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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몸을 형상화하는 방법
임현준
—이정록, 「나왔다」, 시선, 2023 겨울.
—유종인, 「그러니까 만세」, 애지, 2023 겨울.
—박형준, 「메아리」, 문학동네, 2023 겨울.
—정끝별, 「천사가 있다면」, 창작과비평, 2023 겨울.
—함기석, 「걷는 사람」, 애지, 2023 겨울.
요즈음 사람들은 정신적 안정과 육체적 풍요라는 토대가 동시에 구성되어야 ‘생활의 안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의 안위에 대한 이러한 풍토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정한다면 다음 스텝은 매우 명확해진다. 정신과 육체의 접점으로서 ‘몸’을 상정해볼 수 있겠고, ‘생활의 안위’를 ‘몸의 안위’로 보다 선명하게 상상할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나는 현대인의 정신적 안정과 육체적 풍요를 가늠하게 하는 통찰적 단위를 ‘몸’이라 부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따져보면 문학이 문학일 수 있는 경계는 말 그대로 ‘몸’으로 수렴되고 발산되는 순간을 문장화하는 데서 발견된다. ‘몸’으로부터 고통받고 ‘몸’으로부터 해방되는 생활의 순환이 ‘태어남’과 ‘살아감’과 ‘병들어감’과 ‘죽음’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문학이 진정성 있게 대하는 범위로서의 영역이다. 문학에서 ‘몸’에 관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매우 중요하다 간주되면서도 냉안시받아 왔고, 거북하고 껄끄럽게 여겨지면서도 화끈하고 생동감 넘치는 주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시의 할 일은 생활에 대한 보편적 공감을 얻어낸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시가 철학과 종교와 정치같이 보편적 관념을 드러내면 안 된다. 시는 철학과 종교와 정치 같은 관념을 속으로 품고는 한껏 시치미를 떼야 한다. 그 와중에 하면 안 되는 것과 꼭 해야 하는 것의 외줄타기 속에서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야 한다. 그 해답은 서정시가 왜 공상(空想)과 망상(妄想)이 아닌 상상(想像)에서 비롯되어야 하는지에 이미 나와 있다. 시는 현실적이지 못한 생각과 망령된 생각이 아닌 ‘읽는 이에게 있을 법한’ 생각을 형상화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시인의 진솔한 경험의 목소리가 있어야 하고, 우리의 생활 가운데에서 찾아낸 한순간의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우리 모두가 외면하거나 잃어버렸거나 숨겨둔 오래된 감정의 발견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생활’로서의 ‘몸’을 이해하고 관조한다. 그냥 보고 이해하는 ‘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몸’으로서의 시를 창작해낸다.
사람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은 인류사를 역동적으로 구성하게 한 요소이다. 시인은 ‘태어남-늙어감(성장, 경험, 나이 듦 따위의 살아감)-병듦-죽음’의 과정 속에서 생활의 순간을 포착해내고 그것을 통해 시적인 것과 접하게 된다. 이른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직시하거나 관조하는 데서 시가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한 생애의 ‘고통’들은 곧 ‘몸’의 총체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대서정시는 몸의 시공간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개인적인 체험을 보편적 사유로 전환시키는 데 몰두해 왔다. ‘현시대에 몸은 무엇에 현혹되는가’, ‘시인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몸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형상화하는가’ 같은 질문은 그대로 서정시가 시적 영감을 얻는 방식으로서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여기 몸의 계절 혹은 시공간의 흐름으로서 생로병사를 시적으로 증명하는 몇 편의 시가 있다.
#생(生)-태어나는 고통을 대하는 시의 외침
불교의 가르침에서 태어남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 물고 물리는 데에서 행한 대로 업을 받게 된다는 인과응보의 도상 중에 생긴 한 지점이 생고(生苦)다. 그러한 대로 ‘몸’만이 새로이 생활의 고통 속에 놓이는 새것일 따름이다. 그러니 부처님이 보시기에 한 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이번 생의 ‘몸’을 잘 보전하고 운용하는 데 당락을 정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을까.
