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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53> 화폐 이야기 (32) 한국의 돈 100원 주화 ㉕ / 왜군 총사령관들, 정유재란 초기 육전 남원성전투와 광한루
이전 글 옹달샘 <52> ‘고령전투’에 이어, ‘왜군 총사령관들, 정유재란 초기 육전 남원성전투와 광한루’를 이야기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 초기인 1597년 8월 중순에 3개의 본격적인 육전(陸戰)이 벌어졌다. ①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 : 옹달샘 <52>에서 이야기했음), ②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 ③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가 그것이다.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를 ‘남원전투(南原戰鬪)’라고도 한다.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이전 글(옹달샘 <52>)에 게재했던 ‘정유재란 초기의 왜군 침공 상황도’를 다시 한 번 게재한다.
▲정유재란(1597-1598) 초기(1597년 8월 13일) 왜군 침공 상황도
같은 시기에 있었던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는 조선군만으로, 그것도 왜군(12,000명)의 4분의 1 병력(3,000명)으로써 왜군을 전멸시켰다(왜군 100명만 도주했음). 더욱이 정기룡 장군이 지휘한 고령전투는 고령성(高靈城)을 지키는 수성전(守城戰)이 아니라, 대담하게 야전(野戰)을 해서 얻은 통쾌한 승리였다.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는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와 너무나 대비되는 전투였다. 남원성전투는 한 발짝도 성 밖을 나오지 않은 수성전(守城戰)이었다. 그러므로 전투명이 ‘남원전투(南原戰鬪)’보다는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가 더 타당하다.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와 같은 시기에 벌어졌으나, 그보다 이틀 먼저 시작된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를 알아본다. 병력과 침공 경로는 다음과 같다.
(1) 일본 육군 좌군(左軍) : 총 65,800명
① 총사령관 제8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2-1655} 10,000명
② 선봉장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1600} 14,700명
③ 장수 제5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도진의홍), 1535-1617} 10,000명
④ 장수 제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봉수하가정), 1559-1638} 11,100명
⑤ 수군 장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등당고호), 1556-1630} 약 20,000명
일본 육군 좌군(左軍)의 침입 경로는 ‘웅천 → 진주 → 사천 → 하동 → 구례 → 남원’이었다.
일본 수군은 ‘부산 → 거제도(칠천량해전) → 사천 → 하동’의 경로를 거쳐 좌군과 합류하여 ‘하동 → 구례 → 남원’에서 남원성전투를 한 후 남해로 돌아가서, 명량해전(鳴梁海戰, 1597년 9월 16일)에서 이순신 장군에 의해 대패하게 된다.
여기서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2-1655}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 1579-1650}에 대하여 조금 언급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대표적 장수 하면 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1600 : 제1군 대장}, ②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 : 제2군 대장}, ③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정), 1568-1623 : 제3군 대장}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들의 상급자들이 있었다. ①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2-1655}, ②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모리휘원), 1553-1625 : 모리 히데모토의 양부(養父)} 또는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 1579-1650 :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養子)}가 바로 그들의 상급자들이었다. 보통 임진왜란에서 그들에 대한 언급은 드물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다시 정리하면,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2-1655}는 임진왜란에서 제8군 대장이었지만, 다른 대장들의 상급자로서 총사령관이었고, 정유재란에서도 제8군 대장이었지만, 역시 좌군(左軍)의 총사령관이었다. 또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모리휘원), 1553-1625 : 모리 히데모토의 양부(養父)}는 임진왜란에서 제7군 대장이었지만, 다른 대장들의 상급자로서 총사령관이었다. 모리 데루모토는 전쟁 중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정유재란에서는 그의 양자인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 1579-1650 :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養子)}가 제8군 대장이었지만, 다른 대장들의 상급자로서 총사령관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교{奉行(봉행)‧ぶぎょう}’와 ‘다이로{大老(대로)‧たいろう}’라는 관직(官職)을 신설했다. ‘부교{奉行(봉행)’는 무인정권(武人政權)인 바쿠후{幕府(막부)} 시대의 중앙 행정(行政)을 담당한 관직으로서 장관과 비슷했다. 5명의 ‘부교’가 있었다. 그 위에는 최상위 직급으로서 중앙 정치(政治)에 관여한 5명의 ‘다이로{大老(대로)}’가 있었다. 다이로는 ‘쇼군{將軍(장군)}’의 보좌역(補佐役)이자 최측근(最側近)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이어, 일본 마지막 바쿠후{幕府(막부)}인 도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덕천막부), 또는 ‘에도막부{江戶幕府(강호막부)}’라고도 함, 1603-1867]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 1543-1616}는 ‘부교{奉行(봉행)‧ぶぎょう}’라는 호칭을 ‘로주{老中(노중)‧ろうじゅう}’로 바꾸어 5명을 두었고, 5명이던 ‘다이로{大老(대로)}’는 1명만 두었다.
