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국제공항 독일 뤼브케 대통령 방문 모습 1967.3.4
서독 뤼브케 대통령 서면로타리 통과 하는 모습 1967.3.4
뒤편에 서면로타리 부산탑이 보이고 오른쪽에 동보극장도 보인다.
그리고 중앙로 복판에 두개의 전차선로가 선명하게 보인다.
'68년5월에 전차는 운행종료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중2시절인 저 때 학교가 서면에 있다보니 우리도 동원되어 박수치고 손을 흔들었던 것 같네요.
수영국제공항에서 재송동길, 원동교를 건너 "구"대동병원, 동래경찰서옆을 거쳐 세병교를 건너
교대앞 거제리, 하마정을 거쳐 서면로타리를 통과 중앙동에 있는 부산시청으로 향하는 모습.
저때는 양정로타리를 막 건설하던 시절이었고 양정에서 현 연제구청 신리삼거리 수영로타리
까지의 길이 완전히 개통되기 전이었습니다.
중앙동 부산시청앞 뤼브케 대통령 환영식장 모습 1967.3.4
뤼브케 방한 기념 우표 1967.3.2
(칼 하인리히 뤼브케(Karl Heinrich Lubke) / 1894.10.14~1972.4.6)
1960년대 서독에서 차관을 들여올 때 광부 5천명과 간호사 2천명 파견하여
그들이 받는 월급을 담보조건으로하여 1억 4천만 마르크를 빌립니다.
1963년 12월 21일을 시작으로 1977년까지 약 8천명의 광부와
1만 2천명의 간호사가 독일로 떠나 그 곳에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1000m가 넘은 땅속에서 석탄을 캤고, 어린 간호사들은 시신을 닦는 일을 했죠.
1964년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박대통령은 서독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국민소득이 100불이 안되던 시절에 대통령 전용기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서독정부에서는 이런 사정을 알고 국빈용 항공기를 보내주었고, 1964년 서독을 방문합니다.
1965년 우리나라는 수출 1억불을 달성했고, 그 날을 기념하여 무역의 날이 생깁니다.
뤼브케 대통령 방한 현수막 모습, 서울 세종로 1967.3.2
뤼브케 대통령 청와대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환담하는 모습 1967.3.2
서독 방문에 대한 답방의 형식으로 1967.3.2 뤼브케 대통령이 방한합니다.
뤼브케 서독 대통령부부의 방한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두 나라 대통령 내외가 환영대 위에서 네명의 어린이가 꽃다발을 선물하자
뤼브케 대통령이 호주머니에서 5마르크 은화 한닢씩을 꺼내 어린이들에게 주었다고 해요.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인자한 이웃집 신사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오래오래 기억되었습니다.
아무튼 독일정부 기술원조하에 이뤄진 인천 한독실업학교가 좋은 결실을 맺은 것을 인정하여
독일에서는 기자재 등을 기증하여 부산에 한독직업학교 설립을 무상지원(50만 달러)합니다.
그리하여 1967년 기술인력 양성을 목표로 국립한독직업학교(현 국립부산기계공고)가 개교합니다.
뤼브케 서울 김포공항 방한 모습 1967.3.2
부산시청앞 환영식장 1967.3.4
1967년 3월 4일 뤼브케 대통령의 환영식은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는데,
270만원을 들여 한국식 건축양식의 부흥대를 마련했습니다.
환영식을 마친 뒤 우리나라 회사로서는 처음 서독차관을 받았던
동래 금성사를 방문하였고, 해운대 극동호텔이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해운대 극동호텔 1967년
극동호텔에서 열린 김대만 부산시장의 오찬에 참석했고,
뤼브케 대통령께서는 김 시장으로부터 사슴과 다람쥐가 수놓인 병풍을,
대통령 부인께서는 시장 부인이 선물한 진주목걸이를 선사받았습니다.