여하튼, 모태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출생할 때까지의 고통은 사실 매우 추상적이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고, 더군다나 세상에 나서 가장 처음으로 하는 것이 태어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우는 일이다. 우리는 태어남의 시간과 공간을 부모든 친지든 누군가에게 전해 들어서 알게 된다. 그것은 그것대로 ‘나’의 순수한 기억이 아닌 채로 ‘나’가 세상에 나온 까닭에 대한 부조리를 덧대인다. ‘나’가 직접 본 적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시작이, 태어난 곳의 풍습과 사상과 사회체계가 꾸며놓은 생활에 의해 곧이곧대로 끌려가야 하는 처지가 ‘태어남의 고통’이니까 말이다.
거기다 현생은 결과이고 전생은 원인인 곳에서 인간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태어나기 이전은 기억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것이고, 전생의 결과인 현생은 인과율에 따라 생활을 운영해 나갈 선택지가 협소하게 정해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게다가 선택지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다음 생의 ‘몸’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몇 번의 생이 무기력하게 끌려다닌 것 같은 떨떠름함 앞에서, 어쩌면 선택의 여지 따위 없는 생활의 고통 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게 인간일지도 모른다. 허무한 대로 또는 무식한 대로 좋은 일에는 좋은 일이,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가 따른다는 만물의 원리를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가스라이팅처럼 생고(生苦), 태어남의 고통이 전생에서처럼 현생에 반복된다.
알에서 깬 애벌레가 말했다
— 살려고 나왔다
씨앗을 찢고 새싹이 말했다
— 살려고 나왔다
갓난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 살려고 나왔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 살려고 나왔다
가슴을 뛰쳐나오며 시가 말했다
— 살리려고 나왔다
—이정록, 「나왔다」(시선 2023 겨울) 전문
알 수 없는 생활의 고통은 영원한 것인지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나는 왜 태어났나’와 상통하고, 태어나는 순간과 태어나기 이전의 데이터가 전혀 없는 각각의 범인들은 그 자체로 생활의 방향을 잃고 살게 될 운명인지도 모른다. ‘왜 태어났나’는 곧 ‘왜 사냐’ 식의 비아냥을 내포한 채로 이번 생의 ‘몸’을 가지고 우리는 때때로 비관에 빠지곤 한다. 평범한 ‘나’와 ‘너’와 “애벌레”와 “새싹”과 “갓난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은 “살려고 나왔다”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그리고 “살려고 나왔다”를 곱씹으면서 각자의 생활에 끌려다닌다.
놀라운 것은 태어남의 고통으로부터 오는 어쩔 수 없음의 “살려고 나왔다”가 글자 하나만으로 전복된다는 데 있다. 아니, 그렇게 전복시키는 존재가 있다는 점에 있다. “살려고 나”온 존재를 “살리려고 나”온 시가 그렇고 시인이 그렇다. 뒤돌아서는 것 하나만으로 우주의 좌우가 바뀌듯, 접미사 ‘-리-’ 하나만으로도 인생의 태도가 달라진다고나 할까. 물론 “가슴을 뛰쳐나”온 “시”가 우리를 구도해줄 메시아나 미륵은 아니다. 창조주가 만든 “알”을 깨거나 “씨앗을 찟”거나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트”리거나 “태초의 빛”이 날 때와 같이,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순수한 외침처럼 “가슴을 뛰쳐나오며 시가 말”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 “시가 말”한 것에 귀가 뜨인 이들은 “살려고 나왔다”라는 불가항력의 생활이 아니라, 주체적인 태도로서 “살리려고 나왔다”라는 생활과 마주할 수 있게 한다.
사실 시인은 성자도 철학자도 과학자도 정치인도 지식인도 그 무엇도 아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설명할 길 없는 시적 영감을 말로 쌓는 자들이 세상사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겠는가. 그럼에도 시인은 세상사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목소리를 낸다. 어차피 ‘태어남의 고통’이 인과응보라는 시스템에 놓여 있다고 할 때, 생고의 원인을 아는 자도 기억하는 자도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살려고 나왔다”를 비틀고 분해하고 덧대고 재조립하면서 다른 시선을 제공하는 것뿐이다.
이정록의 시에서 “살려고 나왔다”는 순수하고 신성하고 귀하고 선한 ‘태어남’의 탄성이 아니라, ‘왜 사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절규와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의 외침이 서려 있다. 그리고 그건 모호하고 답답한 채로 우리에게 일말의 살아갈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시적 외침은 이전 생에도 보배롭고 후생에서도 귀하다. “죽음을 모욕한 죄” 같은 어느 웹툰의 대사처럼 아무렇게나 죽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작금의 현실에서 “가슴을 뛰쳐나오며 시가 말했다”에 더더욱 귀를 기울여야겠다. 시가 “살리려고 나왔다”는 건 부처도 눈뜨게 할 말이니까.
