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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으로 읽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 5편, 구지(九地)편,1597년9월16일 명랑대첩
아들아, 손자병법으로 읽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
이번에는 1597년 9월 16일,명량대첩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해.
앞에서는 칠천량 해전부터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백의종군과 복직 그리고 조선 수군
재건행로에 대해 얘기했는데...이것은 이번에 이야기할 명량대첩을 말하기 위해
배경지식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영화 명량, 회오리바다 포스터
1597년 9월 16일, 전남 진도와 해남 사이..남해와 서해가 연결되는 좁고 험한
물길에서 조선 수군 13척과 일본 수군 130척 또는 333척의 전투가 있었단다.
전장은 명량, 우리 말로는 울돌목.
울돌목의 물살, 회오리
울돌목이란 이름은 그 물길을 흐르는 물길이 얼마나 거센지..물이 흐르는 것이
꼭 우는 소리 내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세계적으로도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
곳이란다.
1597년 8월 18일, 남해안 전남 장흥의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숨겨놓았던
판옥전선 12척을 접수하고, 회령포에서 이진으로, 이진에서 어란진으로 그리고
명량대첩 직전에는 진도의 벽파진으로 진을 옮겨갔어.
일단..이때 조선 수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단다.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판옥선 1척을 더하여 13척의 함대를 구성했지만,
칠천량 해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졸들의 사기가 바닥이었고, 겨우 13척으로
최소 1백척 이상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한다는 공포감이 진영을 억누르고 있었지.
영화 명량 속 경상우수사 배설 (탈영은 맞으나 귀선을 태우고 도주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 스스로도 고신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졌으며, 토사곽란이란 병으로
사흘동안 운신도 못하고 앓아 건강상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며,
경상우수사 배설은 사사건건 군령에 따르지 않고 반감을 보이며,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지휘를 어렵게 하고,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그의 장수로서 기량과
심성을 신뢰할 수 없었고..
결국 경상우수사 배설은 신병을 칭한데 이어 탈영하며 진중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또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해서 싸우라는 선조의 유서(諭書)가 내려왔단다.
물론 겨우 10척의 전함으로 일본 수군의 대함대에 맞서는 것 자체가 무모하고
승산이 없으니 차라리 육군에 전력을 집중해서 싸우는 것이 낫다는 판단은
일견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경우 바닷길이 뚫려 한성이 있는 한강까지 일본수군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고, 일본군의 수륙병진책을 그대로 돕게 되는 엄청난 문제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야.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론의 불가함과 승리에 대한 의지를
밝혔단다.
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임진년이후 5, 6년간 적이 감히 호남과 호서로 쳐들어오지 못한 것은 수군이 눌러
그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사오니 온힘을 하다여 막아 싸울 수 있습니다.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지금 만약 수군을 폐한다면 바로 적이 이를 다행으로 여기는 것으로서 호남과 호서의
바다를 지나 한수로 바로 닿지 않을까 신은 이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전선의 수가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의 몸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업수히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일본군의 상황은 이때에 어떠했는가.
1597년 다시 침공해온 일본군 14만은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 파죽기세로 북상했단다.
처음으로 호남이 돌파당하여 남원과 전주가 점령되었고, 이들은 전주에서 모여 서울로
향하기 위해 북상하여 충청도 직산에 이르러 조명연합군과 대치했단다.
이때에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의 대승 이후, 조선 수군이 완전히 붕괴하여..
잔존 조선 수군에 대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북상하는 육군의 진로에만
관심이 가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행로를 통해 시간을 벌 수 있었지.
만약..일본이 조선 수군을 확실히 없애겠다며 끝까지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조선 수군을
제거하려 추격하였다면...정말로 조선 수군은 끝이 날 수도 있었을 거야.
일단, 일본군의 이 방심은 우리가 활용할 중요한 요소였다고 볼 수 있지.
일본군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재기용을 인지하였지만, 사실상 무너져 재기가
힘든 조선 함대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러면서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란 존재에 대해선 두려움도 여전히 있었고..
이런 복합적인 심리적 요소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데
활용해야 할 재료가 되는 것이었지.
일본군이 남원과 전주를 공략하는데 성공하자..일본 수군도 육군의 행로에 맞추어
한강으로 가려 서진해 오는데, 이 과정에서 어란진과 벽파진에서 조선 수군에 대해
소규모 도발을 해왔어.
