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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6일 재 출항 (아덴만 대탈주 - 바람의 틈을 노려라!)
오전 5시 10분. 해수부와 연락을 주고받다 보니 여명이 밝아온다. 위성전화가 잘 안 터진다. 인근에 군사지역 때문에 위성전화가 잘 안 된다는 소문이 맞나 보다. 맞바람 16 노트. 시작부터 윈디와는 다르다. 윈디는 10~11노트라고 했는데. 선속은 5.5 노트. 펀칭이 시작된다.
오전 5시 20분. 윌리엄에게 연락이 왔다. : 좋은 계획이 있는 것 같군. 너는 매우 단호한 사람이다. 잘됐군. 나는 기도를 믿지 않으니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겠다. 시간 낭비, 바람에 오줌 누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허걱!) 하지만 나는 너를 위해 좋은 생각을 하고 조언과 도움을 줄 거다. 너의 성공을 기원한다. 나는 윌리엄의 삶을 위해 기도한다.
오전 5시 30분. 어제, 홍무싸님 사모님이 싸주신 소고기 뭇국으로 아침 식사를 한다. 생각보다 양이 많아 점심에 한 번 더 먹기로 한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돌아보니 어느새 지부티는 사라지고 없다. 안 보인다. 꿈이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현실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지부티에 머물렀던 시간들이 믿기지 않는다. 홍무싸님의 가족과 사업이 건강하고 곧게 자라나길 바란다.
오전 6시 20분. 맞바람이 더 심해지고 파고가 거칠어진다. 예보와 다르게 바다는 시작부터 기를 죽인다. 펀칭할 때마다 4.5노트로 속도가 확확 줄어든다. 이번엔 잘 돼야 할 텐데. 바다 한가운데서 항로를 전면 수정한다. 원래는 아덴만 공식 코리도어 한가운데로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도 강한 역풍 항해라서 그랬다가는 살랄라까지 못 간다. 거대한 상선들이 오가는 곳에 맞바람 때문에 2~3 노트 속도로 항해 했다가는 상선과 추돌 위험도 크다. 윈디에 바람이 약하게 불 것으로 예보되는 소말리아 해안을 따라 코스를 바꾼다. 그래도 해안에서 50~60Km 이상 떨어진 거리다. 육지에서 보이지 않는다. 어제 머리에 떠오른 계획을 홍무싸님께 말하자. “소말리아도 라마단인데, 걔들이 해적질 하러 나올까요?” 하며 웃으신다.
아덴만은 당연히 피항 할 데도 없다. 무조건 가거나 회항이다. 둘 중 하나다. 이틀 약풍으로 가고, 3~4일 강풍으로 고생한다. 이후 북쪽으로 방향 침로 변경. 예맨 해안의 바람 약한 곳으로 가서, 약풍 또는 무풍으로 오만 살랄라로 간다. 작전은 간단하다.
오전 6시 30분. 수정된 항로로 침로를 바꾼다. 바람은 포트 15에서 12노트로 불어온다. 윈디 예보대로 더 약해져라. 선속은 5.6노트. 오늘 내일 최대한 멀리 가자.
오전 6시 40분.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정말 큰일이다. 레이더 플로터가 삑! 소리와 함께 꺼져 버렸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 무슨 고장이지? 플로터를 거치대에서 들어내, 뒷부분의 모든 커넥터를 뺐다가 다시 끼운다. 앗! 전원이 들어온다. 그러나 잠시 후 Second Power Off! 라고 표시하고 삑 소리와 함께 다시 꺼진다. 큰일이다. AIS 도 없고, 야간엔 오직 레이더 가드 존만 의지해 항해하는데, 이러면 완전히 깜깜히 항해다. 앞에 배가 있으면 항해등이라도 보고 피해가지만, 암초가 나타나면 전혀 무방비다. 어쨌든 해결해 보자. 대신해 줄 사람도 크루도 없다.
선실에 내려가 내비게이션 전원을 껐다가, 7까지 세고 다시 켠다. 오토파일럿도 자동이 풀렸다. 자동으로 세팅하고 다시 플로터를 켠다. 40초쯤 후에 같은 메시지를 표시하고 삑! 꺼진다. WD 40을 가져 온다. 커넥터를 하나씩 빼 WD40을 뿌리고, 휴지로 닦고 다시 연결한다. 오 이번엔 스캐너 웜업을 끝내고 레이더 화면까지 잘 갔다. 그러나 1분 후 다시 꺼진다. 달리 기술도 없다. 달리 방법도 없다. 다시 모든 커넥터를 빼 WD40 작업을 반복한다. 평정심을 유지하자. 그래야 한다. 안되면 귀항해 수리하고 다시 출발하면 된다. 그러자 커넥터에 청록색 녹들이 보인다.
WD 40을 다시 찬찬히 구석구석 뿌리고, 휴지로 닦고, 이번엔 커넥터 탈착을 반복하며, 접촉 부위의 녹이 벗겨지기를 기대한다. 서너번 쯤 이 작업을 반복한다. 이만하면 커넥터의 녹이 어느 정도 벗겨졌겠지? 조심스레 커넥터를 다 연결하고 전원을 켠다. 아, 켜진다. 레이더 웜업 준비까지 70초. 가슴을 두근거리며 초긴장 상태로 카운트다운을 함께 센다. 레이더가 켜진다. 가드 존을 설정하고 다시 지켜본다. 7시 25분. 아직 레이더는 정상 작동중이다. 기도한다. 제발 이대로 잘 버텨다오. 그래도 고장의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아서 다행이다. 참 별별 예상도 못한 고장이 다 발생한다. 맞바람 11노트, 선속 5.7노트. 아직은 순항중이다. 이제 지부티에서 25해리 왔다.
오전 7시. 굉장히 피곤하다. 일단 잠시 눈을 붙이기로 한다. 배는 펀칭으로 흔들린다. 땀을 많이 흘린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는다. 그대로 누워 땀을 흘린다. 깔고 누운 담요와 쿠션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린다.
오전 9시 20분. 청해 부대의 위성전화에 일어나, 위치와 헤딩, 속도를 불러 준다. 날씨는 맑다. 맞바람 12노트다. 파도 0.6미터. 펀칭만 아니면 상당히 괜찮은 항해다. 가자, 더 멀리 가자.
책을 편다. 첫 번째는 작업인문학 – 김갑수 : 바차라 ( Bazzara ) 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근대식 커피음용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상업화해서 회사로 만들었다. 그 회사 이름이 '가자(Gaggia)'다. 커피기계회사 가운데 제일 큰 축에 속한다. 발음을 좀 틀면 ‘배째라' 가 개발한 것을 '가짜'가 상품화해서 보편적으로 만든 것이 커피인데, 드립 기술은 상당 부분 일본에서 발달한다. - 상당히 재미난 묘사다. 책에 코를 박고 읽는다. 큰 파도와 펀칭, 역풍을 모두 잊고 시간이 잰걸음을 걷는다. 가끔 펑펑 펀칭 할 때만 고개를 들어 이상 유무를 살핀다. 여기는 아덴만 소말리아 인근 해역. 독서로 근심걱정을 잊어본다.
오전 10시 40분. 지부티에서 산 땅콩 비스킷 하나와 차가운 캔 콜라 하나를 마신다. 아무래도 이게 점심이 될 것 같다. 내 위치는 이미 소말리아 해역이다. 신경이 곤두서 있다. 신기한 것은 지부티 사람들이 소말리아를 휴양지로 들락거린다. 정확히는 지부티에 사는 프랑스, 미국, 영국 사람들이다. (뭐 소말리아가 휴양지?) 소말리아도 전 지역이 다 위험한 것이 아니라, 모가디슈처럼 특히 위험한 지역이 있고, 지부티 가까운 곳은 서양인들의 여름철 휴양지다. 우리는 소말리아? 미쳤어? 해적질 하는 나라에 왜 가? 하고 당연히 입금금지 국가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부티에 와보면 이렇게 황당한 사실과 직접 마주치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바쁘시겠지만, 외교부가 좀 더 확실하게 일해서 선진국들이 드나드는 지역을 잘 파악, 우리 국민들도 관광과 사업 목적의 방문이 가능하도록 발 빠른 현장 대응이 필요할 것 같다. 잘 부탁합니다.
오전 11시. 새로 작성한 해도를 잘 살피니, 소말리아에 가장 가까이 근접하는 부분은 약 30해리(55.56Km) 인데 한밤에 지나가게 된다. 나머지는 이보다 먼 40~60해리 정도다. 오늘 밤을 잘 지나면 그래도 소말리아에 최 근접 거리는 아니니, 역풍과 파도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맞바람 10노트, 속도 5.8노트다. 46해리 왔다.
오후 1시 40분. 식빵에 잼을 발라 먹으려고 선실에서 빵과 잼 통을 가져 왔다. 지부티에서 산 500미리 멸균 우유도 가져왔다. 부석부석한 빵을 두 개 꺼내고 잼 병을 여니, 맙소사 곰팡이 덩어리다. 병째 버리고 우적우적 빵을 씹는다. 레스토랑처럼 작은 잼이 필요하다. 빵을 씹으니 고소한 맛도 있다. 우유와 함께 맨 식빵을 먹는다. 사탕과 비스킷 등도 조금씩 먹는다. 무조건 뭐라도 먹어야 한다.
파도가 거세졌다. 파고 1미터 정도, 다행이 포트 30 정도에서 온다.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까지 이대로다. 펀칭이 있기는 해도 5분에 한 두 번 꼴이다. 바람은 정면 12노트 정도, 조류가 없나보다. 파도도 좌전방에서 들어오니 속도는 5.6 노트다. 펀칭 한 방이면 5.2 노트로 뚝 떨어진다. 오늘 일요일과 모레 화요일 새벽 3시까지, 120해리 이상을 가 두면 좋겠다. 그럼 소말리아 보사소 앞 해역까지 160해리를 이틀이든 삼일이든 엄청 고생하며 가면 된다. 거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절반인 400해리를 간 것이지만, 이후로는 옆바람이고, 옆바람 약풍 또는 무풍이다. 이후로는 한결 평온한 항해가 된다.
전 코스 810해리의 반만 고생하면 된다. 미련한 내가 만든 항로가 아니라, 신이 바람에 틈을 주시어 만들어진 항로다. 4월 21일이나 22일 오만 살랄라 도착. 이후 3일간 디젤과 물 식량보급. 4월 24일 싸이클론의 눈치를 보고 출항하면, 5월 7일 ~ 8일 사이 스리랑카 Galle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다시 태풍을 확인하고, 말레이시아 랑카위로 간다. 이것은 나의 계획이다. 모두 하느님이 허락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출항할 용기를 주신 김석중, 윤태근 선장님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4월 2일 저녁 지부티에 도착해서 4월 16일 새벽 3시 10분 출항했다. 15일이나 지부티에 머물렀다. 외로운 김선장에게 도움 주신, 김진국 서기관님, 홍종수 무싸님, 장 대위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한국오시면 강릉 꼭 들러주세요.
오후 4시 30분. 바다가 거칠어지고 있다. 펀칭이 심해진다. 점심이 부실했으니 저녁을 일찍 하기로 한다. 홍무싸님께 부탁드렸던 중국 쌀. 사모님이 주신 김치, 아침에 남은 소고기 무국이다. 그릇하나에 김치까지 다 넣고 수저 하나 든 채 콕핏으로 나온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따갑다. 풍속은 좌전방 30도 18노트, 선속은 4.5~5.5너트를 오르내린다. 윈디에서 일요일 오후 잠시 맞바람이 강해졌다가 다시 약해지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확인 해 볼까? 저녁에 맞바람이 심해졌다가 다시 약해진다. 문제는 40마일 전방에서 포트 20으로 침로를 변경해야 한다. 아마 밤 11시나 12시 쯤이 될 텐데, 그러면 바람과 파도를 정면으로 받아야한다. 무척 힘든 항해가 될 거다.
오후 6시 30분. 배 뒤쪽으로 해가 지고, 노을이 아름답다. 지부티에 온 크로아티아의 카타마란 Trinity 호의 Captain Simon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지금쯤 출발했을까? 피부를 태우는 햇살 때문에 일몰이 기다려지고, 맞바람과 펀칭 때문에 야간 항해가 두렵다. 파도는 더 커지고, 맞바람은 16노트, 계속 겁을 준다. 하지만 며칠뿐이다. 두려워 말고 힘을 내자. 후덥지근하고 별이 가득한 밤이 제네시스 위에 펼쳐져 있다.
4월 17일(월) 오전 1시 27분. 예정대로 보사소 앞바다 쪽으로 침로를 변경했다. 노고존 풍속 12노트, 선속 4.5노트, 바람과 파도 모두 정면이 되었다. 펀칭이 심해진다. 보사소 앞에서 북쪽 예맨 방향으로 침로 변경까지 이틀. 운명의 이틀이다. 맞바람 강풍항해를 이틀만 견디면 된다. 이후로는 제법 순조로운 4일의 항해가 남아 있다. 윈디 예보가 제법 잘 맞고 있고, 항로 계획도 잘 맞아 들어간다. 남은 거리 688해리. 122해리 왔다. 하느님 저를 보호하소서.