#노(老)-늙어감의 통증이 연속되는 생활에 대한 시적 이유
몸의 사철 중 가장 긴 계절은 ‘늙어가는 동안’이다. 태어남은 순간이면서 기억나지 않고, 죽음은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의 동면과 같다. 운 좋게(?) 피해가기도 하지만, 병듦은 죽음으로 가는 관문이면서 늙어가는 동안에 들러붙었다 떨어졌다 한다. 노고(老苦), 늙어가는 고통에는 성장하고 멈추고 기력이 쇠하는 육체의 생물학적 능선이 완만하게 놓여 있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는 정신적 경험이 길게 이어져 있다. 그 변화되는 생활의 정도가 통으로 감지되기 어려울 정도로 ‘몸’의 늙어가는 시간은 사계절 중 가장 길다. 마치 여름의 뙤약볕으로부터 시작되는 뜨거운 괴로움에 짙어가는 나뭇잎의 농도를 감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몸’이 늙어가는 것은 체감상 지루할 정도로 더디게 이어져 있어서 늙어가는 고통에 대해 무지각하게 된다고 하겠다. 물론 살아온 시간이 긴 이들일수록 되돌아보면 한 줌 세월이라 깨닫게 되는 지점들에 대해서는 생의 속도에서 오는 이물감이라는 또 다른 명제로 논박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두어야겠다.
어깨 염증을 오래 참았더니
어느 날부터 팔을 돌리기가 어렵다
팔을 앞으로 돌릴 때도 그렇지만
팔을 뒤로 젖혀 돌릴 때는 더 아파온다
팔이 너무 아프니까
팔이 내 팔 같지가 않다
아픔이 이제 팔의 주인 같다
아플 때마다 참아온 팔이
안 아플 때조차 견뎌온 팔이
아플 때마다 따로 떼어논 팔이
아픔을 모르는 나를 만들어온 것같이
언제부터인가 앓아온 나라를
그래도 이게 내 나라인가
묻는 이들이 좌로 우로 북적일 때마다
하나같이 그들은
어떻게든 만세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
만세를 못 불러서
오히려 팔이 아파온 사람들
못나도 가만 불러주고
잘나도 만세를 불러주길 오래 참았더니
아픈 팔만 남은 몸뚱이같이
그 아픈 자식들만 남은 나라같이
팔이 나으려면 아파도 돌리세요
그러면서, 동네 의사는 때로 義士나 烈士처럼
내 팔을 그윽이 대신 들어주진 않는다
그래도 아픔 몰래 팔을 살살 돌리다
경계 삼엄한 아픔한테 걸려 팔을 도로 내릴 때
내 몸은 내 마음한테 그런다
언제까지 아픈 팔을 데리고 살 거냐
언제까지 아픈 나라를 고개 숙이고 살 거냐
그때에 이르러 당신이 한 말씀
아픔을 가만히 참고
먼저 팔이 어디까지 올려지나 올려 보세요
통증이 잡아끄는 팔을
조금씩 또 조금씩 들어 천장을 향해 하늘에 올릴 때
아 나 같은 어깨 병신 팔 병신도
뭔가 한 것만 같은 으쓱함이여
그러니까 만세
그러니까 만세
말을 닫고 그저 입만 꽃처럼 벌리고
아픈 팔이 안 아픈 팔까지 거들어 올리고
서로 좀 즐거이 아파보자구
서로 좀 살 떨리게 기쁜 아픔 찾아보자구
벌써 가로수와 정원수와 죽어가는 나무들까지
언제부턴가 두 팔 들어 올린 지 오래고
하늘 높이 기다린 지 오래다
—유종인, 「그러니까 만세」(애지 2023 겨울) 전문
유종인의 이 시는 연속되는 ‘몸’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늙어가는 동안의 지루함은 노고(老苦), 늙어감의 고통에 의해 선명히 체감된다. “어깨 염증을 오래 참았더니/어느 날부터 팔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것은 생활의 고통 같은 피로가 오랫동안 쌓여왔기 때문이다. 피로는 비단 “팔”이라는 육체적 고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앓아온 나라를/ 그래도 이게 내 나라인가” 하고 견디며 끌려온 마음까지도 ‘몸’의 고통에 포함된다. 육체의 통증과 정신의 아픔이 서로 전이되고 옮는 관계랄까. 그렇다면 이 시에서 정신과 육체는 동음이의어로서의 ‘몸’이고, “오래 참”음은 생활의 피로로서 ‘몸’이 견딘 노고의 계절이 된다. 그리고 “경계 삼엄한 아픔한테 걸려 팔을 도로 내릴 때” 시인과 시를 읽는 우리는 “내 몸”의 “아픔”이 살아오는 동안 지속적으로 받아온 고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통증”은 순간순간 느껴지는 것이지만 “아픔”은 두고두고 지속되는 것이어서 “가만히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이 노고의 과정이 될 수도 있겠다. 