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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선생님사람들과의 이야기
2015년 2월 7일 토요일
박소정-어제 덴마크에서 삶의 원형을 보았다면 우리 안에도 있다. 우리 안에서 가꾸어가지 않는다면 지식일 뿐이다. 오늘은 그런 삶을 실현하고 실천하는 곳을 만나보겠습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정신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분들을 모시겠다.
신난다-노래(쿰바야)
박두규-마음모으기 잠깐 하고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원주에서 아침 8시부터 서둘러서 네 분이 오셨다. 무위당 만위제 회장님이신 이경국 님 오셨고, 무위당 학교 황도근 교장 선생님, 한알학교 김용우 교장선생님 오셨다. 생명평화결사가 모시고 있는 스승 중에 한분인 목영주 선생님도 오셨다. 네 분이 원주에서 오시면서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각자 무위당을 공부했지만 실제 무위당을 만나보지 못한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책이나 이야기를 통해 알기에, 나름대로 기대와 존경과 이러한 것이 있다. 구체적인 우리 생활에까지 자본이 침투되면서 생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커다란 하나의 해답이 아닌가? 그로부터 답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병국 선생님은 무위당의 제자이시고 함께 일을 하셨고 그분의 삶을 함께 했기에 생생하게 말씀해 주실 것 같다. 황도근 선생님은 무위당의 정신과 사상으로 원주 사회를 엮어내며 원주 공동체의 많은 부분을 이루어주신 분이다. 김용우 선생님은 생명사상과 무위당의 정신을 생명평화 사상과 연계한 이야기를 해주실 것이다.
이경국-내가 수술을 해서 앉지를 못한다. 서서 하겠다. 김민해 목사님 보고 싶어 왔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도법스님을 모시고 계신 분들이 무위당을 60년간 모신 사람을 귀한 시간에 불러주셔 고맙다. 김성순 님을 아기 취급하는 모습을 보니까 생명평화결사가 살아 숨 쉬는 공동체 같다. 나는 강의하는 강사가 아니고 무위당을 모신 삶 속에 여러분 생각의 지표가 되고 운동을 통해 그 양반의 사상과 철학이 여러분이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무위당이 생존해 계신다면 87세다. 그 어른이 돌아가신지 21년이 되었다. 무위당은 28년에 이 세상에 태어나 원주에서 대농의 집안에서 사셨다. 그 당시 원주에서 장일순 선생의 땅을 밟지 않으면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할아버지가 자수성가 하셨는데 그 돈을 거의 희사했다. 원주초등학교가 생길 때 학교 짓는데 어렵다고 하니 희사하고 해방이 된 다음에도 소작한 사람들에게 농사를 다 주고 해방 이후에는 오히려 가난해지셨다. 소작농 했던 사람들이 대농들을 얼마나 많이 고발했나? 공산주의가 되어서도 그 문중에 한 사람도 손가락질 하거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고발하지 않았다. 대농하면서도 좋은 일 하며 산 집안에서 4남 1년의 5남매에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 때 큰 병으로 돌아셨다. 할아버지가 무척 좋아한 아이였다. 죽지 전에 그 아이가 한 말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소원이 있어요. 할아버지 천주교 나가세요. 성당에 나가보니 참 좋아요.”했단다. 할아버지가 약속을 했다. 그때부터 그 집안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마지만 상여가 나가는데 할아버지가 상여가 안 보일 때까지 잘 가라고 절을 했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집안이다.
무위당은 자연스럽게 큰 아들이 되었는데 큰 아들처럼 총명하지는 않았다. 무위당 선생님아래 동생도 총명했고 무이당은 둔했다고 한다. 원주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석차가 중간쯤, 성품은 좋아서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많이 가르쳤다. 무위당 선생님 집안이 대농이니 많은 손님들이 오는데 그 당시 애국지사도 아주 많이 드나드셨다. 유명한 애국지사도 많이들 왔는데 청강 선생님이 무위당 선생님의 붓글씨를 지도해주셨다. 난을 특히 많이 지도해 주셔서 선생님이 붓글씨를 배웠다. 집안이 좋고 경제도 넉넉하니 서울 배제 중고등학교에 갔다. 그리고 서울 공과대학 공업전문대학에 입학했다. 단과 대학을 다니는데 종합대학을 만들자고 미군대위가 서울대 총장으로 왔다. 그때 단과대학에서 주모자로 데모를 했다. 그 양반이 옳은 일에는 늘 앞장을 섰다. 앞장서서 대모하다가 퇴학을 당하고 6개월 지내다가 서울대 물리대학 미학과에 복학했다. 미학교 3학년 때 6.25가 난다. 김지하도 문리대 미학과, 김민기, 유홍준도 미학과다. 6.25때 피난 와서 시골 노인네 집에 숨어있는데 한 사람도 고발 안했다. 원체 덕 있게 집안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공산주의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 한 사람도 고발을 안 해서 자신의 문중이 잘 유지되었다. 그 당시 무위당 선생님머리에 이가 많았다. 그래서 무위당은 머리를 깎았다. 원주는 아침에 아군이 점령하면 밤에는 인민군이 오고 맨날 싸우던 지역이다. 6.25 당시 원주는 아무것도 없었다. 장일순 댁도 산산조각이 났다. 낮에 밖에 나가셨는데 우리 국방군이 보고 “일루 와봐. 모자 벗어봐” 했더니 머리가 까까머리였다. 그 양반은 머리에 이가 많아서 깎았는데 그 당시 인민군들이 머리를 밀고 다녔다. 그래서 그 날만 10명이 거리에서 잡혔다. 그 안에 공산주의자가 있는지도 모르지. 바로 산에 올라가 자기가 죽을 곳을 파라고 했다. 할 수가 없으니 자기 묘를 팠다. 다 파면 묘에 들어가 누워 총에 맞아 죽는 거다. 무위당이 마지막에 죽기 전에 성호를 그었다. 그 모습을 본 장교가 “너 천주교야?” 물었더니 “네!” 대답했다. “올라와.”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죽이고 그 양반은 살았다. 천주교 신자 성호 긋는 바람에 살아서 물자 지고 심부름하고 홍천까지 심부름하면서 고행을 했다. 어느 날 물자 지고 있는데 누가 담배를 주었다. 바로 선생님 집에 하숙하던 국방부 장교였다. 웬일이냐고 물어서 여차 저차 끌려왔다고 하니 이리 저리 알아봐줘서 집으로 올 수 있었다. 6.25 때 영어를 하니 거제도에서 통역을 좀 하고 1955년부터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6.25 이후니까 이북 사람들이 엄청 내려왔다. 학교에 선생으로 들어가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24세에 교장을 했다. 교장을 하면서 육영사업을 하겠다고 하는데 돈이 없었다. 당시에는 재산이 있어서 이것저것 팔고 원주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요즘 한국은행 총재도 대성학원 출신이다.
젊은 나이에 24-25살에 육영사업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28세에 대성학교 초대 이사장을 한다. 얼마나 괄시가 심했는지 ‘국회의원 한번 하자.’했다. 정치적으로 힘이 있으면 무시를 안 하니까. 그래서 4대 때 출마한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니 떨어졌다. 나는 4.19 혁명 때부터 무위당과 인연이 된다, 당시 노동운동의 대부였던 이창복이 내 동기다. 나는 중앙대학교에 다녔는데 그 때 데모하다가 6명이 죽었다. 경찰서, 읍사무소가 다 마비되었었다. 치안을 유지하려면 대학생들이 도와주자. 우리가 도와주자고 무위당을 찾아갔다. 넙죽 절하고 보니 인도의 간디 선생의 이야기를 하면며 치안을 유지해야지 학생들이 폭력을 쓰면 안 된다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1주일, 10일 동안 읍사무소를 지켰다. 그렇게 치안 유지를 돕는 일로 무위당과 인연이 되었다. 무위당은 1960년에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한다. 민주당 공천을 받으면 쉬운데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며 무소속으로 나간다. 나는 무위당이 국회의원 출마할 때 동네 들어가서 “청렴결백한 장일순을 국회로 보내자”고 했다. 그때 무위당 선생님선생에게 반했다. 하루는 “야 경국아, 너 바쁘지 않으면 우리집에 가서 한 달만 유숙하자.”고 해서 나와 김용규가 같이 지냈다. 김용규가 선거 전략을 하고 난는 유세를 했다. 매일 선생님 집에 가서 잤다. 12시까지 일을 보고 선생님 집에 들어갔다.
사모님은 경기여고 나오고 서울사대 1등으로 졸업한 기가 막힌 규수인데 원주로 시집을 오셨다. 상대가 대성학교 이사장이니 나는 선생이나 하면 남편 뒷바라지하면 되겠거니 하고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나 점심 식사를 하고 걸었다.
우리 무위당 선생님이 한족 귀가 어둡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제가 오른쪽 귀가 어두워요. 그러니 이쪽으로 서주세요.”하셨다고 한다. 우리 무위당 선생님이 인물이 좋다. 김목사보다 못하지만. 처음 만났는데 한쪽 귀가 어두운 것을 숨겨도 모자랄 판에 귀가 어둡다고 자기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시집오셨다. 그때 사모님 배가 만삭이었다. 사모님 집에서 자는데 새벽 1시에 가도 2시에 가도 사모님 하고 안자고 우리하고 잤다. “형님 들어가요.” 해도 “손님 있는데 무슨 소리야” 하면서 우리와 같이 잔다. 아침 6시가 되면 그 건너편 방에 부모님 방에 가서 “어머님 기침하셨어요? 내 놓으셔요.”하셨다. 가만 보면 요강이 나온다. 부모님이 요강을 내놓으면 화장실에 가서 비우고 바깥에 있는 수세미로 요강을 닦고 다시 넣어두시더라. 그 모습을 한 달을 봤다. ‘나는 저 양반 평생 믿고 살아야겠다.’
그때부터 나는 그 분 믿고 살았다. 무위당은 지금도 계신다.
