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0.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
민중과 단절된 불교…승원에 갇혀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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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 |
사진설명: 아잔타 석굴 같은 훌륭한 석굴은 있어도, 그런 석굴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 현재 인도불교의 모습이다. |
부처님이 태어나고 자랐던 부처님의 땅 인도. 인도에서 불교는 왜 쇠퇴하게 됐을까. 기원전 5세기 탄생돼 1천년 동안 사상적·문화적·종교적으로 인도대륙을 쥐락펴락 했던 인도불교. 인도불교를 발전시키고, 쇠미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동인도에 있던 밀교의 본거지 비크라마쉴라사(寺)가 1203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면서 역사적으로 인도불교는 최후를 맞는데, 한때 ‘불교’ 인도라고 불려지던 인도의 불교가 13세기 이후 무엇 때문에 인도의 ‘한미한 불교’로 전락해 버렸을까.
지난해 3월5일 인도 뭄바이에 도착, 칸헤리 석굴에서 취재를 시작하며 가졌던, 아니 출발하기 전부터 줄곧 품어왔던 “인도불교는 왜 쇠퇴했는가”하는 의문은 엘로라·아잔타·산치 유적을 보는 동안 더욱 커졌다. 아잔타 같은 세계적 유산을 남긴 인도불교가 사라졌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천여 년 동안 망각 속에 있던 아잔타 동굴은 햇빛을 보았는데, 아잔타를 만든 불교는 인도에서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단 말인가.” 한탄만 나왔다.
바이샬리·쿠시나가라·붓다가야·파트나·쉬라바스티·룸비니 등을 취재하는 동안에도 ‘그 원인’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인도의 ‘나란다 유적’과 파키스탄의 ‘탁실라·페샤와르 유적’을 답사하는 동안에 이유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카필라바스투 궁성 유적으로 간주되는 네팔의 틸라우라코트 유적에서 진행된, 힌두교도들의 의식을 참관하는 사이 ‘불교가 쇠퇴한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든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이슬람의 동점’이 불교쇠퇴의 주요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같은 ‘이슬람의 칼’ 속에서 힌두교는 존속하고 불교만 사라졌다는 것은 무언지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재가자 응집할 독자적 의례없어
인도대륙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과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은 대략 이렇다. 인도불교 쇠퇴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인도불교의 학문화”다. 5세기 전반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나란다대학이 창건됐다. 7세기 당나라 현장스님이 도착했을 당시 나란다는 이미 예불당, 승원, 탑 등이 ‘하나의 외벽’으로 둘러싸인, 일반사회와 유리된 대 사원이 되어 있었다. 당시 불교가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선한 삶의 지침’을 제공했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나란다에서의 토론과 공부를 통해 ‘불교는 학문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8세기 9세기 10세기를 거치며 불교는 점차 거대한 승원 안에서,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비호를 주로 받으며, 일반과 유리돼 갔다. “학문연구를 핵으로 하는 이러한 불교는, 학문을 뒷받침하는 광장으로서의 사원과 인재를 잃을 때, 존재의 실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일본 나라 야스아키 교수).”
승원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고, 자기들끼리의 지적 유희에 빠져있는 사이 대중들은 불교에 등 돌리고 힌두교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란다대학과 비크라마쉴라사 등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고, 사원에 있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인도불교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대중적 지지가 없는, 대중의 생활에 지침이나 도움을 주는데 인색했던 ‘학문적 불교’의 예정된 말로였다고나 할까.
물론 ‘불교의 학문화’만 인도불교 쇠퇴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보다 직접적인 것은 재가조직의 결여, 포교에 대한 열망이 수그러든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불교가 출세간의 종교로 사회와 단절된 교단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출가조직을 도울 재가조직을 지속적으로 육성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불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힌두교도 있었다. 그런데 불교만 사라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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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도 보팔 부근의 파우니 스투파 터> |
사진설명: 불교 스투파가 있었던 곳에 힌두교 사원이 세워져 있다. |
일본의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불교는 나란다나 비크라마쉴라사 같은 거대한 승원을 갖고 있었으며, 돌이나 벽돌로 건조된 승원들은 견고한 장벽으로 둘러져 있었다. 스님들은 모두 누런 가사를 입는 등 보통 사람의 복장과는 크게 달랐다. 그들이 정연하게 걸식하는 모습은 군대를 연상케 함으로써 침입자인 이슬람교도들의 적개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에 비해 힌두교는 민중의 종교로, 일반인의 사회생활 속에 완전히 용해돼 있었다. 신상(神像)을 모시는 사원도 규모가 작고, 소위 ‘교단조직’이란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힌두교를 멸망시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파괴하는 셈이 된다. ‘이슬람의 칼’도 힌두교를 멸망시킬 수는 없었으며, 불교를 멸망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힌두교를 도운 셈이 됐다.”
