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나름대로,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고통 속에 지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는데에도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은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실패도 아니다. 우리는 너무 결과만을 집착하고,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있다.
일단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향해 외면적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이든 결과가 나올 때까지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공 혹은 실패라는 외면적 결과는 순간이다. 우리는 성공이나 실패와 같은 순간적인 결과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의 과정이 사실은 결과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다. 그 과정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정말로 가치있는 체험이다. 이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성과인 것이다.
단지, 여러분이 과정이 진정한 성과라는 것을 인식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성과를 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과정이 진정한 성과이다」 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성과는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성과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을 뿐이다.
이러한 진실을 확신하고, 성과가 수면위로 올라올 때까지 인내하며, 계속 노력한다면, 임계점을 뛰어넘고, 성과는 수면위로 반드시 올라온다. 수면위로 올라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마치 바다에서 낚시를 할 때, 낚시줄에 걸린 작은 물고기는 금방, 수면위로 올라온다. 그러나 물고기가 크면 클수록 수면위로 올라올 때까지의 시간이 긴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목표를 향해, 어떤 일을 시작했으면, 성공이라는 물고기는 이미 잡힌 것이다. 이 물고기가 수면에 올라오는 시간이 긴가 짧은가만이 문제인 것이다.
잡힌 큰 물고기가 금방 올라오지 않는다고 중간에서 포기하면, 큰 선물을 놓치는 것이다. 노력한 의미가 없어진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 이미 성공이라는 물고기가 잡혔다」는 확신과 「결과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나타난다」는 확신을 가지고, 인내하며,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예를들어 설명하겠다. 특히 영어같은 어학공부가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쓰는 문화권에서 자랐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유창하게 영어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와 상관없는 문화권에서 자랐고, 나이가 50정도 되어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어를 유창히 말하기는 어렵다.
몇년 꾸준히 공부해서, 단어를 어느 정도 암기했고, 문장도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물론 들리지 않으니까 말할 수도 없다. 그러면,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도중에서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현실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증에서 포기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50세를 넘어서 영어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영어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수면위에 올라오지 않아서 그렇지, 수면 밑에서는 큰 성과가 있다.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영어실력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하는 때가 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들리지 않았던, 영어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입 밖에서 자동적으로 영어가 나오게 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이 원리를 나름대로 체계화시키면, 50이 넘어서 시작해도 영어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영어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가 있다.
이러한 영어학습의 노하우는 영어권에서 자랐기 때문에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나, 영어 조기 교육에 의해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큰 성과이다.
50이 넘어서 자신이 터득한 영어비결은 영어 때문에 고통을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영어교육을 받아 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노하우를 모르기 때문에, 영어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이라는 물고기가 크면 클수록 도중에서 거의가 포기하고 만다. 그것은 성공이라는 물고기가 수면위로 올라오기 전에 주변에 드림킬러(dream killer)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드림킬러들의 수는 성공이라는 물고기가 크면 클수록 많아진다는 우주의 법칙이 있다. 드림킬러들은 전혀 여러분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여러분의 꿈을 짓밟는 드림킬러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러분의 가까운 곳에 있다. 예를들어, 배우자, 형제, 친구, 친척 등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는 못할지언정 가능성을 짓밟는 드림킬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무엇인가 정의로운 큰 뜻을 세우고 뜻을 위해 나아가려고 하면 여러분 주위에 있는 드림킬러들은 여러분을 과거로부터 계속 관찰해왔기 때문에, 여러분의 과거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고 여러분을 판단한다.
여러분의 가능성을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가치를 공교육인 학교 교육에서는 등한시한 것이 사실이다. 즉 공교육이 알맹이가 빠진 교육이었던 것이다.
국영수 중심의 학교의 공교육에서 서열을 중시하고, 개개인의 진정한 능력과는 상관없이 대학입시 수능시험에서의 점수 차이로 능력을 가르는 잘못된 사회적 교육적 관습이 한국 땅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대학입시 수능시험이 끝나면, 수능배치표를 보고 적성이 아니라, 본인의 점수대에 맞는 대학이나 학과를 찾기에 바쁘다.
