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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앙이란 무엇인가? ( 사 66:1-4 )
글쓴이: 김강석 목사
오늘날 보편적인 기독교 신자들 중에도 자신의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데 문제가 큽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아주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보편적인 신자들 가운데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문제를 세상에 다양하게 있는 하나의 종교적인 문제로 생각하여 단지 내 마음에 드는 종교를 하나 선택해서 그것을 옳은 것으로 믿고 자신의 마음과 삶에 평안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편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생각하는 신앙이라는 것도 내가 단지 교회를 다니는 나의 유익을 위한 정도로 교회를 찾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별로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하나님께 목덜미를 붙잡힌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한 번 붙잡힌 사람은 자신의 마음대로 신앙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찾을 때는 친구에게 붙들려서 다닐 수도 있고, 때론 부모님 때문에 다닐 수도 있습니다. 또 내 스스로 좋아서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께 내가 목덜미를 붙들린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신자의 올바른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끝까지 포기 안 하시고 내 안에 소원을 두시고 자기 기뻐하신 대로 나를 끌고 가신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가는 자는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달아 아는 자로 자기부정, 자기부인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는 대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그 마음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신앙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단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중요한 자신의 인생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중대한 인생 문제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힘의 원리의 구조를 띤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가 더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들을 보다 중요한 자기 문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반면에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고 세상을 사는 신앙생활은 단지 자기 문제에 잠시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단지 잠시 잠간 세상을 사는 인생 문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죽느냐? 사느냐?의 아주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서 목사인 저는 바로 그 문제를 오늘 여러분에게 보다 성경적인 올바른 말씀을 가르쳐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저와 여러분들이 마지막 때의 자신의 영원한 영혼의 운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세상의 인생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분명 제가 드리는 말씀에는 흥미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붙들려서 이 자리에 나와 있다고 생각하는 신자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것은 세상의 인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죽고 사는 중대한 자신의 영원한 생명의 문제로 여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본문 3절에 보니까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 한 즉"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본문 3절을 보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정성을 완전히 묵살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성을 전혀 받아주시지 않고 인정하시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최고의 방법은 뭐였습니까? 제사 행위이며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스스로 자각했고, 또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주일이면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 신자임을 자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종교의식에 온갖 정성과 열심을 포함시키기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가 있을까? 그래서 찬양대를 세우고, 값비싼 오르간 피아노와 다양한 악기들을 준비하여 사람들에게 귀를 즐겁게 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관심을 두고 몰두했던 부분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사람들은 종교적인 예배 의식에다가 자기들의 신앙과 정성을 집어넣어서 예배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종교적인 의식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거나 영광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증거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제사하고 제물을 잡으면서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고 자기들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소를 잡아서 바치는 것은 사람을 살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어린 양으로 제사하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은 것과 같고, 예물은 돼지의 피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구약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나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에는 전혀 차별을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복을 기대하고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골 3:5절 기록에 있는 말씀처럼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1장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제사와 절기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의 이유는 그들이 복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제사와 절기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그들 마음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1:17을 보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선행을 배우는 것이고, 공의를 구하는 것이고,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고,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약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제사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하나님께 붙들려서 살아가고 있는 인생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여타 다른 약한 자들과 자신을 동등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나 제사라는 것은 물질이나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를 예배라고 하고, 자신이 직접 제물 되어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따라서 복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약자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약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삭제 당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재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나의 믿음(신념), 나의 정성과 열심 노력, 사랑, 이런 모든 것까지 하나님께 삭제당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믿음 역시 하나님의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결국 내 믿음 가지고 예배하고, 내 믿음 가지고 헌금하고, 내 믿음 가지고 봉사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나로 하여금 예배하게 했고, 헌금하게 했고, 봉사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믿음을 하나님께 뺏겨 버린 삭제당한 상태인 것입니다.
내 믿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이제 내 믿음이란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나를 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믿음 있음을 타인에게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바로 약자인 것입니다.
사랑 역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으로 부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사랑하도록 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삭제당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었음을 발견하며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가 진정한 약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고, 그 약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삭제당한 자기부인의 자리에 서는 자가 약자이고, 그 마음을 가리켜서 가난한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런 신자를 하나님이 권고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권고하신다는 것은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면서 끝까지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본문 2절을 보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상태이고 이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창조가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이 되어서 완료가 된다는 걸 인정하는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고, 하나님은 바로 그 마음이 가난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신자가 그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 심령에 통회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말합니다.
(특히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 죽이는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그 본질을 직시하게 되었고 그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게 바로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내 것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빼앗기고, 삭제 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의 소유 욕구가 점점 소멸되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가득 찬 풍선에 바람이 모두 빠져 나가 버리는 것 같이,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빨려 나가 버리는 그런 경험을 한 사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신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일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더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힘을 빼앗아 가버리는, 삭제당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당시 이스라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말씀에 두려워 떠는 삶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자기들의 노력과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본문 1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고 말씀합니다.
세상 모두가 다 하나님 아래 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너희가 무슨 집을 짓겠느냐? 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의해 인간과 무관한 하나님에 의해 건설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처소, 즉 교회는 인간들의 그 어떤 기특한 행위로도 지어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나라가 하나님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짓겠다고 내어 놓는 그러한 인간들의 종교 행위나 선행을 오히려 가증한 것이며 악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 세 예루살렘? 그 나라는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연합이 되는 상태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집은, 처소는 내가 짓는 거야! 예레미야 31:31-34절과 에스겔 37:14절, 그리고 에스겔 36:26-27절에서처럼 내가 새 영으로 너희 속에 뚫고 들어가서 내 처소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뚫고 들어가서 그들의 자아를 해체시켜 버리고 나로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내가 거하는 처소를 율법으로, 제사로 열심히 희생제사 지내면서 짓겠다고 하니?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건 율법주의잖아! 그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전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냥 표피적으로 껍데기로 이해하게 되면 그 성전은 곧 섬김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성전은 인간들이 해야 할 일로 가득 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집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하여 잘못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도둑질 하지 마!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한 율법주의 그 성전을 부수시면서 강도의 굴혈, 도적의 굴혈 이라고 그러시면서 야단을 치셨습니다. 내 말을 왜 너희들 맘대로 바꿔 가지고 가서 엉뚱한데 거짓을 설명 하는데 쓰니?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의식과, 특정한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것으로, 자기 힘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이고 멸망의 모습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들은 소위 우리가 지금껏 옳다고 생각했던 신앙생활이란 것들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가를 한 번쯤 생각해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아주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습관적 종교적인 모습에 속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로, 심령이 긍휼한 자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삭제당한 자로, 자기부인의 고백의 자리에 서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리며, 그 음성을 듣고 말씀에 떨면서 주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하시고, 마지막 때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예수의 흔적을 남기는 삶의 신앙의 여정에 자리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