무인정권(武人政權)인 바쿠후{幕府(막부)} 시대는 군인이 실권을 가지고 정치를 한 시대, 즉 군사정권 시대였다. 정무를 맡아보는 쇼군, 즉 정치적인 실권을 쥔 최고 정치 지도자를 ‘간바쿠{關伯(관백)’라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쇼군인 동시에 간바쿠였다. 정유재란이 발발했던 1597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바쿠 자리를 아들에게 세습(世襲, 물려줌)하고, 형식상 물러났으나, 실권을 행사하는 ‘다이코{太合(태합)}’ 자리에 있었다.
당시 일본의 수직적 권력 구조를 보면 ‘다이묘{大名(대명)}-부교{奉行(봉행)}-다이로{大老(대로)}-쇼군{將軍(장군)}, 즉 간바쿠{關伯(관백)-다이코{太合(태합)}’로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정)} 등은 ‘다이묘{大名(대명)}’로서, 중앙 행정이나 정치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지방 영주로서 오로지 전쟁을 수행하는 장수{대장(隊長)}였다. 임진왜란에서 대장이자 총사령관이었던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모리휘원)},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는 장수들, 즉 다이묘들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내리고, 그들을 감시‧감독하는 ‘부교{奉行(봉행)}’였다. 그래서 부교, 즉 총사령관들의 부대는 예비대 성격을 띠고 후방에 있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역사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드물게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임진왜란의 전공으로 ‘부교’에서 ‘다이로’로 승진했다. 부교와 다이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었고, 혈통적 또는 친인척으로 연결된 예가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직접적인 친인척 관계이거나, 관련된 자의 양자가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양녀와 결혼하여 측근이 되었다.
이전 글 ‘옹달샘 <42>’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1600}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의 경쟁관계를 이야기했었다.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이야기한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 1537-1598. 8. 18}가 죽은 후 임진왜란이 끝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 1543-1616}가 권력 전면에 나서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들은 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인 이시다 미츠나리파{서군(西軍)}와 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파{동군(東軍)}로 분열하여 싸웠다. 이 싸움이 ‘세키가하라 전투(関が原の戦い, 1600년 10월 21일)’였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이는 등의 행동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불신임을 받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파(동군)에 설 것 같았으나, 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인 이시다 미츠나리파(서군)에 서서 싸우다가 죽었다.
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촌 동생이자 그의 총애를 받으며 그에게 영원한 충성을 다할 것 같았던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로서 권력을 세습한 8세의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풍신수뢰), 1593-1615 : 측실의 차남}와 그의 보호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석전삼성), 1560-1600}를 버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서 싸워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죽였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총사령관들은 세키가하라 전투(関が原の戦い, 1600년 10월 21일)에서 어느 편에 섰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養子)가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養女)인 고히메{豪姬(호희)}와 결혼했으며, 임진왜란의 전공으로 5명의 다이로{大老(대로)} 중의 한 명이 되었던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2-1655}는 임진왜란에서 제8군 대장이었지만, 다른 대장들의 상급자로서 총사령관이었고, 정유재란에서도 제8군 대장이었지만, 역시 좌군(左軍)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1600)에서 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인 이시다 미츠나리파(서군)에 서서 싸워서 패배했다. 그 후 도피했다가, 붙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오랜 유배생활 끝에 죽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모리휘원), 1553-1625}는 임진왜란에서 제7군 대장이었지만, 다른 대장들의 상급자로서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전쟁 중에 득병(得病)한 때문에, 정유재란에서는 그의 양자인 19세의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 1579-1650 :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養子)}가 제8군 대장인 동시에 우군(右軍) 총사령관이 되었다. 모리 데루모토는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1597년 5명의 다이로{大老(대로)} 중의 한 명이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권력 세습자인 나이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풍신수뢰), 1593-1615 : 측실의 차남}의 보좌역을 임명받았으며, 세키가하라 전투(1600)에서는 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인 이시다 미츠나리파(서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싸웠다. 모리 데루모토는 서군이 패배할 것을 알고, 동군과 협상했다. 그리하여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처벌받지 않고, 승려(僧侶)가 되어서 제명대로 죽었다. 양자 모리 히데모토는 항전(抗戰)을 주장하다가, 도쿠가와 야스나리 편이 됨으로써 처벌받지 않고, 번주(藩主)가 되어 제명대로 죽었다.
