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33 <교원 편> 도쿄조고 복싱부 감독 이성수씨
(글 장혜순)
인생의 카운터펀치
‘인생의 카운터펀치를 날려라’ 지금까지도 이 가르침이 가슴에 살아있는 이들이 있다.
조고 복싱부를 정점으로 키워내기 위해 인생을 바친 이성수 도쿄조선중고급학교 복싱부 감독(향년 46세)의 제자들, 지인들로부터 그의 정열을 들어보았다.

- 도쿄 조고 복싱부, 1995년 인터하이에서 결승까지 진출. 선수를 격려하는 이 감독 -
시합조차 꾸릴 수 없었다
도쿄조고에 복싱부가 생긴 것은 1947년.
브라운관에서 본 파이팅 하라다(原田)의 펀치에 매료되어 복싱에 입문한 강용덕(姜容德 60)씨가 동료들을 모아 시작했다. 당시 쿠로다 체육관에 있던 자이니치복서 골드 조에게 낡은 글러브를 얻어 교실에서 연습을 시작하자 복싱을 좋아하는 고교생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고에는 대전 상대가 없었다.
강씨는 조선대학교에 진학한 76년, 후배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호쇼학원(도쿄도 토요시마구) 복싱부의 사토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연습시합을 요청했다. 이것이 도쿄 조고 최초의 대외 시합이었다.
이후로 조고 선수들은 도쿄도와 타 지역 현과의 친선시합에서 도쿄도 대표로 선발되었고, 승리를 거듭해 간다. 평판이 좋았던 이유도 있어서였을까, 81년 10월 3일 도쿄도 아마추어 복싱 연맹과 도쿄도 고체련(전국고교체육연맹) 복싱전문부는 제1회 도쿄도 고등학교 신인전을 시작해 도쿄조고를 멤버로 받아들였다.
“조고의 경기 참가에 대해 의논했는데, 어느 누구도 이 학교의 참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임원은 없었다. 조고 복싱부의 진지한 노력과 실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 회상한 것은 전문부 위원장을 역임한 순다이학원(도쿄도 기타구) 복싱부의 키노시타 히데오(木下英雄) 감독(76, 현 고문)이다.
초대 감독인 황의효(黃義孝), 2대 감독 강용덕씨의 노력과 더불어 ‘키노시타 감독, 테이쿄 하치오우지 고교의 코자카(小坂) 선생님을 비롯한 일본인 이사들의 협력이 컸다.’ 고 강씨는 말한다. 그리고 이 대회는 재일조선고교 선발 대 도쿄도 고교선발 친선시합이라는 큰 대회를 낳았다.
제1회는 1983년 1월 23일, 순다이학원에서 열려 일본 각지의 조고에서 선발된 선수와 도쿄도에서 선발된 일본 선수가 겨뤘다.
92년도 전적은 조고의 9승 1패 1무. 조고의 기세는 압도적인 힘을 자랑했다.
“복싱의 좋은 점은 일대일로 주먹을 겨루는 인간의 본능과 같은 것. 시합이 끝나면 사이가 좋아진답니다. 차츰 고교생들끼리 트러블이 줄어갔어요.”(키노시타 씨)

- 1994년 여름 인터하이, 준결승에 진출한 김성주씨 -
일본 전국대회에 도전
친선시합이 시작된 해인 83년부터는 조선대학교 이학부를 졸업한 이성수(58)씨가 제3대 감독에 취임했다. 학생 때는 180Cm가 넘는 장신을 이용한 아웃복서로서 활약, 후에 <단장>으로 불린 별명은 당시 TV드라마 ‘서부경찰’의 와타리 테츠야 역할에서 따왔다. 복싱에 대한 정열은 뜨거웠고 조고는 황금기를 향해 돌진해 간다.
“무조건 가슴은 뜨겁게, 그런 면을 학생들에게 매일 보여줬기에 힘든 연습을 끝내도 불만이 없었죠. 시합 때 기합을 넣는 말도 절묘했고요. 약해져 있는 금붕어에 소금을 뿌린 거죠.(웃음)” (강씨)
도쿄조고 복싱부는 도 아마추어복싱연맹에 가입해 오픈전이라 부른 강화시합과 신인전에는 출장했지만, 인터하이(고교 대항 시합)로 연결되는 도 선수권에는 나갈 수 없었다.
걸림돌은 일본의 학교교육법에서 정한 법적지위였다.
“우리는 각종학교로 취급되었으니까. 그래도 차츰 일본 선수를 이기는 선수가 늘어갔죠. 어째서 조고는 인터하이에 못 나오느냐고, 일본 선생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죠.”(강씨)
1992년, 이 감독은 큰 도전에 나선다. 사회인이 겨루는 제62회 전일본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대회에 박성준(朴成晙 43, 당시 고3)이 출장, 밴텀급에서 3위의 전적을 올린 것이다. 더욱이 이듬해 93년에는 도쿄조고에서 으뜸가는 인재였던 서위륭(徐尉隆 41, 당시 고3)이 도쿄도 복싱선수권 60Kg급에서 우승하고, 전일본선수권에 출장하게 되었다. 고교생이 사회인 대회에서 보여준 실력의 임팩트는 컸다. 그 근원에 대해 서씨는 말한다.
“넌 자신감이 있으니까 가볍게 나가라 하셨죠. 손은 후들거렸지만, 단장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링에 올라갔죠.”

