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16
[經]
“마음에 마음이라는 상[心相]이 없으나
허공을 취하지 않으며,
모든 행(行)이 생하지 않으나
적멸(寂滅)을 증득[證]하지도 않으며,
마음에 출입이 없으므로
본성[性]이 항상 평등하며,
모든 법의 실제가
한결같이 결정된 성품이므로,
그 어떤 단계[諸地]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반야바라밀(船若波羅蜜)이다.”
[論]
‘마음에 마음이라는 상이 없다’는 것은,
자기 내면을 관할 때
마음의 상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허공을 취하지 않음’이란
마음이 비어 있다는
공성(空性)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증도혜(證道慧)라 한다.
‘모든 행이 생하지 않음’이란
모든 행이 본래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적멸을 증득하지도 않음’이란
무생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밖을 교화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교도혜(敎道慧)라고 한다.
‘마음에 출입이 없으므로
본성이 항상 평등하다’는 것은
앞의 2도(道)가
항상 서로 분리되지 않음을 말한다.
움직이면서도 언제나 고요하고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움직이므로
출입이 없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 병행하되
한편에 치우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본성이 항상 평등하다’고 하였다.
‘모든 법의 실제가
한결같이 결정된 성품’이란
증득하는 도의
항상 고요한 상(相)을 설명한 것이니,
그 상은 진제(眞諦)와 같고
법성(法性)과 동등하다.
‘그 어떤 단계[諸地]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머물지 않음’이란
가르치는 교리가
항상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니,
10중법계(重法界)에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적조혜(寂照慧)에
머물러 지체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 가운데에는
깨달아 비춘다는 뜻과
법으로 삼을 만하다는 뜻과
쟁론을 끊었다는 뜻이 구비되어 있다.
이를 위에서는
‘3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을 출세간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이상 6바라밀에 대한
개별적인 설명을 마친다.
[經]
“선남자야,
이 6바라밀은
모두 본각(本覺)의 이로움을 얻어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가
초연히 세간을 벗어나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총괄적인 설명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6도(度)가 해탈과 동일함을 밝히고,
다음에 해탈이 곧 열반임을 드러낸다.
‘모두 본각의 이로움을 얻어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6바라밀을 처음 닦아
모두 본각과 같아지고,
본각 자체가 그대로 드러나
본각의 이익이 행해지기 때문에
여래장에 들어가는데,
그 본성이 본래 고요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바뀌거나 전변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6바라밀은
본각의 이로움을 얻기 때문에
망념과 유전(流轉)하는 모양을 멀리 떠난다.
그러므로
‘초연히 세간을 벗어난다’고 하였다.
또한 법성(法性)에 들어가기 때문에
법계(法界)에 두루 미쳐
모양이 없고 작위가 없으며,
결박됨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고 하였다.
[經]
“선남자야,
이와 같은 해탈법의 모습은
모두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으며,
또한 벗어났다거나[解],
벗어나지 못했다는[不解] 구별이 없다.
이를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해탈의 모습은 형상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동요도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고요한 열반이지만 그
렇다고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論]
둘째는 해탈이 곧 열반임을 밝힌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해탈을 말하고
다음에 열반을 말한다.
‘모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한 것은,
6도의 행은
모두 본각과 동일한 것인데
본각의 모습이
상(相)과 성(性)을 떠나 있기 때문에
상(相)이 없다고 하였다.
6도의 행은
닦음도 떠났고, 행함도 떠난 것이므로
행(行)이 없다고 하였다.
행과 상이 모두 끊어졌으므로
‘모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였다.
해탈법의 모습이 이미 이와 같으니
어찌 결박을 떠난 벗어남[解]이 있으며,
또 어찌 벗어나지 못한 결박이 있으랴.
그러므로
‘벗어났다거나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 하면’은,
어째서 6도의 행을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느냐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여,
그와 같은 6도는
단지 해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반이기도 하기 때문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해탈의 모습이
무상하고 무행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해탈을 지적한 것이요,
‘동요도 없고[無動] 산란함도 없어서[無亂]
고요한[寂靜] 열반[涅槃]’이란
열반에 관한 설명이다.
앞에서 설한 6도의 행이란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본래 적정한 열반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6도가 열반이라면
어찌 모습과 행이 있겠는가?
동요하고 산란한 모습을 떠났으므로
적정이라고 하고,
또 그 적정한 본성마저도 떠났으므로
열반의 상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6도·해탈·열반은
초지(初地)에서 시작하여
불지(佛地)까지 이른다.
여기서 열반이라고 한 것은
네 가지 뜻 중에서 본래 청정한 열반,
즉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해탈(解脫)을 가리킨다.
자재하다는 뜻과
장애가 없다는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무애해탈(無碍解脫)이라고 말한다.
[經]
해탈의 뜻이 대단히 많아서
쌍도(雙道)76) 중의 해탈이 있고
3점(點)77) 중의 해탈이 있으며
오분법신(五分法身)78) 중의 해탈이 있고
십종해탈문(十種解脫門) 중의 해탈이 있는데,
그 같은 여러 문 가운데
어느 문에 해당하는가?