다시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의 병력과 침공 경로 이야기로 돌아온다.
(2) 조선군 : 총 1,000명
① 전라병마사(全羅兵馬使) 이복남(李福男, ?-1597) 1,000명
② 남원부(南原府) 민간인 6,000-7,000명(병력으로 계산할 수 없음)
(3) 명군 : 총 3,000명(②, ③, ④는 남원성전투에 참전하지 못했음)
① 부총병관(副摠兵官) 양원(楊元, ?-?) 3,000명(남원성)
② 유격장(遊擊將) 진우충(陳愚衷, ?-?) 2,000명(전주성)
③ 부총병관(副摠兵官) 오유충(吳惟忠, ?-?) 4,000명(충주성)
④ 유격장(遊擊將) 모국기(茅國器, ?-?) 3,000명(성주성)
아래 그림은 일본 측 자료를 참고하여 그린 정유재란 당시의 남원성 그림이다.
▲정유재란(1597-1598) 초기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 전황도
남원성(南原城)은 통일신라 때 축조(築造)되었고, 조선 초기에 중수(重修)된 것으로서, 중국 읍성(邑城)을 모방한 네모 형태인 평지성(平地城)이었다. 규모는 둘레 2.5km, 높이 4m였고, 성곽 바깥에는 해자가 있었다. ‘해자(垓字)’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성 바깥에 만든 인공 못’이다. 해자는 평지성(平地城)에 설치되었다. 우리나라의 성은 대부분 산성(山城)이기 때문에 해자가 없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해자가 있는 평지성이 없다. 수원성(水原城), 공주(公州) 공산성(公山城)에 해자를 설치한 유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남원성은 일본 측 자료에 해자가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일본의 성곽은 해자가 발달했다. 오사카성{大阪城(대판성)}의 해자가 그 대표적이다.
남원성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첫 관문(關門)이었다. 남원의 지척에 전라도 행정의 중심인 전주부(全州府)가 있다. 그런데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은 텅 비어 있었다. 관문인 남원성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정유재란 당시의 조선군의 실정(實情)이었다.
정유재란이 시작됐을 때 명군(明軍)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고, 한참 후에 한성(漢城, 서울)으로 이동했으며, 1597년 8월 10일 전에 한성 남쪽으로 이동한 명군은 양원(楊元, ?-?)의 3,000명(남원성), 진우충(陳愚衷, ?-?) 2,000명(전주성), 오유충(吳惟忠, ?-?)의 4,000명(충주성), 모국기(茅國器, ?-?)의 3,000명(성주성), 도합 12,000명이 전부였다.
일본 좌군(左軍) 65,800명이 남원성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명나라 부총병관(副摠兵官) 양원(楊元, ?-?)이 전라병영(全羅兵營)이 있는 강진(康津)의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줄여서 전라병마사(全羅兵馬使) 또는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 ?-1597)에게 격서(檄書)를 보냈다. 그러나 이복남은 시일을 지체하면서 오지 않았다. 여러 번 격서를 보낸 결과, 오기는 왔으나, 1,000명이 아닌, 수백 명에 불과했다. 양원(楊元)은 전주성의 유격장(遊擊將) 진우충(陳愚衷, ?-?)에게도 두 차례 지원을 요청했으나, 전주성을 비울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오지 않았다. 뒤이어 광양현감(光陽縣監) 이춘원(李春元, 1571-1634),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1597) 등이 도착했다. 그리하여 조선군 병력은 겨우 1,000명가 되었다. 결국 양원의 3,000명(명군), 이복남‧이춘원‧김경로의 1,000명(조선군), 도합 4,000명이 왜군 65,800명을 상대로 수성전(守城戰)을 펼쳐야 했다. 병력 차이가 1대16이었다. 이것이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였다.