밤하늘이 맑아 별들이 총총하다. 그런데 공기는 장마철 같다. 온몸이 축축하고, 콕핏의 모든 것들이 눅눅하게 젖었다. 이런 건 처음이다. 손에 물기가 쥐어진다. 콕핏에 깔아 놓은 담요가 물에 젖은 걸레 같다.
당연히 레이더엔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감시 구간을 12해리로 늘려도 개미 한 마리 없다. 국제 코리도어 정규 코스가 아니라, 내가 바람 약한 곳을 찾아 임의로 만든 항로라 그렇다. 나비오닉스로 줌인을 해가며 몇 번이고 확인한다. 혹시라도 암초나 장애물이 있으면 큰일이다. 있다. 보사소 쪽으로 가다 깊이 2미터짜리 암초다. 잊지 말고 확인하자. 항로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문제는 없다. 곧 소말리아 땅에 30해리로 가장 근접한 곳을 통과한다. 먼동이 트기 전에 멀어지자. 맞바람, 맞파도, 해적을 피해 달아나는 3중고 항해다.
오전 5시 5분, 아~ 아~ 음악같이 이상한소리에 콕핏에서 일어나 자세를 고친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망망대해에 음악이라니. 그런데 파도와 마스트를 지나는 바람 소리 등이 어우러져 갑자기 무슨 신디사이저나 마이크 음 같이 들린다. 계속 되는 것은 아니고, 어느 순간 인위적인 음이 1초 정도 들린다. 환청인가? 절대 자연음 같지 않다. 이게 고대인들이 들었다는 사이렌인가? 정말 경이롭다. 우현 전방에 그믐달이 뚜렷하다, 역풍 13노트, 파도도 0.6미터 정도로 잦아 들었다. 역조류 인지, 속도는 5노트를 밑 돈다. 몇 시간을 왔지만, 다음 웨이포인트까지 2일이 줄어 들지 않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이틀만 가서 북쪽으로 가면 된다. 이따 날이 밝으면 미리 디젤을 더 채워 두자. 전방에서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온다.
나중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내세웠던 국정운영의 기본원칙들을 나는 해양수산부에서 다듬었다. 자율과 분권, 투명과 공정, 부단한 학습과지식의 공유 같은 것들이었다. - 고 노무현 대통령의 ‘운명이다.’
오전 6시 15분. 주변 사물이 해가 밝아 옴에 따라 모양과 색채를 지닌다. 나는 재빨리 디젤을 보충한다. 디젤은 보충할 수 있을 때마다 해야 한다. 바다가 사나워지면 하고 싶어도 어려워진다. 파도가 드센데 기름까지 떨어지면 큰일이다. 80리터를 넣으니 게이지가 끝까지 간다. 1,800Rpm에 3.7리터/시간 이다. 1,750Rpm이니 계산대로 소모한 모양이다.
오전 6시 50분. 디젤을 다 넣고 난후 라면을 끓인다. 모자라면 찬밥을 말아 먹으면 된다. 그제 산 삼겹살도 오늘 중 먹어야 한다. 냉장고에 있긴 하지만 상할지 모른다. 나는 식사를 굉장히 빨리 한다. 항해엔 유리하다. 라면을 끓이고 찬밥을 말아 먹는다. 육지에선 정말 아무렇지도 않고 시시한 일이다. 그러나 파도 심한 바다, 마구 흔들리는 선실에서는 라면 끓이는 자체가 굉장한 모험이다. 혹여 뜨거운 물이나 라면을 엎지르기라도 한다면 대형 참사다. 그래서 콕핏에 빵과 물, 비스킷 따위를 가까이 둔다. 조리 불가능할 경우, 뭐라도 먹어두기 위해서다. 바다에서는 아무리 간단한 식사라도 바다가 허락해야 한다. 내 의지 따윈 별 상관없다.
선실에 들어 갈 때마다 습관적으로 엔진룸을 열어 체크한다. 엔진 상태는 좋다. 바닥에 오일도 흐른 흔적이 없다. 깨끗하다. 스리랑카 이후부터, 가능한 곳에 가면 엔진 오일을 교체할 거다. 제네시스는 다른 무엇보다 엔진이 신뢰를 준다. 감사한 일이다.
식사 후, 나는 또 다른 사건을 벌인다. 바로 샤워다. 거친 바다에서는 샤워도 큰 모험이다. 일단 보통 사람들은 샤워실에 들어가자마자 멀미다. 샤워실에 들어가지 못한다. 또 몸에 비누칠하고 미끌미끌 흔들리는 샤워실 안에 있는 것은, 낙상해 부상을 입을 우려가 매우 크다. 반드시 앉아서 차분하게 몸을 닦아야 한다. 샤워를 마치면 간단한 세탁을 한다.
아내와 리나가 귀국한 뒤로는 물탱크의 물이 잘 줄어 들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 물탱크의 1/7 (107리터)를 사용했다. 하루 15리터다. 샤워하고, 설거지 하고, 세탁까지 해도 그렇다. 샤워 할 때 발밑에 대야를 놓고 샤워한 물을 받는다. 샤워를 마치면 그 물에 러닝셔츠와 팬티를 세탁한다. 마지막에 깨끗한 물로 헹구지만 아마 2~3리터 쯤으로 세탁을 마친다. 겉옷을 세탁할 때는 바닷물로 세탁하고, 탱크 물로 마무리 한다. 매번 물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는데, 이젠 가족이 그립다. 혹시라도 다음에 이런 장거리 항해를 하게 되면 워터메이커를 반드시 장착할거다. 사방이 물인데 물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이 항해다. 오늘 맞바람, 맞파도 항해에 별 짓 하다고 있다. 행운이다.
오전 9시 20분. 맞바람 12노트, 선속 5.2노트. 이번 항해에서 소말리아에 30해리(55.6Km)로 가장 가까운 Raas khansiir 곶을 지난다. 뭔가 모르게 긴장 된다. 언제 강해질지 모르는 맞바람도 나를 긴장 시킨다. 에라 화장실이나 다녀오자.
오전 11시 5분. 바람이 13노트로 조금 강해진다. 다시 펀칭이 시작된다. 속도가 4.5~5.5노트를 오르내린다.
취침나팔이 밤하늘을 울리면 수감자들은 습관처럼 고향을, 부모를, 바깥을 상상해본다. 꿈에나마 그리운 곳, 그리운 사람을 만나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오후 12시 10분. 맞바람 17노트, 파도 1미터. 펀칭이 심하다. 스프레이 후드로 파도가 계속 흩뿌린다. 그래도 속도는 5노트를 유지 한다. 다행인 것은 바람과 파도 모두 포트 30으로 정면에서 벗어나 있다. 나비오닉스의 궤적을 보니 보사소 앞 바다까지의 직선거리를 20%나 왔다. 이제 209해리만 더 가서 북쪽으로 침로 변경하면 된. 쉽지는 않겠지만, 희망이 보이는 항로다. 남은 거리 633해리, 현재 177해리 왔다. Raas khansiir 곶을 벗어나고 있다.
오후 12시 30분. 지부티 카지노마트에서 산 돼지고기가 생각났다. 삼겹살 300그램. 혼자니 두 끼는 먹을 거다. 냉장고에서 꺼내 피 묻은 종이봉투를 열어보니, 돼지 냄새가 엄청나다. 껍질이 아주 두툼하게 붙어 있다. 먹을 수 있을까? 한국 같으면 당연히 안 먹겠지. 그러나 여긴 아덴만 한가운데. 뭐든 먹어둬야 한다. 칼로 껍질은 떼어 버린다. 절반을 깍두기처럼 잘게 썰어 냄비에 통마늘과 함께 넣어 버린다. 후추를 잔뜩 치고 천천히 굽는다. 나머지는 다시 냉장고에 넣는다. 내일 다시 먹자.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펑! 하고 펀칭이다. 엄청난 소리다. 뭔가 다 깨어지는 듯 한 기분. 그러나 배는 멀쩡하게 전진하고 있다. 냉장고에서 야채를 (상추 같이 생긴) 꺼낸다. 1/3이 상했다. 상한 부분을 떼어 버리고 성한 부분을 1/2 나누어 다시 보관한다. 잠시 후 고기가 익자, 종이 그릇에 담아 콕핏으로 나간다. 야채와 마늘, 쌈장 맛으로 먹는다. 고기는 거들 뿐. 그중에서 기름 많은 부위는 먹지 못하고 바다에 투척한다. 물고기에게 선물이다. 나중엔 야채와 마늘과 쌈장만 먹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식사 후 물과 비스켓으로 모자란 부분을 채운다. 문득 마실 물을 보니 이탈리아 스베바에서 산거다. 2월 20일 이탈리아를 떠나, 지금 4월 17일. 3일 모자라는 두 달이다. 이탈리아에서의 일상은 출항준비와 기다림이었다. 이제는 항해중이며 기다림이다. 아프리카 지부티에서 아시아 오만 살랄라로 간다. 전 선주 까를로와는 계속 연락 중이다.
브로커 파브리치오에게도 어제 왓스앱을 했다. 이탈리아 보험증서는 스탬프나 사인 없이 QR코드가 있다. 오만 살랄라의 에이전트가 갑자기 보험증서에 스탬프와 사인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한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이상 없이 잘 왔는데 황당한 일이다. 파브리치오에게 보험서류에 스탬프와 사인해서 다시 보내 달라 부탁한다. 그는 알았다고 했다. 최선을 다해 줄 거다. 내가 항해중이니, 살랄라에 도착해서 받아 볼 수 있겠지. 다른 선장님들도 후진국 통행을 대비해 보험에 스탬프와 사인을 미리 받아 두시기를 권유한다.
요 며칠 책에 코를 박자니, 훌륭한 분들은 대부분 감옥에 수감된 경험이 있다. 유시민 작가는 물론이고, 고 노무현 대통령도 구치소에 수십일 갇혀 있었다. 사회가 모순되고 그 모순을 바로 잡으려니 필연적으로 감옥에 가야하는 것인가? 나는 일반인이지 계몽사상가가 아니다. 그래서 무서운 ‘가막소’에 간 경험은 없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러길 소망한다. 그러나 이번 항해는 혼자 검푸른 바다위에 일주일 ~ 열흘 이상 지내야 한다. 선장으로서 자발적 고독을 택한 거다. 이런 거친 경험이, 훌륭한 분들의 수감 경험을 조금이라도 체험하는 계기가 되고, 그분들의 책을 읽어, 내 삶의 부족한 자양분이 보충되길 기대해본다.
오후 3시. 맞바람이 20노트다. 이런데도 4.5~5.2 노트를 유지하는 제네시스가 신기하다. 펀칭이 있으면 4.5로 느려졌다, 곧장 5노트 대를 회복한다.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이면 다시 바람이 약해질 거다. 떠나는 날 16일 새벽 3시, 윈디에는 그렇게 예보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17일 이니, 아직 하루하고 9시간 밖에 안 지났다. 그사이 190 해리 왔으니 잘 온 거다. 화요일 늦은 저녁이나, 수요일 오전이면, 예멘 방향으로 침로변경이 가능 할까? 제네시스야! 힘을 내라.
오후 4시. 맞바람이 21노트가 넘어가니 마스트와 리깅에서 바람 우는 소리가 엄청나다. 배는 4.2 ~ 5.0 노트 사이로 느리게 전진한다. 배 뒤편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은 살을 태우려 한다. 나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펀칭이 심한데, 앞쪽 물탱크는 괜찮을까? 이렇게 쿵쾅거리니, 진동에 연결된 파이프라도 손상되면 난리다. 배가 항해중지 될 상황들을 떠올린다. 공포가 한층 더 짙어진다. 스프레이 후드 틈으로 파고든 파도가 콕핏에 흐른다. 펑펑 들이치는 파도는 1.3미터 내외. 지옥 같은 항해다. 바람이 23노트 이상이 되면 지그재그 항해를 시작해야겠다. 북쪽 침로변경 웨이 포인트까지 191해리 남았다. 어떻게 가든 이틀이면 거기까지 갈 거다. 참자. 두려워하기를 참자. 마음의 내부로부터 무너지지 말자.
오후 4시 30분. 앞파도를 크게 맞았다. 전체적으로 배를 둘러본다. 콕핏에서 보니 좌현 펜더가 하나 바다로 늘어져있다. 엉금엉금 재빨리 갑판으로 나가 펜더를 정리하고 온다. 돌아오는데 파도가 등을 때렸다. 아슬아슬했다. 옷만 젖고 별 문제는 없다. 좌우의 펜더 수자를 세어본다. 총 12개, 이상 없다.
오후 5시. 이른 저녁 식사를 한다. 바람과 파도가 점점 심해지는 탓이다. 홍무싸님이 주신 참치 샐러드 캔과 콜라 한 캔. 저녁은 그걸로 충분하다. 홍무싸님 부부는 내게 많이도 챙겨 주셨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후 6시. 아프리카의 태양이 지고 있다. 붉고 아름답다. 역풍 19~20노트, 바람 방향이 포트 10으로 바뀌었다. 펀칭이 더 심해졌다. 속도는 3.5~5.0 노트를 오르내린다. 다시 16일 새벽 캡춰한 10일치 윈디를 살핀다. 오늘 저녁만 지나가면 내일 화요일부터 내가 진행하는 항로의 바람이 약해진다. 수요일은 더 약해진다. 결국 오늘밤이 고비라는 의미네. 파도가 스턴을 덮쳤다. 다행이 테이블까지 젖지는 않았다.