한번, 비명문 대학에 진학하면, 평생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한번 명문대학에 진학하면, 영원히 능력있는 사람처럼 평가되는 잘못된 사회적 관행은 시정되어야한다.
대학입시 수능시험처럼 답이 정해진 문제를 잘 맞춘다고 능력있는 자가 아니다. 지금과 같은 지구문명의 대변혁기에는 정해진 답이 아니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 창의적인 사고를 가진 자들이 요구되고 있다.
정답이 정해진 것은 사실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그렇게 세뇌된 교육을 받아왔을 뿐인 것이다. 정답이라고 생각한 것들 중에서는 정답이 아닌 것도 정말로 많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구의 대변혁기에는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하는 창의적 사고가 중요하다. 그리고 역발상이 필요한 시기이다. 선천시대의 정답이 오답이 되기도 하고 오답이 정답이 되기도 하는 시대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어야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꿈 과 비젼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드림킬러가 아닌 그들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행동력을 높게 평가해, 그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우리가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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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樹千年翠님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새시대에 사람은 머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사는 시대입니다. 새시대는 지식으로 사는 시대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시대입니다. 사랑이 곧 무한 가능성입니다. 무한 가능성을 가지고 싶으면 사랑을 가지면 됩니다. 사랑 앞에서는 의문은 봄에 눈이 녹듯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곳에는 의심이 계속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믿음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역으로 사랑이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천국이라는 것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주면 그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천국에는 의심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해서 우리가 사는 곳을 믿음으로 충만한 천국으로 만듭시다. 귀한 댓글을 달아주신 松樹千年翠님께 사랑과 감사를 전합니다.
하하하하하~! 생명수님! 감사합니다,. 무사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성인은 誠者라 했습니다. 至誠如佛이 [덕화만발의 정신]이지요!
너무 반갑습니다. 별 일 없으신거죠?
그리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 이미 성공이라는 물고기가 잡혔다」는 확신과
「결과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나타난다」는 확신을 가지고, 인내하며,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감사해요! 건강 조심하시고요! 하하하하하하!
역시 덕산님의 호탕한 웃음은 영원하시군요. 웃음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덕산님의 호탕한 웃음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영원히 행복 속에 사시는 분이 덕산님이시라는 것이죠. 무사귀환을 축하한다는 덕산님의 말씀을 들으니 감정이 묘합니다.
至誠如佛이라는 말씀이 정말로 멋집니다. 지극한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겠지요. 부처가 되는 방법은 정말로 간단하군요, 지극한 정성만들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군요, 지극한 정성을 들이는데에는 뭐니뭐니해도 진리에 대한 진심에서 나오는 기도이지요. 결국 진리에 기도를 열심히 하면 스스로 부처라는 것을 깨달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가 부처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진짜 부처가 되겠지요.
저도 덕산님을 만나 너무 반갑습니다. 덕산님을 비롯한 여러 도반님들 덕분에 건강하게 잘 있었습니다. 덕산님도 늘 건강에 조심하세요. 귀한 댓글을 주신 덕산님께 무한 사랑과 무한 감사 그리고 무한 존경심을 전합니다.
@생명수 하하하하하! 감사합니다. 무엇에나 정성을 다하면 성공합니다.
부처도 정성을 다 하면 바로 부처이지요!
그 誠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것이랍니다.
마치 저의 웃음소리 같이요! 하하하하하하!
@덕산 무엇에나 정성을 다하면 성공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새세대에 중요한 것은 정성에다 방향성을 추가해야 보다 멋진 성공을 할 것 같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에 정성을 다해야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겠지요. 많은 사람들을 불행을 초래하는 것에 정성을 다해서 개인을 비롯해 일부 사람들만 성공하면 성공했다고해도 진정한 성공은 아닐 것입니다.
@덕산 중학교 때 과학시간에 속력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물리 시간에는 속력과 속도를 가르칩니다. 그러면 속력과 속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거의 비슷한 점인데에 차이점은 바로 속력은 방향성이 없지만 속도는 방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속력을 말할 때에는 방향이 필요없지만 속도를 말할 때는 무슨 방향으로 1 초에 몇 m 혹은 몇 cm 움직였는지를 나타내야하는 것입니다.
