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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는 무려 66장에 이를 정도로 방대합니다. 성경 분류 상 대선지서에 속합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 차례에 걸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받으신 고난입니다. 네 차례에 걸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서는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저와 여러분으로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엄청난 고난을 받으셨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한 아기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값없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통치자이십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곧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신학과 무수히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갖게 된 탁월한 지혜로 무장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모사이십니다. 마음에 품은 작정 곧 계획과 뜻과 목적은 환경이 아무리 급변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마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환난도, 곤고도, 박해도, 기근도, 적신도, 위험도, 칼도, 사망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다른 어떤 피조물이 할지라도 절대로 끊어놓을 수 없는 완벽한 사랑을 베풀어주는 영존永存하는 아버지이십니다. 다른 누구가의 희생을 통해서 세우는 평화PAX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음으로서 완성하는 평화Shalom의 왕이십니다. ②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때 중근동의 유일한 패자覇者로 군림했지만 급속히 무너진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던 집안에서 연한 가지처럼 나타나셨습니다.
미천한 존재같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서 자기 위에 임하는 것을 보셨다.”(마3:16),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마4:1a)라는 증거에 따르면,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왕으로서 가져야할 탁월한 자질들을 두루 갖추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삶의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단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불의가 조금도 포함되지 않은 공의로 심판하셨습니다. 겸손한 자들은 거짓이 전혀 없는 정직함으로 판단하셨습니다. 아주 미쳐버렸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타락한 세상은 마치 단단한 홍두깨와 같은 말씀으로 인정사정 보지 않고 두들겨 패셨습니다. 하루 세끼 밥을 먹듯 쉬지 않고 온갖 죄악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악인은 입술의 기운으로 아주 녹여버리셨습니다. 모든 일을 처리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의였습니다. 마땅히, 무조건 되어야할 일은 쉬지 않고 일하는 성실함으로 이루어내셨습니다.
공의롭고 정직하며 평등한 사회의 완벽한 구현을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이보다 이상적인 통치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까지 이어지는 평화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과 행복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 건설입니다. ③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공의로 통치하십니다. 그가 통치하는 나라에 속한 방백들의 삶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정의입니다. 공의가 서지 않은 나라에서는 정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의를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왕 곧 통치자가 공의를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미친 듯 휘몰아치고 거칠게 불어 닥치는 광풍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이십니다. 사납게 쏟아지는 폭우로부터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게 지켜주는 평안한 쉼터이십니다. 거칠고 메마른 땅을 완벽하게 해갈시켜주는 냇물이십니다. 생수이십니다. 곤비한 땅에게는 큰 바위같이 피할 수 있는 그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마치 소경과 귀머거리 같던 자들이 다시 완벽한 시력과 청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의 깊게 경청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실제로,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완전히 매몰되었습니다.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서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막6:35-36)라는 증거에 따르면, 시간이 가는 줄도 잊은 채 완전히 빠져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조하고 분주하여 헛된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집착하는 자들이 사물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참된 지식과 통찰력을 갖게 해주십니다.
보는 순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가야할 지 말아야할지, 쥐어야할지 버려야할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이어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경험한 일입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단이나 잘못된 일에 미혹되어 빠지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는 지극히 무지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는 혀조차 제대로 놀리지 못하던 어눌한 자들이 지극히 세련되고 가장 적당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는 고상하다고 말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간교한 자를 다시는 존귀하다고 부르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가치가 전도되어 참과 거짓이 뒤바뀌고 악덕과 미덕이 혼동되던 시대에 상습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었던 무수히 많은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모든 일이 흐트러짐이 전혀 없는 바른 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주십니다. 외부 요인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동기에서 힘겨운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이웃을 돌보고 아낌없이 베풀어주게 하십니다. 너그럽고 관대한 성품을 갖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교묘하고 간사한 자들이 끊임없이 도모하는 악한 계책이 사라지도록 해주십니다.