야간 항해등을 켠다. 혹시 몰라, 선수등과 후미등만 켠다. 마스트 등은 멀리서 보이니까 켜지 않는다. 레이더로 전방의 배만 확인하면 된다. 소말리아 해안에서 누군가 나를 발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핸드폰을 열고 지난 12월부터의 사진을 본다. 로마로 출국, 크로아티아 등을 돌아다닌 사진들이다. 리나가 귀엽게 잘 나왔다. 사진을 보는 순간은 파도가 치든, 배가 요동을 치던 별 신경이 가지 않는다. 걱정과 염려 할 마음이 온통 리나에게 빼앗긴 탓이다. 앞으로는 사랑하는 내 딸을 두고 너무 멀리 가지 않으리.
오후 8시 5분. 펀칭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바람은 노고존 풍속 20노트에 고정되어 있다. 콕핏에 잠시 누우니 밤하늘을 가득 메운 오리온자리가 크게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다. 바람이 잦아들기는 할 텐데, 언제일까? 남은 거리 597 해리, 213해리 왔다. 예맨 Saihut 방면 변침 웨이 포인트까지 173해리 남았다. 제네시스는 한밤의 거친 파도를 뚫고 전진한다.
예맨 쪽으로의 변침 시기를 다시 고려해 보고 있다. 보사소 앞까지 가지 않고 더 일찍 크로스 홀드로 변침해도 예맨 앞바다에서 약풍이나 횡풍이 될 것 같다. 아직은 이른 감이 있으니, 내일 아침까지 24해리 정도 더 간 후, 시험 삼아 변침을 해보자. 만약 내일 아침 맞바람이 강하지 않다면, 그대로 보사소 앞바다까지 까서 변침이다.
4월 18일 (화) 오전 0시 49분 맞바람 16~18노트. 선속 4.5 노트. 계속되는 펀칭. 설마 배 부서지는 것은 아니겠지? 아침까지는 바람이 약해져야 할 텐데. 북쪽으로 변침하기엔 아직 각도가 부족하다. 파도의 물보라 때문에 콕핏이 다 젖었다. 모든 게 다 축축하다. 비 오는 날, 물새는 텐트에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은 졸린다. 나는 쪽잠을 잔다.
오전 3시. 딱 이틀째다. 567해리 남았다. 243해리 왔다. 역풍 항해에도 대단히 잘 온거다. 기적적인 속도다. 143해리만 더 가면, 예맨 Saihut 방면 변침 웨이 포인트다. 물론 그전에 바람이 약해지지 않으면 변침할거다. 맞바람 15~16노트, 아침이 되면 더 약해질 거다. 윈디를 보고 항로를 다시 작성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아직까지는 예상대로, 아니 예상 이상으로 잘 가고 있다. 맞바람이 더 약해진다면 계획대로 보사소 앞까지 가서 변침이다. 온 몸이 다 축축하다.
오전 5시 27분. 역풍이 12~13노트다. 윈디 예보가 맞았다. 선속은 4.7 노트. 역조류가 있나보다. 파도는 여전히 거칠다. 보사소 앞 바다까지 131해리 남았다. 기분이가 좋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되어 간다. 윈디가 정확하게 맞아 주니, 바람 예보를 기준으로 짠 항로까지 맞아 들어간다. 원래 계획한 국제 코리도어 항로로 갔으면 아마 첫날이나 둘째 날 회항 했을 거다. 거긴 바람이 한결같이 강한 역풍이다. 바람의 틈을 찾아 예정대로 항해 중이다. 256해리 왔다. 예상 못한 것은 온통 축축한 파도의 비산이다.
역풍 11~12노트. 바람이 약해졌으니 이대로 간다. 이제부터는 예맨 Saihut 방면 변침을 언제쯤 하느냐다. 바람이 약해지니 예맨 Mukalla로 미리 변침해도 된다. 동이 트면 세일들을 다 점검할거다. 크로스홀드 또는 림리치로 가게 된다. 강풍이니, 미리 세일을 확인해야 안전하다.
오전 6시 15분. 짬뽕라면과 찬밥. 김치다. 이정도면 호화만찬이다. 역시 날씨가 허락해준 아침 밥상이다. 27시간 더 가면 웨이포인트다. 언제 변침하느냐? 는 인내심과의 싸움이다.
오전 8시. 디젤을 보충한다. 70리터. 어째서 70리터냐구? 원래 80리터를 넣는데, 마지막 통에 딴생각을 하느라 연료통에서 호스가 빠진걸 모르고 있다가 10리터 낭비한 뒤에야 알았다. 참 실수도 가지가지 한다. 혼자 장거리 항해를 하다 보니 집중력이 떨어지는가 보다.
지부티에서 총 780리터를 가지고 떠났다. 1,800Rpm 시간당 3.7리터를 소모한다고 해도 9일 가까이 사용가능하다. 처음 지부티에서 출항했다가 회항할 때, 200리터를 소모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기름을 모두 사용한다면, 모두 980리터를 쓰는 셈이다. 이건 항해가 아니다. 필사의 탈출이다. 아덴만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출발 시기가 잘 못됐다. 3월에 수에즈 통과하면서 윈디를 보았을 때는 아덴만에 서풍이 며칠씩도 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4월 2일부터 24일까지 한 달 내내 동풍이 강했다. 그래서 나는 인도양의 5월 사이클론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덴만을 탈출하고 있다.
만약 1월에 이탈리아 출발, 3월에 지부티 도착, 4월중 인도양 횡단. 이랬다면 싸이클론 걱정도 없고, 여유 있는 항해가 되었을거다. 물론 아드리아해, 지중해 항해가 엄청나게 추웠겠지만, 지금처럼 필사의 대탈출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물론 역풍항해로 이렇게 기름낭비할 일도 없다. 또는 9월에 지부티 도착해서 스리랑카로 가면된다. 다만 한국까지는 곤란하다. 동남아시아 어디쯤에 배를 두고, 겨울 지난 뒤 한국에 가야 한다. 나는 이런 것을 모르고 떠났다. 나 다음으로 같은 항로를 오시는 분들은 절대로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언제 침로 변경을 할까? 윈디와 바람을 번갈아 본다. 아차, 이미 포트 30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 지금 침로변경을 하면 거의 포트 90을 잡아야, 60도 바람 각이 나올거다. 그럼 예맨 Mukalla 로 못 간다. 풍속 8.8노트, 선속 5.2노트. 아무 소리 말고 보사소 앞까지 가서 변침해야할 상황. 그럼 메인 세일이라도 펴야겠다.
오전 9시 30분. 출항하고 처음으로 메인 세일을 80% 폈다. 바람이 포트 30으로 들어오므로 집세일은 펴지 못한다. 속도가 0.5노트 정도 상승한다. 그게 어딘가? 엔진 세일링과 범주는 배의 움직임이 다르다, 훨씬 부드럽게 파도를 탄다. 모처럼 바람 맛을 보고 있다. 예상 밖이다.
오전 11시. 유감스럽게도 바람은 정면으로 바뀌었다. 나는 메인 세일을 접었다. 하지만 이것은 머지않아 내가 북쪽으로 침로 변경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침로변경하면, 간신히 예맨 Mukalla 방향으로 항해가능하다. 그래도 좀 더 전진하자. 그래서 확실하게 클로스홀드 이상 옆바람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 아예 예맨 Saihut 쪽으로 갈 수 있도록. 맞바람 12~14노트, 선속 4.5~5.5 노트.
점심 메뉴는 식빵을 버터에 구워 계란프라이를 가운데 끼우고, 설탕을 많이 뿌린 길거리 식 샌드위치와 환타 오렌지.
오후 12시 32분 침로를 포트 40 으로 변경해 본다. 간신히 예맨 Mukalla 방향 이지만, 바람이 스타보드 30이다. 각이 부족하다. 다시 원래 항로를 돌아온다. 더 기다려야 한다. 맞바람 12노트, 속도 4.3 ~ 4.9노트. 파도가 높아지고 펀칭이 시작된다. 하루만 더 기다리면 바람도 안정권이다. 변침 웨이 포인트까지 96.1 해리. 살랄라까지 519 해리 남았다. 괜히 지그재그로 항로를 바꾸었다가, 시간과 거리만 늘어나고 고생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바람의 틈을 잘 파고 들었다. 조금만, 하루만 더 기다리자.
오후 1시 30분. 비행기 소리가 난다. 웬 비행기지? 군용기 같은 프로펠러기다 소말리아 쪽으로 곧장 날아간다. 설마, 해적이 띄운 비행기는 아니겠지. 저걸 타면 12시간이면 집으로 가는데, 부모님도 리나도 만날 수 있는데. 문득 비행기가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펑! 하고 배가 펀칭한다.
오후 4시. 바람이 17노트로 도로 세지고, 파도도 커졌다. 미리 카레를 만들어 둔다. 이따 6시쯤 찬밥과 카레로 훌훌 저녁을 먹을 생각이다.
지부티에서 북쪽으로 침로 변경하는 웨이 포인트까지 387해리(716.7Km) 아직 하루 더 가야 한다. 출발 후 삼일 동안 오직 이 웨이 포인트만 생각했다. 항해도 뭣도 아닌 아덴만 탈주극이다. 바람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기주로만 펀칭에 시달리는 4일이다. 앞으로 장거리 항해 시엔 몬순, 싸이클론을 잘 파악해서 이런 괴로운 항해는 하지 않을 거다. 또 날짜도 충분히 정해서 대기가 너무 길 때는 비행기로 한국 다녀 올 계획도 할 거다. 너무 몰랐고, 준비가 부족했다.
이번 일요일(16일) 새벽 출항하지 않았다면, 아마 5월초~중순까지도 지부티에 앵커링해야 했을거다. 앵커리지 한가운데 갇혀, 홍무싸님을 귀찮게 하며, 아마 서서히 미쳐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인도양의 싸이클론 때문에 오만 살랄라에 또 하염없이 대기했을 수도 있다. 오싹하다. 가족과 함께 항해할 땐, 나름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물과 음식 등 여러 가지 부족에 걱정도 많았지만, 일단 외롭지는 않았다. 지금은 현실 같지 않은 시간이다. 나는 유리병에 갇힌 느낌이다. 혼자 맞바람과 싸우며 꾸역꾸역 아덴만을 탈출하고 있다. 아덴만이 이토록 집요하게 항해의 발목을 잡을지 상상도 못했다. 리나가 보고 싶지만, 이 뜨겁고, 습하고, 거친 탈주극에 어린 리나의 부재는 마음 편한 사실이다. 10시간 더 가서 한번 방향을 잡아 보고, 각도가 안 되면 10시간 더 가서 침로변경이다. 제네시스는 4.3노트로 항진 중이다.
오후 6시. 찬밥에 데운 카레를 부어 저녁을 먹었다. 혼자 수저를 들고 문득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요트사기, 지중해, 수에즈, 홍해, 그리고 지금 아덴만. 아니 그런 거 말고. 60살 먹은 남자 혼자 좁은 배에서 뭘 하는가? 하는 그런 질문이었다. 글쎄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 항해는 요트 체험 사업을 하는 남자가, 제법 괜찮은 중고 요트를 유럽에서 사서 강릉까지 항해하는 것. 그리고 여름 시즌을 놓치지 말아야, 이 요트 사느라고 빚진 것들을 갚을 수 있다는 것. 팡! 하고 펀칭으로 배가 흔들리고 있다. 덤으로, 내가 몰라서 고생한 것들을 다른 분들은 고생하지 말라고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 그런 건가? 그게 다 인가? 그래서 지금 지독한 두려움과 고독을 견디고 있다는 건가? 강릉으로 낙향할 때, 지나치게 치열하게 살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맞아, 그랬다. 그러나 어느새 또 이렇게 에덴만 탈출을 감행 중이다. 나는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인가보다. 너무 힘들게 살지 않기로 해놓고 스스로 약속을 깼다. 겨우 오후 7시인데 사방이 너무 어둡다. 콕핏에 작은 등을 켰다. 잠시만이다.
오후 8시 25분. 앞바람 17노트, 선속 4노트. 느리다. 이대로 65 해리를 가야한다. 그래도 미리 방향을 틀면 안 된다. 바람 각이 맞지 않아, 예맨 Mukalla 방향으로 가지 못한다. 기다리자. 기다리자. 제네시스는 가랑잎처럼 흔들리고 있다. 담요를 가져다 덮는다. 밤에는 쌀쌀하다.
4월 19일 (수) 오전 3시 55분. 맞바람 12노트, 선속 4.7 노트. 펀칭은 여전히 심하다. 예맨 쪽 침로변경 웨이 포인트 31 해리 남았다. 스타보드 쪽의 바람 각도가 충분하기를 빈다. 오만 살랄라까지 454해리. 이번 아덴만 대탈출이 가능해 보인다.
