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벽당 왼쪽 옆에 또 다른 조그마한 정자 요월대(邀月臺)가 있는데 달을 맞이하는 정자라는 뜻으로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것을 1986년 복원하였다.
한벽당 오른쪽 계단 아래에 한벽당기적비(寒碧堂紀蹟碑)가 있는데, 1957년 가평절(嘉平節)에 김문옥(金文鈺, 1901~1960)이 비문을 지었다.
* 가평절(嘉平節) : 조상이나 종묘 또는 사직에 제사 지내던 날. 동지(冬至) 뒤 셋째 미일(未日)
한벽당 오른쪽 뒤편에 기린대로가 확장되면서 대로변으로 옮겨 세운 월당선생찬시비(月塘先生讚詩碑)가 있는데 참의공유사(參議公遺事)에 수록되어 있는 찬시(讚詩)를 새긴 것이다.
월당선생찬시비를 지나면 월당공유허비(月塘公遺墟碑)와 그 주변 빈터가 전해오고 있는데 이른바 옥류동유허(玉流洞遺墟)이다. 비문은 1827년(순조 27) 1월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가 지었다. 옥류동 유허에는 참의정(參議井)이라고 이름이 새겨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 있고, 주변 바위에 시를 비롯한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다.
타성인 소유 옥류동유적을 1827년 종중에서 매입 월당공유허비를 세웠다.
옥류동 유적은 월당공이 말년에 살았던 곳으로 바위에 새겨진 많은 글자 등 흔적이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타성인 소유로 넘어간 것을 1827년 한벽당을 중수할 때 종중에서 돈을 모아 토지를 매입하고 그 자리에 월당공유허비를 세웠다.
閑中日月 한가한 세월 속에
醉裡乾坤 온 세상이 취해 있을 때
鳶飛戾天 솔개는 하늘에서 맴돌고
魚躍于淵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
옥류동 유허는 방치되어 폐허가 되어 있는데, 주변 바위에 적힌 글씨와 참의정을 원래대로 복원한다면 한벽당과 연계하여 좋은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옥류동유허는 월당공께서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우유자적하시던 곳인데, 정유재란 때 전주가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일본군의 방화로 한벽당을 비롯한 유허가 모두 불타 버렸고, 빈터마저도 타성인(他姓人) 소유가 된 것을 종중이 힘을 모아 되찾아 복원하고 1827년(순조 27) 1월에 그 내력을 기록한 월당공유허비(月塘公遺墟碑)를 세웠다.
함께 즐기면서 사귄 분들을 살펴보면 절재 김종서, 양촌 권근, 만육 최양 등 여러 분들인데 어찌 산은 보지 않고 나무만 보기를 원하는 것을 그르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송애공(松厓公) 최광지(崔匡之)는 20대 초반 젊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지만, 18세 나 나이 어린 막내 동생 연촌공(烟村公) 최덕지(崔德之)가 정랑이 될 때까지 아직 좌랑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를 월당공이 검교 호조 참의가 된 1416년(태종 16)에 지었다고 하더라도 송애공의 나이는 이미 50대 초반이다. 송애공이 문과 급제 때 받은 홍패(紅牌)가 있으므로 그 때 가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박팽년은 1434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월당공은 1434년에 돌아가셨다. 박팽년이 서문을 지은 것이 사실이라면 월당공이 돌아가신 후 문집을 정리할 때 지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가능성이 별로 없어서 오류일 것으로 보인다.
<참의공유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1437년(세종 19) 5월 병진일에 정곤(鄭坤)이 지은 <제공찬시병서(諸公讚詩幷序)>이다.
제공찬시병서에는 월당공의 행적이 소상하게 적혀 있다.
전인 즉 앞사람은 제공찬시병서를 지은 정곤이다. 이선제, 정인지, 김종서, 신석조, 권맹손, 안평대군, 안지, 김조, 안숭신이 지은 월당공을 찬양한 찬양시가 수록되어 있다.
한벽당 아래에 있다가 기린대로변으로 옮겨 세운 찬시비와, 2014년 7월 중랑장공파종회에서 풍남동 종대 마당에 세운 비석에도 이 글은 인용되었다. 종대 마당 비석에는 앞면에 찬양시를 번역하여 새기고, 뒷면에 제공찬시병서 원문을 새긴 다음 옆에 한글로 간단하게 축약된 해석을 새겨 두었는데, 얼핏 보기에 제공찬시병서를 번역한 것 같지만 실제는 내용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