결국, 살아가는 동안 깨달을 수 있는 건 “아픈 팔만 남은 몸뚱이같이/ 그 아픈 자식들만 남은 나라같이” 어쩔 수 없는 고통의 견딤밖에는 없다. 견딤의 연속은 늙어가는 생활의 연속을 무감하게 계속 버텨내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선명함은 ‘몸’의 일대기에서 가장 길고 지리멸렬해서 우리를 무지각에 빠뜨리곤 한다. 태어남과 죽음은 짧은 순간으로 수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늙는 시간은 평생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생이 통째로 지각되지 않으면서도 노고의 시간은 매번 새롭고 생생한 통증으로 강렬하다는 점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내 몸은 내 마음한테 그런다/ 언제까지 아픈 팔을 데리고 살 거냐/ 언제까지 아픈 나라를 고개 숙이고 살 거냐” 하고. 그러한 불가항력의 생 한가운데에서 시가 할 수 있는 것은 “통증이 잡아끄는 팔을/ 조금씩 또 조금씩 들어” 올리는 일이고, “아 나 같은 어깨 병신 팔 병신도/ 뭔가 한 것만 같은 으쓱함이여/ 그러니까 만세/ 그러니까 만세” 하고 소리 내보는 일이다. “만세”만큼의 팔동작만으로 늙어가는 동안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고통받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나’에게 익살 같은 어떤 충격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운명에 대한 저항이든 생에 대한 대항이든 생활에 대한 항거이든 그 어떤 목소리를 내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픈 팔이 안 아픈 팔까지 거들어 올리”게 하고 “서로 좀 즐거이 아파보자구” 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살아생전 팔을 들어 올리고 사는 “나무들”과 같이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만세”의 시는 “뭔가 한 것만 같은 으쓱함”으로 늙어가는 길고 긴 계절에 파문을 일으킨, 시의 시적 의무를 다한 작품이다.
#병(病)- 병듦의 고통에 대한 시의 처방
병고(病苦)가 미치는 육체와 정신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병리학적으로나 정신분석학적으로 할 말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룰 계제가 아니어서 논외로 두기로 한다.
몸에 있어 병은 어둡고 음습한 것이다. 쪼그라들고 녹고 주름지고 메말라가고 바스러지고 헐거워지고 빠지고 깨지고 썩고 잡아먹히는 이미지가 병고이다. 어두운 밤의 짙은 안개와 같고, 성난 비바람과 파고가 공격하는 것과 같고, 차갑고 시린 늪이 끌어당기는 중력과 같고, 뼈를 풍화시키는 사막의 메마른 입김과 같은 시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는 잃어버림의 심상이고 없어져 감의 은유며 죽음으로 가는 관문으로서의 상징이다. 여기에는 필시 원망과 희망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 불안과 체념과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다. ‘몸’의 입장에서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는 강도가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고통이 병고일 것이다. 생고는 우리가 애초에 선택할 수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한 고통이고, 노고는 우리가 무감하게 견딜 정도의 연속된 고통이라면, 병고는 선택적으로 오지만 가장 선명하고 직접적으로 ‘몸’의 쇠락을 체감케 하는 고통이다. 더불어 인간이 인간에게 처방전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이기도 하다.