이것은 우리 조선 수군의 전력 탐색과 더불어 일본 수군의 전력을 과시하고, 대공세가
멀지 않았음을 알려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명량, 울독목의 충무공 이순신 제독상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해남 어란진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진영을 옮기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단다. 그가 선택한 전장은 바로..해남과 진도 사이의 명량이었지.
전투 전 그는 법 집행을 엄격히 하고 군기강을 잡는데 상당히 주력했단다.
탈영과 유언비어로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행위에 대해 엄격히 군률을 적용시켜
단호히 처형하고, 어란진과 벽파진에서 일본 수군의 소규모 도발에서도 휘하 전선이
대응을 제대로 못하자 대장선을 이끌고 직접 앞으로 나섰단다.
명량해전이 임박해서 9월14일, 일본 수군이 어란진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전투가 임박했음을 알고 명량 바로 코 앞인 해남의 전라우수영으로 이동했지.
1597년 9월 15일, 명량해전 전일..난중일기의 기록을 보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우수영에서 휘하 장졸을 소집하여 또한번 다짐을 두어
군을 다잡은 내용이다.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병법운, 필사즉생, 필생즉사.)
병법에서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했다.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今我之謂矣. (우왈, 일부당천, 족구천부, 금아지위의)
또 말하기를, 한명이 좁은 길목을 틀어 막으면, 족히 천명을 감당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를 이르는 말이다.
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 再三嚴約.
(이개제장, 물이생위심. 소유위령, 즉당군률, 재삼엄약)
너희 제장은 살 생각을 하지 말라. 군령을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참할 것이다. 두번, 세번 엄히 약조하는 바이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1597년 9월 16일, 일본 수군이 움직였다는 초병의 보고를 받고
출진하여 조선 수군은 명량의 좁은 물길 위에 일자진으로 포진했단다.
명량의 거친 물살은 남쪽에서 서북으로 흐르고..우리 군은 역조류를 견디며,
순조류를 타고 몰려오는 일본 수군을 기다렸지.
전투 직전에서도 일본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보고 아군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들아, 어쩌면 그것은..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앞자리에 선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대단했던 것이지.
초인(超人)적인 용기와 의지라고 밖에는 뭐라고 설명이 안되는 것이야.
일본수군이 압도적인 전력을 믿고 포위진을 형성하며 다가오고..
충무공 이순신 제독도 군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어.
그런데..우리 군 내부의 두려움이, 저하된 사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고,
삼도수군통제사인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탄 대장선이 홀로 수많은 일본군 전함의
공격을 홀로 감당하는데..
나머지 전함도 뒤로 물러나 전투에 나서지 않고 있었단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자면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아주 뒤로 물러나 전투의지를
보이지 않았고..처음 수군에 보임되어 왔고, 애초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그를
신뢰하지 않았으니, 그는 그렇다 치고..
그런데 오랫동안 그를 보좌해온 수군으로 잔뼈가 굵은 명장들..
조방장 백기 배흥립, 녹도만호 송여종, 해남현감 류형의 전함까지 뒤로 물러나 있으니
충무공 이순신 제독도 이를 돌아보고 크게 실망하였지.
대장선이 홀로 앞으로 나아가 버텨내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홀로 그렇게 버틸 수는
없는 법..초요기(招搖旗)를 올려 휘하 장수를 불렀단다.
이때의 일도 난중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영화 명량 속 거제현령 안위
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
안위, 욕사군법호? 여욕사군법호? 도생하소야?
거제현령 안위를 꾸짖은 내용인데..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은 것이냐?
도망한다고 네가 살아날 것 같으냐?
영화 명량 속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
汝爲中軍而遠避不救大將、罪安可逃. 欲爲行刑、則賊勢又急姑令立功.
여위중군이원피불구대장, 죄안가도. 욕위행형, 즉적세우급고령입공.
중위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을 꾸짖은 내용인데..
너는 중군이 되어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피하겠느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의 기세가 급하여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이정도라면..평소의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참했을 사안이다.
어쨌든 뒤늦게 달려온 두 장수를 꾸짖어 전투에 나서게 하고, 다른 전함도 전투에
합류했단다.
거제현령 안위의 함선이 일본수군 3척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대장선이 원거리
포격으로 구원하고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전함이 가세하여 위기를
넘기니..이때쯤부터 이제 물살의 흐름이 바뀌었지.
