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의 시작과 윤흥신 >
1592년 음력 04월 13일. 1만 8천명의 일본군 1진이 대마도를 떠난다. 지휘관은 소서행장과 그 사위인 대마도주 종의지. 목적지는 부산. 하루 종일 노를 저은 끝에 그들은 해 지기 전에 부산포에 이른다. 지금의 영도에 사냥 나갔던 부산첨사 정발은 대규모로 들이닥치는 일본 함대에 기겁을 하고 급히 부산진성으로 돌아와 방어 태세에 들어간다. 하지만 병력은 기백명. 백성들까지 다 포함해야 천 명 안팎. 일본군은 긴 해안선에 닥치는 대로 상륙했고 기나긴 7년 전쟁의 시작을 열어젖히게 된다.
부산첨사 정발을 보면 당시 무관들이 얼마나 고달팠을까를 짐작할 수 있어. 그의 이전 벼슬을 보면 전라도 땅끝마을 해남 현감이었다가 그 다음 벼슬은 두만강 변 종성에 가서 여진족과 싸우고 있지. 그리고 당시는 전쟁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대일본 전선 최전방 부산진 첨사로 와 있었던 거야.
정발은 열심히 싸운다. 검은 옷을 입고 싸웠다고 흑의장군이라고 불리웠다고 하는데 후일 일본군 장수가 조선의 관리에게 “당신 나라에서 무서운 장수는 부산의 그 검은 옷 장수 밖에 없더라.”는 말을 했다고 해.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야. 18세기 변박이 그린 부산진순절도에 봐도 정발은 눈에 띄는 검은 옷을 입고 있지.(그런데 일본군이 한 말은 아무래도 놀림 같아. 정발 뒤로는 그 정도나마 싸운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 아냐)
중과부적.
부산성은 반나절만에 일본군 손에 떨어져. 그리고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다. 정발은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는 전멸이었어. 일본군을 따라온 스페인 신부의 기록도 조선군들은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죽어갔다고 증언하고 있지. 그래서 정발은 오해에 휩싸인다. 항복을 해서 일본군이 됐네 도망갔네 술에 취해 싸우지도 못하고 죽었네 소문이 분분했지.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에야 정발의 처 임씨가 진정을 해. 우리 남편은 그럴 리 없는데 억울하다고. 그때 조사가 진행되던 중 당시 함께 싸우다가 포로가 됐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한 병사가 나타난다. 그의 입을 통해서야 정발은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어.
정발은 그나마 죽은지 10년 만에 명예를 되찾지만 같은 날 비슷한 장소에 있던 한 사람은 그러기 위해 무려 150년이 넘게 기다려야 했다. 다대포첨사 윤흥신이라는 사람이야. 왜군은 부산포에만 온 게 아니라 다대포 서생포 등 당시 경상우수영 관할의 최전방 기지들을 골고루 들이쳤거든, 경상좌수사 박홍은 난리났다는 장계를 서울로 올린 뒤에 몸을 빼 버렸고 결국 다대포와 서생포는 외로운 요새로 그 최후를 맞이하게 돼. 그런데 다대포를 지키던 윤흥신은 좀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었어.
옛날 드라마 <여인천하> 혹시 기억나냐? 그때 아역 배우가 깜찍하게 연기했던 세자의 외삼촌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있어. 윤임이라고. 그러니까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세자를 낳고 죽은 왕비의 오빠고 세자의 외삼촌이었지. 중종의 세 번째 부인도 윤씨, 문정왕후 윤씨인데 그 동생이 윤원형이었다.
윤원형과 윤임은 자신들의 조카를 왕위에 앉히고 또 그를 지켜내기 위해 격돌하지. 이른바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대결이었어. 윤임의 조카가 왕위에 올라 중종의 뒤를 잇긴 하지만 8개월도 못가 세상을 떠나지. 그게 인종 임금이고 인종의 죽음은 곧 윤임의 끝장이었어. 나이 어린 조카 왕과 대비인 누나를 등에 업은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윤임을 죽인다.
윤임 뿐 아니라 그 아들 셋까지 사형을 받아. 하지만 그때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한 아이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윤흥신이었어. 하지만 오갈데없는 역적의 자식이었지. 유모나 노비들에 의해 빼돌려지긴 했다지만 그의 유년 청년 시절은 무척 불우했을 거야. 어쩌면 관노가 돼서 매 맞으며 눈물을 뿌렸는지도 모르지. 그러던 중 임금이 바뀌고 지배세력이 교체되면서 아버지 윤임이 신원되게 된다. 역적의 자식 타이틀을 떼게 된 거지. 양반이니 벼슬은 해야 했는데 여건상 문과 급제는 꿈도 못 꾸었을 윤흥신은 무과를 지망할 수 밖에 없었을 거야.