5.16 쿠데타가 났다. 박정희도 그 일에 관여가 되어있다. 군대 안에서 있던 것을 넘겨주고 자기만 살았잖나? 다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 연장에 여순사건이 있다. 그런데 자기가 정권을 잡았다고 다 잡아들였다. 북진통일 말고 평화통일 하자는 말밖에 안 했다. 서대문 교도소에서 군사재판으로 8년을 받았다. 아내는 서울에서 3년간 직살 나게 고생했다. 나는 무위당 선생님국회의원 선거 같이 했다고 잡았다. 그러면서 군대 가면 놔준다고 해서 군대를 갔다. 어느 날 헌병이 와서 하루 밤 재우고 중앙정보국을 갔다. 1주일간 고문을 받았다. 나중에 “장일순 알아?”해서 “내 스승인데요.”했더니 “스승은 뭔 스승이야?”하더라. 그때 군대에 있으니 어딘가 있으시겠지 했다. 10일을 맞다보니 나도 죽게 됐다. 폐를 검사해보니 폐가 나쁘다고 했다. 육군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받고 내과과장이 아는 사람이라서 6개월 만에 병가제대를 했다. 그러고 가서 선생님은 어디계신가 봤더니 춘천교도소에 계셨다. 무위당이 감옥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포도농사를 지었다. 선생님 나온 다음 집 앞에 파출소를 멋지게 짓어놓고 어느 놈이 오는지를 감시했다. 무위당은 빵이나 고구마 같은 것을 사서 파출소에 가져다주었다. 인간적으로 그렇게 겸손했다. 나는 선생님 모시면서 많이 보았다. 우선 그 어른이 사람을 대접할지 알았다. 교도소에 계시면서도 그랬지만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가운데 늘 사람을 겸손하게 모셔라. 행동으로 보여준 가운데 우리가 감화했다. 그 어른이 정치 안전법에 걸려 다른 일은 못하고 붓글씨 쓰면서 자기 수행을 하셨다. 대작들이 많이 나왔다. 선생님 난은 웃는 난이 많다. 서양 사람이 와서 보면 그림이 이상하다고 한다. 그러면 김용우 선생님이 한국의 피카소라고 한다.
이소선 여사, 박종철 어머니가 기금 조성을 하려고 할 때 선생님을 찾아온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아.. 그러세요” 하고 난을 그린다. 선생님이 줄 때 “이소선 여사, 아무리 못 받아도 30만원 넘게 받아야 돼요” 그러면 인사동에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콧방귀를 끼었는데 작품이 걸리기만 하면 잘 팔렸다고 한다. 그 사람 마음에 담긴 철학이 작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남으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주셨다. 한 살림 운동 힘들 때도 인사동에서 작품전 한번 하자고 하면 한꺼번에 4-5000만원을 벌었다. 그렇게 한 살림에도 많이 보태주었다. 1969년에 원주에 박재일이 왔다. 김지하는 목포중학교 입학했다가 원주로 왔을 때다. 무위당 선생님아버지가 양반이다. 재일이는 6.3 사태 주모자로 감옥에서 살다 나오니 취직할 학교가 없고해서, 그때 원주로 왔다.
나는 아무래도 선생님 뒤에서 뒷돈 댈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돈을 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경상도 촌놈을 데리고 왔는데 박재일이었다. 둘이 소주 4홉들이 3병을 먹어도 끄떡없었다. 선생님이 “재일이하고 병국이하고 술 대작을 해도 끄떡없을 거다.”하셨다. 둘이 6병을 마셨다.
72년도에 한강 유역에 수해가 났다. 그 때는 이미 지학순 주교님이 원주에 오신 후이다. 지학순 주교님이 천주교 신자 중에 사람을 찾으니 사람이 없더란다. 개신교는 넥타이 맨 사람이 많은데 천주교는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장일순 밖에 없으니 지주교가 ‘딱 이 사람이다’ 했다. 지학순 48세, 무위당은 38세였다. 지학순 주교가 “청년들 교육을 시켜라.”했더니 장일순이 “주교님 성당 담을 좀 헐으세요. 담이 없어야 사람이 다니지요.”했단다. 그때 담을 다 헐었다.
지주교님이 개신교에 가서 설교도 많이 했다. 70년대 삥당 사건이 있었다. 월급을 너무 적게 받은 버스 차장이 요금에서 300원씩 빼내서 동생들 학자금을 댔다. 그러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개신교 목사님을 찾아가 말을 했는데 “원주의 지학순 주교에게 가라.”고 했다. 그렇게 원주에 와서 지학순 주교를 만났다. 원주에서는 아주 심각했다. 무위당과 지학순은 논의를 했다. “이 삥땅이 죄냐? 아니냐?” 장일순이 말했다.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 삥땅 안하면 살 수 없는데 죄라고 하면 안 되지요.”
지학순 주교님이 기자들 앞에서 “삥땅은 죄가 아닙니다.”하고 말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렸다. “삥땅이 왜 죄가 아니냐? 그 버스 사장이 와서 이야기해야 한다. 왜 저임금을 주냐? 최저 생계비가 있는데 먹고는 살아야 한다. 이것은 서울시도 책임이고 대통령도 책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듬해 지주교가 무위당, 김지하와 함께 전력적인 일을 많이 했다. 지금은 김지하가 병이 들었다. 7-80년대 옥살이를 했는데 지금은 마누라 말만 듣고 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박근혜가 연임을 해야 한다고 떠들었다는데 미친거다.
그때 사람들이 다 모였다. 재일이는 6.3 사태 때 데모를 해봐서 75년에 데모 준비할 때 나는 원 교구 청년회장 다시 말하면 행동 대장이었다. 그러니까 밤에는 몰래 모의를 했다. 기도회를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들은 신부나 주교가 오라고 하면 온다. 부정부패 규탄하고 박정희는 물러나야 한다고 성명서를 냈다. 그것이 71년도다. 나는 행동 대장이니까 앞으로 나가야 한다. 신부님들이 덜덜 떠는데 “나가요!”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데모를 했다. 신자들 나가고. 그것을 3일 동안 했다. 지주교 님이 버티고 있고. 박정희가 그랬다더라. “삥땅 사건을 가만두었더니 주교라는 놈이 까분다”고. 천주교에는 보수가 많다. 김수환 추기경도 그때 “아, 왜 지주교가 저걸 해?”했었다. 요즘은 지주교는 없고 모든 영광은 김수환 추기경에게 갔다. 나는 우리 주교님이 지도자라고 본다. 지도자의 배경에 늘 장일순이 주교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애쓰셨다. 예수 믿는 것은 생활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활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운동이라고 말씀해주셨지요. 박수 한번 쳐줘요.
여기 황교수나 김용우 교장도 못들은 이야기가 많다. 지주교가 독일에서 3억 5천만 원을 가지고 왔다. 그때 독일에서 지학순 주교에 대한 이미지가 높았다. 돈을 얻으러 갔는데 3억5천이 모였다. 당시 담양군 예산이 3억 5천이 안되었다.
그때 사회개발 위원회 집행위원장 맡으면서 그 분들에게 물었다. 당시에는 협동조합을 몰랐다. “협동조합 식으로 합시다. 급한 일부터 집 쓰러진 것은 고치고 일 속에서 돈을 주더라도 2단계, 3단계 사업은 협동조합으로 합시다. 그리고 다 암송아지 한 마리 씩 사줍시다.”하셨다. 그 일을 박재일 회장이 했다. 농민들 속에서 16년 동안 가톨릭 농민회 회장을 하고 회의 때마다 “이제는 먹을거리를 유기농으로 생산해야 한다. 이 우주만물 속의 땅을 살려야 한다. 땅을 안 살리면 정치가 산다해도 의미가 없다. 이 땅을 살려야지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주겠나?” 이것이 생명운동의 시작이다. 땅을 알칼리성으로 바꾸려면 비료, 농약 주지 말고 먹을거리를 유기농으로 생산해야 한다. 그때 눈을 뜨게 해주었다.
나는 건축자재를 판매해서 돈을 벌었다. 돈을 벌어서 선생님께 용돈을 드렸다.
72년 4월 어느 날 교구청에서 나를 오라고 했다. 장일순 선생의 종이라서 무위당을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전에는 개신교 신자였다. 선생님에게 말도 안하고 천주교에 입문했다.
나는 65년도에 장가갈 때도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도 천주교 신자이신 무위당이 주례를 섰다. 그때 선생님의 나이가 38세였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다.
교구청에 갔는데 지학순 주교하고 선생님하고 두 분이 계셨다.
“병국아 너 사람 낚는 어부 한번 해볼래?” “사람 낚는 어부요? 그건 베드로가 했잖아요?”했더니 웃으면서 “너 가게 접을 수 있냐?” “아.. 안돼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가게를 접어라. 접어. 석 달 내로 접어.” 주교님이 계시는데 선생님이 접으라니까 “예”하고 나왔다.
광산에서 광부들을 모시고 일하라는 거였다. 가게 정리하고 마누라하고 갈등이 많았다. 그때 박재일은 딸이 둘이고 나는 하나였다. 나중에 보니 박재일은 딸이 다섯이고 7-8년 만에 광산일 마무리 하는데 43때에 아들을 낳았다. 우리 아들의 대부가 박재일이다. 이런 관계로 연결되어있다. 일하는데 나는 광산에 혼자 갔다. 광산에 가서 협동조합을 하는데 광부들 모시고 해라 하셨다. 솔직하게 그대 우리 강원도에 석탄 매장량이 전국의 3분의 2가 넘었다. 광부가 35만 명이 넘었다. 천안, 장성 이쪽을 다니려면 길이 막혔다. 천안을 가려면 영주로 돌아서 6시간 기차를 타고 갔다.
주교님이 조금씩 동냥을 주고 “요걸 밑천으로 해서 신용협동조합을 지도해라.”하셨다. 내가 신협을 알아야지. 당시 무위당이 신용협동조합 일을 시작했다. 강연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어서 그걸 가지고 광산으로 갔다.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곳이다. 동해보다 500미터 밑인 곳이다. 승강기 타고 내려가면 이미 공기가 없다. 바깥에서 “쉭~” 소리가 나면 그게 공기다. 그게 없으면 죽는다. 200미터 300미터 내려간다. 7.8.9명이 한 조로 일한다. 이 겨울에도 그곳에 들어가면 45도다. 구경만 해도 땀이 난다. 거기서 신자를 만났다. “여기에 웬일이요?”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생각해요?” “계시지요. 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아멘..”했다.
그런 것이 막장이야. 작업복의 땀을 네 번 다섯 번 짜야 밖으로 나온다. 농사일은 아무리 일해도 3천 칼로리가 소모되지 않는데 광부는 5천 칼로리가 넘는다. 그렇게 일하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그 사람들이 막장에서 눈과 이만 하얗게 드러내고 나오면 그들을 붙들고 신용협동조합 말하면 미친놈이라고 한다. 저녁에 따로 만나 소주 한잔 했다. 광부들은 돼지고기만 먹는다. 광부들 처음에는 마음을 안준다. 경북 봉화부터 전라도까지 한이 맺혀서 온 사람이 많다. 돼지고기 한번 사주고 두 번 사주고. 농촌은 조직이 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되었다.