조선군 1,000명은 북문을, 명군 3,000명은 각 1,000명씩으로 나뉘어서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1597)이 동문을, 천총(千摠) 모승선(毛承先, ?-1597)이 서문을, 천총(千摠) 장표(蔣表, ?-1597)가 남문을 담당했다.
왜군은 제5군 대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도진의홍), 1535-1617}의 10,000명이 북문을, 제7군 대장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봉수하가정), 1559-1638}의 11,100명이 동문을, 제1군 대장이자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1600}의 14,700명이 서문을, 제8군 대장이자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2-1655}의 10,000명이 남문을 공격했다. 수군도 합세했다.
조‧명 병력이 턱없이 부족하니, 해자(垓字)는 있으나마나였다. 일본 우군은 첫째 날인 1597년 8월 13일 조선 대포의 사정거리 밖인 남원성 교외(郊外)에 진영(陣營)을 설치하고, 북문을 제외한 3면을 포위하여 남원성을 향하여 조총 사격을 가했다. 그들이 북문을 제외한 것은 전투를 포기하고 도망하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조‧명 연합군은 소형 대포인 승자총통(勝字銃筒)과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아 그들을 격퇴했다.
명의 부총병관(副摠兵官) 양원(楊元)이 전주성의 유격장(遊擊將) 진우충(陳愚衷, ?-?)에게 재차 지원을 요청했으나, 진우충은 전주성을 비울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끝내 오지 않았다.
둘째 날인 1597년 8월 14일 왜군은 성을 포위하여 진을 치고, 조총과 대포로 번갈아 공격했다. 명군은 왜군이 도착하기 전에 성 주위에 빽빽하게 모여 있던 민가들을 불태워 없애고, 주민들은 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왜군들은 그 민가의 담벼락을 엄폐물(掩蔽物) 삼아 성을 향하여 조총을 쏘아 조‧명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또 공성(攻城) 기구를 제작하고, 참호(塹壕)를 메우는 등 본격적인 공성전(攻城戰)을 준비했다. 또 남문 쪽을 공격하는 왜군은 남문 앞의 광한루에 불을 질렀다.
예로부터 남원(南原)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 소리를 들었다. ‘하늘이 고을을 정해준 땅이고, 비옥한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다’라는 뜻이다. 그러한 남원 하면 사람들은 ‘광한루(廣寒樓)’을 떠올린다.
▲우리나라 최고 누각 남원(南原) 광한루(廣寒樓)
우리나라 최고 누각은 경복궁(景福宮)의 경회루(慶會樓)이다. 궁궐의 누각과 지방의 누각을 비교할 수 없으니까, 경회루를 빼놓고, 북한까지 포함한 우리나라 4대 누각 하면 ① 남원(南原) 광한루(廣寒樓), ② 평양(平壤) 부벽루(浮碧樓), ③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 ④ 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이다. 이 순서를 바꾸어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원 광한루를 1위로 꼽는 이유는 건축미뿐만 아니라 광한루원(廣寒樓苑)의 풍광, 스토리와 깊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소설 『춘향전』의 배경과 다양한 행사와 관광객이 많은 점도 그 이유이다.
광한루는 소설 『춘향전(春香傳)』 속에서 이몽룡(李夢龍)과 성춘향(成春香)이 연못 위에 세워진 오작교(烏鵲橋)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 곳으로 유명하다. 『춘향전』은 조선 제2 르네상스(문예부흥운동) 시대(조선 제1 르네상스 시대는 15세기의 세종 시대)인 영‧정조 시대(18세기)에 저작되었고(정학한 연대는 미상), 저자는 미상이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전투에서 불 타버린 광한루는 『춘향전(春香傳)』 이전의 것이었다.