그녀는 사막의 죽은 나무에 기대어 상념에 빠져 있다
죽음이 수액까지 모두 빨아들여
잎사귀 하나 없는,
몸통과 가지가 모두 하얀 나무 아래에서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신기루에 빠져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도 떠올리기 어려워
요양원 방 한구석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간혹 환희에 젖은 얼굴로
천장을 바라본다
그녀는 저 단단한 장막에도
반드시 구멍이 뚫릴 날이 있을 것이며
그 틈 아래로
빛이 새어나오리라 확신했다
장막의 뚫린 틈 아래로
세상이 궁금해서
눈을 대고 지상을 관찰하는
천사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장막 틈으로 떨어지는 천사의 눈물이
환한 빛으로
마른 목을 축여주리라 믿었다
우리의 죄는 물 한 방울에도 사해질 수 있을 것이오며
그럴 때면 그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을 것 같은
사막의 나무 아래에서
기도를 올린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나날이 사막이 넓어져가고
그녀의 요양원 침대 머리맡에는
죽어가는 행운목 하나가 놓여 있다
그녀는 하루하루 모래바람 사이로 풍경을 본다
모든 게 지워져가는 것을 보며,
지워져간 모든 것이 떠나 살고 있는
그런 곳이 사막이라고 여기며
그녀는 매일 여행을 떠난다
언제나 사막의 죽은 나무에 기대어
지평선을 바라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두운 요양원 방 한구석에 웅크린 채
행운목의 마른잎을 만지며
지평선에서 울려오는
메아리를 듣는다
—박형준, 「메아리」(문학동네 2023 겨울) 전문
‘몸’이 겪는 병의 고통은 그 자체로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어둡게 하고 지치게 한다. 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오래전부터 병마(病魔)로 불리며 마귀나 악마와 같은 존재를 상정하게 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 괴기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능하다. 아무튼 ‘마(魔)’는 악마나 마귀 이외에도 ‘한 가지 일에 열중하여 그 본성을 잃어버리는 일’이라는 사전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병이 난 몸은 그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병마일 터이다. 본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병고는 병마의 종류에 따라 제각각 겪는 고통의 방법도 범위도 달라진다. 그중 ‘기억’에 관한 병마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지능·의지·기억 따위의 정신적인 능력이 상실된 상태를 야기한다. 그리고 생고 이래로 쌓아온 노고의 과정을 허물어버린다. 노고가 그 자체로 한 인생의 본성을 형성한다고 할 때, 병고는 정신과 육체가 쌓아온 ‘몸’의 본성을 잃어버리게 한다. 한 존재의 생활이 무너지는 것이다.
박형준의 시 「메아리」는 기억이 지워지는 병으로부터의 고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죽음이 수액까지 모두 빨아들여/ 잎사귀 하나 없는,/ 몸통”에 찾아든 병마는 “자신의 이름도 떠올리기 어려”운 기억에 관한 질병이다. 기억은 마음의 자양분이며, 마음은 ‘몸’을 운영한다. 기억이 지워져 “사막이 넓어”지면, 마음도 지워져 ‘몸’의 운영도 황폐해진다. 그러므로 기억의 “모든 게 지워져가는 것을 보며,/ 지워져간 모든 것이 떠나 살고 있는/ 그런 곳이 사막이라고 여기”는 “그녀”의 병고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조차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막의 죽은 나무에 기대어 상념에 빠져” 있는 것도, “천사가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도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몸’의 회복을 바랄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을 암시한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에 대해 종교적인 상상력으로 악마와 마귀라는 빌런을 대적하게 할 “천사”를 불러오곤 하니까.
또한 “머릿속에선 나날이 사막이 넓어져” 가는 만큼 기억을 잃어버리는 고통은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시적 화자와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어찌할 수 없음’을 직접적이고 현실적이고 즉각적으로 목도하게 만든다. 시인이 “죽어가는 행운목”처럼 ‘몸’이 쌓아온 본성을 잃어버릴 때의 풍경을 ‘사막화가 진행 중인 이미지’로 직관적 상상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시인이 마지막에 내놓은 처방전을 받게 된다. 기억이 지워지는 병고처럼 “사막”이 된 “지평선에서 울려오는/ 메아리를 듣는” 건 “죽어가는” 고통이라고. 그리고 그 “메아리”는 “그녀”와 시인과 시를 읽는 이들 모두가 서로 단절된 채로 저마다의 고통을 상상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시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행을 떠”나는 “그녀” 곁에서 “사막의 죽은 나무에 기대어/ 지평선을 바라보”듯 관조하는 것뿐이라고. 한 편의 시가 내리는 병고에 대한 처방전은 고통에 대한 관조와 그 관조를 통한 공감의 “메아리”라고 말이다.