@덕산 이렇게 중학교 때에는 속도를 가르치지 않고 속력만 가르치다가 고등학교 때 방향성이 있는 속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성장함에 따라 방향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행복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정성을 다해야 진정한 성공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덕산 도둑질에 정성을 다하면 바로 도둑놈 소리 듣는 것이고 부처에 정성을 다하면 바로 부처 소리 듣는 것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자신이 지금 걷는 길이 바른 길이 아니라면 정지하고 방향을 바꾸어 바른 길로 가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덕산 특히 새시대는 지금까지와는 역으로 우주의 흐름이 흐르는 시대인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한 길이 잘못된 길인 경우가 많아집니다. 지금까지 한결같이 걸었더라하더라도 옳지 않으면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새로운 바른 길을 것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誠인 경우가 있습니다.
@덕산 사실 인류는 삶의 방향을 영혼이 성장함에 따라 바꾸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살다가 영혼이 조금 성장하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공동체 성원들끼리 서로 협력하는 삶을 삽니다. 처음에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살다가 영혼이 조금 성장하면 장기적 이익을 위하여 삽니다.
@덕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려면 의지력이 있어야합니다. 사실 목표를 정했어도 의지력이 있어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목표를 향해 꾸준히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지력이 약합니다. 의지력이 약하면 결심 아무리해도 소용없습니다. 결심만하고 몇일 실행하다가 그만두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덕산 예를들어 건강을 위해 매일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겠다고 결심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몇 일은 합니다만 일주일도 계속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도에서 포기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삶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誠이 마음에 밴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삶이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덕산 스트레칭을 제가 예로들었는데에 새시대에는 스트레칭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건강, 경제적, 안정, 인간 관계 등에 반드시 영향이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컨트롤못하기 때문에 어떤 목표를 정해 처음에는 목표를 향해 장가더라도 가는도 중간에 힘드는 경우를 만났을 때에는 힘든 것은 그냥 때려치우고 싶은 욕구에 지고맙니다.
@덕산 스트레칭뿐만이 아니라 금연, 다이어트, 절약 등 많은 부분에서 우라는 유혹이 오면 유혹에 그냥 넘어가려는 욕망에 지고 맙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유혹의 덪에 걸려 제대로 금연을 성공한 사람들이 적고, 제대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들이 적고 제대로 절약에 성공한 사람들이 적습니다.
@덕산 의지력이 강한 사람은 어려운 일이 주어졌을 때 할 마음이 생깁니다. 의지력이 강한 사람은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에도 할 마음이 생깁니다. 의지력이 강한 사람은 지루하고 따분한 일에도 할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 뇌에서 이러한 할 마음이 생기는 곳은 전두엽 앞에있는 피질의 상부입니다. 전문용어로는 전두전피질 상부이지요.
@덕산 또한 의지력이 강한 사람은 유혹이 와도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운전중에 헨드폰의 이 메일을 보고 싶어도 참습니다. 그 밖에도 이성이 유혹해도 충동과 욕구를 잘 참습니다. 이렇게 하지않아야 한다고 판단되었을 때 하지않는 힘이 의지력이 강한 사람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덕산 이렇게 하지않아야 한다고 판단되었을 때 하지않는 힘을 조절하는 부분은 전두옆 앞쪽 피질 상부의 오른쪽입니다.전문용어로는 전두전피질 상부 오른쪽이지요.
@덕산 의지력이 강한 사람은 목표를 달성하고자하는 소망의 힘도 강합니다. 소망의 힘을 관장하는 부분은 전두엽 압쪽 피질 중부의 아래에 위치합니다. 전문용어로는 전두전피질 중부의 아래이지요.
@덕산 그러면 의지력을 강하게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삶을 살기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진리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똑같이 세상을 보더라도 진리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들과 세상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은 세상인데에도 보이는 세상이 다릅니다.