인도불교의 쇠퇴를 이야기 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인 중 하나가 ‘불교의 힌두화’다. 불교적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불타의 세계〉 등에 의하면 8세기부터 12세기 사이 ‘힌두세계 속에 제대로 정착한 불교도’ 집단은 없었다. 그렇다고 불교가 힌두교의 카스트 사회 밖에 독자적 집단으로 존재하지도 못했다. 불교도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응집시킬 ‘독자적인 생활규칙이나 통과의례’로 인정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의례다. 출가자들은 승원 안에서 자기들의 규칙에 의거해 수행하면 되지만, 재가자들은 의례에 의해 불교 신도가 되고, 의례에 참여하는 빈도가 높을수록 불교에 대한 신심도 깊어간다.
그런데 불교는 굽타시대(기원후 320~500) 이전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독자적인 의례가 없었다. 힌두교 의례를 차용해 사용하고 있었다. 힌두교식 의례에 참여한 불교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힌두화 돼 갔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결과였다. 의례가 힌두화되자, 불교는 점차 정체성을 잃고 힌두교에서 각종 신들마저 차용해 왔다. 그러다 결국 불교는 힌두교에 용해되고 말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적이다.
반면 자이나교는 달랐다. 자이나교도 힌두교의 신들을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대단한 응집력을 보여주었다. 재가신자들은 독자적인 12계율의 의무사항을 지키고 있었고, 12종의 통과의례도 갖고 있었다. 자이나교도들은 힌두세계 속에서도 의례나 생활양식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실체가 확실한 단일 집단으로 응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자이나교는 지금도 인도에서 나름의 교세를 유지하며 큰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힌두교에 용해된 불교가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정체성 잃고 힌두교 속으로 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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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부서진 산치대탑 주변의 승원. |
‘불교의 힌두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불교는 인도에서 쇠퇴했다. 전쟁이나 급격한 혁명적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런 방식으로 힌두에 용해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독립인도의 초대수상 네루는 자신의 저서〈인도의 발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광범위하게 난폭한 수단에 의해 근절되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힌두교도의 지배층과 민중 층에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 교단의 지도자들 사이에 때때로 지방에서 충돌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정치적 원인에서 야기됐고, 본질적인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 아무리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불교에 의해 힌두교가 밀려나간 사실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가 전성하던 시기에도 힌두교는 여전히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불교는 자연사(自然死)했다.”
이만큼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을 정확히 꿰뚫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살(自殺)도 아니고, 타살(他殺)도 아닌 자연사가 인도불교 쇠퇴의 비밀이었다. 병에 걸려 오래 동안 앓다가 자연히 죽어가든지, 아니면 아주 노쇠하여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자연사. 인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흥했던 인도불교는 결국 정체성을 상실한 채 힌두사회에 용해(溶解)돼 자연사하고 말았다. 자신의 땅에서 버림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한 집단이든 한 종교든 한 사람이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배들에게 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게 교육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한국불교는 자연사한 인도불교로 부터 분명하게 배워야 될 것이다.
**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자들 **
암베드카 개종에 중흥불길
다르마팔라는 순교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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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002년 4월14일 인도 델리에서 거행된 암베드카 박사 탄신 111주년 기념행사 모습. |
현대에 들어와 인도불교는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현대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그중 특히 중요한 인물이
‘암베드카’(1891~1956) 박사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다. 불가촉천민 집안에서 태어난 암베드카 박사는 인도 사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로 개종했다. 1947~1951년엔 독립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그였지만, 불가촉천민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간답게 사는 길은 불교로 개종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길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암베드카는 1956년 10월15일 중인도 나그푸르에서 3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대적인 개종식을 갖고 ‘신불교 탄생’을 주도했다. 이후 인도에서 불교인구는 점차 증대하기 시작했다.
암베드가 박사와 함께 현대 인도불교 부흥(復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다. 스리랑카에서 태어난 다르마팔라는 현대 인도불교 탄생을 위해 순교한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도불교 재탄생을 위해 대보리회(Maha Bodhi Society)를 결성했으며, 부처님 관련 성지 유적을 보호하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는 운동도 주도했다. 특히 붓다가야에 있는 대보리사를 힌두교들로부터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결국 대보리사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다음 생에는 바라나시의 브라만 가정에 태어나 새 몸으로 다시 대보리사를 위한 투쟁을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죽을 만큼,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인물이 바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였다.
인도·파키스탄·네팔·아프가니스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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