▲남원(南原) 광한루(廣寒樓)와 오작교(烏鵲橋)에서 사랑에 빠진 성춘향(成春香)과 이몽룡(李夢龍)
광한루를 처음 건축한 사람은 세종 때의 명재상(名宰相) 황희{黃喜, 1363(고려 공민왕 12년)-1452(조선 문종 2년)}였다. 황희는 청백리(淸白吏)이자 명재상 중의 명재상으로서 조선조 최장수 재상이었다. 황희는 온유하면서도, 소신(所信) 있는 언사(言事)로 유명했다. 그는 자신이 한 말대로 현실이 돌아가지 않을 때 번복하는 일은 있었어도, 근본적으로는 임금 앞에서도 정언(正言)과 직언(直言)을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유배(流配, 귀양)를 간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황희의 사람됨을 안 임금들은 정적인 황희를 다시 불러서 중용(重用)했다. 조선의 개국(開國)을 반대한 황희를 태조(太祖)는 용서해서 중용했다, 황희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태조의 5남‧제3대 태종)을 반대하고, 이방석(李芳碩, 태조의 8남)을 지지했으나, 왕위에 오른 태종은 황희를 중용했다. 또 황희가 충녕대군(忠寧大君, 태종의 3남‧제4대 세종)을 반대하고, 양녕대군(讓寧大君, 태종의 장남)을 지지했으나, 왕위에 오른 세종은 황희를 중용했다.
조선에서 법적인 호칭이 아니라, 통칭(通稱)인 ‘재상(宰相)’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적용되었다. 첫째, ‘정3품 이상 정1품의 벼슬, 즉 당상관(堂上官)’을 ‘재상’이라고 했다. 둘째, ‘정2품(판서 등), 종1품(좌찬성, 우찬성 등) 및 정1품(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재상’이라고 했다. 셋째, ‘정1품(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재상’이라고 했다. 넷째, ‘영의정’을 ‘재상’이라고 했다.
황희는 태조 때에 입 바른 소리를 하다가 여러 번 파직 당했고, 1406년(태종 6년) 47세에 형조판서를 시작으로 해서 여러 판서직을 두루 역임했다. 1416년(태종 16년) 음행(淫行)을 저지른 세자(世子)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옹호하다가 파직되었고, 공조판서로 재직 중인 1418년(세종 원년)에는 양녕대군을 폐세자(廢世子)하고, 충녕대군이 왕위 계승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상왕(上王, 태종)의 진노를 사서 남원(南原)으로 유배를 갔다. 하지만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이 붕어(崩御)하자, 1422년(세종 원년) 세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황희를 불러서 중용했다. 1409년(태종 9년) 47세의 황희는 형조판서를 시작으로 해서 여러 판서직을 두루 역임했고, 1426년(세종 8년) 64세에 우의정, 1427년(세종 9년) 좌의정, 1431년(세종 13년) 69세에 영의정에 올라, 1449년(세종 31년) 영의정을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했다. 이듬해인 1450년(세종 32년)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이 붕어했고, 황희{黃喜, 1363(고려 공민왕 12년)-1452(조선 문종 2년)}는 2년 후인 1452년(문종 2년) 문종(文宗, 1414-1452, 재위 1450-1452)과 같은 해에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황희는 판서‧정승을 40년간, 삼정승을 23년간, 영의정을 18년간 역임했다. 이렇게 황희는 조선의 ‘최장수 재상’이었다. 재물(財物)에 초연했던 청백리(淸白吏), 온유(溫柔)했으나, 언사(言事)에는 추상(秋霜) 같았던 ‘황희 정승’은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본받아야 할 귀감(龜鑑)이다.
임진왜란의 인물은 아니지만, 명재상 황희{黃喜, 1363(고려 공민왕 12년)-1452(조선 문종 2년)}의 초상화를 게재하고 싶어졌다.
▲작자미상, 조선의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 초상>(제작연대미상, 비단채색, 120.7×70.0cm, 서울역사박물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모사본 <황희(黃喜, 1363-1452) 초상>
(1926년작, 견본채색, 80.0×54.0cm, 진안 화산서원)
황희(黃喜, 1363-1452)는 본관이 장수(長水 : 장수 황씨)이고, 개성(開城)에서 출생했으며, 아호(雅號)는 방촌(庬村)이고, 시호(諡號)는 익성{익성(翼成) : 익성공(翼成公)}이다. 그는 사후(死後)에 전북 장수(長水)의 창계서원(滄溪書院), 경북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祭享)되었고, 전북 진안(鎭安)의 화산서원(華山書院), 경기도 파주(坡州)의 반구정(伴鷗亭)에 영정(影幀, 초상)이 봉안되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방촌집(庬村集)』이 있다.