그런데 1967년 동백림사건(간첩단 적발사건)으로 서독과의 관계가 불편해졌고
이후 서독의 지원이 중단되자 정부는 부산한독직업학교를 공업계 특수목적고로 지정합니다.
1974년3월1일 국립부산기계공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게 됩니다.
(국립 부산한독직업학교는 1967.3.11 대연동 국립 부산수산대학내 임시 가교사에서 개교
하였으며 1968.2.2 해운대 우동 신축교사로 이전하였고 1974.3.1 국립 부산기계공업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였고 1977.9.1 국립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설립후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무려 5회나 이 학교를 방문했죠.
그래서 설립 초기부터 이 학교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몰렸답니다.
지원자격은 전국 중학교 성적 상위 5% 이내의 학생을 교장이 추천하여
이 가운데 3% 이내인 학생만 입학이 가능한 학교였답니다.
입학 후 학생 전원 공납금 면제, 기숙사에서 숙식 제공, 1인 1기 교육이 실시되었고,
졸업 후 일정 요건이 충족되면 군 복무기간 단축이라는 특전도 제공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국립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의 약 26,000명의 졸업생들은
기능올림픽 13연패를 달성하는 등 국가 기간산업인 분야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1969년까지 서독의 대통령을 지냈던 칼 하인리히 뤼브케는 1972년 사망합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야기들도 하나씩 찾아보면 연결이 되더라구요.
출처 : 네이브 블로그 "토박이 김반장의 부산이야기"
blog.naver.com/zerokim200/20164194432
첫댓글 당시 비 내리는 그날,좌천동 지금의 수정터널 진입로 부근에서 태극기 흔들며 환영하던 기억이 새록 새록.
공중에선 경찰 헬기가 주민들에게 환영나와 달라고 마이크로 계도 방송하고요.
저는 그때 보림극장 앞에서 환송식행렬에 참석하였습니다
"홍깨"님의 포스팅한 작품을 따지자는 것은 아님을 전재로, "용심"이는 늘 의심과 궁금증이
있었는데, 오늘"홍깨"님께서 포스팅한 것중에 시청앞의 환영식 사진중 10번째의 사진은
틀림이 없는 1967.3.4 시청앞 뤼브케 서독 대통령 환영식장의 사진입니다,
그렇다면 4번째 1967.3.4 시청앞 뤼브케 서독 대통령 환영식장으로 알고 있는
이 사진은 언제 누가 무었 때문에 이렇케 거대한 환영식행사를 하였을까요?
1, 시청사 전면의 양국대통령의 사진과 플랜카드,
2, 연단의 형식과 카펫이 깔린 계단의 차이점,
3, 1967.3.4. 행사 당일 비가 오는 사진과 청명한 날씨의 사진,
부울경 카페 네티즌 여러분들 "용심"이는 4번째의 사진이 궁금 합니다, 알켜 주세요,~~ ♡˘◡˘♡
날씨가 다른걸로봐서 하루전날의 예행연습(리허설)이 아닐까요?~ Willkommen 간판이 왼쪽 길바닥에 보이네요
@재규어 예행 연습?, , 그 생각을 못하였네요, 궁금증을 해소하여 주신 "재규어"님께 감사합니다,
복장이나 종이장식 쓴 걸로 봐서는
예행연습이라고 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혹시 환송행사였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WILLKOMMEN'을 비롯해서
환영의 의미를 담은 벽면 장식물들이
보이지 않다 보니 그런 생각도 드네요.
신문사에서 보유한 장면과도 겹치는데
본 행사가 아닌 예행연습을 두고
공중촬영하지는 않았을 법하기도 합니다.
@ㅅㅁㅅㅁ72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본문에 나온 흑백사진보다는 컬러사진과
공통점이 더 많이 있는 행사 장면입니다.
흑백사진은 박영감 초도순시 때 일 것 같으네요,
저도 학교때 부산 교통부거리에서 환영식에 동원되어 거리에서 박수치며던 기억이 나네요~그날 비도 엄청 내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