근대의 대표적 건축가인 르코르뷔지에는 직사각형의 공간을 겹겹이 쌓아서 많은 사람이 제한된 공간을 최대한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건물이 인간의 편안함이나 효용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살기 편하고 효율적인 집이 집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아파트는 르코르뷔지에로부터 시작되었다.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여행 중.
오전 5시 40분. 보사소 웨이 포인트를 22.6 해리 앞두고 북쪽으로 침로 변경했다. 메인세일 80%, 집세일 60% 편다. 스타보드 30에서 풍속 15~16노트, 엔진 Rpm 1,400. 선속 5.5 노트. 안정적이다. 파도도 스타보드 30에서 들어오니 펀칭이 줄었다. 지부티에서부터 쭉 1,750 Rpm을 유지 했는데, 처음 1,400 Rpm으로 낮추니 사방이 조용하다. 사랑하는 아우 최인 교수가 보내준 클래식 기타연주를 드디어 들어본다. 모처럼 항해하는 기분이다. 이대로 하루를 더 가면 예맨 Mukalla 방향이지만, 중간에 바람을 봐가며 최대한 우측 살랄라 쪽으로 붙이자. 정말 아덴만 대탈출이 성공하는가 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넓적다리가 가렵다. 양쪽 다 그렇다. 나일론 바지를, 축축하고 땀난 상태로 이틀 연속 입어 그런가 보다. 항해 중에 산 5천 원짜리 냉장고 바지. 이게 쌩 나일론이니, 의자에 앉는 부분이 땀으로 범벅되어 피부발진이 생겼나 보다. 냉큼 샤워를 하고 광범위 피부질환 치료 크림을 바른다. 혼자 항해하는데 어디든 아프면 큰일이다. 벗은 옷을 세탁해 배 뒤편에 매달았다. 이후는 바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긴장이 풀리고 있다.
아침식사는 어제 먹다 남은 카레와 밥, 계란 프라이다. 소단위 포장의 후르츠 칵테일로 디저트. 이만하면 왕후의 식사다. 배가 부엌 반대쪽으로 기울어져 흔들린다. 식사 준비를 하다말고, 뒤로 후다닥 멀어졌다, 다시 부엌으로 다가가길 반복한다. 혼자 웃는다. 마치 슬립스택 코미디 같다.
지부티에서 홍무싸님 부부를 만난 것 외에 제일 좋은 일은, 작은 테팔 냄비와 프라이팬을 산거다. 이탈리아 바스토에서는 마트를 아무리 뒤져도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산 냄비는 전부 뚜껑 손잡이 볼트가 새빨갛게 녹슬어 버렸다. 음식에 녹물이 떨어진다. 프라이팬은 계란 프라이가 달라붙고, 뭐든 익기 전에 타서 눌어붙었다. 이탈리아에서 산 수저, 빵 칼도 모두 녹이 난다. 음식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았다. 테팔을 산 뒤론 한국서 조리 하듯 평범한 식사 준비가 가능하다. 이탈리아 식기들은 어째 그럴까? 한국 같으면 소비자들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텐데,
오전 6시 32분. 맞바람 항해에서 크로스 홀드로 침로를 바꾸자, 펀칭이 사라졌다. 엔진 Rpm을 낮추었다. 조용하다. 물보라가 튀지 않으니 스프레이 후드 창을 열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두려운 소말리아가 뒤쪽으로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 지옥에서 5분 만에 즉각 천국이다. 이런 행복한 항해를 꿈꾸고 세계일주에 도전했는데, 의도치 않게 지옥 탈출 항해를 경험했다. 이제 독일선장 마르코가 왜 그리 자주 내게 핑거크로스를 보냈는지 알 것 같다.
중간에 국제 코리도어를 건너야 한다. 땅이라면 고속도로 중간을 가로 질러 가야하는 거다. 거대한 배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통항로다. 충돌이나 추돌당하지 않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레이더에 집중하자.
오전 8시. 풍속 16~18노트. 선속 6.0노트. 파도 1.5미터. 파도가 높다. 그래도 35도로 타고 넘으니 펀칭도 약하다. 뭔가 이상해 갑판으로 나가보니, 라이프 라프트 고정대가 부러졌다. 일단 밧줄로 감아둔다. 살랄라에 도착하면 강력 접착제로 보수해야겠다. 남은 거리 430해리. 앞으로 3일 8시간이다.
오전 10시 35분. 배가 6.0 노트로 잘 나가기에, 여기저기 선실을 점검했다. 그동안 폭우가 와도 비 한 방울새지 않던 앞 선실과 갤리에 물방울이 떨어져 있다. 갤리야 마루바닥이니, 걸레질이면 끝나는데 앞 선실이 문제다. 이불과 매트리스 한쪽이 젖었다. 선실 천정을 살펴도 어디서 물이 들어왔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계속 들이치는 파도가 해치 틈으로 물방울을 흩뿌렸나 보다. 맞바람 항해의 부작용이다, 오만 살랄라에 가면 할 일이 많다. 앞 선실의 매트리스와 이불을 모두 꺼내 말려야 한다. 허허. 벌써 오만 어쩌구 하는 것을 보니, 아덴만을 잘 빠져나갈 모양이다. 살랄라에서 3일 또는 4일만 머물고, 인도양을 건너 스리랑카 Galle로 가야 한다. 사이클론이 발목잡지 않기를 기도한다.
K는 이제 몇 년 만 지나면 은퇴 할 수 있으니 그때를 대비해서 요트를 구입하고 항해술을 배워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 배수아 시취 중
오후 12시 30분. 점심으로 라면 1개 와 김치. 선속 5.7~6 노트. 이제 18해리만 더 가면 국제 코리도어다. 국제 코리도어의 폭은 12해리. 약 3시간 후부터 배들의 고속도로를 횡단해야 한다. 레이더 잘 보고 정신 차려서 지나자. 방향 전환이 용이하게 집세일은 접고 메인 세일만 펴야겠다.
오후 2시 30분. 국제 코리도어까지 6.5해리 남았다. Rpm 1,600 선속 6.4 노트로 올린다. 국제코리도어까지 1시간, 국제코리도어 폭 12 해리, 2시간. 총 3시간이면 오후 6시경 통과 가능하다. 주간에 국제 코리도어를 통과할 수 있다. 야간에 레이더와 다른 배들의 항해등만 보고 지나는 게 아니니 훨씬 안전하다.
디젤유를 100리터 더 넣는다. 이번 항해 중, 80 + 80 + 100= 260 리터, 원래 연료통 350리터. 총 610리터가 들어갔다. 갑판에는 200리터가 더 있다. 아마 이대로 오만 살랄라 까지 갈 거다. 국제 코리도어를 건너면 다시 1,400Rpm으로 속도를 줄일 거고, 1,400Rpm 공식 연료 소모량은 2.1리터/시간당 다. 350리터로 약 7일 간다는 말이니, 3일만 더 가면 되는 상황에 모자라지는 않을 거다. 아덴만 탈출에 기름 값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레이더 탐색 범위를 6마일로 맞추고 국제 코리도어에 접근중이다.
오후 3시 45분. 레이더에 동진하는 배들이 나타났다. 육안으로도 보인다. 30분 후 저 배의 앞으로 지날지, 뒤로 지날지 결정해야 한다. 동진하는 배들을 지나면 다음엔 서진하는 배들이다. 정신 차리자. 육안으로 보이는 배는 카고선이다. 좌후방에서 굉장히 빠르게 접근중이다. 코리도어까지 1.2 마일. 20분 후 저 카고선은 내 앞을 지날까? 아직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또 다른 배들이 줄 지어 오고 있다.
오후 4시 5분. 국제 코리도어 진입. 카고선 뒤 4마일에 컨테이너선이 따라 오고 있다. 두 배 사이로 지나갈 수 있을까? 첫 번째 카고는 1마일 전방에서 통과, 3마일 뒤의 자동차 운반선도 빠르게 접근중이다. 동진하는 코리도어의 4/5를 건넜다. 선속 6.6 노트. 자동차 운반선도 앞을 지나간다. 5마일 밖의 세 번째 배까지는 괜찮을 것 같다. 이제 서진하는 배들, 우측에서 오는 배들을 주의해야 한다.
오후 4시 55분, 동진 코리도어 통과 중간 분계구역 진입. 플로터 스위치 안 먹음. 오만 도착하면 스스로 다시 자가 수리 할 예정. 레이더가 안 되면 큰일이다. 특히나 가드존 설정은 필수다. 부산 레이마린 대리점에 중고 C80플로터가 있다는데, 후원 차원으로 저렴하게 달라고 졸라볼까? 김기자님이나 임대균 선장이 랑카위 올 때 가지고 오면 되는데. 살랄라 가서 연락해 보자.
오후 5시 20분. 서진하는 코리도어 진입. 이제 레이더와 육안으로 우측을 살피자! 우측에 카고선이 온다. 거리 10해리. 제네시스는 서진 코리도어 끝까지 2마일 남았다. 아직은 카고선이 멀어 진행 방향이 안 보인다. 이럴 때 AIS가 있었으면! 카고선들은 생각보다 빠르다. 20분이면 나와 교차하게 될 거다. 계속 카고선을 관측한다. 카고선과 거리 4마일. 카고선이 제네시스의 후방을 향하고 있다. 다행이다. 16번으로 켜 두었던 핸디 무전기를 끈다. 긴장이 풀리자 두통이 온다.
오후 6시. 제네시스는 서진 코리도어를 빠져 나온다. 전방의 레이더는 깨끗하다. Rpm을 1,500으로 낮춘다. 풍속 12노트, 선속 6.2 노트. 아직은 바람이 변하지 않았다. 스타보드 크로스홀드다. 앞으로 50마일을 더 가서, 예맨 Mukalla 에 접근하면 바람이 약해지며 스타보드 빔 리치가 된다. 16일 새벽에 마지막으로 확인한 윈디 예보는 그렇다. 이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나는 3일후 오만 살랄라에 도착한다.
국제 코리도어를 지나고 밥을 했다. 간장과 참기름, 계란 프라이를 넣어 비볐다. 목소리가 다시 변하고 입맛은 실종이다. 하지만 무조건 먹어야 한다. 예맨 앞바다에 석양이 지고 밤이 다가 오고 있다. 아덴만 탈출, 4번째 밤이다.
오후 7시. 예맨 Mukalla(무칼라) 앞바다의 웨이 포인트 수정으로, 총 거리는 847해리로 늘었다. 393해리 2일 15시간 남았다고 나비오닉스에 표기 된다.
4월 20일 오전 2시 35분. 예맨 해안선과 평행이 되게 침로를 변경한다. 메인 세일을 접는다. 맞바람 풍속 11노트, 엔진 Rpm 1,500, 선속 6.1노트. 속도가 빠르다. 조류가 없거나 도움을 받고 있다. 여기서부터 바람이 약해지고 무풍이다가, 스타보트 빔리치가 된다. 살랄라까지 남은 거리 340 해리. 2일 8시간이다. 이대로라면 ETA는 22일(토요일) 오후 1시 경. 레이더는 좌후방 12마일 지점에 깜빡이는 물체 하나. 나머지는 깨끗하다.
지금 맞바람 7~8노트에 Rpm은 1,500 선속은 6.2노트다. 지부티에서 소말리아 해역으로 바람의 틈을 노려 항해 할 때는, 맞바람 17~18노트에 Rpm은 1,750 선속은 4.8 노트 였다. 게다가 배를 다 깨버릴 것 같던 펀칭과 갑판을 마구 쓸고 올라오던 파도. 아덴만처럼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풍속 10노트 이상의 맞바람 항해는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지부티에서 풍속 7~8노트 이하로 아덴만의 동풍이 약해지기를 기다렸다면 나는 5월 중순까지도 출항하지 못했을 거다. 물론 싱가포르 Galle나 말레이시아 팡코르 마리나에서도 기상을 잘 살펴야 한다.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바람의 틈을 노려 출항한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지금까지 윈디 예보도 제대로 맞았고, 수정한 항로 계획도 딱 들어맞았다. 정말 좋은 공부가 됐다. 김석중, 윤태근 선장님의 조언이 기가 막혔다. 이런 장거리 항해 선배님들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아덴만을 탈출한다. 아직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 인사를 드린다. 새벽 바다는 평온하다. 아직 예맨 Mukalla(무칼라) 앞 30해리 바다. 예맨 해역이다. 오만의 Dhalkut 해역으로 가야 안심할 수 있다. 제네시스야 가자!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전 5시 20분. 된장국을 끓인다. 아침 메뉴는 된장국과 김치, 오이지다. 이상하게 항해 중엔 배가 고프지 않다. 몸이 아니라 머리가 의식적으로 음식을 몸에 넣는다. 입 맛 대로 배고플 때를 기다렸다가는 아마 거식증처럼 말라죽을 거다. 어쨌든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배 두드리고 앉아, 시원한 바람을 뚫고 전진하는 제네시스를 본다. 행복하다.
장거리 항해는 심심하다. 당연히 고독하다. 그러나 생각은 잘 정리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견시하고 배 상태를 살펴야 한다. 귀는 늘 엔진 음을 체크한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나이든 사내의 오열을 부르기 때문에 생각금지! 다. 예를 들어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리나 같은 단어들.