3년이 지나고 선생님이 “뜸들이냐?”하시니 “아직도 뜸을 들이고 있어요” 했다. 대신 아침에도 소주, 점신에도 소주, 저녁에도 소주... 다 내가 샀다. 그러면서 세뇌하고 조직해서 시작이 됐다. 동해탄광 신용조합이 오픈되고 강원산업이 되고 연결이 되다보니 15개 신용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광부들은 장화 한 켤레를 못산다. 그곳에서는 장화 한 켤레가 3만원인데, 서울에 가면 1만 원이다. 서울로 가서 도매로 한 차를 실었다. 그러면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난리가 난다. 그것을 1만원씩 가져다 줬다. 겨울에는 배추를 실어 날랐다. 한번에 50차, 60차를 실어서 가지고 왔다. 가지고 나오면 해발 600미터. 여기보다 기온이 10도가 차이가 난다. 배추가 전부 언다. 언 것은 지도부가 나눠 갖고 멀쩡한 것은 조합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노동운동도 협동운동도 잘 되었다. 광부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국회에 무소속으로 당선이 됐었다. 그 놈이 제일 먼저 선생님한테 찾아와 큰 절을 했다. 그러면서 이 운동을 조직화해나갔다.
선생님의 장점은 사람을 적재적소에 심는 것이다. 박재일은 유기농생명운동을 하면서 원주서 84년에 소비자 협동조합을 했다. 배추를 1500원씩 계약재배를 했는데 땅이 산성화되어서 배추가 아주 작았다. 시중은 큰 것이 5백 원인데... 작은 놈들을 50포기, 60포기 씩 쟁여놓으니 마누라들이 난리가 났다. “여보. 이것이 유기농 생산이야.”하면 “유기농이라도 먹을 수가 있어야지.” 3년 정도 지나니 배추 안이 차더라. 한 살림이 그렇게 어려웠다. 한 살림 거저된 것이 아니다.
“재일아 원주가 장터가 너무 작다. 서울 엄마들은 눈으로 먹지 입으로 먹냐? 사과도 빛이 나야 먹고 배도 빛이 나야 먹는다. 농약 친지도 모르고. 그 엄마들의 눈을 뜨게 해주려면 생산자의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한다.”
제일 먼저 생산자 의식을 바꾸었다. 생산자가 의식을 안 바꾸면 운동이 안 된다. 생산자가 먼저이고 소비자가 나중이다. 한살림 조합원이 50만 명이다. 박재일을 통해서 했기 때문이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심자. 이창복은 노동운동을 시작해라. 노동운동에서 이창복은 대부다. 90년대 들어와 정치를 시작했다.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김대중, 노무현 때에 사회운동을 한 사람들이 다 정치로 들어갔다. 그래서 망하게 됐다. 정치하는 놈들은 정치를 하고 사회 운동을 하는 놈들은 사회 저변을 지켜야 하는데... 이창복이 4년 국회운동 하다고 나오더니 건달이 됐다. 가톨릭 농민회 사무국장 하던 이길재도 건달이 됐다.
운동을 끌고 가던 지도자들이 지키고 해야지. 크리스찬 아카데미 지도자였던 한명숙, 이우재 다 정치하고 건달이 됐다. 이것이 우리가 자화자찬 하던 민중의 지도자들이 정치문화 때문에 깨졌다.
우리는 새로 시작해야한다. 정신세계의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을 섬기는 일이다. 신협을 하다 보니 나를 불러서 “강원도 신협 회장 출마해. 니가 가서 뛰어.” “예.”
강원도를 다니면서 교육했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이사가 만원씩 내서 자장면 사먹였다. 그러면서 신협운동을 했다. 그 뒤 사무총장을 맡아달라고 해서 무위당에게 물었더니 해라고 했다. 45세에 사무총장을 8년 했다. 지금은 신협이 돈장사가 됐다. 전부 은행화되었다. 이제 원위치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순천의 밀알신협이 아직도 있다. 전국에 1천개 정도 된다. 신협이 가진 돈이 60조다. 새마을 금고는 120조다. 3천개다. 박정희가 신협 잘하는 것을 보고 새마을 금고를 시작한 것이다. 새마을금고는 행정안전부가 감독한다. 우리는 금감원에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관리를 내무부에서 하는 것이 어디 있어? 그러면서 박정희 때 새마을금고가 하게했다.
나도 정치의 유혹을 받았지만 “야 이놈의 새끼야. 사무총장이나 제대로 해.”하셔서 “알았습니다. 선생님 약주한잔 해요.”하고 이해시켰다. 우리가 미국의 프로젝트를 받아서 연변에 신협을 만들었다. 조선족과 신용조합을 만드는데 다행히 중국정부가 인정을 해주었다. 대전 연수원에 20명 단위로 60명을 모셨다. 중국에 정상화 안 될 때라 돈이 많이 들었다. 하루는 강의를 갔더니 하얀 넥타이를 두른 남자 2명이 앉아있었다. 강의 마치고 나니 “이북서 왔소.”하더라. 조평준 지도부장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때가 김일성 죽은 다음이다. “김정일 동지가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을 배우려고 합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백성들이 돈을 모릅니다. 개방을 준비해야 하는데 남한의 신협을 배워서 돈벌이를 하려고 합니다. 저하고 1주일만 평양을 다녀오시면 어떨까요?”하더라. 솔직하게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위당에게 시외전화를 했다. “다녀올까요?” 무위당이 “아직 준비가 안됐다. 허락하면 제 3세계에서 만나는 것으로 하고 지금은 안 된다.” 셋이 저녁에 술을 먹는데 한 놈은 표준말을 쓰고 한 놈은 평안도 말을 해. 한 놈은 덴마크에서 공부를 했다더라. 아주 똑똑한 놈들이 있다. 그놈하고 사진을 찍고 중앙정보국에 전화를 해서 “만나게 허락을 해다오.”했다. 현재 연변에 6개가 만들어지고 있다. 남북이 통일 될 때 제일 먼저 들어갈 것이 신용조합이다.
90년도에 독일이 통일되고 가보았다. 전체 독일의 23%가 신용협동조합이다. 그 밑바닥에 민중의 운동이 갈려있다. 돈도 있어야 한다. 제일 먼저 통일 된 다음에 교육을 하는 것을 봤다. 통일 되면 앞으로 가야한다.
마무리를 하겠다. 도법스님의 사상이 뭔가? 영호남의 응어리를 풀고 정치, 문화, 사회, 보수, 진보가 하나가 되고 민족의 우애로 사상을 심자는 것 아닌가?
박맹수 교수가 현장을 알고 이론을 안다. 박맹수 만한 사람이 없다. 당시 마누라가 원주에서 선생을 하고 있어서 원주를 드나들었다. 무위당이 동학을 공부해서 이 길로만 가라고 과제를 주었다. 박맹수는 지금 동학의 대가다. 민족의 사상으로 접목할 뜻과 마음이 통일된 사상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운동은 조직이 되어야 한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도법스님 모시고 해왔는데 이제는 그것을 확대해서 꿰어서 가는 운동가가 되어야 현장 중심의 일을 해 갈 수 있다. 황도근이 무위당 학교 교장으로 잘하고 있는데 금년에 무위당 학교가 부산, 광주에 세워질 것 같다. 원주에 작년에 2천명이 왔다가 갔다. 신용운동도 의식을 바꾸어 가고 있다. 뭉쳐야 한다. 무위당께서 “박정희가 30년을 독재하면 60년에서 100년 가야 민주주의가 된다”고 했다. 지금 박근혜는 박정희 보다 더한다. 계속 이현주 목사, 김민해 목사와 같이 실천에 옮기는 지도자가 있을 때, 조직하는 지도자가 있을 때 무위당의 철학 사상을 엮어가는 일을 여러분들이 실천에 옮기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박두규-말씀을 생생하게 해주셔서 영화 한편을 보고난 느낌이다. 무위당 선생님의 사상과 철학으로 접했는데 정말 그러한 것들이 생활과 삶 속에 녹아들면서 사람들과 교감하면서 사상과 철학을 펼쳐간 것이구나 싶다. 원주, 무위당의 삶에 그대로 녹아든 것이 감동을 주고 계속 바라보게 하는 이유인 것 같다. 듣고 나서 질문을 메모해 주시라.
목영주-협동조합의 3대 지표가 있다. 우리가 흔히 신협을 경제운동으로 생각하는데 교육운동으로 3대 지표를 가지고 있다. 나도 관심이 있어서 참여하다가 영향을 받았다. 함석헌 선생님과 인연이 있었다가 무위당을 만나서 특별히 격려해 주었다. 강릉에서 책상 두 개 놓고 한 살림, 우리밀 살 리가 생명의 숲, 생명이 사는 세상을 만들었다. 최근에 하나씩 놓고 또 하나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상국 대표가 한 번은 한과가 전국에 공동체 방법으로 살려보자고 해서 이제야 가능해서 만든 것이다.
박두규- 두 번째 이야기를 모시겠다. 원주 지역 공동체의 전체적으로 연결된 그림이나 지역 공동체 운동이라고 하는 그런 분들이 어떤 힘들이 무위당과 연계되어서 지역 공동체가 되는지 지금 전국적으로 협동조합이 진행되면서 원주를 바라보고 있다. 그쪽 사정을 들려주시면 좋겠다.
황도근-이경국 선생님 노래 한번 들어보시죠?
이경국-무위당은 두 곡 밖에 모른다. ‘검은 장갑 낀 손’과 ‘아침이슬’이다. 사모님이 평화 시장에 가서 시골에서 온 쳐녀들이 바느질 하면 실밥 뽑는 일을 했다. 거기서 돈 몇 푼 받은 것으로 교도소 수발을 들었다. 선생님은 약주만 드시면 그 노래를 불렀다. 면회하고 돌아갈 때 나한테 시집온 마누라가 그렇게 불쌍해 보였다. 서울 살다가 경기여고 나와서 좋은 데 시집온다고 왔는데... 사모님 생각하면서 부른 노래다. 또 하나는 ‘아침이슬’이다. 김민기는 선생님의 아들이다.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부른 노래가 ‘아침이슬’이었다. 그 노래를 좋아하셨다. 무슨 일을 하든지 끝에는 ‘아침 이슬’을 불렀다.