오히려 항상 고귀하고 덕스러운 일을 생각하게 해주십니다. 생각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존귀한 자들의 계획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게 된다 할지라도 절대로 변하지 않게 해주십니다. 어떤 장애물이 가로막을지라도 결단코 중단되지 않게 해주십니다. 반드시 견고히 서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이렇게 한 아기, 연한 가지, 한 왕은 장차 세상에 나타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왕으로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도래하자 어린나귀를 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소식을 전해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어린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겉옷을 벗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 위에 펼쳤습니다. 다른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 깔아드렸습니다. 한 목소리로 “호산나!, 복되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간절한 마음을 담아 “도와주세요, 건져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채워주세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강력한 압제와 지배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해방시켜달라고 목이 터지라고 부르짖어 외쳤습니다. 오랜 가난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자신들이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해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정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충족시켜 달라고 외쳤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해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 먹음직도 하고, 보람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한 세상 것들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이 되어달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속한 교회 역시 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목이 터지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대를 모자람이 전혀 없을 정도로 넉넉하게 채워주는 왕이 되어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기대한 대로 움직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상황은 완전히 돌변했습니다. “복되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는 외쳤던 무리들은, “예수를 당장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외치는 소리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환호에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쏟아내는 비난과 모욕과 조롱 때문에 의기소침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평정平靜을 유지하셨습니다. 묵묵히 당신이 가야할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난의 한복판으로 기꺼이 뛰어 들어가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다른 길로 가고 있다면 그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라는 그David H. Thoreau의 주장대로, 자신들의 기대 충족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버리고 말았던 무리들과는 달리 영원 전부터 하늘로부터 울려 퍼지고 있던 북소리 곧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셨습니다.
한편,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42:1)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종의 모습을 한 왕the Servant-King이십니다. 세상 왕들과는 통치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제국을 건설했던 정복자들처럼 무력과 힘을 과시하며 강압적으로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같이 연약한 당신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돌봐주십니다. 사랑과 온유로 통치해주십니다. 영적으로 눈먼 소경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탄의 포로가 되어 흑암 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영혼들을 구원해주십니다. 강제와 압박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사49:2b)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복중에 있을 때 이미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經綸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사49:4a),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말씀하셨다.”(사49:7a)라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결코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평탄치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 자체였습니다. 실제로 멸시와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사50:6)라는 증거대로,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셨습니다. 수염을 뽑는 사악한 자들에게 귀싸대기를 맞으셨습니다.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얼굴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아침마다...깨우쳐주시고...알아듣게 해주셨다.”(사50:4)라는 증거대로,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이 받들어 섬겨야할 왕이십니다. 그럼에도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악함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평화를 누리도록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매를 맞으셨습니다. 업신여김과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도 내놓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사53:12)라는 증거대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너무나도 소중한 목숨까지 서슴없이 버리셨습니다.
극한 고난을 끝까지 참아내셨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세상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충성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린나귀를 타고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 당하신 고난을 깊이 돌아보는 종려 주일 및 고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50:7)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와주시므로 심각한 모욕을 당해도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뎌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사50:8)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 가까이 계시니 누가 감히 나와 다툴 수 있겠는가? 함께 법정에 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당당하게 고발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한 번 해보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50:9)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와주고 계신다.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희생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와 여러분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세상 누구라고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과 다툴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와 여러분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저와 여러분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의 성가 곡에는 “...고통의 길 돌로로사 그 작은 마을엔 / 양과 같은 예수 왕 중 왕 주 예수 / 당신과 나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의 길 가네 / 고통의 길 돌로로사 갈보리 언덕으로 / 가시관을 머리에 쓰고 고통스런 그 모습 / 채찍의 상처에선 피가 흐르고 / 고통의 걸음마다 죽음 부르는 사람들의 함성.../ 양과 같은 예수 왕 중 왕 주 예수 / 당신과 나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의 길 가네..”라는 가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사랑 때문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다고 노래합니다. 유대 랍비인 그Moredechai Kaplan는 “만일 당신이 (어떤 변화도 없이) 회당에 들어올 때의 사람 그대로 회당을 떠난다면, 당신은 회당에 오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당해내신 엄청난 고난을 돌아보는 예배를 드리고도 여전히 변화된 어떤 모습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사도는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벧전2:21)라고 외쳤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내신 고난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세상 자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구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가신 길을 따라가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