배의 해치들을 다 열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는다. 눅눅하고 파도에 일부 젖은 내부가 잘 마르기를 기대한다. 살랄라에 도착하면 이불을 전부 내다 말려야겠다. 일단 담요를 먼저 말린다. 햇살이 좋으니 금방 마를거다.
청해부대와 해수부에서 4~5시간 마다 위치 확인을 한다. 감사한 일이다. 만약 몇 사람이 항해를 하는 상황이라면 조금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단독 항해로 일주일, 열흘씩, 항해 하는 입장에서 그 통화의 순간만 내가 말을 하는 시간이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찰나다. 잊지 않게 미리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항해 중 저랑 통화하신 분들, 모두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라이프라프트를 보니 플라스틱 받침대가 부러졌다. 펀칭이 심해서 견디지 못했나보다. 본드로 해결 될 일이 아니다. 일단 밧줄로 잘 묶어 놓고, 한국 가서 스텐으로 받침대를 새로 만들어야겠다. 거울을 보니 노숙자 분위기의 아저씨가 바라본다. 2개월간의 항해로 제네시스도 여기저기 잔고장들과, 구석구석 아프리카의 흙먼지가 많다. 살랄라에 가면 전면 물청소를 실시! 해야겠다. 엔진룸을 열어 본다. 열 때마다 늘 두근두근한다. 엔진은 지금 생명이다. 힘차게 잘 돌고 있다. 누유도 보이지 않는다. 좋다!
배를 점검하다보니 제법 큼직한 날치가 한 마리 말라 죽어있다. 생선을 즐기는 사람 같으면 한 끼 반찬도 되겠다. 그러나 나는 비린내를 참지 못한다. 패스! 바다로 돌려 보낸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그런데 항해 중에서 자주 견시까지 해야 하니, 계속 쪽잠을 잔다. 오전 4시에 일어나, 오후 7시까지가 하루다. 무려 15시간이 낮이다. 중간 중간 레이더를 확인하고, 12마일 이상 접근 물체가 없을 때, 레이더 가드존에 뭔가 들어오면 경보가 울리도록 해놓고 쪽잠을 잔다. 다행이 레이더 경보음은 사람의 신경을 긁어대는 소리라, 잠이 잘 깬다.
바다가 잔잔하니 뭔가 일할 시간이다. 초강력 에폭시 본드로 콕핏 테이블을 수리한다. 일단 잘 굳기만 하면, 한동안 잘 사용 할 수 있을거다. 아니야, 아예 비스로 박아 버릴까? 해보자! 결국 초강력 본드와 비스 3개를 박아 고정했다. 단단히 잘 고정됐다. 콕핏 테이블이 넓어져 신난다. 이제 제대로 앉아 책을 보거나, 음식을 먹거나, 글을 쓸 수 있다. 이따가 샤워하고, 세탁하고, 빨래 널자. 그러면 오전은 순식간에 아덴만 어딘가로 사라질 거다. 날 좋고 바람 시원하다. 여전히 맞바람이다. 아마 예맨 Saihut 인근 해안까지 가야 빔리치가 될 것 같다.
메리는 재능이나 취미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허영심이 심하진 않지만, 그녀의 허영심은 아는 체와 잘난 체를 동시에 했다. 그런 것들은 그녀보다 훨씬 나은 사람에게도 결함이 될 거다. 한결 소박하고 잘난 체하지 않는 엘리자베드는 동생의 반 정도도 못 치지만 듣는 이들을 훨씬 더 즐겁게 해주었다.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중. <== 이 책은 번역이 너무 거지같아서 더 볼 수가 없다. 나중에 제대로 된 책을 사서 보자.
오전 8시 41분. 아아, 이제 남은 거리 299해리, 드디어 이백해리 대로 들어섰다. 바람이 우측으로 돌고 있다. 스타보드 30 크로스홀드. 시간이 지나면 점점 빔리치로 바뀌겠지. 나는 메인세일을 Full 로 편다. 선속 6.6 노트. 나는 이제 48시간 이내에 오만 살랄라에 도착한다. 회항 후, 지부티에서 아덴만의 바람이 약해지거나 바뀌기를 기다리던, 그 절망의 시간들을 돌아본다. 아덴만 항해를 마친 선배들의 조언과 내 무모한 용기가 없었다면, 나는 아덴만 맞바람 항해를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다. 경험 많은 외국 선장들도 힘든 항해라고 크로스 핑거를 보내왔었다. 아덴만 탈출.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러고 보니 기적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경험과 용기.
10시 20분. 말끔하게 면도하고, 샤워하고, 빨래도 했다. 4월 8일부터 4월 20일 까지, 나 혼자 사용한 물이 750리터의 1/5이다. 150리터를 사용했다. 물론 샤워, 설거지 빨래(런닝셔츠, 팬티, 수건 정도)까지 다 한 것이다. 하루 평균 12.5 리터다. 지금처럼 물을 사용하면 나는 제네시스 750리터 탱크 물을 60일 사용한다. 혼자라면 태평양도 건널 수 있다.
지부티의 수도물은 짜다. 비누도 전혀 풀리지 않는다. 지부티 전역이 이렇다. 일단 살랄라에서 정상적인 수돗물을 배에 공급할 수 있다면, 지금 물탱크의 물은 전부 빼 버려야한다. 수아킨에서 모래 섞인 물, 지부티에서 염분 섞인 물을 공급 받았다. 수에즈는 수돗물을 호스로 공급할 수 있어서 좋았다. 살랄라에서 수돗물을 잘 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미국선장 윌리엄은 물, 전기, 룰루마켓 모두 Okay! 라고 했다. 감자와 양파도 필요하다. 대파는 있을까나? 바람이 없다. 선속 6.2 노트.
할머니는 손자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 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 이기주, 언어의 온도 중
오전 11시 45분. 지부티에서 산 꼬마 도넛과 환타로 점심을 먹는다. 도넛은 쓴 맛이 난다. 3개만 먹고 나머지는 물고기에게 양보한다. 레이더 가드존이 울린다. 뭐지? 2마일 우전방에 아주 작은 점이 명멸한다. 파도인가? 알람을 끄고 바다를 본다. 아, 아주 작은 배가 있다. 큰 배가 아니니, 갑자기 긴장된다. 여긴 소말리아가 아니라 예멘 앞바다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 정지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선인가? 일부러 예멘 쪽으로 침로 20도 바꾸어 본다. 어떻게 하는지 반응을 보자. 혹시 몰라 위성전화기를 손에 든다. 뭔 일이 생기면 곧장 청해부대에 연락하자.
어선 같이 보이는 배는 2마일 밖에 그대로 정지해 있다. 어? 움직인다. 가까이 접근하는 것 같네. 일단 청해부대에 연락하고 좌표를 불러준다. 어선 같은, 소형 선박이 접근중이라고 알린다. ‘예멘 지역은 해적활동이 뜸하기는 한데...’ 란다. 뜸하다? 없지 않다는 말인가? 잠깐 사이 위성전화기는 끊어진다. 소형 선박과의 거리는 자꾸 가까워진다. 400미터 전방에 왔을 때, 침로를 원래대로 20도 되돌린다. 소형 선박은 그대로 나를 지나쳐 간다. 어선인가보다. 다행이다. 이때 청해부대에서 위성전화가 온다. ‘어선인가 봅니다. 멀어지고 있습니다.’, ‘네 안전항해 하십시오’ 완전 식겁했다. 어선보고 이렇게 놀래보긴 처음이다.
오후 1시 30분. 바람은 맞바람 7~8노트. 파도는 잔잔하다. 속도는 5.6노트로 떨어졌다. 점심으로 신라면에 떡을 넣고 끓였는데, 떡에서 술 냄새가 난다. 상했나 보다. 라면만 먹고 떡은 버렸다. 이탈리아에서 산 냄비 뚜껑의 볼트를 빼고, 다른 볼트를 끼워 재생에 성공. 이제 라면 냄비가 두 개가 됐다.
오후 1시 40분. 바다가 장판 같다. 3일을 맞바람과 싸우며 필사의 대탈주 항해를 하고 나니 지금 바다는 현실 같지 않다. 아마 하늘의 선물인가보다. 김추자 골든 힛트를 들으며 바삭바삭 빨래가 마르고 있다. 빔리치 바람을 받고 엔진을 꺼보려고 했더니, 아직 바람이 오지 않는다. 60해리 더 가야 Saihut 앞 바다가 나온다.
사람은 태어나면 다들 자기만의 배에 오르게 된다. 가끔은 항로를 벗어나 낯선 섬에 정박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끊임없이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간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만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 이기주, 언어의 온도 중
오후 4시 20분. 예멘 해안선에서 30해리, 혹시나 싶어 U-SIM을 갈고 전화를 켜본다. 서비스 불가다. 살랄라에 가서야 전화가 되려나 보다. 한국에서 가입한 10기가 6개월 8만원짜리 로밍서비스는 수단, 지부티, 오만, 스리랑카까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데이터는 안 돼도 통화는 되더라. 10기가 8만원이면 엄청난 금액이다. 수단에선 10기가 데이터 Sim카드가 30달러, 지부티에선 12기가 데이터 Sim카드가 7달러였다. 오만에서는 얼마일지 모르지만, 그냥 현지 데이터 Sim카드를 사는 것이 백번 낫다. 앞으론 그냥 일반 로밍으로 전화통화가 필요할 때만 쓰고, 데이터 Sim카드로 카톡 문자나 카톡 통화를 하는 것이 답이다.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출항했다. 어리석었다. 사람들아, 외국가면 데이터 Sim카드를 써라.
오후 5시. 어두워지기 전에 이른 저녁을 준비한다. 쏘시지 계란 부침. 유럽의 쇠고기 돼지고기들은 도무지 입맛에 맞지 않는다. 일단 시각적으로 괴기하다. 맛있게 생긴 햄들은 소금덩어리다. 그들이 어떻게 먹는지 상상이 안 간다. 중동에서는 뭐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쏘시지는 우리가 어린 시절 먹던 진주햄 쏘시지나 비슷하다. 간혹 양이나 염소 쏘시지가 있는데, 열심히 골라내지만 혹시 모른다. 아랍문자를 모르니, 내가 산 쏘시지 중에도 그런 것이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쏘시지를 잘라 프라이팬에 놓고 구우면서 계란을 하나 풀어 놓는다. 간편한 쏘시지 계란 부침이 된다. 밥 한 그릇, 뚝딱이다. 남은 된장국도 마저 먹는다. 야채의 장기 보관이 가장 큰 문제인데, 대략 4~5일이면 다 문드러진다. 그전에 많이 먹어둬야 괴혈병에 걸리지 않겠지. 이렇게 저녁을 해치운다. 다음엔 김치 통조림을 좀 많이 사두어야겠다. 이번 항해는 7*3=21끼다. 이정도도 메뉴가 힘든데 인도양은 최소 14*3=42끼다. 무슨 재료를 준비해야 할지, 고민이다. 내일 아침엔 스파게티다. 다시다를 조금 넣어보자.
바람은 고집스레 바뀌지 않고 배는 황소걸음이다. 선속 5.3노트. Saihut 앞 바다까지 30해리 남았다. 내일 금요일부터는 바람이 스타보드 빔리치라고 했으니 기대해 보자. 비록 5일전 예보이긴 하지만. 오늘 따라 일몰이 예술이다. 붉은 관솔불 같다. 파도가 얌전해, 바다에 비친 석양이 찰랑찰랑 제네시스를 따라 오고 있다.
4월 21일(금) 오전 1시. 예멘 Saihut 앞 통과 중. 바람이 바뀌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 그새 윈디 예보가 바뀐 건가? 선속 5.0노트. 이대로면 오후 7시 넘어 도착 할 수 있다. 해가 밝고도 바람이 바뀌지 않으면 Rpm를 더 높여 내일 오후 6시, 일몰 전에 도착하도록 해야 한다. 바람 방향이 바뀌고 이번엔 바람이 세기를 기도한다. 이리듐고가 절실하네. 윈디라도 쓸 수 있었으면. 오늘은 임대균 선장에게 전화라도 해서 물어 볼까? 달 없는 밤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에덴만 항해 내내 별자리들은 제자리를 지킨다. 오늘 날씨는 별들에게 물어볼까나? 그러나 별들은 침묵한다.
오전 4시 30분. 바람 방향은 스타보드 빔리치로 바뀌었다. 문제는 풍속. 3~4노트다. 선속은 5.0노트. 오늘 풍속이 어찌되려나? 오전까지는 기다려 봐야 하나? 아니면 엔진 Rpm을 높여야 하나? 흠... 전방의 수평선에는 구름이 높다. 기후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영 힘든 항해다. 청해 부대에서 연락이 오면 물어보자. 사방이 희뿌옇게 동이 터온다. 일단 이 닦고 커피나 한 잔 하자.