#사(死)-죽음을 상상하는 시의 활로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태어남이 처음은 아니듯, 죽음 또한 끝은 아니다. 고통의 차원에서 보자면, 지금 살아 있는 노고의 결과가 업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전생은 반드시 있었어야 할 것이다. 딴에는 살고 있는 지금 생활의 업보가 누적될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후생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몸’의 새로운 갱신이 우리의 인과율에 대한 이해를 방해한다. 몇 번의 업보가 반복되었는지도 알 길 없고, 매번 살았던 ‘몸’이 견뎌온 노고(老苦)와 병고(病苦)의 기억도 되살릴 수 없다. 거기다 죽음을 겪어본 자들에게서 단 한 번도 경험담을 들어본 적 없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죽음의 고통은 유사체험일 뿐인 간증이나 사이비들이 떠드는 신의 쪼잔한 형벌밖에는 없다. 그래서 죽음의 고통은 다른 고통들과는 달리 상상하는 고통에 가깝다.
주름진 엄마의 무릎이나 팔꿈치로 올 것이다
얼마나 무릎 끓고 얼마나 기도하느라 저리 튀어나온 것인지
엄마의 무릎과 팔꿈치는 간절과 절박이 첩첩이 접힌 가파른 그늘이다
해질 대로 해진 실패의 계단처럼 주저앉아 있다
부서진 엄마의 고관절로 올 것이다
얼마나 딛고 서고 얼마나 쓰러지느라 저리 삭은 것인지
엄마의 용가리통뼈에 든 바람은 희망의 폐광이다
백년 묵은 뼈일수록 잘 진 백기처럼 펄럭이는 이유다
그리고 고장 난 엄마의 콩팥 깔때기로 올 것이다
죽음을 살며 죽음을 완성해가는 엄마의 오줌보에 고이는 붉은 피는 살아 있는 사원이다
뒤섞인 피와 오줌을 걸러주려고 비린내 나는 이 여름에 손님처럼 다녀갔다
그리 많은 피를 쏟아내고 야윌 대로 야윈 두 날개뼈를 활짝 펼치고
모든 생명의 처음에 천사가 있고 모든 생명의 다음에 천사가 있다
처음과 다음을 몸에 담고 사는 우리에게 천사는
팔월의 엄마처럼 되풀이해 올 것이다
—정끝별, 「천사가 있다면」(창작과비평 2023 겨울) 전문
어떤 인간이라 하더라도 이전 생과 다음 생을 알 수 없다. 고통의 축적을 분기별로 정산하는 차원에서 죽음 이후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불멸회귀하는 생의 순환 속에서 한 마디를 이루는 ‘몸’의 유한한 궤적이 그 단서가 될 뿐이랄까. 시인도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공상과 망상이 아닌 현실적인 것을 기반으로 도출된다. 정끝별의 「천사가 있다면」은 제목 자체가 시 전체에 관여하는 가정적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팔월의 엄마처럼 되풀이해 올 것”이라는 답을 향해 살아 있는 동안의 현실적인 기억들을 소환한다. “주름진 엄마의 무릎이나 팔꿈치로 올 것”이라든가 “부서진 엄마의 고관절로 올 것”이라든가 “고장 난 엄마의 콩팥 깔때기로 올 것”이라든가는 노고와 병고의 축적된 시간을 호출하고 기리는 일이고, 그것은 시인의 현실적인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진앙이 된다.
