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영어교사 영국인 "토마스 에드워드 핼리팩스"(Thomas Edward Hallifax)는
영국 "웨스트베리"(Westbury)출생으로 원래 전신(電信)사업에 종사하던 전문기술자였다.
처음 영국에서 인도로 건너와 전신사업을 시작했고,
그다음 일본으로 와서 6년간 전신사업일을 했다.
한때는 일본에서 선원생활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1879년 일본 도쿄에 정착해 영어교사를 시작했다.
이즈음 일본인 아내를 두고 딸을 하나 두었다.
4년여를 지내던 중 "뮐렌도르프"에게서 조선에 와서 영어교육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조선의 외교와 세관 업무를 맡았던 독일인 외교 고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 1848년∼1901)의 추천을 받아
조선 최초의 관립 영어 교육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의 영어 교사로 1883년 채용됐다.
그러나 1886년 9월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창설되며 "동문학"(同文學)은 문을 닫는다.
1886년 "동문학"이 폐교되자 조선의 초창기 전신(電信)사업에 참여해
조선 정부로부터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품계를 받았다.
그 뒤 1890년에 일본에 건너갔다가 1895년 다시 조선에 돌아와
관립 "한성영어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최근 일본에서 "토마스 에드워드 핼리팩스"(Thomas Edward Hallifax)가
조선에 관한 인상을 기록한 잡지 기고문과 그의 사진이 발견됐다고 한다.
공무원으로 역사를 연구해온 김성수(45·관세청 관세평가분류원 품목분류1과 2팀장)씨는
"핼리팩스"가 일본 체류 중이던 1890년 잡지 "후소노 하나"(扶桑の花)에 발표한
"조선의 사정"(朝鮮の事情)이라는 기고문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핼리팩스"는
"내가 처음 조선에 상륙해 느낀 점은 조선인의 풍속이 기이하다는 것이다"
라며 글을 시작했다.
커다란 자루 같은 버선, 입에 문 긴 담뱃대, 대나무를 쪼갠 살을 엮어 만든 모자,
쌀밥에 찬물을 끼얹어 먹는 식습관 등 모든 게 그에게 낯설었다는 것이다.
그는 기고문 곳곳에서 관리의 부패나 저잣거리의 불결함을 지적하기도 했으나,
조선인의 성품에 대해서는
"내가 6년간 조선에 있는 동안 조선인이 결코 난폭한 행동을 보인 적이 없고,
내가 싫다고 생각하는 일에 빠지게 한 적도 없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글 끝 부분에서도
"민족으로서 아름답고 몸이 강하며 강인한 사람들이다.
지니고 태어난 기질도 솔직하고 온순하며 손님을 접대할 때
진심으로서 친절하게 대한다" 라고 조선인을 칭송했다.
"핼리팩스"는 글에서 당시 조선 전역을 감싸고 있던 외세의 간섭도 지적했다.
"조선은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청나라로부터 정치적 압력을 받아 광산 같은 것도 마음대로 채굴할 수 없다."
"(청, 일이 개입한) 전신선(電信線) 설치는
일반인의 통신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라고 언급하는 등 당시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 침략 야심을 지적했다.
짤막하나마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언급도 있어 눈길을 끈다.
"왕은 용모가 아름답고 총명한 사람이지만,
왕뿐 아니라 왕비도 국정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적어
당시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절대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음을 강조했다.
"핼리팩스"는 1908년 퇴직한 뒤 대한제국 훈(勳) 4등에 서임(敍任)되는가 하면
태극장(太極章) 훈장을 받았고 그 해 11월 24일 세상을 떠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지에 묻혔다.
오른쪽에 있는 "핼리팩스"의 묘비.
왼쪽에는 일본인 부인과의 딸인 "아그네스 플로렌스"(Agnes Florence)의 묘비가 있다.
"아그네스 플로렌스"는 조선에 와서 "헬리펜스"보다 먼저 죽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두 묘비는 모두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아마도 6.25의 상흔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