오전 5시 20분. 앞쪽에 구름이 많아. 혹시 비가 오거나 햇살이 없을까 염려된다. 오너 선실의 이불을 미리 꺼내 하나씩 말린다. 햇살과 바람으로 바삭하게 말리고 싶다. 이따가 깔고 자던 담요는 세탁도 해야겠다. 매트리스도 꺼내 갑판에 둔다. 매트리스를 꺼낸 김에 고정판을 치우고 앞 쪽 물탱크를 확인한다. 어! 그 밑에 공간이 있고, 비닐도 뜯지 않은 새 구명조끼가 13개나 들어있다. 빙고! 그러면 지금 있는 구명조끼까지 총 15개다. 그중 젖은 것 하나는 갑판에 말린다. 제대로 된 진짜 고급 구명조끼인데 처박아 두다니. 잘 말리고 비치해 두어야겠다. 한국가면 안전검사 무조건 통과다.
앞쪽 물탱크를 확인한다. 오, 물탱크 곁은 콘크리트다. 뭔가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물탱크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 두려는 것일까? 독일인들의 지혜인가? 아니면 무게가 맞지 않아 부어 놓은 것인가? 나중에 바바리아 50 포럼에서 검색 또는 질문해봐야겠다.
Rpm을 1,550으로 조금 올려 본다. 선속 5.2노트다. 조류가 바뀌고 바람이 약간만 불어주면 된다. 5.5 노트만 되면 일몰 전에 입항 가능하다. 오망 살랄라항은 야간에도 접안 가능할 정도로 밝은가? 그것도 청해부대에 문의해 봐야겠다.
바람은 5~6노트. 집세일도 마저 펴보자. 밑져야 본전이다. 이번 출항 이래 처음 풀 세일이다. 바람을 조금이라도 더 쓰자. 집세일이 90%에서 더 펴지지 않는다. 뭐지? 간판으로 나가 집세일을 돌려본다. 별다른 이상 없는데 왜 안 펴지지? 마스트 끝까지 전부 육안으로 확인한다. 이상 없다. 시트도 당겨본다. 뭔가 뻑뻑하다. 일단 망가지면 안 되니 오늘은 집세일을 여기까지만 쓰자. 하고 콕핏으로 돌아와 보니 집세일 시트가 한번 꼬이면서 클러치에 걸려 있다. 이런 등잔 밑이 어두웠네. 꼬인 줄을 풀자 스르륵~ 집세일이 100% 펴진다. 바람 빔리치 5.0 노트, 선속은 5.5~5.9 노트를 오르내린다. 잘 한 결정이다. 여기서 바람만 조금 더 세지면 속도가 더 나겠지. 아니 지금 정도라도 내일 22일(토요일) 일몰 전에 살랄라 항에 도착가능하다. 바람이 더 세지면, 엔진을 끄고 범주하고 싶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는 진짜 세일링 말이다.
0 청해부대 문의 사항.
- 내일의 기상 상태, 바람세기 방향, 날씨
- 오만 살랄라항은 야간 접안 가능할 정도로 조명이 밝은가?
0 임대균 선장 협조사항
- 부산 C80건 (가능하면 랑카위에서 접수)
- 초강력 본드건.
- 소포장 식료품건등
오전 6시 30분. 파스타를 끓였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파스타 크림소스를 찾다가 못 찾았다. 그냥 토마토소스만 구했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파스타는 모두 맛났다. 그런데 병에든 토마토소스로는 그런 감칠맛이 나지 않는다. 어쩐지 20% 부족한 맛이다. 그래서 짠 햄을 잘라 넣고, 다시다를 조금 넣었다. 한국적 파스타다. 감칠맛이 난다. 10% 부족하지만 이만해도 좋다. 역시 병에든 오이지 반찬으로 아침식사를 마친다.
바람이 4노트면 선속은 5.5노트, 바람이 5~6노트면 곧장 선속 5.9~6.1 노트다. 제네시스는 바람에 엄청나게 민감한 배다. 바람이 횡풍 10~12노트만 불면 엔진을 끄고 범주해 볼 만 하다. 어쨌든 이대로만 가도 좋다.
오전 6시 45분. 청해부대에서 전화가 왔다. 기상을 물어 본다. 남풍 10노트라고 하니 너무 잘됐다. 비 예보는 없단다. 풍속 6노트, Rpm 1,350, 선속 5.5 노트다. 풍속 10노트만 돼라. 오만 살랄라 야간 입항 가능성은 나중에 확인해 준단다. 나는 앞으로 통화시에 기상 상태만 좀 확인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래저래 청해부대에 신세를 많이 진다. 감사합니다.
"딱 한 번이라도 좋다.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때의 옛날로 돌아가자. 나는 펜을 내려놓고. 읽다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너는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긴다. 내 키만큼 천장에 다다를 만큼 널 높이 들어 올리고 졸음이 온 너의 눈, 상기된 너의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 거다.“ - 이어령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중
아침 식사 후 책을 읽다가 오열한다. 나는 여전히 밥 엘 만뎁(눈물의 문)해협을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결국 내 인생의 일부는 영원히 지부티에 남겨 둔 것인가? 단독항해중인 배는 아무도 없어 통곡하기에 적당하다. 하느님 저를 가엾게 여기소서.
오전 7시 35분. 풍속 7노트, Rpm 1,300, 선속 6.3노트. 청해 부대원 말대로 남풍 10노트면, 엔진 꺼도 될 듯하다. 이틈에 이불 빨래 중이다. 물을 빼는 일이 제일 크다. 일단 해보자. 이불 빨래를 하고 최대한 짜서, 스턴에 널었다. 바람은 점점 강해진다. 풍속 9노트, Rpm 1,300, 선속 6.5노트. 아직은 6~9노트 사이를 오르내리는 바람이다. 곧 10노트가 되고 안정 될 거다. 계속 이런 바람이면 나는 내일 오전 중에 오만 살랄라 항에 입항 가능하다. 레이더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진공의 바다. 날씨 맑고, 바람 적당하고, 빨래가 바삭바삭 마르는 신라의 달밤, 아니 아덴만의 아침이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열정적인 솜씨로 베토벤 교향곡 제 5번 운명을 들어보자. 임현정이 한 라디오 방송에서, ‘베토벤이 당시의 Pop 스타라고 하더라’니, 화(짜증?)를 내던 음대 교수 한분이 떠오른다. ‘최인’이라고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왜 그랬을까? 새삼 궁금하다. 임현정이 일본 공연 중 한국 음악은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아리랑을 테마로 신나게 연주하여 무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단 일화를 나는 아주 통쾌하게 생각한다. 나는 그런 제대로 된 또라이를 애호가다. 나는 최인 교수의 클래식 기타 연주도 아주 많이 사랑한다.
오전 9시 10분. 해수부에서 연락이 왔다. 살랄라 앞의 바람을 물어본다. 북동풍이라고 한다. 뭐? 남풍이나 남서풍이 아니고? 그럼 완전 반대인데, 일기 예보가 뒤집혔나? 그럼 이렇게 여유부리며 갈 때가 아니다. 일단 Rpm을 1,450으로 올린다. 곧장 선속이 6.3 노트로 올라간다. 이대로 가보자. 해수부 말이 맞다면, 맞바람이라는 말인데. 이렇게 예보가 완전히 다르다니, 청해부대에서 연락 오면 다시 확인해야겠다.
오전 10시 20분, 아직은 남풍이다. 풍속 5노트의 아주 약한 남풍. 선속은 5.7노트. 세일이 힘을 잃고 펄럭인다. 여기까진 5일전 윈디가 맞다. 구름이 끼어 하늘의 푸른색이 탈색 된다. 좌후방 40 미터밖에 돌고래의 등지느러미가 보인다. 멀어져 가는 등지느러미다. 근처에 온 걸 못 봤는데. 나비오닉스와 책에 코를 박고 있느라 돌고래들과 놀아주지 못했나 보다. 미안하다. 얘들아. 남은 거리 159 해리. 곧 ETA가 24시간 이내로 표시 될 거다.
오전 11시. 바람은 스타보트 크로스홀드 7.7노트. Rpm 1,450. 선속 7.0노트. 살랄라까지 남은 거리 155 해리. 남은 시간 23시간 28분. 장기하의 노래들을 듣고 있다. 점심을 일찍 먹는다. 남은 파스타와 차가운 환타.
청해부대에서 전화가 온다. 살랄라 앞의 풍향 풍속을 물어 본다. 내가 인터넷이 안 되서 그러니, 그냥 윈디 상의 데이터만 알려 달라고 한다. 잠시 후, 남풍 10노트라고 한다. 역시 맞았다. 그래서 다행이다. 바람이 점차 빨리 지다가 10노트까지 부나보다. Rpm을 1,400으로 낮춘다. 선속은 6.7노트.
오후 12시 45분. 엇 속도가 막 빨라진다. 바람은 스타보드 크로스 홀드 7노트, 속도는 7.3노트. 좋다. 막 달리자. 이불 하나를 더 꺼내 말린다. 이따 3시경에 담요도 하나 더 말리자. 이러면 살라라가서 이불 말릴 시간을 번다. 스프레이 후드 앞에 내 베게와 리나의 베게가 나란히 햇살을 쬐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 나와 리나의 관계가 저 베게들만큼 정답기를 소망한다.
오만 살랄라는 내일 22일 토요일 오전 중 도착 예정이다. 16일 새벽 3시 출항, 7일 만이다. 예정보다 하루 늦었다. 맞바람으로 고생한 것 치고는 정말 빠르게 온 거다. 물론 바람이 지금 같다는 전제하에. 도착하면 입국 C.I.Q. SIM 카드 구매, 날씨 정보 살피기, 물채우기, 디젤유 구매, 룰루마켓 장보기, 밴드에 항해일지 올리기. 그리고 플로터 수리, 엔진 점검, 배 정비 및 출항준비. 사이클론 오기 전에 출항이다! 도착에서 출항까지 2박 3일을 예상한다. 22일 도착, 24일 새벽 출항, 그러면 14일 후 5월 7일 싱가포르 Galle다. 성급하게 일정을 정리해 본다. 사이클론이 쫒아 올까봐, 마음 급하기 때문.
2023년 4월 21일 오후 1시 5분. 오 신기하다. 아까까지 위성전화기에 Gulf of Aden 이라고 표시되었는데, 방금 보니 Indian Ocean 이라고 표시 된다. 드디어 아덴만 대탈주 성공! 이제부터는 인도양이다. 혼자 두 손을 들고 인디안처럼 뛰고 빙빙 돌며 자축한다. 아 참, 이 인디안은 미국의 그 인디안이 아니지. 어쨌든 나의 아덴만 대 탈주 항해를 함께 나누는 이 없이 혼자 기뻐하고 있다. 이집트 포트사이드부터 아덴만까지는 어디 빠져 나갈 곳도 없이 기주로 직진 항해를 했다. 이제 인도양에서부터는 범주 항해를 기대해 본다. 어서 SIM 카드를 사서, 나의 작은 성공(?)을 어머니께 알려 드리고 싶다. 연락이 안 돼, 지금 걱정이 크실텐데.
오후 2시 30분. 드디어 살랄라로 침로 변경했다. 남은 거리 127해리. 18시간 남았다. Rpm 1,400. 풍속 5노트. 선속 7.5노트다. 뭐지? 왜 이리 빨라? 조류 도움을 받고 있나보다. ETA가 내일 22일 (토요일) 오전 8시다. 뭐, 그 정도까지 빠르지 않아도 된다. 오전 중에만 도착한다면 더 바랄게 없다. 오만 살랄라에 도착하면 에이전트 Mr Omar Moosa를 찾아 입국진행을 하면 된다.
Mr Omar Moosa Number: 0096892899961 Email: sahoolalhogori@gmail.com
아, 그리고 오만의 Dhalku 까지 가면, 드디어 해수부가 지정한 ‘해적위험해역’에서 벗어난다. 국제해사 협회와 EU가 2023년 1월 1일부터 High Risk Area에서 해제하고, 전 세계의 수많은 세일요트들이 안심하고 수에즈를 통과하려 항해중인 아덴만지역. 우리나라 해수부가 아직 해수부장관 고지를 하지 않아, 철지난 유행가처럼 남겨져 있는 그 ‘해적위험해역’에서 완전히 탈출이다.
[우리국민 김명기님께서는 수에즈를 통과하여 Indian Ocean 그리고 동남아 지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참고로 Indian Ocean HRA는 IMO MSC 106/ING.10, 22 August 2022, 106th session Agenda item7으로 0001 UTC on 1 January 2023부로 해제되었습니다. 기존 Voluntary report 는 유지 중입니다.] - 해외안전지킴이 센터.
오후 4시. 간식으로 지부티 라면을 하나 끓였다. 점심이 부실했던 모양이다. 라면을 먹고 샤워를 하고, 세탁까지 한다. 걸레를 물에 적혀 콕핏을 닦는다. 흰색이라 그런지 검은 먼지들이 많이 묻어 있다. 일단 닦아내고 살랄라에 가면 대대적인 물청소를 한 번 하리라 마음먹는다. 몸도 마음도 개운하다. 갑판으로 나가 사진 몇 장을 찍는다. 젠장, 어쩌면 이리 우울한 남자의 초상인가.
오후 4시 50분. 선속이 8도까지 올라간다. 바람은 아주 약하고, 엔진은 1,350 Rpm 이다. 역시 조류가 빠른 모양. 이따 밤이면 속도가 느려 지려나? 어쨌든 내일(토) 일몰 전에는 문제없이 도착할 것 같다. 인도양에서도 요런 항해를 기대한다.