위의 황희 초상화를 그린 초상화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은 ‘옹달샘 <26>’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가 있다.
공조판서 때인 1418년(태종 18년) 황희가 양녕대군을 지지한 문제로 남원(南原)으로 유배를 갔다고 했다. 남원은 오지(奧地)가 아니라, 요지(要地)였다. 그러한 남원으로 유배를 갔다는 것은 다시 불러들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철저한 유배생활이었으면 행동이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황희는 남원에서 그러한 유배생활이 아니었기 때문에 1419년(세종 1년) 누각(樓閣)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누각이 광한루(廣寒樓)의 전신(全身)인 ‘광통루(廣通樓)’였다. 황희는 6대조 황감평(黃鑑平, ?-?)이 세운 서재 ‘일재(逸齋)’를 헐고, 그 자리에 더 큰 규모의 누각을 세우고, 그 이름을 ‘광통루(廣通樓)’라고 했고, 독서로 소일했다. 황희는 이전에도 많은 독서를 했지만, 그때의 독서가 후일 명재상이 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1444년(세종 26년)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내려가 남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상찬(賞讚)하여 “달나라 미인 항아(姮娥)가 사는 월궁(月宮) 속에 있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같다”라고 하여 ‘광한루(廣寒樓)’로 개명했다. 1461년(세조 6년) 남원부사(南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이 보수했고, 요천(蓼川)의 물을 끌어다가 하늘의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고,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만난다는 오작교(烏鵲橋)를 만들었다. 이 오작교는 무지개다리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58m)이다. 1582년(선조 15년) 전라도관찰사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광한루를 크게 증축(增築)하고, 연못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을 상징하는 봉래섬‧방장섬‧영주섬을 만들고, 봉래섬에는 배롱나무(목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었고, 영주섬에는 정자 ‘영주각(瀛州閣)’을 세웠다. 섬과 섬 사이를 사다리꼴의 다리로 연결한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누원(樓苑)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광한루의 역사를 보면 관광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예술‧역사 등의 문화 요소, 즉 스토리와 의미가 있어야 관광명소(觀光名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소설적‧전설적‧신화적 허구(虛構)일지라도 스토리와 의미가 있어야 관광명소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광한루가 1597년 8월 14일 왜군의 방화(放火)에 의해 불타버렸다. 그 날 광한루의 방화는 남원성의 함락과 1만 명의 조‧명 연합군과 조선 백성 순절(殉節)의 신호탄이었다. 광한루 불길은 조‧명 연합군에게 큰 심리적인 공포감을 주었다.
그렇게 정유재란(1597) 남원성전투에서 불타버린 광한루는 1607년(선조 40년) 작은 누각이 복구되었고, 1638년(인조 15년) 남원부사(南原府使) 신감(申鑑, 1570-1631)에 의해 광한루가 복원되었다. 편액 ‘廣寒樓’(광한루)는 선조의 부마(夫馬 : 왕의 사위)이자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한 척화오신(斥和五臣) 중의 한 명으로서 명필이었던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의 글씨이다. 지금의 ‘廣寒樓’(광한루) 편액은 대한민국 제2, 4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정훈(趙定勳, 1914-1987)의 글씨이다. 광한루 뒷면에 있는 편액 ‘湖南第一關’(호남제일관)은 1855년(철종 6년)에 남원부사 이상억(李象億, ?-?)의 글씨이다. 『춘향전(春香傳)』의 배경으로서의 광한루는 1638년(인조 15년) 남원부사 신감에 의해 복원된 바로 그 광한루였다.
그 후 1794년(정조 18년) 남원부사 이만길(李萬吉, ?-?)이 영주섬의 영주각(瀛州閣)을 복원했고, 1869년(고종 6년)에는 광한루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북쪽에 다락을 세우고 층층대를 만들었다. 1925년 수리공사 때 누의 동쪽 구석에 직실(直室)을 마련했다. 1931년 춘향사(春香祠)를 짓고, ‘萬古烈女春香祠’(만고열녀춘향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김은호(金殷鎬, 1892-1979) 화백의 춘향 초상을 봉정했다. 1963년에는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호수 주위를 정비하여 국악원, 월매(月梅)의 집과 방장섬에 육모정(六茅亭)을 세웠고, 광한루를 문화재 보물 제281호로 지정했다. 1964년에는 방장섬에 방장정(方丈亭)을 건립했고, 1965년에는 영주각(瀛州閣)을 단청했으며, 1969년에는 호수를 확장하여 수중누각 완월정(琓月亭)을 세웠고, 북쪽의 정문을 후문으로 하고, 남쪽에 정문을 신축하여 ‘廣寒淸虛府’(광한청허부)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1983년 경역(境域)을 더욱 확장, 정비하여 광한루를 사적(史蹟)으로 지정했고, 2008년에는 광한루원(廣寒樓苑)을 명승 제33호로 지정했다.
