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수형 기록카드에 낙서 사건 개요는 기재돼 있지 않다. 여기에 백초월은 죄명 치안유지법 위반, 2년 6월의 징역, 1940년 10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판결 언도, 출소는1943년 3월 3일, 구속된 형무소는 서대문형무소라고 기재돼 있다. 그리고 이 카드에는 백초월의 사진이 첨부돼 있고, 그촬영일자는 1940년 5월 16일로 나온다. 김광식은 이 카드를 복사해 생전에 백초월을 만났던 금암 스님(대전)을 찾아가서 카드에 기록된 인물이 백초월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
이 같은 구도에서 위의 결사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백외식의 선친 즉 백초월의 조카인 백락귀는 독립기념관 건립 운동에 자극 받아 전국을 순회하며 백초월 관렬 자료를 수집(구술 증언 확보, 문건 채록등)하였다. 그 자료에는 1946년부터 1970년까지 청주 용화사 주지를 역임하고 청주 와우산 대한불교수도원 원장이었던 윤벽산이 백초월관련 내용을 정리한 「고 백초월 스님 광복행적초 」(1985.6.6)가 있었다. 윤벽산은 8·15 해방 직수인 1950년 6월, 청주시 금천동에 있는 공동 묘지에서 '고배초월묘'라는 표목을 발견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꽃을 바쳤다. 그리고 청주교도소로 가서는 백초월에 대한 판결문을 읽어 보았다. 그는 판결문을 읽고서 백초월의 독립운동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사본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그는 충청북도 차원에서 백초월의 추모제를 올리고, 중앙광복회에 보고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6·25가 터져 피란길에 오른 그는 1951년 8월에 청주로 돌아와, 폭격에 의해 용화사와 교도소가 폐허가 되어 판결문 등 관련 자료가 모두 소실된 것을 확인했다. 이후 그는 판결문을 입수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그가 봤었던 200여장에 달하는 판결문 내용을 기억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