생전 “엄마”의 노고와 병고가 죽음 이후에 도래할 후생을 상상케 한다. 그리고 각 연의 두 번째 행부터 펼쳐지는 ‘몸’의 이미지들은 후생의 모습을 비근하면서도 가슴 저리게 하는 생생함으로 그려낸다. 역시 이 시의 탁월하고 재미있는 점은 현생의 모습이 후생의 모습 그대로 재현된다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엄마”의 존재는 보편적 의미를 띠게 된다. “모든 생명의 처음에 천사가 있고 모든 생명의 다음에는 천사가 있”다는 통찰은 “천사”로 올 “엄마”는 ‘몸’의 연을 맺은 육체적 생모로서의 개체적 “엄마”가 아니다. “엄마”의 희생과 사랑으로 “엄마”가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은 “엄마”를 닮은 “엄마”가 새로이 태어나 또 다른 “엄마”를 키우는 “되풀이”는 보편적 의미로서의 “엄마”를 상정케 한다. 그리하여 “처음과 다음을 몸에 담고 사는 우리”라는 시인의 상상력으로 사고(死苦), 즉 죽음의 고통이 무섭고 두려운 형벌이 아닌 것이 된다. 오히려 “처음과 다음”으로서 ‘몸’의 죽음이 친근하고 포근한 그 어떤 것으로 승화됨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하여 죽음이 완전한 사라짐에 대한 공포라면, 「천사가 있다면」은 “모든 생명”은 “천사”이고 “엄마”여서 완전한 사라짐 자체가 모순이라 역설한다.
유사체험의 간증이나 사이비의 예언과 달리, 시가 죽음을 노래하는 방법으로서 찾은 하나의 활로는, 노고와 병고의 ‘몸’ 기억을 가지고 현실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활로는, “처음” 존재는 “다음” 존재로 “되풀이해 올 것”이라는 위로처럼 “팔월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 “올 것”이라는 보편적 희망을 이끌어내는 일일 것이다.
#팔고(八苦)- 시와 시인이 존재하는 이유
정신은 육체에 거처하고 육체는 물질을 통해 세계와 조우한다. 여기서 육체라는 명사는 그대로 구체어이지만, 생활과 오감과 감정의 주체로서는 추상어일 수 있다. 서구 쪽에서는 정신이 곧 ‘나’이다. ‘나’ 자체로는 세계와 접촉하지 않으며 단지 바라보는 시선으로서만 존재한다. 관조라는 철학적 태도의 뿌리에는 ‘나’라는 순수한 정신이 육체라는 영토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발현된다라는 절대믿음이 서려 있다. 물론 동양에서도 정신과 육체의 상관관계를 수신(修身)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는 것도, 업보에 관한 인과율에 대한 이야기도, 하늘과 땅과 사람이 마땅히 거기 있어야 할 이치도 결국에는 육체를 바로 해야 정신(마음)이 바로 선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다.
그림자가 계속 뒤를 따라온다
내가 일생을 똑바로 걸어가서
배고픈 무덤에 잘 들어가는지
검안하라고 빛이 보낸 검시관
—함기석, 「걷는 사람」(애지 2023 겨울) 전문
불교에서는 생로병사 사고(四苦)에다가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 넷을 더하여 팔고(八苦)라고 한다. 사랑하는 존재와 헤어지는 고통이나, 원한이 맺힌 이들과 만나야 하는 고통이나, 얻고자 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고통이나,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물질적 집착과 탐욕 때문에 받는 고통이나 하는 것들은 결국,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가는 ‘몸’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림자”들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배고픈 무덤에 잘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한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쉽고 자명한 룰을 이해하고 있다손 쳐도 ‘몸’이 견디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안고 “일생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조차 용이하지 않다. 앞서, 이쪽이나 저쪽이나 오래된 것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가름을 조율하면서 정치‧경제‧사회‧과학‧기술‧교육 등을 다듬어왔다고 했다. 그러한 조율들이 굴곡의 역사를 거치면서 당도한 현대에는 더 많이 가지거나 더 많이 소유하거나 더 많이 누리거나 하는 것과 더불어 함께 누리거나 다 같이 나누거나 더 많이 책임지거나 하는 가치들과 맞물리게 된다. “배고픈 무덤에 잘 들어”가기가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이럴 때, 시인은 또 시는 우리를 “검안”하는 “검시관”이 아닐까. 살아 있는 동안의 흔적이나 상황을 조사하고 따져 생로병사의 몽타주를 만드는 시인. 그리하여 생로병사의 고통이라는 “그림자”가 우리의 이번 생을 “똑바로 걸어가”게 해주는 시. 이 모두 “빛이 보낸 검시관”이면 좋겠다. 그러니 이번 생의 ‘안위’를 위해, 일평생 끌고 다닐 ‘몸’을 위해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와 “빛이” 보낸 시에 쫓기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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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준
약력
2018년 애지 등단. 애지 편집위원.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