오후 5시 40분. 아덴만 항해의 마지막 날 일몰이다.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를 듣고 있다. 태양은 수평선 구름위에 잠시 망설이더니, 마른 이불을 걷어 선실에 두고 오니 깜빡 사라졌다. 선속이 6.3노트로 내려간다. 바람도 약하고 조류가 느려지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내일 일몰 전에만 마리나로 들어가면 된다.
오후 7시 저녁으로 짬뽕라면. 국물은 남겼다가 내일 아침밥에 국 대신으로.
오후 10시 37분. 시간대가 1시간 앞당겨 졌다. 핸드폰에 ‘걸프만 표준시’라며 10:37분으로 표시 된다. 손목시계의 시간을 1시간 앞당겨야겠다. 또 왔다 갔다 하는 건 아니겠지?
2023년 4월 22일(토) 오전 2시 32분. 바다로 예맨 국경을 넘었다. 이제는 오만이다. ‘해적위험해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풍향풍속 스타보드 쿼터런 3.9노트, 선속 5.9 노트. 8시간 40분 후면 오만 살랄라 도착이다. 칠흑 같은 좌현 하늘을 가득 채우고 북두칠성이 서 있다. 북두칠성이 원래 저렇게 큰 별자리였나. 한동안 별자리를 바라본다,
오전 3시 30분. 갑자기 문자가 쏟아진다. 로밍이 되는가 보다.
[Web발신][LGU+]오만은 가입하신 요금제가 적용되지 않는 국가입니다. 단문메시지 발신 165원, 장문 및 사진/동영상메시지 발신 550원 (메시지 수신 무료)
한국에 걸 때 46.7원/초, 받을 때 37.3/초, 데이터 0.55원 /1KB(해외로밍적용요금)
이렇게 문자가 쏟아진다. 그러나 데이터는 되지 않는다. 통화는 1분 2,800원이다. 한국시간 오전 08시 51분. 어머니께 안전하게 아덴만을 건넜고, 9시간 후면 오만 살랄라에 도착한다고 문자를 보내야겠다. 165원 쓰자! 돈은 이럴 때 팍팍! 쓰는 거다. 그러나 문자가 보내지지 않는다. 뭐하는 거야?
시애틀 사는 여동생에게 위성전화를 한다. 받지 않는다. 잠시 후 여동생에게 전화가 온다. 엄청나게 비싼 줄 알기에 예전 DDD 공중 전화기처럼 용건만 말한다.
“응, 나 아덴만 잘 빠져 나왔고, 8시간 후면 오만 살랄라 도착이야. 끊어, 끊어!”, “알겠어 오빠!” 이렇게 용건만 말한다. 살랄라 가서 SIM 카드 구입하면 그때 실컷 떠들자.
문득 오만 살랄라 에이전트 Mr Omar Moosa를 누가 내게 소개했지? 왓스앱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았나 보다. 지부티 에이전트 아산이 보낸 자료가 있긴 하다. Mr Omar Moosa 가 아닌 다른 에이전트를 소개했다. 추가 자료를 한 번 읽어 본다. 2021년 10월 자료다. 요약하면,
[Kay 와 나는 살랄라에서 한 달을 보냈다. 9월 30일 도착. 계획 없이 엔진 고장으로 살랄라 행. 가보니 Noonsite의 자료와 전혀 틀린 현실. 오만은 2020년 코비드-19로 완전 닫힌 상태. 개항 때와는 모든 게 변했다. 우리 요트가 첫 번 째 외국배다.
너는 도착 전에 모든 승선원이 여행 비자를 받아야 한다.
2. 너는 모든 공식적인 백신증명서와 QR코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3, 항구에 들어가기 위해 에이전트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요트가 한 대도 없어, 에이전트도 없다. 살랄라는 아덴만에서 가장 큰 상업항구기 때문에, 길이 400미터 쯤 되는 상업적인 배들을 위한 에이전트만 있는데, 그들은 요트에 관심도 없고 $3,000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일단 중지를 요구하고, 그들이 우리 요트를 다시 고려해서 방안을 내 놓을 때까지 기다린다.
4. 너는 항구 밖 북쪽 브레이크워터에 앵커링을 해야 한다. 바닥은 12미터 깊이의 모래다. 거기서 너의 에이전트가 입항을 위한 허가를 받을 거다. 우리는 거기서 3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커다란 배들을 위한 큰 콘크리트 선착장에서 2.5미터 조수변화를 조심하며 대기해야 한다. 거기엔 플로팅 도크가 없고 요트는 항안에 앵커링 할 수 없다. 너의 에이전트가 PCR 검사 준비를 구성하고, 간호사가 보트로 와서 PCR 테스트를 한다. 비용은 1인당 70달러다. 보통 검사 결과까지 24시간이 걸린다. 검사가 끝나면 에이전트가 와서 여권과 배 서류를 가져가 입항 수속을 한다. 그리고 에이전트를 일주일 넘게 기다린다.
5. 여권에 도장을 받으면 입국된다. 포트 사용료를 내야 한다. 보트 크기와 날짜로 계산한다. 우리 같은 경우는 15미터 이하, 20톤 이하여서 면제 되었다. 그게 최소 제한 같다.
6. 이제 너는 다른 항구로 갈 수 있다. 우리는 12 해리 떨어진 Hawana 마리나로 갔다. 택시비는 50달라다. 거기엔 수많은 콘도들이 있는데 모두 문을 닫았다. 식당 몇 군데도 닫았다. 사막만 있고 아무도 없다. 마리나에 플로팅 선석은 두 개인데, 14미터 선석에 하루 비용은 65달러다. Noonsite엔 160선석이 있다고 했는데, 그건 누군가의 마케팅이고 실제는 전혀 다르다. 아주 작은 마켓이 하나 있다. 마을 밖은 그냥 사막이다. 오만 살랄라에 갈 아무런 이유가 없다. 특히 비용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오 마이 갓! 이것만 읽어보면 완전 절망이다. 그런데,
2009년에 오만 살랄라에 간 윤태근 선장님은 에이전트도 없이, 그냥 가면 다 된다고 했다. 오만이 물가가 저렴하니 기름, 물, 식품, 다 꽉꽉 채워서 가라고 하셨다. 그땐 그랬나 보다.
2019년에 간, 김석중 선장님도 오만이 물가가 저렴하다는 말씀만 하셨다.
2020년에 간, 미국선장 윌리엄은 오만이 너무 좋아서 3달간 체류했다고 한다.
2021년 9월에 간, Kay 는 이렇게 절망스러운 상황을 적었다.
2023년 4월, 나는 에이전트 Mr Omar Moosa와 이메일을 주고받고 있다. 그는 오만 살랄라의 개항여부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나는 여권자료를 보냈고, 그는 보험서류의 스탬프와 사인을 요구했다. 나는 이탈리아 브로커 파브리치오에게 스탬프와 사인을 부탁해 두었다. 자 이제 입항과 입국절차가 어떻게 전개 될지는 하늘만이 아실 일이다. 내가 가서 경험하고 기록하면, 그게 그 순간의 정확한 상황이 될 거다. ATM이나 비자카드 사용은 가능할까? 에이전트가 웨스트유니언 은행도 사용하나? 이따 오전 9시쯤 Mr Omar Moosa 에게 위성전화를 해보자. 윤태근 선장님 같으면, ‘걱정 마이소, 어떻게든 다 해결됩니더.’ 하고 웃으실 거다. 맞다.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다 해결하고 왔다.
여기까지 쓰는데 똑! 또르르~ 뭔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뭐지? 스프레이 후드 앞을 보니 볼트가 하나 떨어져 있다. 앗! 어디서 떨어진 볼트지? 한참을 찾아보니 붐 시트의 도르래를 고정하는 볼트다. 운이 좋다. 때마침 볼트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거다. 굴러가지도 않고 제자리에 멈췄다. 전체 도르래의 볼트를 확인하고 다시 조이기로 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전 6시 20분. 붐 아래의 도르래 볼트들을 확인하면서 욕이 절로 나온다. 볼트들이 다 풀어져 있다. 이게 곧 모조리 빠져나올 찰나였다. 아니 이 독일 X들은 어떻게 이렇게 중요만 부품을 이렇게 엉성하게 처리했지? 메인 세일 작살 날 뻔 했네. 볼트를 모두 다 조이고, 이제부터는 자주 점검해야겠다. 그런데 다른 곳의 볼트들은 다 제대로 조여져 있다고 누가 장담하지? 참나 걱정이다.
오전 6시 50분. 오만 도착 전 마지막 아침 식사다. 감자밥에 어제 라면 국물, 리나가 남긴 요리가케와 김치다. 이만하면 진수성찬이다.
혼자 장거리 항해를 해보니 싸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특히 잼이나, 과일 주스 같은 음료는 반도 못 먹고 버리는 경우가 많다. 선내 냉장고가 작고 성능도 별로다. 뭐든 조금 비싸더라도 소포장으로 사야, 그때그때 변질되지 않고 알뜰하게 먹을 수 있다. 룰루마켓에서 다 구입할 수 있을까? 미국선장 윌리엄이 강력 추천하니 믿어보자.
오전 8시. 남은 기름 190리터를 모두 배에 넣기로 한다. 시간 있을 때 미리미리 해야지. 모두 부으니, 300리터 가량 된다. 110리터가 남아 있었군. 그런데 이게 표준 Rpm 당 리터 사용표와 잘 안 맞는 것 같다. 1,400Rpm에서 시간당 2.7리터 가량 되는 것 같다. 일단 배의 기준을 2.7L/h 로 하자. 그래야 실수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아덴만 같은 미친 기주 항해는 최대한 자제하고, 엔진 사용기준을 1,400Rpm 으로 하자. 그래도 5.5~6.0노트 가량 나온다. 그만 하면 충분하다. 세계일주 선장들은 평상시 선속 4~5노트 기준이라고 한다.
이상 일단 배에 말통까지 기름을 모두 실으면 1,050 리터. 시간으로 389시간, 날짜로 16일이다. 아무래도 16일까지는 못 쓸 성 싶은데. 바람 좋을 때, 엔진 끄고 범주하면 비슷하게 사용 가능할 것도 같다. 꼭 필요에 의해 하루에 절반만 기주해도 30일이다. 대략 이정도로 하고 엔진과 기름을 사용하자.
기름을 모두 넣고 샤워를 한다. 물론 입었던 셔츠와 팬티 세탁도 한다. 남은 거리 21해리, 3시간 40분 남았다. 바람은 메롱~ 이고, Rpm 1,350. 선속은 5.9노트다. 일단 문자로 몇 분에게 무사히 아덴만을 건넜음을 알린다. 물론 어머님께 제일 먼저.
오전 9시. 역시 제대로 될 일이 없지. 위성전화는 Mr Omar Moosa와 통화하다가 끊어졌다. ‘나는 4시간 후 살랄라 도착한다.’ 뚝! 돈을 리필하라는 문자다. 제기, 내가 방법을 알 수 있나? 큰일이다. 일반 전화로 전화한다. 전화가 되지 않는다. Mr Omar Moosa에게 문자가 하나 날아온다. Mr jasem Dhofar shipping +968 9929 2439 . 역시 먹통이다. 일반 전화로는 안 되나 보다. 나중에 에이전트 만나면 어떻게 리필 하는지 확인해 보자. 그런데 위성전화 받기만 했지 거의 사용 안했는데, 어떻게 200분이 다 소모됐지? 도무지 이해 불가다. 윤태근 선장님께 빌려온 이리듐 위성전화기도 일단 충전. 둘 중 프리페이드 충전이 간단한 전화기를 사용할 예정이다. 어쨌든 전화 연락하고, 에이전트와 대화하고, 뭐 이런 식으로 정상적 연결은 크레타 하니아에서 딱 한 번, 나머지는 포트 콘트롤에 연락하면, 포트 콘트롤에서 나랑 미리 연락한 에이전트를 찾아 연결해 주었다. 대개의 포트 콘트롤은 VHF 12번 이었다.
샬랄라 포트 콘트롤을 불러 본다. 나온다. 4시간 후 도착이라니까, 2시간 후에 다시 연락하란다. 그러지 뭐. 일단 가보자. 뭐든 어떻게든 될 거다. 무슨 난관이 있든, SIM 카드 구하고, 연료, 물, 식량보급하고 떠나면 된다. 나머지는 필요 없다.
오전 11시 30분. 난리가 났다. 포트 콘트롤에 Omar Moosa의 이름과 연락처를 주었는데, 연락이 안 된단다. 전화를 안 받는다. 그러더니 다른 번호를 물어 Mr jasem 연락처를 주었는데도 안 받는다. 너는 에이전트가 없으니 12마일 밖으로 나가라. 어쩌라고! 여기서 보급 못하면 아무데도 못 간다. 나는 VHF 12번 채널로 막 떠든다.
