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45)
태권도부 동기로는 여러 사람이 있는데, 이상헌, 박인유, 유진철, 김문식, 그 중에 조영배군이 상대 경영학과로 학사편입을 함께 하는 바람에 제일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가 우리은행 LA 지점에 근무하고 있을 때 내가 LA를 가족과 같이 방문했었다. 그는 헐리우드를 위시해 LA시내와 산타모니카 해변을 자신의 승용차로 자세히 안내해 주었다. 조영배가 석사학위 취득차 LA에 거주하고 있을 때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LA시내에서 수년간 영업용 택시 운전을 한 적도 있다.
조영배는 우리은행 지점장을 퇴직하고 지금은 태권도 관련 일을 하고 있다.
후배 들 중에 나와 인연이 깊은 후배는 1년 후배 차종길(체육과) 군과 3년 후배 차찬회군이 있는데, 특히 차찬회 후배는 뛰어난 태권도 실력을 살려, 대통령 경호실에 들어가 경호실 처장을 지냈다. 당시 경호실차장이 공석으로 있어 사실상 경호실의 2인자 역할을 함으로써, 공채경호요원으로는 최고위직에 오른 셈이다. 그가 퇴직 후 국립공원관리공단 감사로 갔는데, 그 때 차후배가 나를 크게 도와주었다. 나는 그 고마운 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밖의 윤진원 후배는 체구가 거대한 편인데, 연고전 시합 때 장충체육관 농구장에서 고대 공수부의 한 선수가 도복을 입고 휴식시간에 연대 측 코트로 넘어와서 응원단에 발차기를 하는 등 난동을 벌였다. 그 때 윤후배가 거대한 몸으로 뛰어가 발차기로 한 방에 그 자를 제압했고, 그는 혼비백산 달아났다. 그 광경은 TV중계 화면에도 방영된 명장면이다. 그 통쾌한 장면에 연세대 응원단과 학생들의 환호가 일어난 것은 물론이다. 윤후배는 졸업 후 중앙정보부에 스카우트 되어 특수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운동부 선후배간의 끈끈한 정은 대학 캠퍼스의 일반 클럽회원들과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운동부 선후배는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선배에 대한 예의가 깍듯하고 선배들은 후배를 잘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연세대 체육관에는 농구장과 유도장, 태권도장, 펜싱장, 체력단련장, 샤워실이 있었다. 태권도장과 유도장은 이웃사촌처럼 왼쪽은 유도장이고 오른쪽은 태권도장이었다. 따라서 유도부원과 태권도부원은 서로 친하게 지냈다. 내가 다니던 당시 유도부 선배 중에 김영환씨와 정덕환씨가 서로 동갑내기(학년은 김영환씨가 1년위)로 라이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체중은 김영환씨가 81KG 이하로 71KG 이하인 정덕환씨보다 더 무겁다. 두 사람 다 국가대표 출신으로서 기술과 힘이 단연 뛰어난, 가히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선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시합을 하면서 한 치의 양보 없이 기량을 겨루었는데, 어느 날 명륜동 성균관대 근처 유도도장에서 오전에 운명의 한판 시합을 벌였다.
먼저 김영환씨가 업어치기를 성공시켰다. 그런데 정덕환씨가 자존심 때문인지 순순히 넘어가지 않고 계속 버티다가, 김영환씨의 위에서 누르는 강력한 힘에 척추가 우지직하고 부서져 버렸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운명의 대참사였다. 한 인간의 운명이 바뀌는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이 소식은 한동안 유도계의 큰 화제였다. 그러나 운명은 모진 면도 있어, 정덕환씨는 오랜 재활치료 끝에, 비록 평생 불구자로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되었지만, 인생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에덴 장애자 복지센터를 설립하여 장애우들을 모아 쓰레기봉투를 제작, 지방자치단체에 납품하는 공익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재단이사장으로서 점점 사업 영역을 확장하였고, 정부에서 주는 수많은 표창과 훈장을 수령하기도 했다. 마치 기적과 같은 인간승리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정덕환 선배는 내가 경영학과에 학사편입 했을 때 세브란스 병원 재활의학과에서 재활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재활의학과 간호과장의 아들 가정교사 자리를 주선해 주기도 했다.
한편 김영환씨는 미국 유학을 하여 체육학 박사학위를 취득, 모교인 연세대 체육과 교수가 되었다. 지금은 정년퇴직하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유도부 중에는 나와 친하게 지낸 입학동기 박정수 군(경신고 다닐 때 미들급 전국선수권자) 이 있었는데, 그는 지금은 소식이 끊어졌다. 그가 사업이 잘될 때는 나에게 자신이 채권으로 압류하고 있던 고급승용차도 대여해 주었고, 술도 많이 사주었다. 아시안게임에서 라이트급 동메달을 딴 정재영군은 고속도로 휴게실 사업을 크게 하고 있다. 유도 4단 황의돈 군은 나와 같이 ROTC 복무 후 상경대 경영학과로 같이 편입했다. 그는 졸업 후 현대 계열 금강여행사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모여행사를 인수하여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만큼 떼돈을 벌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중동건설 붐이 엄청나게 부는 바람에 여행사 수입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이태리에 있는 친동생과 의류 무역업을 하여 또다시 많은 돈을 모아 수원 영통에 상가 빌딩을 크게 지어 임대업과 의류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유도부에 같은 학년 또 한 사람인 이근일 학형이 있다. 그는 내가 대학 초창기 무렵에는 친교가 전혀 없다가 군에서 내가 전역한 후 대학에 복학했을 때 알게 된 친구다. 그는 경기 중, 대광고를 나와 연대에 들어 왔는데, 부친이 유명한 동아기업의 회장을 지낸 분이다. 그 자신도 동아선박의 회장을 18년간 담당했다. 따라서 그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살아온 사람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사교성이 뛰어나서 대한민국에 유력인사 중 모르는 인물이 없을 만큼 마당발이다. 그의 부인은 문과대 과 후배로 집안도 훌륭하고 뛰어난 미모의 여성으로 결혼에 골인하는데 성공했다.
이근일은 2002년 대선 때 나를 이회창 대선 캠프에 들어가게 해 주었다. 그 덕분에 이회창씨가 대선에서 패배하여 내가 비록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지만, 정치세계의 속성을 이해하고 배우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게 해 주었다.
내가 고교 때는 유도를 했고, 대학 때는 태권도를 했다. 이 모두가 체력단련과 심신건강, 호신술 습득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내가 깨달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호신술에 있어서 상대방을 제압하는데 에는 유도나 태권도의 큰 기술이 아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두 가지 극히 단순한 공격만 하면 상대방을 몇 초 만에 간단히 제압한다는 것이다. 즉 손가락 두 개로 상대방의 두 눈을 먼저 찌른 다음, 상대방이 앞을 못 보게 되면, 이어서 발로 상대방의 급소인 낭심을 걷어차면 정말 귀신같이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다. 세계적인 격투기 선수도 시합에서 상대방에게 눈을 찔리면 맥을 못 쓰는 광경을 TV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래서 격투기 시합에서는 어떤 공격도 허용하나, 상대방에게 눈을 찌르거나 낭심을 발로 차는 공격은 반칙으로 간주해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술은 너무나 쉽지만 습성이 되지 않으면, 상황에 직면하여 당황한 나머지 이 기술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강광우 자서전 내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