함께-(아침이슬 부르다.) 긴 밤 지새우며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고운 아침 이슬처럼~~
황도근-나는 이경국 회장임이 운동하던 시절, 내가 원주를 처음 갔을 때 원주를 잘 몰랐다. 나는 의정부에서 태어난 거의 서울 사람이다. 내가 연애를 했는데 그 사람이 원주 사람이라 알게 되었다. 89년에 원주에 가서 정착하는데 무위당 선생님집 앞에 살았다. 그곳이 나의 처갓집이다. 나는 원주에 있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자석, 쇠붙이가 전공이다. 철썩 철썩 붙는 자석 말이다. 포항제철에 가기로 했는데 상지대에서 연락이 왔다. 그날도 기억이 나는데 그 분이 면담을 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무위당을 몰랐다. 내 전공이 물리학이다. 집에 들어와서 포항을 가고 싶은데 장인어른이 보자마자 “같이 살 수 있냐?”고 물었다. 아내가 대성고 교사인데 그 당시에는 포항에서 원주를 가려면 6시간 반이 걸렸다. 89년대에 둥지를 틀었다. 사실 나를 더 소개하면 무위당의 조카사위다. 그 당시 집이 없었고 학교가 시끄러울 때 무위당 선생님 집에 가면 조카사위 왔다고 대뜸 담배를 주셨다. 몸을 돌려서 피우니까 “왜 그렇게 피우냐?”하셨다. 그 당시에 그렇게 앉아서 서너 시간을 이야기 하셨다. 당시에는 내가 그 정도 현실을 겪지 않았고 해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선생님이 하셨던 이야기는 기억난다. 혹시 상지대 김문기를 아시나? 그때 김문기 씨에게 가서 석고대죄하라고 하셨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때문에 도와달라고 하는데 되려 그분에게 석고대죄를 하라고 하니 깜짝 놀랐다. 아직도 무위당 선생님이 김문기 씨와 같은 편인지 아는 사람들이 있다. 당시 참 다르셨다. 80년도에 전두환을 사랑하라는 말은 듣기 어려운 말이다. 한 때는 저 분이 변했다. 개량주의자라는 말을 들었다.
당신이 감옥을 가셨는데 감옥에 동지가 같이 있었다고 한다. 동지와 이야기 하는데 덜커덩 소리가 나더니 잡범이 들어왔다고 한다. 옆에 있던 동지가 간수를 불렀다. “나는 정치범인데 왜 잡법을 넣었냐”고 했단다. 선생님은 “니가 잡범과 다를 것이 뭐가 있냐?”고 꾸짖으셨단다. 선생님이 계속 지적하는 것이 있는데 운동을 한다거나 자기 주장을 심하게 하는 사람의 문제는 피아를 구분한다는 이야기다. 상대에게 다가가는 연습을 많이 하라는 이야기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무위당 선생님은 자기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 상대에게 다가가는 연습을 하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몰랐다. 싸워서 이기는 생각만 했다. 89년에 내가 들어간 다음 한 살림 이야기 하셨다. 나는 그 당시 멀찌감치 있었다. 내 전공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93년도에 지학순 주교가 돌아가셨다. 지학순 주교도 잘 몰랐다. 94년도에 무위당 선생님도 돌아가셨다. 근현대사에서 빛났던 두 분이 돌아가시고 원주가 잠이 들었다. 93년도 94년도가 되고 나더니 1세대 어른들이 원주를 떠나셨다. 한 살림 운동도 서울로 갔다. 원주는 그 두 분이 떠난 공백 기간이 길었다. 나는 어르신들한테 사랑을 받았다. 원주에 남아계신 1세대 어르신들이 언제든지 따듯하게 해주었다. 원주의 공동체 운동이 정착하지 못하고 정지되었다. 그 당시 원주에 신협이 15개가 될 정도로 지역 공동체의 돈이 남아있었다. 그 후 IMF 때 많아 나가버렸다. 2000년 내가 미국에 다녀오고 나서 김용우 선생 등이 이런 생각을 이야기 했다. 원주는 서울과 가까워서 모든 동력을 서울에 뺏길 가능성이 높다. “야, 우리가 원주에서 어르신들이 했던 운동을 다시 한 번 하면 안될까?” 그렇게 꿈꾸었다. 무위당 선생님은 자신을 기념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무위당 선생님의 1주기에 참석했더니 50-60분 모였는데 그냥 헤어졌다. 그 다음해 모이고, 또 그 다음해 모이는데 특이한 것이 있었다. 숫자가 줄지 않았다. 5주기, 6주기 지나면서 사람들이 늘어나더라. 무위당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위당이 남긴 한 말씀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 한가마니 가져다 준 그 행위 대문에 사람들 마음에 남은 거다. 그 지역에 합기도 도장을 했던 관장이 있었다. 그 분이 너무 가난해서 쓰러져 가는 집에 살았다.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누군가 무위당에게 찾아가면 도움이 될 거라고 해서 술 먹고 찾아가 절을 하고 난 후 “저 좀 먹고 살게 해주세요.” 하니까 무위당이 “무산 수로?” 합기도 도장을 한다고 하는데 살기 어렵다고 하니 위치가 어디냐고 묻고 돌려보냈다. 그 분이 어떻게 하신지 아나? 그분은 활동적이지 못해서 농사도 하다가 망하셨다. 그런 선생님이 합기도 도장을 찾아가 합기도 도복을 입고 그냥 앉아계셨다. 제자들이 그 분을 찾아 그 도장으로 모여들었다. 제자들이 오면 “도복 입어”하시니 제자들이 다 도복을 입고 있었다.
경국-저도 입었어요. 돈 내고.
황-무위당이 사람을 그렇게 끌어 모아서 그 도장이 살았다. 그리고 나중에 더 큰 곳으로 옮겼다. 나도 선생이지만 입으로 떠들기만 한다. 사람이 똥통에 빠지면 밖에서 “야, 나와!” 할 것이 아니라 같이 똥통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같이 한다는 거다. 그 옆으로 다가가서. 그렇게 합기도 도장이 먹고 살게 되었다. 나도 지난 시간을 느껴보면 기억에 남는 세 사람 중 한 분이다. 저희 어머니, 저희 어머니 온전히 저와 함께 하셨다. 그 다음이 무위당 선생님이시다. 지나고 나니까 그립고 생각이 난다. 그리고 상지대의 김찬 총장이 있다. 상지대 김문기 씨가 나가고 그 후에 오신 분인데 점심 때는 꼭 학생 식당에 가서 학생들하고 밥을 먹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교수실 연구실에 찾아와 “차 한 잔 주세요.” 하고 들어갔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절실한 것은 자기 마음을 닦아줄 사람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돌아가신 다음에 기억에 남는 사람은 자기에게 무조건 잘 해 준 사람이다. 무위당 선생님이 그랬다.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 다가간다. 강한 사람에게 강하고 약한 분에게 다가간다. 무위당 선생님이 철저하게 내 이름으로 무얼하지 말라는 말 때문에 아무 것도 못했다. 나중에 너무 고민이 되어서 이현주 목사에게 물었더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너를 내세우기 위해 하지 말라는 거라고 하시더라. 당연한 말이지만 나무가 크다가 사과가 열린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어찌되었건 7주기 때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통신하면서 연락한 것이 첫 번째 모임이었다. 십시일반을 해서 들어온 만큼 일을 했다. 돈 없으면 안하고 있으면 하고. 2000년 7주기 때 소식지 내고 사회적 일자리 하는 젊은 그룹들이 어르신들을 이어받아 뭔가 해보자고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자본이 우리를 이렇게 덮칠지 몰랐다. 서울에 올라가 보니까 서울 집값을 따라갈 수가 없다. 대학교수가 두 부류가 있었다. 한 교수는 서울에 집을 두고 연구실에 간다. 한 사람은 애들 가르치려고 다 내려갔다. 한 사람은 강남에서 출퇴근하고 살다보니 재산이 몇 배로 늘고, 지방에 내려간 교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도 집을 구할 수가 없다. 돈은 생각보다 무섭다. 그럴 때 자괴감이 든다. 당시 젊은 그룹들이 돈으로 승부 안 나지만 원주의 자부심을 되찾자는 마음이었다. 그 당시 한살림은 계속 RKH 있었는데 한살림 생협이 계속되고 있었다. 원주 생협,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생협도 있었지만 지역에서 존재를 몰랐다.
밝음 신협은 무위당 선생님이 만들었다. 지학순 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도 다녀오고 첫 번째로 만든 협동조합이 의료 생협이다. 1차 협동조합은 먹을거리 한 살림이다. 2차 협동조합의 목표는 한실림처럼 조합원이 50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원주 사람들이 공동체 이루며 잘 사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것은 자기를 칭찬할 사람 10명 만 있으면 된다. 협동조합을 하는 이유는 지역 공동체를 잘 하는 것이다. 순천 사람은 순천만 걱정해도 된다. 원주 지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자 했다. 협동조합과 협동조합이 힘을 합쳐서 의료생협을 만든다. 협동조합끼리 연결했다. 노인 협동조합도 만들었다. 노인들끼리 모여서 놀아야 할 것 아닌가. 문화협동조합도 했다. 사실은 협동조합은 힘들다. 돈이 안 되는 것은 다 망한다. 어린 아이들 유치원에서 모여서 하는 협동조합을 하고 대학 생협을 만들고 계속 협동조합을 만들어봤다. 그 당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시도해 보자고 했다.
가장 큰 일이 있었다. 무위당 선생님이 추구한 것이 뭐였을까 하는 갈망이 있었다. 서울 올라가 출세하기도 틀렸고 이것저것 해보았다. 2001년부터 시작한 일이 13년이 되었다. 원주 협동조합 협의회를 만들어서 지금 20여개의 단체가 있다.
거기만이 아니다. 의사가 한분 있는데 그분은 무위당 선생님을 모른다. 그 분이 원주에 오자마자 노숙하는 사람들만 모아다가 교화도 시키고 사회사업을 많이 했다. 무위당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협동조합 식으로 바꿨다. 우리나라 복지 예산이 300조가 넘는다. 간접비까지 합하면 140조인데도 복지가 모자란다. 나누어주는 복지로는 안 된다. 노숙자, 알콜중독자들이 급할 때 돈이 필요하다. 그 분들에게 돈을 대주려고 후원자들 돈을 빌려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래가지고 돈을 꿔준다. 노숙자들이 꿔 가면 회수되는 돈이 얼마일 것 같은가? 95%다. 생각보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 안 떼어 먹는다. 진정한 복지는 교육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을 바꾸어주는 것이다. 그냥 나누어 주면 술 먹고 써버린다. 가브렐라 수녀님이 “협동은 교육이다”는 말을 했다. 살아가는 가치관이 같지 않으면 언제든지 헤어진다. 우리가 원주 공동체 하면서 어려웠던 것은 갈등이다. 협동조합 하면 무지 많이 싸운다. 협동조합을 하는 사람들은 다들 기질이 있다. 자존심이 강하고 기질이 강하다. 그래서 협동이 잘 안 된다. 여성들이 하는 협동조합은 한 번 싸우면 다시 안 본다. 실제로 협동조합 하다 깨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명분은 좋지만 같이 어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은 헤어지지 않기 운동이다. 원주가 엄청나게 많은 갈등이 있다. 원주 생협이 갈라지고 생산자와 소비자도 갈라진다. 사람들의 갈등이 생긴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뭔가? 어떤 분들은 협동조합은 ‘토란까기 같다’고 말한다. 토란은 수저로 까면 안 된다. 양재기로 흔들어야 한다. 서로를 비벼서 상대방의 속살이 나오게 해야 한다. 나도 용우 씨랑 7년을 싸웠다. 원주에 가서 계속 싸움이 일어나는데 어르신들이 큰 힘이 되었다. 어르신들은 그냥 들어준다. 공동체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들어주는 것이다. 연결 시켜주는 사람이 중요하다. 원주 공동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어른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막 싸우다가도 어르신에게 눈치가 보이니 중지한다.