나는 그렇게 못한다. 내 배는 세일 요트고, 12마일은 2~3시간 거리다. 나는 기름과 물과 음식을 구해야만 스리랑카로 갈 수 있다, 나는 이미 내 에이전트에게 메일을 다 보냈다. 나는 SIM 카드가 없어 인터넷 확인을 못할 뿐이다. 나더러 죽으란 말이냐? 나는 배도 손보아야 한다. 이렇게 엄살 부리며 막 떠들었다.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다. 만약 안 되면 살랄라 포트로 들어가자. 가서 체포되면 산다. 아니면 바다에서 죽게 된다.
한국의 선장님께 연락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그때는 그냥 들어갔단다. 살랄라 포트 2마일 전방에서 버티고 있자니, 포트 콘트롤에서 연락이 온다. 코스트가드가 갈 테니 현 위치에서 기다리란다. 좋다, 기다린다.
오후 1시가 되어 코스트 가드가 온다. 오더니, 너 영어하네? 그렇다. 그럼 포트 콘트롤과 이야기해. 하더니 그냥 가려 한다. 노노 핼프 미! 돈 고! 핼프 미! 막 외치니까, 다시 배로 온다. 경찰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일단 경찰 배와 제네시스를 묶는다. 경찰에게 너 핸드폰 데이터 좀 빌려줘! 하니 못 알아 듣는다. 경찰이 누군가에게 전화하더니, 영어 잘 하는 사람을 바꾸어 준다. 상황을 설명하니, 그는 그럼 에이전트가 필요하냐? 묻는다. 일단 경찰에게 데이터를 좀 쉐어링 해주라고 해라. 그럼 내가 내 에이전트와 주고받은 메일을 다시 확인할게. 라고 부탁하니 그가 경찰에게 말한다. 경찰의 아이폰으로 WIFI 연결하고 Omar Moosa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확인한다.
메일 끝에 새로운 전화번호가 있다. Sahool Al Hojari +968 9949 2056 내 전화로 전화를 거니 받는다. 1분에 2,800원 짜리 전화다. Omar Moosa를 말하니 안다. 내 신분을 밝히고 상황을 설명한다. 에이전트 비가 500달러라고 한다. 세상 완전 바가지다. 이러려고 이 새끼들이 장난 친 건가? 일단 보험을 묻는다. 보험은 있다. 이탈리아 보험이다. 그럼 더 좋다. 잠깐 기다려라. 지들 끼리 뭐라고 떠들더니, 한 참 후에 걱정 말고 기다려라. 곧 연락 한다고 전화를 끊는다.
30분 후에 연락이 왔다. 오늘이 오만의 크리스마스란다. 그래서 포트에 일하는 사람이 없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무슨 소리냐? 지금 VHF 12번으로 포트 콘트롤과 열심히 이야기 중인데? 그래? 그럼 곧 다시 연락할게. 이상한 놈들이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포트 콘트롤을 부른다. Sahool Al Hojari와 통화했다고 하니, 아는 눈치다. Sahool Al Hojari에게 포트 콘트롤로 전화 하라고 말한다. 그사이 Sahool Al Hojari에게서 전화가 온다. 1시간만 기다리란다. 자기들이 곧 비자를 내준단다. 배 사이즈와 크루, 머물 일정 등을 묻는다. 내가 보낸 메일은 다 어쩌고? 1시간 있다가 자기들이 포트로 온단다. 나는 SIM카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 SIM 카드를 가지고 포트로 갈게. 믿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해결이 되고 있다. 1시간 또는 좀 더 기다리면 일단 살랄라 포트로 갈 수 있다. Sahool Al Hojari 이자식이 바가지를 옴팡 씌우려는 모양이지만, 인도양을 건너려면 무조건 여기서 보급을 해야 한다. 그런 후 나도 너희의 바가지를 전 세계 선장들에게 알릴게.
오후 2시. 아, 정말 긴장의 연속이다. 살랄라 포트 콘트롤에서 1마일 거리 알파 앵커리지에서 대기하란다. 지금 살랄라 항 바로 앞에서 오전 11시부터 3시간째 대기 중이다. 일단 라면이나 하나 먹자. 먹고 느긋하게 기다리자. 포트는 못 들어갔지만 일단 알파 앵커리지까지는 왔다. 그러나 세일러에게 이렇게 까지 악독하게 구는 곳은 처음이다. 상상도 못했다.
1시간이 넘어 Sahool Al Hojari에게 연락하니, 너는 1시간 지났으니, 포트로 올 수 있다. 란다. 뭔 소리냐? 포트 콘트롤은, 너더러 그들에게 전화하란다. 그리고 나는 알파 앵커리지에서 대기하라고 한다. 오케이, 오케이. 잠시만 기다려 하고 전화를 끊는다. 일도 더럽게 못하면서 바가지 씌울 생각만 하네. 젠장.
오후 3시 15분. Sahool Al Hojari에게 다시 전화해서 언제까지 기다리는 거냐? 라고 물으니, 5분만 더 기다리라고 한다. 지금 공휴일이라서 이머전시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5분이 지나 포트 콘트롤에 연락하니, 또 대기하라고 한다. 그래서 언제까지 대길하나? 나는 일주일 동안 혼자 항해했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 서둘러 달라 하니, 30분 이내에 코스트 가드가 내게 와서 포트 넘버를 안내해 줄 거라고 한다. 30분? 기대도 안하지만, 그래도 한 시간 타령에서 30분으로 줄었다. 30분 후 또 연락해 보자. 2023년도 4월 22일 현재 오만 살랄라의 현실이 이렇다. 입항부터가 불분명하고 힘들다. 최악의 시나리오다.
청해부대에서 위성전화가 온다. 아직도 대기 중이라고 알려준다. 도대체 이슬람권 사람들은 약속을 뭘로 아는 건가? 30분이 다 돼간다. 포트 콘트롤에 또 연락하자. 전화하니 다시 1시간을 더 기다리라고 한다. 아까 30분 기다리라고 하더니 왜 한 시간 더 기다리냐? 물으니, 오늘이 공휴일이라서 그렇단다. 알겠다. 그래도 서둘러 달라. 나는 너무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 하니 미안하단다.
주 오만 한국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상황을 설명한다. 에이전트 번호를 달라고 한다. 직접 전화해서 상황을 알아보고 다시 전화 주신단다. 고마운 일이다. 아예 시간 약속의 개념이 없는 이런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은 진짜 선진국이다. 5시가 넘으면 그냥 포트로 들어가서 체포하라고 해야겠다.
다시 에이전트에게 연락하니, 자기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다며, 너희 나라 대사관에서 직접 전화를 할 거다. 대사관에 부탁하라며 뒤로 빠진다. 정 방법이 없으면 이따가 북쪽 앵커리지에 앵커링이라도 해야겠다. 한국대사관 번호로 연락하니 받지 않는다.
또 한 시간이 흘러 5시가 되었다. 포트 콘트롤에 연락해서 나는 작은 배라 앵커링을 물이 얕은 북쪽 앵커리지에 하겠다고 했다. 안된다고 기다리란다. 뭐야? 개새끼들 죽으라는 거야? 속으로 욕을 하고 20분을 더 기다린다. 그리고 천천히 북쪽 앵커리지로 이동한다. 포트 콘트롤에서 스톱스톱! 컴백! 하고 난리다. 나는 찬찬히 설명한다. 내 배는 앵커도 작고 체인도 짧다. 5~7미터 에서만 앵커링이 가능하다. 나는 다른 방법이 없다. 가서 앵커링 할거다. 그러자, 포트 콘트롤에서, 너는 지금 에이전트가 없어서 안 된다. 네 에이전트가 포기했다. 뭔 소리야? 그게 내 잘 못이야? 나는 모든 서류를 다 메일로 보냈다고!
그럼 코스트가드가 갈 거다. 코스트가드와 잘 이야기 하라. 우리는 권한이 없다. 하고 빠진다. 맘대로 해라. 일부러 천천히 한참을 달려 북측 앵커리지에 진입하는데 코스트 가드가 쏜살 같이 달려온다. 하루 종일 온다온다 말만하더니 드디어 오는군. 양손을 흔들어 환영한다. 그러자 당황한 모습이다. 가까이 오더니, 여기 오면 안 된다고 한다. 무슨 소리야? 보다시피 내 배는 작아. 밖에 앵커링 할 수 없어. 5~7 미터 깊이만 앵커링 된다고. 나는 지금 기름도 없어, 발로 텅 빈 기름통들을 차 보인다. 나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얕은데서 앵커링하고 내일 포트 콘트롤에서 새로운 에이전트를 소개해 준다고 했어. 그러니 나는 내일까지 앵커링하고 기다려야해. 니들이 나를 쫒는 건 나를 죽이는 거야. 나는 못가. 나를 체포해, 어레스트 미! 여기서 입항이 안 되면 어차피 아무데도 못가!
그러자 둘이 얼굴을 마주 보더니 내게 뭘 원하느냐고 한다. SIM 카드, 디젤, 물, 식량이다. 그것만 준비되면 나는 바로 떠난다. 나는 혼자다. 그 중 하나는 웃고, 그 중 하나는 어디론가 전화 한다. 5분정도 통화하더니, Okay! 자기를 따라 오란다. 그래? 가지 뭐. 1마일을 따라가 보니 경찰 배들이 정박한 곳이다. 앗! 그런데 여기가 윤태근 선장님이 2009년에 정박한 바로 그 자리다. 이럴 수가! 어거지로 난리쳤더니 딱 그 자리에 데려다 준다. 여기에 앵커링하고 포트 콘트롤에 전화하란다.
포트 콘트롤에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니, 알겠다며 새로운 에이전트를 소개해 준다. Roxoh다. 통화하니 곧 사람을 보낸다고 한다. 앵커링 중이니, 미리 텐더 보트를 준비한다. 지부티에서 7일을 항해해 오고, 오전 11시 도착해서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바다에서 대기했다. 일단 앵커링을 하니 한시름은 덜었다. 미국선장, 윌리암은 여기 마리나가 있고, 전기, 물, 디젤, 세탁까지 얼마든지 가능하다더니 뭐가 어떻게 된 건가? 입항허가 조차 힘들다. 젠장이다. 새 에이전트는 30분 내로 온다니 기다려 보자. 혼자 오만 살랄라 입국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런 개똥같은 항구가 어디 있나? 만약 에이전트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 청해부대나 오만주재 한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야하겠다. 분당 2,800원 짜리 전화 엄청 썼다. 정말 욕 나온다.
오후 8시. 새 에이전트는 오지 않는다. 전화해 본다. 살랄라에서는 절차가 어려우니 인근의 Hawana Salalah 마리나로 아침에 옮겨 가서 절차를 밟자고 한다. 그래서 왜 안 오냐고 하니까, 오늘은 갈 필요가 없어 졌다고 한다. 네가 30분만 기다리라고 해서 계속 기다렸다. 나는 연락을 위한 SIM 카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오늘은 안 된다다. 아니 바로 네가 된다고, 네가 온다고 한 것 아니냐? 그럼 에이전트 피는 얼마냐? 1,200달러란다. 세상에 그런 에이전트 피는 없다. 나는 전화를 끊는다.
오후 8시 오만 대사관의 구영사관님께서 전화 주셨다. 사실은 구영사관님이 살랄라 포트 콘트롤과 코스트 가드에 인도적 임시 입항을 요청하신 거란다. 나는 전혀 몰랐다. 감사 인사를 한다. 그리고 나는 오만에 들어 갈 일도 없다. 혹시 인도적 상황에서 디젤과, 음식을 구매 하도록만 해주면 나는 정식 입항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내일 오전 포트 콘트롤에 전화를 넣어 주실 수 있는지 묻는다. 오전 10시쯤 전화를 넣어 주신단다. SIM 카드는 코스트 가드에게 부탁해 보란다. 당연히 요청해 볼 거다.
내일 아침 에이전트를 왜 포기 했는지 처음 회사에다가도 물어 볼 거다. 500달라만 해도 도둑놈인데, 두 번째는 더 도둑놈이다. 항해하다 세상 별 더러운 곳에 다 와본다.
현재까지는 오만 살랄라에 대한 분석중에 Kay의 분석이 가장 근접하다. 오늘 하루 만에 오만 사람들의 거짓말만 수십 번을 들었다. 처음 에이전트도 5분, 10분하더니 포기. 포트 콘트롤도 1시간, 30분 하더니, 내가 어거지 쓰니까 그제서야 물러났다. 두 번째 에이전트는 사람 보낸다. 직접 온다. 30분 만에 온다. 모조리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 이게 오만의 문화인가? 아무래도 예상보다 장기전이 될 것 같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인도주의에 기대보자. 느린 놈이 이기는 게임 같다. 여긴 밤인데도 무지하게 덥다. 살랄라항 앵커리지에서 오랜만에 제대로 늘어지게 자보자.
첫댓글 고생하십니다^^, 오만은 들어가지 않는게 정답인가 봅니다
살랄라가 아니라, 19해리 동쪽의 hawana 마리나로 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무지하게 비쌉니다. ㅜㅜ
@Captain KIM 명기 그러게요 보통 60만원 정도 하던데 300은 과한것 같습니다. 인도양 코스가 힘든 코스네요. 고생하시네요. 언제 저도 가능하다면 합류할수 있을까요? 요트 보트 면허 소지하였고, 47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