물살만 바뀐게 아니라 전세의 흐름도 바뀌었단다.
일본 수군이 순조류를 타고 사나운 기세로 기세등등하게 공격해 들어갈 때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탄 대장선 하나를 넘지 못했는데..
이젠 역조류를 만나고 조선 수군이 용기를 얻어 조류를 타고 돌격해 오니,
일본 수군은 한순간에 뒤얽히고 혼란에 빠졌지.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전선은 험한 물살에 통제되지 않고, 좁은 물목에 갇혀
기동은 안되는데 바로 코 앞에 조선 수군 전함이 돌격해오며 포격을 퍼부으니..
일본 전함은 그렇게 깨어지고, 일본 수군은 살상되며 무너졌단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선봉의 구루지마 미치후사 전사, 총사령관인 도도 다카도라 중상,
감독관인 모리 다카미사가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다가 구조되었고..
격침된 것은 약 30척이었지.
일본 수군은 그렇게 황망하게 쫓겨나고..전투가 종료되고, 조선 수군도 전장을 수습하고
명량을 넘어 후방 당사도로 물러나며..명량해전이 마무리 되었다.
손자병법 구지(九地)편은 승패를 가르는 결전을 벌이는 아홉가지 지형을 말하면서
그 지형에 따라 맞는 전술을 구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 구지(九地) 중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죽을 死, 땅地를 쓰는 사지.
심상치 않은 이름..아들아, 너도 충분히 알 것이다.
손자병법 구지편에서 말하는 사지는..
所由入者隘, 所從歸者迂,寡可以擊吾之衆者, 爲圍地.
(소유입자애, 소종귀자우, 과가이격오지중자, 위위지)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돌아올 때는 우회하여야 하고, 소수의 적이 다수의 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땅을 위지(圍地)라 한다.
疾戰則存, 不疾戰則亡者,爲死地(前有高山, 後有大水. 進則不得, 退則有礙)
질전즉존, 부질전즉망자,위사지(전유고산, 후유대수. 진즉부득, 퇴즉유애)
빨리 전투를 끝내면 살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죽는 땅을 사지(死地)라 한다.
앞에는 높은 산, 뒤에는 큰 물이 있어 나아가려 해도 할 수 없고, 물러서는 것도 어려운
땅을 일러 사지(死地)라 한다고 말하고 있지.
圍地則謀(發奇謨也), 死地則戰(殊死戰也). 위지즉모(발기모야)사지즉전(수사전야)
위지에서는 임기응변의 계책으로 속히 포위를 벗어나야 하며
원래 사지에 들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사지에 들었다면 이곳에서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손자병법에서는 뭐라고 했냐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지에서는 싸워라. 죽을 각오로.
그래야 사지를 벗어나 살 길이 있다고 했지.
손자병법 구지편에서는 또 말하고 있다.
圍地, 吾將塞其闕(以一其心也). 死地, 吾將示之以不活(勵士心也).
위지, 오장색기관(이일기심야). 사지, 오장시지이부활(여사심야)
위지(圍地)에서는 장수는 탈출구를 틀어막고 전군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필사적으로
싸우게 해야 하며,
사지(死地)에서는 장수는 결사의 각오로 앞에서 솔선하여 보여 줌으로써 병사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싸워야 한다.
즉, 전장인 명량(鳴梁)이 바로 일본에게는 위지(圍地)이고 우리에게는 사지인 것이며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명량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일본의 공세를 막으며
죽기로 버티고,
또한 죽기로 싸워 살 길을 여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게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명량을 전장으로 고른 이유란다.
그분에게는 이게 너무도 빈약한 전력의 함대, 낮은 사기의 장졸들을 데리고 싸워
이길 수 있는..그분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명량에서 13척의 전함으로 30여 척의 일본 전함을 격침하고, 130여척의 적 함대를
물리친 기적의 승리를 거두고 난 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이날의 승리를 천행(天幸)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는 그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기적의 승리였던 것이지.
명량대첩 축제 전경
패배가 당연하게 보이는 전투에서도 작은 가능성을 키워 결국은 대승을 거두고,
전쟁과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으니..
아들아, 명량대첩(鳴梁大捷),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전투가 아닐까 싶다.
두고 두고, 그 의미를 곱씹어 보고 교훈으로 삼을 전투가 아닌가 한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