협동조합은 실제로 논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른이나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유니언 뱅크하던 사람들이 왔다. 무위당 선생님과 지학순 주교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네도 신협을 했는데 망한 신협은 일만 열심히 하는 곳이고 살아남은 곳은 정신적 지도자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대안 운동도 중요한데 정신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으면 오래 못 간다. 지학순 주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었다. 텔레비전한테 맨날 교육을 받는다. 자본주의는 못 당한다. 계속 주입시킨다. 거기에 배겨낼 재간이 없다. 무위당 선생님과 지학순 주교는 끊임없이 교육하고 생각이 바뀌면 싸우면서도 만난다.
당시 지학순 주교가 어딘가에서 교육을 하면 항상 나와 계셨다고 한다. 원주가 협동조합의 고향이라고 전국에서 찾아온다. 우리가 이것저것 해보았지만 실패한 것이 많다. 그래도 기분 좋은 것은 무위당 학교를 하는데 30대 들이 만들어내는 협동조합이 있다. 한림대 언어치료사들인데 착복이 심하다. 졸업해서 병원에 취직해서 환자를 보면 건 당 4만원을 받는다. 그 중 2만원 받고 센터에서 2만원을 떼어간다. 그 사람에게 월급 주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만큼 만 준다. 젊은 애들한테 착복이 너무 심하다. 그 친구들 스스로 노예 생활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6명이 모여서 협동조합을 만들고 직접 선전을 했다. 지역에서도 계속 떠들어주면서 홍보를 했다. 지금은 당당하게 돈을 벌고 있다. 무위당 선생님이 합기도 도장에서 한 것처럼 50대 권력자들이 그렇게 해주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생겨난다.
원주가 다른 것은 몰라도 같이 할 수 있는 선배, 후배들이 있어서 좋다. 공동체를 하다 보니 서울에서 하는 것이 잘 안 들린다. 원주 걱정하는 데도 바쁘다. 그러다 보니 젊은 그룹, 중간 그룹, 1세대 어른들이 생긴다. 이것은 꼭 필요한데 어떤 형태든지 스승이 필요하다. 그에 관련해 공부를 하고 돌아보는 것이 없으면 아무리 떠들어도 부동산으로 뛰어간다. 논리와 방법은 별로 의미가 없다.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철저하게 운동 속에서 살아 온 어른들이 원주의 축복이다. 그 당시 이경국 회장님은 바로 국회의원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스승님 말씀 하나로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1세대 어른들의 특성은 풍족하지 않은데 전화하면 바로 오고 함께 하는 것이다. 정말 멋지다. 나도 거기에 쫒아가고 싶다. 나는 교수라 먹고사는데 문제없지만 소통할 데가 없다. 다들 프로젝트 따는데 바쁘다. 하루 이틀 교육 시키는 것이 아니어서 돈이 무섭다. 현장에서 일하는 실무자만 300여명이다. 조합원 숫자가 1만 명이다. 이제 지방자치 선거 대비하면서 정치가도 낄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간단하다. 거대한 조직은 위험하다. 삼성? 앞으로는 모른다. 내가 2000년에 미국에 나가서 거대한 쇼핑몰에 간 적이 있다. 거기에 보면 하이마트 같은 곳이 있다. 전 세계 전자제품이 다 있다. 소니, 카시오, 필립스, 삼성이 있었을까? 없었다. 흑인들이 가는 종합 매장 같은 곳에 금성, 대우, 현대가 있었다. 잡화상처럼 있는 곳 돌아서 끝에 있었다. 그런데 2011년에 삼성의 총 매출액, 순 이익을 일본 5개 회사가 못 쫒아갔다. 소니는 전 세계 시장의 80%를 쓸고 갔다. 그런데 지금 젊은 애들은 소니를 모른다. 2000년에 소니가 망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삼성의 매출은 70%가 핸드폰이다. 핸드폰 망하면 끝이다. 거대한 조직은 생명이 짧다. 내 전공이 자석인데 나중에는 하드 드라이브 헤드를 개발했다. 외국 논문을 140편을 썼다. 그 당시 삼보 컴퓨터의 핵심 부품이었다. 10년을 연구했다. 결국에는 USB 때문에 망했다. 잘나가는 것은 한 때다. 당시 49세에 논문 다 버리고 속이 까매져서 실상사에 갔다. 아무도 찾지 않는 논문이 되었다. 그때 다시는 첨단에 안 쫒아가기로 했다. 자본은 한쪽으로 쏠린다. 2000년만 해도 1등부터 10등까지 다 먹고 살았다. 10등도 점유율이 3% 정도 되어 다 나누어 먹었다. 지금은 3등도 못 산다. 핸드폰도 삼성만 몰리고 나머지는 어렵다. 그것이 세계화다. 세계화가 얼마나 다가왔다면서 영어로 NH, 농협 KB 국민은행. sh 맞혀 봐요. 수협이다. 슬픈 이야기인데 왜 수협이 그렇게 쓰나? 수협이 왜 세계로 나가나? 밝음 신협이 원주 바깥으로 나가나? 농협이 왜 세계화를 하나? 내가 돈이 있어서 은행에 가 저축을 하겠다고 했더니 펀드를 50만 원짜리 두 개를 들라고 하더라. 결국 절반이 되었다. 그 2천만 원이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돈놀이를 해서 돈을 따면 순천에 있다. 원주의 신협 돈은 원주 돈이다. 원주에 있는 돈이 1조다. 국민은행 돈은 원주 돈이 아니다. 비행기 타고 월스트리트 간다. 그것이 펀드다. 여러분 원주 시내, 순천 어디를 가도 돌아보라. 프랜차이즈 업소가 열 개중 8개다. 취업이 안 된 아이들이 패밀리마트로 간다. 신종 노예다. 나는 학생들에게 “여러분들 등에 꽂힌 빨대를 빼라”고 한다. 프랜차이즈 커피와 지역 카페는 두 배 차이가 난다. 옛날과 지금의 차이는 이거다. 옛날에는 대지주와 땅이 있으면 농사를 잘하나 지켜본다. 흉년이 되면 바로 눈앞에서 문제를 볼 수 있다.
무위당 장일순이 존경하는 분이 두 분이 있었다. 집 안에 사진을 붙여 두었다. 한분은 본인의 할아버지. 한분은 해월 선생이다. 조부는 옛날에 400평에 사랑채도 있는 대갓집에 사는데 배고픈 사람이 지나가면 대부분 밥을 준다고 한다. 변고 일어날 때 뭘 들고 올지 모르니까 대부분 문간방에 밥 들여 주고 가게 한다. 그런데 무위당의 조부는 안방을 내주셨다고 한다. 안방이 안 되면 안채의 마루에서 드시게 사람을 모셨다. 옛날 분들은 사람 대하는 것이 달랐다. 요즘은 빨대 꽂아두고 타워 팰리스에 가서 산다. 미국은 흑인 지역과 백인 지역이 담이 쌓여서 완전히 다른 사회를 산다. 2000년 후에 우리에게 남은 현실이다. 무위당 선생님이 “니들끼리 함께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하느님처럼 모셨다. 너를 보고 부끄러웠다. “옆에 있는 사람이나 챙기세요.”라고 말했다.
지역 공동체 하면서 중요한 것은 크고 강할수록 빨리 무너진다. 멸치, 꽁치 상어, 고래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느 것이 먼저 죽을까? 제일 큰 것이 먼저 죽는다. 이렇게 상황이 안 좋을 때는 적을수록 좋다. 지역 공동체를 다 지역 분화를 해야 한다. 노자의 사상이 지방분권이다. 지난번 서울에서 김민해 목사님 뵙고 순천공화국이라고 하신 말씀에 가슴이 뛰었다. 여러분 무위당 선생님에게는 여러 가지 정신이 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먹고 사는 거다. 무위당의 글씨 중에 一合成이 있다. 한 사람이 한 입씩 모두가 다 입이 하나다. 모두 살아있게 하라는 말을 한다. 함께 사는 운동이 진정한 목표고 지역의 사람들이 같이 먹고사는 것을 꿈꾸었다. 공부를 같이 하니까 좋다. 서울에서 원주로 귀농한 분이 많아서 같이 고민하고 떠들다 보니 세뇌가 되었다.
박두규-사람들을 끊임없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상이 생활 속에 녹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김민해-생명평화 결사가 왜 원주 사람들을 모셨는지 알아야 한다. 다른 것은 아니고 생명평화 결사가 뿌리를 찾는 일이라고 본다. 생명평화결사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질 수 없는 거다. 그 시대 만들어진 시대적인 정신, 사상적인 것과 맞닿아 있는 것이 무위당의 삶이다. 그런 삶을 이어가는 분들과 만난 것은 결사로서는 의미 있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때늦은 감이 있다. 1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무위당 선생님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듣는 것은 부끄럽지만 다행스럽다. 생명평화결사의 뿌리를 찾아가는 것은 어린아이를 벗어나는 것이다. 더불어 아까 두 분 선생님 말씀 하셨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 생명평화결사가 무위당 선생님과 연대하는 거다. 생명평화 결사는 연대가 필요하고 그런 구체적인 몸짓을 하는 시간이다.
덴마크 다녀와서 일행과 마지막 소회를 이루는데 덴마크에 그룬투비의 혼이 있었다면 한국은 무위당 장일순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도법스님이 그것의 메시지를 장일순의 메시지에 하나로 정리해 알려주셨다. 앞으로 결사가 무위당의 정신과 그것을 이어가려고 하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할 메시지를 명쾌하게 연결해주는 사건이다. 이곳이 관옥나무도서관인데 이 학교가 관옥 선생님을 모시는 곳이다. 그 선생님의 생애에 마지막 스승으로 모신 분이 무위당 장일순이다. 이럴 때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다. 귀한 발걸음 해주신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일을 진행하는 박소정 선생이 이 지역에 사는데 이 기회에 순천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정신이 더불어 순천에 뿌려지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덕분에 결사에서 이분들을 모시고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런 마음, 염원을 갖고 오랜 세월 동안 어르신들을 모신 것을 알고 그런 점을 고려하셔서 이후 김용우 선생님과 그런 이야기 모아져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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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규-식사들 잘 하셨는지? 술 드시면서 하시는 말씀 중에 무위당 선생님과 연결된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고 사람에 빠져 변하는 것이 크다는 것이 있었다. 정치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면에 어쩔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자본화가 깊어지면서 돈과 물신에 휘둘리면서 그렇게 살고 있는데 지금에 와서는 나를 변화시키고 우리 사회도 변혁될 수 있다는 큰 희망, 그런 것을 되살려 불을 지필 시기가 온 것 같다.