@덕산 진리자리에서는 무엇이든지 긍정적인 관점에서 봅니다. 그런데 세상자리는 이분법적 자리이기 때문에 무엇을 보던 자기 관점으로 이분법적으로 쪼개 봅니다. 그리고 자기 관점으로 선과 악을 나눕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개성이 다 다르고 성향이 다 다릅니다. 당연히 서로 자기 관점이 옳다고 상대방 관점을 이해하고 포용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생명수 그러다보면 세상자리에서 이분법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그러면 술에 이길 장사가 없는 것처럼 스트레스에 이길 장사가 없어 의지력은 도중에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 자리에서 긍정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는 커녕 항상 마음에 평화가 오고 마음에 기쁨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의지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하여 한결같은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誠의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진리자리에 서기만하면 됩니다.
'무한한 가능성'
결과는 업따...그냥 무한한!
「결과는 없다 」라는 이충재님의 말씀은 너무 깊이가 있는 말씀이라 가슴으로 말씀을 새겨들어야지 말로 말씀의 믜미를 설명하기가 여려울 것 같습니다. 너무나 멋진 말씀으로 댓글을 달아주신 이충재님께 사랑과 감사를 전합니다.
지난 4월 12일 이후 약 두 달 보름간 우리 생명수님은 엄청나게 바쁜 삶을 사시었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일 따름입니다. 하모경과 누리경 그리고 무언가 13주렁주렁 삶을 사시고 계시었습니다, 진리가 입체적이듯 삶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바라볼 때에도 자기 중심성을 벗어날 때 비로소 입체적 진리, 역동적 삶이 보입니다. 바로 사랑과 감사와 순수입니다. 사랑은 밥을 먹여 줍니다, 그 밥은 하루의 밥이고, 영생의 밥, 하늘의 천록(天祿)입니다. 감사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 너가 있음에 내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깨닫는 마음입니다, 은혜를 알고 보은하는 삶의 실천입니다. 순수는 동심입니다. 반갑습니다.
마당바위님 반갑습니다. 약 두 달 보름간 제가 엄청나게 바쁜 것을 마당바위님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역시 마당바위님께서는 천리안이십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일 따름이다」 라는 마당 바위님의 철학적 명제 앞에 마당바위님의 사고의 철학적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동안 마당바위님의 철학적 내공이 더욱더 커진 것 같습니다.
「진리가 입체적이듯 삶도 그러하다」 라는 말씀도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오래간만에 마당바위님의 댓글을 접하니 단순한 댓글이 아니라 인생의 깊이, 사고의 깊이가 글 속에 꽉 차있군요. 이 세상 사람들은 한 사람을 볼 때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봅니다. 따라서 어떤 한 사람을 크게 바판하고 깔고 뭉게는 사람들의 특징은 어떤 한 사람의 문제라기 보다는 본인이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진리가 입체적이고 삶이 입체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부정적인 면도 있고 긍정적인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자는 누군가를 볼 때 부정적인 면을 확대해서 보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긍정적인 면을 확대해서 보는 사람일까요? 당연히 긍정적인 면을 확대해서보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인 것입니다.
일삼 주렁주렁 법칙의 삶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모성적 사랑 안에서 사랑의 실천과 감사생활 그리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누군가를 볼 때 긍정적인 면이 크게보이고 부정적인 면이 적게 보입니다. 부정적인 면이 적게 보인다고 부정적인 면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포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찬하는 삶을 삽니다.
일삼 주렁주렁 법칙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지상 천국인 것입니다. 일삼 주렁주렁 법칙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누구나 역동적인 삶을 삽니다. 마당바위님께서는 사랑과 감사 그리고 순수를 너무나 멋지게 설명하시네요. 사랑은 영생의 밥이고 천록이다. 감사는 너가 있음에 내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깨닫는 마음이다.
감사는 또한 은혜를 알고 보은하는 삶의 실천이다. 순수는 동심이다. 마당바위님의 철학적 깨달음에 정말로 저의 영혼에 큰 감동의 물결이 입니다. 고품격 마당바위님의 진수를 오늘 마당바위님의 댓글을 통하여 다시한번 확인하는군요. 고품격 마당바위님께 무한사랑과 무한 감사 그리고 무한 존경심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