그런데 선조실록상 윤흥신의 이름이 매우 특이하게 나타나는 대목이 있어. 충청도 진천 현감을 지내고 있을 때 그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거든. “문자를 잘 해득하지 못하니 파직하소서.”
그래도 무과 급제자인데 글을 못 읽었을 리는 없지만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교육 잘 받고 자란 사람에 비해서는 적잖이 떨어졌겠지. 요즘도 먹물 좀 들었다는 사람들 자기보다 좀 지식이 떨어진다 싶은 사람 무시하는 버릇이 자심한데 그때는 지금의 열 일곱 배는 더 했을 거 아니겠어. 고고한 선비들 정자에 앉아서 시 읊으면서 입 다물고 있는 윤흥신더러 무식한 무부 같으니 낄낄거리지 않았겠냐고. 결국 “문자를 해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윤흥신은 파직된다. 아마 피눈물이 났을 게야. 역적의 자식으로 지낸 수십 년도 한맺히는데 이제는 무식하다고 목이 날아가다니.
그 뒤 우여곡절을 거쳐 부임한 곳이 다대포였지. 그리고 그는 일본군의 파도와 맞닥뜨린다. 첫날은 윤흥신은 병사들을 잘 지휘해서 일본군을 물리친 것 같아. 그러나 정찰대 수준의 병력이 아니라 본대가 몰려오면 대책이 없었지. 부하가 와서 권한다. “내일은 진짜 대군이 올 겁니다. 후퇴하시지요.” 그때 윤흥신은 대답해. “그냥 죽을 뿐이다. 어떻게 내가 여길 떠나겠나.”
임금 향한 일편단심 따위나 나라 위한 충성심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의 절박함이 더 느껴져. 신원은 됐다지만 한때 역적의 아들에, 인생의 바닥도 경험해 봤고 지금은 무식하다고 모멸받는 무장으로서의 절박함 말이야.
다음날 몰려든 일본군 대군 앞에 기백 명 조선군의 대오는 쉽게 무너졌지만 윤흥신은 끝까지 활을 들고 싸웠다고 해. 화살이 떨어지자 기왓장도 던지고 나중에는 칼을 들고 맞서는데 일본군이 그에게 육박하자 한 사람이 나는 듯이 달려가 윤흥신을 감쌌다고 한다. 이복아우 윤흥제였어.
아마도 둘은 노비나 그 비슷한 신세가 되어 눈물 젖은 깡보리밥을 함께 씹던 사연 많은 형제가 아니었을까. 최전방 요새까지 따라온 이복 아우 윤흥제는 형이 무식하다고 진천 사또 자리에서 잘리는 것도 보았을 것이고, 여기서 도망한다면 무슨 말이 형을 뒤따를 것인지도 모르지 않았을 게야. 윤흥제는 형을 꼭 끌어안고 함께 죽는다. “형님. 편히 가시오. 저승에서는 역적 소리도 무식하다는 소리도 듣지 않으리다.” 이러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거의 200년 뒤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지 “공이 다대포진(多大浦鎭)에 달려갔을 때에 서제(庶弟)인 윤흥제(尹興悌)가 함께 따라갔는데 왜적이 공을 위협하여 시퍼런 칼날을 마구 휘두르자 윤흥제가 공을 끌어안고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끌어안은 것이 어찌나 견고하던지 끝내 풀 수가 없어서 마침내 함께 관(棺)에 넣어서 하관(下棺)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기이하고 장렬(壯烈)한가.”
이 형제의 죽음은 오래도록 잊혀져. 150년 뒤에야 동래부사와 이어 경상감사를 지낸 조엄(이 사람이 고구마를 한국에 들여온 사람)이 옛 기록을 들춰 윤흥신의 최후를 밝혀냈고 그를 조정에 고함으로써 윤흥신은 부산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만 모시고 있던 충렬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지.
1592년 음력 04월 13일 7년의 끔찍한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 역사에 몽골 침략 이후 최대의 전란. 조선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와 문화, 심지어 언어까지 바꿔 버린 미증유의 전란은 부산 해안가의 많은 백성들과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려 한 군인들의 죽음으로 그 처참한 막을 올리지.
*해우 김종명 톡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