지역화폐 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움직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생명평화결사도 원주의 상을 정말 가슴으로 느낄 필요가 있다. 그런 가운데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넓게 펼쳐갈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게 만나 가는 것이 중요하다. 어제 오늘 마음을 제대로 모아간다면 스스로 성숙하고 우리 사회가 변할 것이다. 무위당의 사상과 철학이 근본적으로 다 닿아있는 것이다. 그동안 그런 일을 해왔던 김용우 선생님의 말씀을 듣겠다.
김용우- 앞에 이경국 회장님과 황도근 선생이 다 말씀 하셔서, 정리 삼아 몇 마디 하겠다.
생명평화결사나 한살림 생명운동이 시작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생명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그 안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숨겨져 있다. 생명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은 근대 문명이 문제라는 것이다. 근대 문명이 생명을 죽이고 있다. 이것을 살림의 문명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근대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근대 문명이 어떻게 생명을 죽이고 있는지? 새로운 생명운동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천착하지 않는다. 첫 번째 근대문명에서 돌아볼 것이 국가의 문제다. 근대 국가는 필요한가? 극단적으로 보자면 역사상 국가가 한번이라도 민중을 해방 시킨 적이 있는가? 두 번째 성장 경제의 문명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 인간이 주인인 곳이다. 인간이 자연을, 가진 자가 못가진자를 지배한다. 이 두 가지가 경제체제를 구성하고 있다. 두 가지를 떠받치는 담론은 프랑스 혁명에서 자유, 평등, 우애이다.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먼저 자유란 당시의 자유는 ‘~으로 부터의 자유’, liberty, freedom.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그 다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봉건적인 속박이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소유의 자유였고 또 다른 착취의 자유였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한 번 보자. 그 이전에는 ‘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세는 신이 있었다. 신이 내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내 밖에 있는 신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그러면서 신이 타자화된다. 두 번째로 내가 신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 말 없는 자연이 타자화가 된다. 이 주체가 사회적으로 심화되면 나로부터 상대방이 타자화된다. 근대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 이어지는 이런 사유에 근거해서 사회도 재구성되었다. 이 때의 자유는 두 가지 의미다. 봉건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는 신으로 부터의 자유다. 과연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사회가 풍부해지고 있는가?
프랑스 혁명에서 이야기 한 평등은 국가 앞에서 평등이다. 신이 아니고 국가 앞에서의 평등. 존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무시한 것이다. 평등의 의미가 획일적으로 규정하지 않나? 우애라는 문제. 우애는 던져준 것이다. 봉건제에서 해방되면서 많은 농민들이 도시 노동자가 된다. 자본은 철저하게 착취를 한다. 1800년대 유럽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균 수명이 28세였다. 5세부터 노동을 하고 평균 13-14시간이었다. 하루 노동한 것으로 벌 수 있던 돈은 두끼 정도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당장 노동을 안 하면 부채가 생긴다. 이들로 던져진 것이 우애다. 이 때의 우애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이 나온다. 이 때의 우애는 적대적인 우애다.
가가 이 세 가지 개념을 먼저 꺼내는 이유는 근대문명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나를 보기 위해서다. 사회적인 불평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근대철학의 세 가지 가치에 근거했다. 이원론적 가치철학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로 나갈 수 있는가?
진보라는 것은 국가 권력을 장악해서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성적 사유를 하는 존재의 희망 섞인 인간에 대한 신뢰였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기존의 담론으로 대통령을 뽑는데 난리 발광을 치고 있나? 우리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갈 수 있는가? 생명의 문제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될 수 있는가? 생명운동진영이 빠져있는 딜레마는 솔루션을 이야기 하는데 희망이 없다. 대안을 찾아낼 능력이 없는 건가? 생명에 대한 성찰을 못한 건가?
생명에 대한 성찰을 해보려면 가치 체계상 문제로 돌아가 보자.
자유의 문제로 바꾸어 보면 어떤가? 우리가 자율적인 존재를 지향한다고 할 때 자유는 내 안의 신을 찾는, 내 안의 신령스러움을 각성하고 신령스러운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자유로운 존재다. 우리 대부분은 외재율의 존재다. 자율적 존재는 진리 지향의 문제다.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있는가? 공동체 스스로가 자율적인 존재로 거듭나는가? 자유로운 존재로 있을 때는 자율적 인간 되지 않는다.
평등은 만인이 똑같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옛날에 비하면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율적 존재를 지향한다고 볼 때 배려할 수 있을까? 어딴 누구에게 더 배려해야 할까? 이 개념은 평등의 개념이 아니고 형평의 문제다. A와 B에서 10원 씩 주자고 할 때 관계의 형평에 의해 재구성해야 한다.
우리는 적대적인 연대에 익숙해 있다. 우리가 새로운 개념으로 제기한다면 노동자와 농민이 단결하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단결해야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하고라도 연대해야 한다. 이 문제에서 한 번 더 나간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라는 개념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망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휘두르는 국가주의 체계고 사회주의는 국가독점 사회다. 이 문제에서 핵심은 소유의 문제다. 자본주의 사적소유, 사회주의는 국가소유. 이 세상이 국가의 것인가? 개인 것도 아니고 국가 것도 아니다. 우리 것이다. 우리 것으로 소유 하는 과정이 공동체적 소유, 호혜적 소유의 개념이다. 서로 이익이 되는, 협동조합이 나오는 것이다.
호혜적 소유를 보자. 먼저 자본을 형성한다. 내 주머니를 털어 모두의 것으로 만든다. 그 도시의 경제를 누가 가지는가? 민중들이 60% 이상 갖고 있어야 한다.
순천에서 공동체 경제의 지분이 얼마나 되나? 1%도 안 된다. 원주도 1% 조금 넘는다. 신협가지 합하면 4%. 토렌토는 소유로 36% 넘는다. 고용도 마찬가지다. 원주 400명인데, 원주시 전체 인구 계산하면 별 것 아니다. 대안이라고 했을 때 경제적 대안은 어떻게 하면 호혜적인 소유를 늘릴 것인가이다. 농지신탁트러스트도, 시민기업도 할 수 있다. 공동 소유는 다양한 형태가 가능하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화에 이르지 못한다.
두 번째는 노동이다. 우리는 근대적 노동에 익숙해 있다. 왜 우리는 8시간 노동해야 하나? 그 문제의 이면에 있는 것은 생존의 노동이 아니라 욕망의 노동이다. 노동의 성격이 욕망의 노동으로 변했다. 평화의 노동이 아니라 욕망의 노동이다. 자원이 고갈돼가고 있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소비한다. 송전탑 건설비용을 보면 원전 몇 개를 지을 돈이다. 그러면 서울에 세워야지 왜 원전을 멀리 세우고 송전탑을 세우나? 주위를 가만히 돌아봐라. 거실에 텔레비전, 안방에 텔레비전, 컴퓨터가 두 대씩 있다. 우리가 원전을 반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혹시 풍산금속을 알고 있나? 연봉이 높은 회사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하는데 풍산금속에서 생산한 총알이 쓰인다. 한국의 무기수출 7위다. 모든 노동이 정당한 시대는 지났다. 우리는 노동에 대해, 생산에 대해 문제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자본은 광고를 엄청 때리면서 바꾸도록 한다. 유통비용으로 엄청 쓴다. 생산하고 거래하는데 엄청난 유통 비용을 슨다. 전 세계 식량이 남는데 굶어죽는 사람이 12억이다. 왜 그럴까? 소고기 1킬로 생산하는데 9킬로 곡물이 소모된다. 나는 육식 반대주의자는 아니다. 육식이 지나칠 때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욕망이 해결되지 않고 평화가 가능한가?
한 예를 보자. 한 살림과 이마트, 하나로마트에 100원짜리 물건을 넣으면 하나로마트는 55원을 생산자에게 준다. 이마트는 45원을 준다. 한 살림은 75원을 준다. 어떤 것이 좋은 거래인가? 내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어떻게 생명평화 경제가 가능한가에 해답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호혜적 소유, 호혜적인 노동과 생산이 자립 경제의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치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겠다. 국가는 한 번도 민중을 해방시킨 적 없다.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만 사실 그 시대에 기본적으로 현재의 구조들이 만들어졌다. 조금만 정신 차리고 들여다보라. 우리가 싸우는 것은 국가의 노예가 되기 위함이 아니다. 국가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운동한다. 운동은 모든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자기 공간을 뛰어넘지 않아야 한다. 순천 사람은 순천의 자립과 자치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원주 사람은 원주의 자립과 자치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근대국가는 수직적 체계다. 대통령, 군대, 감옥이 있다. 그래서 국가가 만든 법에 복종한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나라는 부족연맹체다. 원래 ‘나라’라는 말의 어원은 부족 연맹체였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나라’를 ‘국가’로 바꾸었다. 우리는 나라를 국가로 바꾸어버린 지배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안 된다. 국가를 해체한다는 의미로 원주가 자유로워야 한다. 원주가 국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면 생명평화의 자치 운동이라고 했을 때 의미가 없다.
내가 요즘 주장하는 것이 원주당 운동이다. 원주당이라고 해서 정치권에 있는 당들과 같은 당이 아니다. 원주의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지속시키고 성숙시켜야한다. 청주에 그런 당이 생기면 네트워크 하자. 가라타니 고진은 앞으로 근대 국가는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역의 네트워크로 해소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국가가 해소될 거라고 보는데 여전히 국가에 매달리고만 있다.
자율적인 존재, 자립적인 경제, 자치적인 지역공동체에 대해 말씀드렸다. 생명평화결사가 진지하게 성찰한다면 일부 울림이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장기적으로 협력적인 관계야야 한다. 우리는 지역을 생각할 때 로컬만 생각한다. 우리는 자본이 원하는 남북통일을 이야기 한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논리는 북한을 식민지로 보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종교를 부흥시킬 기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평화 진영에서의 남북 대화의 전략은 뭔가?