- 1994년 인터하이에 첫 출장한 도쿄조고팀 -
승리에의 집념
조고의 인터하이 참가 여론이 크게 달아올랐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94년, 고체련(전국고교체육연맹)은 각종학교의 경기 참가를 인정, 조고의 인터하이 문호를 개방한다. 복싱부문은 첫 해부터 실력을 발휘해 각지의 조고에서 12명이 출장했고, 6명이 출장한 도쿄조고는 3명이 3위에 입상해 조고의 실력을 증명했다.
95, 96년은 결승까지 진출하는 의지를 보였다. 실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장소가 없던 이들이 어렵게 기회를얻은 ‘도전의 장’이었고, 발휘된 힘은 강했다.
94년도에 3위에 입상했던 안수영(安秀英 41)씨는 “인터하이 출장은 우리들의 존재가 인정된 사건이었다”고 회상한다. 함께 출장했던 권철준(權喆俊 41)씨는 조고에 입학하고 며칠 후 이 감독이 ‘부상당한 적 있나?’하고 물어 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내일부터 연습에 나오라’는 말을 듣고 입문했다.
2학년 때 혼자 계신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부 활동도 학교도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내년부터 인터하이가 시작된다’ 며 붙잡아 주어서 남게 되었다. 인터하이 숙박 장소에서 고열에 시달렸던 이 감독과 냉수마찰을 했던 일, ‘어머니에게 뭐라도 사다 드리라’며 돈을 주셨던 일… 추억담으로 꽃을 피우며 권씨는 말했다.
“언젠가 꾸중을 하실 때인데, 모두의 염원이던 인터하이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해 버리겠다며. 단장님의 각오는 굉장했죠.”
2001년에는 춘계 전국선발에서 도쿄조고의 윤문현(尹文鉉)이 우승, 같은 해 하계 인터하이에서는 오사카조고 최일령(崔日領)이 기세에 힘입어 첫 우승에 빛났다. 나아가 프로복싱에서는 2000년에 도쿄 출신의 홍창수(洪昌守), 2010년에 오사카 출신의 이열리(李冽理)가 세계챔피언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조고에서 2명의 세계 챔피언이 나온 ‘기적’은 각지의 조고 복싱부가 내 건 목표 - <전국재패>에 계속 도전한 피와 땀의 결정이었다. 이 감독과 2인3각으로 조고 복싱부의 황금기를 만들어 낸 량학철(梁学哲)·전 오사카조고 복싱부 감독은 회상한다.
“조선에서 제2차 조고권투강화훈련이 열린 1996년. 이른 아침 5시에 대동강 산책로에서 영웅탑까지 달리고 영웅탑 217개 계단 오르기를 지도하면서 이 선생이 나에게 한 말이 잊을 수 없다. 인터하이 결승전에서 도쿄, 오사카조고가 대전하는 순간 민족교육이 전국을 재패하는 일이 되겠다고요.”
2017년 10월, 제자들은 이 감독이 사랑했던 모교에서 추모 모임을 열었다. 95년도 인터하이에 출장했던 권영인(權泳仁 39)은 당일 팸플릿에 ‘인생의 카운터펀치를 날려라’ ‘위기를 기회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감독이 연습과 시합에서 격렬하게 외쳤던 말이다.
카운터펀치는 상대 공격이 들어왔을 때 되받아치는 펀치로 열세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다.
“승자도 패자도 앞으로 기나긴 인생에서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키우고 싶다, 복싱의 경험을 바탕으로 열세와 곤란을 이겨내는 인간을 키우고 싶다, 그것이 단장의 소원이었습니다.”(졸업생 전 코치 배정열(裵正烈))
*월간 <이어> 2018년 1월호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