※76)
해탈도(解脫道)와 무간도(無間道).※※
※77)
범어의 ∴자의 모양이
3점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함.
여기에서는
열반덕(涅槃德)·지덕(知德)·해탈덕(解脫德)을
3점 중의 해탈이라 함.※※
※78)
계(戒)·정(定)·혜(慧)·
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
[論]
이는 3사(事)79) 중의 해탈이다.
해탈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는 6도의 행에
3사의 덕(德)이 있음을 드러내려고 한 것인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초지(初地)에서 이미 얻고
묘각위(妙覺位)에 이르러
마지막의 완성을 보는 것이다.
경에서도
“보살이 대열반에 머물면
큰 뜻을 세울 수 있다…”하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79)
자재(自在)·무장(無障)·무애(無碍)를 말함.※※※
[經]
해탈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껏 없던 일이라고
크게 기뻐하면서
뜻을 다시 펴기 위하여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깨달음을 구족하신 세존께서
대중을 위하여 법을 설명하시되
모두 다 일승(一乘)에 대한 설법이요
이승(二乘)의 도는 설하지 않으셨네.
일미(一味)의 모양 없는 이로움은
마치 저 큰 허공[大虛空]과 같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제각기 다른 성품[性]을 따라
모두 다 근본 자리를 얻게 하시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거듭 송한 것[重頌]이다.80)
먼저 경을 서술하는 자의 서문이 있고
게송이 시작된다.
게송은 모두 7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앞의 여섯 게송은
개별적인 게송이고,
뒤의 한 게송은 총괄하는 게송이다.
※80)
무상법품(無相法品) 서두에
세존이 삼매에서 일어나
“諸佛智地 入實相法 決定性故”라고
설법을 시작하는 부분부터가
본격적인 설법[正發言說]에 들어가는데,
이를 크게 장행(長行)과 중송(重頌)
둘로 나눈 가운데
여기서부터가 중송에 해당한다.
이 게송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 2송 1구는
(장행 중에서 논지를 간략하게 표시했던)
약표(畧標)의 부분이고,
둘째 3송 3구는
뒤의 자세한 해석 부분[廣釋]을
노래 한 것이다.
약표 중에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法相)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며,
방편과 신통으로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無相利]을 얻게 하신다’라고
하신 것은
지금 이 게송 중에서는 첫 1송으로 노래한다.
또한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2승들은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이를 알 수 있으니)
제도할 만한 중생이면
모두 일미(一味)를 설한다’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 이 게송에서는
세 가지 뜻[三義:法·喩·合]으로 노래한다.
즉 앞의 1구는 법(法),
다음 2구는 유(喩),
끝의 2구는 합(合)에 해당한다.
[經]
저와 같이 마음[心]과 나[我]를 떠나면
하나의 법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든 행(行)이
모두 다 본각(本覺)의 이로움[利]을 얻게 하여
상(相)과 견(見) 두 가지를 다 끊어 버리네.
[論]
이 아래는
자세히 해석한 부분을 송한 것인데
이 가운데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다섯 구는
무상관(無相觀)을 설명한 것이고,
다음 두 구 반은 일각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무상관을 설명하는 게송에도
정광(正廣)과 중현(重顯)이 있다.
지금 처음 두 구절은 정광의 글이다.
정광 중에도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방편관(方便觀)을,
다음에 정관(正觀)을 밝힌다.
지금 이 게송 가운데
정관을 노래한 것은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心:法執)과 아(我:我執)를
떠나게 해야 한다…’고 하고
능소(能所)를 떠나는 것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이 두 구가
바로 그 문장들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이 게송에서
‘하나의 법[一法]’이란
유(有)와 무(無)의 극단을 멀리 떠난
하나의 중도관(中道觀)을 뜻하니,
마음(心)·나[我]
두 가지 집착에서 멀리 떠나도록 한 것이다.
다음에는
거듭 설명하는 글 중에
네 개의 문답이 있는데,
지금 두 구는 두 번째 문답을 노래한 것이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든 행(行)’이라는 것은
저 첫 번째 답 가운데
‘마음의 온갖 모습[相]은
본래부터 근본[本]이 없으며…
(근본 자리[本處]가 본래 없으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글에 해당하며
동행총상관(同行總相觀)이다.
둘째 문답 중에서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게 하라’ 한 것과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며,
반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 잡힌 이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어라.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한
글 등은
이행별상관(異行別相觀)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동행(同行)과 이행(異行)은
들어가는 곳[實際]에 차이가 없으므로
‘모두 본각의 이로움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
‘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實際]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이 게송에서
‘상(相)과 견(見)
두 가지를 다 끊어버린다’고 한 것은
나중의 두 번째 문답의 게송이다.
셋째 답 중에서 말하기를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것을 그대로
게송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2견(二見:有見·無見)을 없앤다고 말한다.
또한 넷째 답 중에서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
본생(本生)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며,
그 공적함이 머무는 곳 없고… ’라 했는데,
지금 그것을 송하여
두 가지 상[二相]을 끊었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