남북이 통일 된다는 것은 국가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북이 남보고 닮으라는 것이 통일인가? 통일은 겹쳐지는 것이다.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자유 왕래되고 협력할 수 있는 것이 통일이다. 우리는 그런 통일로 가고 있는가? 남한의 인민들에게 무엇을 제시할 것인가?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사실은 이미 조금만 밖으로 나가도 동아시아가 하나라는 이야기 한다. 남북이 평화협정만 체결되면 여기서 방콕까지 간다. 이것이 뭘 이야기 하나? 동아시아 전체가 거대한 생활권으로 편입된다는 것이다. 남북 간 합의만 되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다. 우리는 하는 것이 반쪼가리 생명평화 운동은 아닐 것이다. 북한 사회에서 수령체제가 무너지면 주체사상으로는 견딜 수가 없다.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 어떤 생명평화 비전을 제시할 것인가? 무위당 선생님의 생각을 발전시켜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로컬푸드 문제도 다 나와 있다. 오히려 생평운동을 하는 것은 진보, 보수가 아니고 탈근대적인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생명평화적 존재, 진리 지향의 존재가 되고 있는가? 우리는 그런 방향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가? 자립적 공동체, 지역 내에서 자립공동체를 30%를 확보하자고 한다면 엄청나게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오히려 self-governance,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서로의 성숙도를 높여갈 것인가? 그런 문제에 대해 무위당 선생님 말씀 중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不易이다. 진리는 안 바뀐다. 생명이라는 것이 원칙이라면 모든 변화하는 것을 대응할 수 있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좀 더 창조적인 변화를 모색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명운동 진영이 새로운 운동노선이 있어야 한다. 지역마다 거점이 있어야 순례도 의미가 있다. 순례는 반드시 해야하지만 순례가 살기 위해서라도 자기 존재 공간에서 무엇을 생명 평화적으로 바꿀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위당 선생님이 협동조합 다 좋은데 하다가 다 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은 안 망했으면 좋겠다. 사람 남는 운동을 하자는 거다.
두 번째는 어떤 현실적 문제에 대한 솔루션, 대안을 생각해야 한다. 대안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하면 지속하기 힘들다. 그런 속에서 대안이 조직되고, 이 때의 대안은 대책이 아니다. 대안과 대책은 다르다. 근대적 시선을 넘는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결사가 새로운 현실적인 방향으로 가면 좋지 않을까 싶어 이야기 했다.
박두규-앞 두 분의 말씀에서 가슴으로 느꼈던 부분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주셨다. 무위당 선생님이 말씀하신 사람을 만들어내는 운동만한 대안이 없는 것 같다. 오늘 세 분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생명평화결사 스승 중 한분 말씀을 듣고 질의 답 시간을 갖겠다.
목영주 -말씀을 듣다보니 우리 사회는 연간 실질소득이 1%에 해당하는 사람이 76%를 가져가고 10%의 사람들이 90%를 가져간다. 요즘 연말정산 문제가 터지니 지방자치를 조이는 이야기를 하는데 생명평화적인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은 되는지 걱정이다. 잘못된 가치는 무너지거나 대안이 필요한 현실이다. 이런 말씀 나누는 것이 소중하다. 우리가 사는 지금 현재가 어렵다하지만 무위당 선생님이 살아온 그 시기는 얼마나 더 엄혹했나? 그럼에도 지혜롭게 살아오셨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으니 위로가 되고 힘이 난다. 그런데서 생명평화적인 가치를 지향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내가 무위당, 함석헌을 만났기에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신협 한 귀퉁이에 한 살림, 또 책상하나에 생명의 숲, 함께 사는 세상 등 새로운 협동조합을 추구하고 있다.
별 것 아닌데 70년대 저항 할 수 없어서 커피 끓여먹지 말자는 거였다. 나는 그 다짐을 지키면서 살고 있는데 엊그제 KBS에서 나왔다. 중국에 아편전쟁이 얼마나 파렴치했는지 말이다. 그때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에서 아편전쟁을 일으킨 배경에 커피가 나온다. 커피에 세금을 붙이니 난리가 나서 커피 세금을 내린다. 세금을 내리니 수입을 감당할 대안이없어서 양귀비를 키워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오늘의 현실이 새로운 문명? 지금 이것이 지속가능할까?
과연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생각되지만 옛날에 김지하가 옥고를 치르고 있다가 10.26으로 김매중이 들어가고 세계에서 압력이 들어오니 원주 집에다 연금을 시켰다. 외신 기자들이 인권상을 가지고 수여식을 하러왔을 때 원주에서 기자회견을 원했다. 무위당과 김지하에게 기자회견 권했는데 거절했다. 밥이나 먹자고 해서 같이 먹으면서 외신기자들이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엄청난 무기 수입을 해온다. 그 상황을 보고 미국에서 놀랐다. 광주 사태를 일으킨 사람이 무기수입을 한 것을 보고 한반도는 존재가 가능한지 물었다고 한다. 그때 무위당 선생님이 되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두환을 어린애로 보냐? 어른으로 보냐?”물으니 “어린애다.”고 대답하더란다. “미국의 레이건은 어른이냐 어린이냐?”물었더니 “어른”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무위당께서 “그렇다면 총 달라고 떼쓰는 아이에게 총을 준 어른이 문제냐 어린애가 문제냐?”하고 물었더니 외신기자들이 깜짝 놀랐다. 인식을 바꾸게 하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무위당께서 “지금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질서가 유지되지만 그것은 곧 무너진다. 미국은 그렇게라도 무기 수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실제로 그 예언대로 되고 있다. 냉전이 무너졌을 때 그 기회가 한반도에는 유일한 기회라고 하셨다. 지역사령관한테 찾아갔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일본, 중국은 불구대처의 원수이다. 광주를 보면 전두환이 원수다. 내 머리 위에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부모 형제를 희생 시킨 원수다. 그러나 원한의 옷을 벗어던지지 않으면 평화의 기회를 놓친다. 군사적인 국방적인 것이 훨씬 더 의미있는 진전으로 생각한다고 하셨다. 무위당의 혜안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70년대 가톨릭 농민들이 생산원가를 보장해 달라고 할 때 그냥 올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생산원가를 보장해 달라고 하니까 무위당 선생님이 물었다. “여러분 뭐하시는 분입니까?” 다 알면서 물으신거다. 농사짓는 분들에게 “여러분은 생명사업을 하는 분들이다. 여러분은 어떤 농사를 짓고 있나요?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 평화농법으로 가야한다.”고 하셨다. ‘어떻게 비료 농약을 안 쓰고 농사를 지으라는 거지?’ 이해가 안 된 농민들이 가슴에 응어리만 가지고 갔을 것이다. 후에 자기가 농약을 치고 피해를 보고 나서야 80년대 들어서야 겨우 한살림 운동이 시작되었다. 상식적으로 계산이 안 맞는 일을 했다.
강릉에 오셔서 바닷가에서 술을 한잔하는데 준비위원장이 선생님께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기도? 별것 아니다. 기도하는 것은 치사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는 심산 유곡에 들어섰다”고 말씀하셨다. 총회를 하려고 준비한 사람들 앞에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나 10년 고생하면 길이 보일 것이라고 하셨다. 오늘의 우리가 생명평화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안전하게 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사명을 제대로 바라보고 깨닫고 광산에 가서 한 것처럼 믿음과 사명이 없이는 안 되는 구체적인 삶부터 새로운 양식의 삶으로 바뀌는 운동을 해야 한다.
박두규-오늘 말씀하신 네 분의 무위당 선생님 제자들과 생명평화 결사들의 공감, 교감 이루어질 질문을 해 달라. 무위당이라는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 질문하면 좋겠다. 원주 지역 공동체나 협동조합의 문제는 김용우 선생님께 질문해달라.
질문-여기서 하는 말들이 이곳에서는 공감하지만 친구들과 스펙 이야기 하면 왜소해진다. 교육이 아주 중요하다. 젊은이 입장에서 일상 속에서 그러 내공을 쌓고 꿋꿋하게 행복을 지향하면서 살 수 있으려면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이 매개가 되어야 한다. 지역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것이 녹록치 않다. 우리 젊은이들한테 좋은 사례를 소개해 달라
박두규-서로 공감하고 교감하자는 질의응답이다.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삶의 방식이 있기에 다 이야기 하다보면 복잡해진다. 궁금한 것을 위주로 보태서 듣고 싶은 것으로 이야기 해주면 좋겠다.
교수-내가 대학에 몸담은 지 27년이다. 30년전에 대학에 갔다가 30년 가까이 되었는데 요즘 느끼는 괴로움 중 하나는 학생들이 찾아오면 말을 안한다. 말을 안 하는 학생은 걱정된다. 내가 물리학과에서 의료공학과로 옮겼다. 입학사정관제로 개별적으로 학생들을 만나보면 성적은 좋은데 말을 안 한다. 30분 동안 면접을 해야 하는데 말을 안 한다. 개그를 하거나 노래를 하는 학생은 학교를 다니면서 뭔가를 찾는다. 그런데 아버지가 목사이거나 교수인 사람은 대화를 안 한다. 그 학생들은 대부분 중간에 포기한다. 정규교육에서 근본적으로 빼놓은 것, 소통이 없다. 이곳에 오기 전에 어떤 학부모가 왜 우리 아들한테 F를 줬냐고 전화를 했다. 그 부모 입장에서는 그 아들이 왕이다. 아들이 군대를 가도 페이스북에 올리고 난리다. 그래서 내가 “아들이 직접 전화하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어디로 와 있는지 알아야 한다. 청년들이 마음으로 사고를 친다. 안되는 스펙에 매달린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다 너희들을 부려먹기 위한 일이라고. 50대들이 보기에는 20대가 안됐다고 생각한다. 원주에는 두루바르 협동조합이 있다. 대표가 31살인데 신이 나서 일한다. 자기들이 알리는 것이다. 우리끼리 버는 것을 나누어 가진다고 스스로 일을 찾아가는 것이다. 어떤 애들은 책방과 카페를 같이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한 것이 있다. 젊은이들이 지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50대 된 사람들이 모여서 기금을 만들자. 20-30대한테 꿔주고 오픈 할 때 박수 쳐주자. 그것만 해도 알아서 한다. 젊은 애들은 지들끼리 살려고 발버둥 친다. 두루바루 대표를 무위당 학교에 강사로 모셨다. 열정이 있는 친구들에게 우리는 뛸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주고 무대 위에 올라오게 하고 떼어먹혀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돈 빌려준다. 무위당처럼 실천을 하자는 거다.
20대에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대로 사고 좀 치면 좋겠다. 원주는 감사한 것이 80대부터 20대가지 강의를 듣는다. 같이하면 길이 있다.
몽피-무위당 선생님이 상지대 사건에서 석고대죄하라고 했다는데, 짐지하 선생이 진짜 미친건가? 김지하가 역설적인 변증으로 한 것이 아닌가?