광한루와 광한루원 확장 또는 정비 사업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남원 광한루를 유명하게 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에 열리고 있는 ‘춘향제(春香祭)’이다. 1999년 제69회 때부터는 매년 양력 5월 5일에 시작해서 점점 행사기간이 길어져서 한 달을 넘게 계속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 미인선발대회는 ‘미스코리아(Miss Korea)’이다. 1957년 시작한 이래 올해(2014년) 제58회 대회가 열렸다. 이보다 훨씬 먼저 시작된 것이 미인선발대회가 춘향제의 ‘미스춘향’이다.
춘향제는 1931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남원 유지(有志)들이 주축 되어 권번(券番 :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의 기생(妓生)들과 함께 기금을 조성하여 춘향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제사(祭祀)를 지내게 되었다. ‘춘향제’는 『춘향전』만큼이나 소설적인 허구(虛構)로 시작되었으나,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 제20회 때부터는 단순한 제사(祭祀)를 탈피하여, 향토문화예술 축제(祝祭, Festival)의 형태로서 ‘춘향제(春香祭)’로 명칭을 바꾸었고, 또 ‘미스춘향’ 선발대회도 하기 시작했다. 1931년 시작한 이래 올해(2014년) 제84회 춘향제가 열렸다.
다시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로 돌아온다.
셋째 날인 1597년 8월 15일 왜군은 성을 포위하여 조총과 대포로 번갈아 공격하는 한편, 성 밖의 풀과 볏짚을 베어와 쌓기 시작했다. 명군(明軍)은 그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것은 공성전(攻城戰)을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어둠이 깔리자 왜군은 그 풀과 볏짚을 성벽 가까이에 쌓기 시작했다.
넷째 날인 1597년 8월 16일 왜군은 본격적으로 총공격을 폈다. 왜군은 풀과 볏짚 더미를 딛거나 사다리를 타고 성을 넘기 시작했다. 동문과 서문의 명군이 먼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 안은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명군 중에는 북문을 통해 달아나는 병사도 있었다. 성 안에서 벌어진 백병전(白兵戰)에서 1대16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명군은 맥없이 스러져 갔다. 명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했다. 달아나다가 살해당하는 병사도 있었다. 명군 3,000명은 거의 다 전사했다. 명군 부총병관 양원(楊元)의 휘하 장수로서 동문을 맡았던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1597), 서문을 맡았던 천총(千摠) 모승선(毛承先, ?-1597), 남문을 맡았던 천총(千摠) 장표(蔣表, ?-1597)도 전사했다. 북문을 맡은 조선군은 잘 방어하고 있었으나, 얼마 후 배후(背後)에서 파도처럼 밀어닥친 왜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전라병마사 이복남(李福男, ?-1597)과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1597)는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 뛰어들어 장렬히 순사(殉死)했다. 조선군 1,000명은 거의 다 장렬히 전사했다. 남원부 민간인 6,000-7,000명도 도륙(屠戮)당했다. 이렇게 하여 남원성(南原城)은 왜군에게 비참하게 함락되었다.
명군의 부총병관 양원(楊元, ?-?)은 말을 타고 달아나 전주(全州)로 갔다. 그는 명나라로 소환되어서 처형되었다. 광양현감 이춘원(李春元, 1571-1634)은 살아나서, 병조참의(兵曹參議, 정3품), 우승지(右承旨, 정3품),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종2품)를 역임했다. [다음 호에 계속 / 2014.7.25.(금). 조귀채]
첫댓글 작가님! 이글을 보면서 역사적으로 일본의 조경은...
평지에 돌과 모래를 이용한 조경의 흐름을 알수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의 조경은 그러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