암 강세황 (1713~1791 豹菴 姜世晃)
- 조선의 르네상스인 영정조 시대의문인, 화가, 평론가로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 자는 광지 (光之), 호는 표암(豹菴), 첨재(忝齋) , 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 이다..
- 그중 가장 많이 사용한 호인 표암(豹菴)은 그의 등에 있는 흰 얼룩무늬가 표범과 비슷하다고 하여 스스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 예서와 전서 등 각 서체에 능했으며, 산수화와 사군자는 물론 뛰어난 식견과 안목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사대부 화가이다.
- 당시 화단에 남종 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새로운 서양 화법을 수용하는 데 기여하였다.
♣ 생애
- 그의 조부 강백년(姜栢年)이 판중추부사를 역임하고, 부친 강현(姜鋧)은 판서를 지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청백리에 오를 정도로 가난했었다고 한다.
- 강세환은 그의 아버지 강현이 64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로 서울 남산자락에서 태어났다.
- 부모의 극진한 사랑과 교육 속에 어린시절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그가 쓴 글씨로 병풍을
만드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 2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고 가난한 시절 좁은 집에 많은 식구들이 살 수 없어 남소문 밖 본집과 처가가 안산으로 이사하여
떨어져 살았던 28세가 되는 해에 어머니를 여윈다.
- 그의 삶은 크게 안산 (34~61세)과 서울 (61~79세)시절로 나뉜다.
계속된 불행은 아들 셋이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부모는 땅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 처지가 된다.
- 그의 나이 34세가 되던 1744년 겨울, 표암은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나 처가가 있는 안산(安山)의 부곡동의 청문당(淸聞堂) 부근으
로 이사를 한다. 한편 형 강세윤은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귀양을 간다.
그런 이유로 그는 벼슬에 환멸을 느껴 젊은 시절을 주로 작품 활동에만 전념한다.
- 이주 후 오랜 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지만 그의 아내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한 가난으로 45세에 세상을 떠난다.
- 양반 주류사회에서 소외되어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를 글과 그림을 벗하며 지냈던 그는 당시의 화가였던 정선, 심사정, 강희언
등과 교류하고 매형인 임정과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 이수봉 등과 친하게 지내며 김홍도와 같은 제자를 키운다.
- 영조가 즉위한 뒤 사실상 노론의 일당 독재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북인 중에서도 소북 계열이었던 집안이 몰락한다.
(당시 東人이 나뉘어 南北이 되고 北人이 분열하여 마침내 대북, 중북, 소북이 된다.)
- 그가 처음 벼슬을 한 것은 1773년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 나이 육십이 넘도록 관직에 나오지 못한 그에게 임금은 9품 하급직을 내린다.
- 너무 늦은 나이로 인해 강세황이 곧 사임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영조는 다시 종6품 사포서 별제를 명한다.
- 그 후 4년만에 종2품 당상관, 그리고 정조 시대에는 호조판서까지 지내게 된다.
- 64세에는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 사포별제(司圃別提), 병조참의,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다.
- 1776년 정조가 등극한 뒤에도 강세황의 벼슬길은 탄탄대로였다.
남들은 평생 동안 이루기 힘든 당상관을 육십이 넘은 나이에 시작하여 일시에 이루니 그야말로 질주인 셈이다.
그는 호조참판을 지내면서 정조 어진 제작의 총감독을 맡기도 했다.
- 강세황은 관직에 나간 51세 때부터 그림을 멈추게 되는데,
“그림 그리기는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 고
영조임금이 이른 후 부터였다고 한다.
과거에 합격하여 영조를 만났던 아들에게 표암의 근황을 물으면서 전한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감격하여 3일 동안 눈이
부어오를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붓을 태우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을 다짐했으며 이 결심은 영조가 살아 있는 동안 변치 않았다.
표암은 다시 붓을 잡기까지 20년 동안 평론가로만 활동했다.
- 강세황은 인생 말년에 다시 붓을 들어 자신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몇몇 그림을 제작하며 79세로 붓을 놓을 때까지 소박한 필치와
맑고 고운 채색법 등으로 자신만의 개성있고 독자적인 화풍을 보여준다.
-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와 인물화를 유행시켰다.
- 그의 나이 72세 때는 천추부사로 북경사행(北京使行)을 다녀오고 76세 때는 금강산 유람을 하면서 기행문과 실경사생화 등을
남긴다. 여행으로 얻은 경험을 기반으로 삼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키기도 하였고, 풍속화, 인물화 등을 그려낸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서양 채색화법을 전적으로 수용 발전시킨다.
- 강세황은 부언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당시 ‘예단의 총수(藝壇의總帥)’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 그는 윤순(尹淳 1680~1741), 정선(鄭敾 1676~1759), 심사정(沈師正 1707~1769) 등 유명 서화가들의 작품에 방대한 양의 평을
남겼다.
특히 제자 김홍도에 대해서는 신필, 신품, 입신 등으로 극찬하며 “화가는 각각 한 가지에 장점이 있고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 못
하는데, 단원은 못 그리는 그림이 없고,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 그려 이것만으로도 일세를 울리고 후대에 전해지기에 충분하다”
고 평했다.
- 끊임없는 실험 정신과 노력하는 자세로 다양한 방면에서 선구자적인 면모를 보였다.
- 그는 뛰어난 서예가, 화가, 문장가로서 글씨와 그림, 글을 남겼다.
- 주로 산수와 화훼가 그림의 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 저서로는 《표암집》
- 작품으로는《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표현연화첩》《송도기행첩》《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다.
- 54세 때 쓴《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과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 그의 초상화는 모두 18점이 전하는데 얼굴표현에서 주름과 음영법을 쓴 입체묘사, 명암법으로 처리된 옷 주름이 특징이다.
- 표암은 시서화에 두루 능한 문인화가인 동시에 김홍도, 신위(申緯, 1769~1847, 조선 후기 문신 겸 시인이자 서화가) 등을 가르
친 교육자였다.
-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서화가들의 작품에 수많은 비평을 남긴 평론가로서 18세기 예술계를 이끈 ‘큰 스승’이었다.
▣ 참고 도서
- 가을 풀잎에서 메뚜기가 떨고 있구나 / 조정육 / 고래실
- 클릭 한국미술사 / 강민희, 이숙희 외 / 예경
-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 월간미술
- 그림 속에 노닐다 / 오주석 / 솔
- 단원 김홍도 / 오주석 / 열화당 미술책방
- 조선의 풍속을 그린 천재화가 김홍도 / 최석태 / 아이세움
- 한국의 초상화 /조선미 / 열화당
- 경기도 공식블로그 경기문화열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3년 8월1일 아침에 소원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