경국-김지하 선생님이 83년도에 해남에 가서 은둔 생활을 하는데 3년이 됐다. 그 때 무위당 선생님과 해남에 갔다. 해남에 있던 친구 김성동 대표와 몇 분이 김지하 시인의 울타리가 되어서 도와줬다. 낙지에 소주 한 잔 먹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김지하 처마 밑에 앉아서 소금에 찍어 소주를 먹고 있었다. 술에 병들면 아침에 소금 찍어서 술 먹는 사람이 많다. 지하는 7년 동안 옥살이 하면서 독방에만 있었다. 무위당 선생님은 잡범, 정치범과 같이 있었다. 나도 6개월 들어가 살아보니 독방이 무섭다. 지하는 이미 병이 들었다. 알코올중독이다. 그래서 내가 “지하를 데리고 여기서 도망가야겠습니다. 여기 두면 죽습니다.”했다. 그곳에서 지하는 우두머리였다. 원주에 단 한 분 스승이 있었다. 강제로 차에 태워서 원주 기독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김영일 본명으로 입원을 시켰다. 정신질환자들이 있던 큰 병원이었다. 서너 달 있었다. 그 사이 김지하가 해남에서 제주도로 도망갔다 어쨌다 난리가 났다. 감쪽같이 원주에서 건강을 되찾았다. 그때가 1차 병들었을 때다. 그런데 좀 나으니까 계속 술을 먹고 병과 병이 쌓인 것이다. 제정신이면 텔레비전에 나와 박근혜 연임해야 한다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 나이가 75세다.
마지막에 무위당의 사상을 계승해가는 사람이 김지하였다면 이런 세상에서 얼마나 좋은 지도자가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가 병들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다. 우리는 지도자를 한 명 잃어버리고 있구나 하고 생각해야 한다. 무위당 선생님은 평생을 원주를 떠난 일이 없다. 늘 원주에 계셨다. 무위당 선생님을 뵈려고 전국에서 원주로 모였다. 그것이 도법과 다른 점이다. 도법은 전국을 다니며 사람을 찾고 만났다. 그것이 도법과 무위당 선생님 사상이 다른 점이다. 도법은 순례를 많이 하셨다. 무위당 선생님의 철학과 사상이 도움이 된다면 앉아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게 해서 그 조직을 조직화 해나가는 내용적인 운동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여러분이 제 2의 도법스님이 되고 제 3의 김민해 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질문-지금도 유지되는 열정의 근원은?
경국-그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가? 여기서 나오는 여러분들의 모습 속에 나오는 거야. 기를 받은 거야. 김성순 님은 87세다. 나와는 9살 차이다. 이 어른의 기를 여러분들이 배워가고 익히는 것이다. 거기에 내용이 있다. 나는 보고 싶은 김민해가 있어서 여기 왔고 여러분을 처음 만나니 무조건 기분이 좋다. 내가 다리가 아파서 앉지를 못한다. 나도 여러분을 만나니 기분이 좋다. 무위당 선생님 정신을 여러분에게 드리려면 열정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내용적으로 젊어져. 늙지 말고. 마음이 젊어져야 일한다. 운동은 계산보지 말고 해라. 운동은 미치게 해야 한다. 사회운동이라는 것은 엄청난 비바람이다. 광산에서 16년 일할 때 정보과 형사가 내 옆에 따라다녔다. 나중에는 정이 들어서 “오늘 다 끝났어요? 소주한잔 모실께요.”한다. 돼지고기에 소주 한잔 먹으면서 그 놈을 스스로 교화 시킨거야. 그러면 그 놈이 “보고서 잘 쓸께요”한다. 생명평화운동, 환경운동도 생명운동이다. 무위당이 이야기 한 생명운동과 결사운동도 같다. 결사라는 이야기는 해보자는 이야기다. 도법 스님의 모습, 김 목사님의 모습을 현장에서 조직화 해나가야 한다. 도법 스님의 말씀과 무위당의 이야기를 나누며 교화 시켜. 결정적인 것은 다음 봄에 모시고 와. 이것이 결사다. 나는 광산에 가서 16년 동안 조직하고 일하는 동안에 신용협동조합을 6개 만들었다. 광부들이 출장을 나왔다. 막장에 들어가면 분진가루가 들어가 오래 못산다. 어떤 때는 광부들이 출자금 데어먹고 도망간다. 교육을 받은 조합원은 안 떼어 먹는다. 일이 힘들어 부산으로 야반도주한 광부 한 사람은 전화해서 “동지들 돈은 안 떼어먹을 테니 걱정 말라”고 하더라. 협동조합은 사람중심이다. 생명결사는 사람중심이다. 그 일을 큰 도법스님의 사상과 철학으로 생각해서 실천하는 결사체가 되어야 전국을 바꾸는 일의 기초를 세우는 거다.
질문-협동조합을 처음 시작할 때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점이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하고 말마만인가요?
경국-무위당 선생님이 옥살이 하고 나오셔서 지학순 주교님이 교구장을 하는데 지학순 주교가 부산 성당에서 점심 먹다가 원주로 발령이 났다. 가톨릭의 본고장에서 3년 동안 공부하셨다. 그 분은 ‘교회가 개방되어야 한다. 교회가 젊어져야 한다, 폐쇄적인 가톨릭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원주로 오셨다. 성당에서 신용협동조합을 했다. 제일 먼저 장일순 선생에게 “신용협동조합 알아?”하셨단다. 지 주교님 오시던 65년 그 해 가을에 장일순 선생님은 서울에 가서 신용협동조합 지도자 코스를 공부하고 원주 성당에서 공부했다. 신용협동조합 이야기를 한다. 한 50명이 들었다. 1주일 동안 교육을 했다. 그 때 유명한 총장분들이 왔고 장일순 선생이 강의했다. 듣다보니 괜찮거든. 소시민을 위한 운동이라 고리채 해결된다. 그러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성당에서 출자금을 걷어서 했는데 6개월 만에 파산했다. 그게 원주 신협이다. 누군가 출자금을 받았는데 가지고 도망갔다. 그 때 70만원은 큰돈이다. 그 돈을 가지고 도망갔는데 그 때 이사장이 무위당 선생이셨다. 선생님이 돈이 많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디선가 70만원을 가지고 와서 조합원을 다 불렀다. 이런 사정이 있어서 조합을 유보한다. 그러면서 돈을 다 돌려주었다. 독일도 처음에 대출 된 돈이 안 들어와서 파산한 경우가 있었다. 그 후 3년 지나서 만든 것이 밝음 신협이다. 무위당 선생님이 돈을 다 갚아주었다는 소문이 원주에 쫙 퍼졌다. 그러니까 밝음 신협이 생겼을 때 사람들이 다 모였다. 황 교수가 이야기 했지. 한 1주일 되니까 60명 정도 모였다. 그 정도면 많이 모인 거다.
원주는 인구가 33만이다. 도청 소재지가 28만이다. 도청 소재지가 원주보다 5만이 적다. 강릉은 평창 올림픽 한다고 난리 치면서도 20만도 안 된다. 원주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전라도, 경상북도에서도 사람들이 온다. 야성이 강한 것이 일리가 있다. 하루는 “경국아 어느 놈이 식당을 개업했다는 데 가보자.”하고 간다. 가서 “어디서 왔어요? 전주서 왔어요? 여기는 뭘 잘해요?” 물어보신다. 음식을 먹고 주인 양반을 불러놓고 원주에 이사 온 것을 환영한다. 식당을 선전하겠다. 그 다음에 그 집에 맞는 선생님 글을 써서 가져다준다. 내일은 경상도 사람이 이사 온 데 간다. “누구든지 원주에 오면 사람대접 해주어라.”하셨다. 그것이 원주에 사람이 모이는 이유다.
강원도에서 강릉처럼 텃세가 강한 곳이 없다. 그래서 강릉이 발전이 없다. 춘천은 공무원들이 터줏대감을 하니 살기가 어렵다. 원주는 지도자들이 그런 풍토를 만들어주어서 가능하다. 순천이 30만 정도면 해볼 만하다. 다양한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서 할 수 있다. 한살림 매장을 이용해라. 먹거리를 통하면 동지들을 만날 수 있다. 가급적이면 신용조합 거래하라. 순천에 남는 돈이다. 민족 자본이다. 순천밀알신협에 가져다주면 그대로 있다. 지역에 돈이 쌓여야 사회운동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하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 순천 괜찮다.
질문- 자기 이름으로 하지마라고 한 유언 외에 다른 유언은 있었나?
교수-가장 많이 하는 말씀이 “기어라”였다. 그 말씀도 김지하에게 많이 했다. 예전에는 그 말씀을 잘 몰랐다. 기어서 천리를 가라고 하는데 이제 알겠다. 지역 공동체를 하니까 겸손해야 한다. 자기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 싸움을 감당할 수 없다. 같이 오래 살려면 기지 않으면 안 된다. 무위당 선생님 말씀 중에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 말고 기어라는 것과 두 번째는 “모셔라”는 말씀이다. 멀리서 오신 분에게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잘 밥 지어서 대접하고 밥 대접하면 된다. 그 두 가지가 기억난다.
전두환을 사랑하라는 말은 심각했다. 전두환의 측근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변절하셨나? 김문기 씨랑 싸우는데 석고대죄 하라니? 그렇게 하면서 개량주의자 회색분자라는 이야기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대 기독교 교수가 무위당과 인터뷰 했다. 주변에서 변절했다고 하는데 어찌 된 거냐? 했더니 “맞다 내가 전두환 사랑하라고 했더니 뭐 받으신 것 있냐고 한다. 죽이고 살면 문제가 해결되나? 전두환은 몇 명 죽였냐? 죽인 사람 또 죽여 봐라. 살리는 방법으로 가는 방법이 없냐는 거다.” 돌직구를 던지셨다. 그럴 수 있는 힘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다. 박정희와 치열하게 싸웠다. 박정희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갔다. 다 반대했다. 그가 한 일은 잘못되었지만 사람은 껴안을 수 있다. 박정희가 시해되기 전 원주에 1군 사령관으로 박정희 친구가 임명되었다. 임명된 분이 청와대로 갔다. 갔더니 박정희가 임명장 주면서 “원주로 가거든 지학순 주교를 찾아가라. 내가 잘못되면 우리 아이들이 고아인데 만약에 맡길 데가 없으면 지학순 주교에게 맡겨라.”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상대와 대화를 했다. 요즘 운동을 달라졌다. 진영의 논리로 싸운다. 최소한 그가 한 일을 비판하지만 사람을 껴안을 수 저희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한다. 김문기가 돌아오면서 그것을 다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