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德 마님
몇 해만에 모처럼 된장을 담갔다. 복더위를 지내고 나니 결이 삭아 된장은 한결 감칠맛이 나는 것 같다.
요즘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장 종류가 많아 주부의 일손이 사뭇 간편해졌다. 하지만 장이란 아무래도 사람의 성과 얼이 담겨야 제 맛을 내는지라 시중 제품에선 전례 고유의 ‘品’이나 ‘格’을 느낄 수가 없다.
예로부터 된장엔 오덕(五德)이 있다 했고, 된장을 다른 말로 ‘오덕’이라 칭했다. 우리 집 된장을 일컬을 땐 나는 한 수 더 떠 ‘五德 마님’이라 부른다. 그 말속엔, 정성을 들여 담근 장에 대한 애정과 함께, 맛이 썩 좋은 된장이라는 은근한 자부심이 한 자락 깔려있기도 하다. 아울러 된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무수한 고뇌를 의연히 견디어낸 한 여인의 모습 같은 걸 느꼈기 때문이다.
된장의 오덕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원심(圓心)과 항심(恒心)과 불심(佛心), 그리고 선심(善心)과 화심(和心)이다. 원심이란 된장이 다른 맛과 섞여도 제 맛을 잃지 않는 것을, 항심이란 오랫동안 상하지 않는 내성을, 불심이란 비리고 기름진 냄새를 없애주는 정화작용을, 선심이란 매운 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을, 화심이란 어떤 음식과도 폭넓게 어울리는 조화의 성품을 의미한다.
옛 어른들은 장맛이 모든 음식 맛의 기초가 된다 하여 장을 담그는 일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장이란 묘한 것이어서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는 멀쩡했던 장맛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주위에서 보기도 했다. 때문인가, 장을 담글 땐 길일을 택하여 목욕재개를 하고, 장항아리 둘레엔 금줄까지 드리우기도 한다. 정성의 도가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이 간다.
장 담그기 전, 나도 나름대로 길일을 잡아보았다. 덜 바쁘고 몸의 상태가 좋은 날을 길일로 택한 것이다. 장 담그는 날 아침, 나는 매무새부터 다듬고 잠시 고개를 숙여 모처럼 담그는 된장이 맛깔스레 담가져 일 년 내내 우리 가족의 건강을 맡아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이를테면, 오덕 마님의 그 오덕이 함께 하기를 빈 것이다.
나는 전래의 방법대로 소금물을 넉넉히 부은 단지 속에 잘 말려둔 메주를 넣고 붉은 고추와 통깨와 대추를 띄웠다. 문제는 숯이다. 참숯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항아리에 금줄을 둘러놓는 일은 생략한다 치더라도 잡냄새를 없애주는 숯덩이만은 빠뜨려선 안 될 일이다. 결국 참나무 토막을 구해다가, 불을 지펴 아쉬운 대로 숯을 만들어 띄웠다.
이쯤 되고 보면, 내 깜냥으론 제법 공을 들인 셈이다. 덕분인지 금년 된장도 성공작이 된 듯싶어 내 혼이 담긴 장이라고 혼자 흐뭇해하기도 한다. 된장을 담글 때 성의를 다했다는 생각에 나는 어떤 음식이나 반찬보다도 귀하게 여겨졌다. 된장이란 재료만 있다 해서 즉석에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아니지 않는가.
요즘에야 뉘에게도 뒤지지 않는 된장 예찬론자가 되었지만, 예전엔 된장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외관으로 보이는 음식의 빛깔과 분위기를 중시했던 젊은 시절의 일이다. 그러던 내가 언젠가부터 그 텁텁하고 구수한 된장 맛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세월 따라 식성도 변한다더니, 아마도 내 나이 삼십 중반을 넘기고부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시기는 내 삶 속에 찾아드는 갖가지 고통으로 인내와 의지를 부단히도 되 뇌이던 무렵이다.
된장의 맛, 그건 귀족스런 맛은 아니다. 산뜻함이나 얕은맛을 내는 사치로움도 없다. 그 맛은 서민의 맛이요, 그것도 산전수전을 다 겪어낸 달관의 맛이다. 그래선지 나는 된장찌개를 먹을 때마다 그 편안하고 깊은 맛에서 삶의 풍상을 묵묵히 견뎌온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여인에 비유함은, 된장이 여인의 손을 빌어 만들어지고, 여인과 함께 생활하는 때문일 게다. 된장은 한을 안으로 삭히며 부덕(婦德)으로 승화 시켰던 우리네의 옛 여인과 너무 닮은 듯하다. 그것은 또한 자신에게 누누이 다져왔던 나의 내밀한 바람이기도 했다.
된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거기엔 기나긴 파란과 거듭되는 자기 변신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콩을 푹푹 삶아 짓이기는 것이 그렇고, 쑤어진 메주가 일정 기간 잘 썩어야 하는 것이 또한 그렇다. 싹을 틔우기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묻혀 썩어지듯 메주는 본래의 제 모습과 제 속성을 버려야 한다. 철저히 비우고 버려지는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된장의 관문을 통과한다.
완숙으로 이르는 여정 또한 짧지도 쉽지도 않다. 메주는 짜디짠 소금물에 자신을 우려내는 수련기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 후에야 된장의 형태로 항아리에 담겨진다. 그러나 아직 힘겨운 수련과 구도의 과정이 모두 끝난 게 아니다. 삼복의 염천 하에 결을 삭히는 마무리를 또다시 감내해야만 한다.
원심과 항심과 불심, 그리고 선심과 화심을 일컫는다는 오덕. 된장이 어찌해서 이런 오덕의 품성을 갖추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푹푹 삶아지고 짓이겨지고, 그것도 부족해 다시 처참히 썩어지는 고통을 통해 비로소 오덕의 성정을 지니게 된 것일 게다. 아니 오덕으로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이는 시련과 극기로 거듭나는 변신의 미학이요, 재생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급속한 흐름과 함께 이제는 우리의 음식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때문인가 너나없이 조급하고 덕이 메마른 척박한 세상을 살아가고들 있다. 물질의 풍요를 얻은 대신 정신의 덕목을 상실한 셈이다.
한낱 음식을 통해서도 미덕을 기릴 줄 알았던 조상들의 혜안을 생각해본다. 오덕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헤아리며…….
첫댓글 평범한 된장 이야기를 이렇게 맛깔스럽게 깊이 있게
끌어내는 민혜샘 매력에 또 한 번 빠지면서
오늘도 배웁니다.
ㅎ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맛깔스러웠다면 된장이 그런 식품이니
그리 됐겠지요.
글의 소재는 여러 사물에 분포돼있습니다.
희곤샘도 좋은 글감을 찾아보세요.~~^^♡
등단작부터 남달랐네요^^~
시어머님이 돌아가시자 간장이 새카맣게 변해 버렸던 일이 떠오릅니다~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
네. 그런 일을 많이 봤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체로 등단작이란 한 작가가 앞으로 어떤 성향의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방향이 깃들여있다고 어느 샘이 말씀하셨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