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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 5일 추억여행
3월 26일(목)
이번 토요일(3월 28일) 전주 동생 경열이 아들 재현이가 오후 1시 효자동 소재 N 컨밴션 웨딩홀에서 결혼을 한다. 큰 아버지 입장에서 불참할 수 없어 참석하기로 했는데 거리가 거리인만큼 조금 미리 떠나기로 했다. 여행갈 때 항상 문제가 되던 두 마리의 애완견은 아예 애견센타에 맡기기로 했다.26일(목요일) 보건소 물리치료를 마치는대로 출발하기로 하고 성당제대 꽃꽂이도 미리하고 개들도 미리 맡겼다. 나름 서둘렀지만 막상 출발한 시간은오후 2시 정도였다. 삼척을 출발하여7번 국도를 타고 울진-평해-영해-영덕을 지나 포항 이터체인지에서 포항 – 대구고속도로를 타고 대구 부근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 금호 분기점에서-대구마산 고속도로를 타고 칠서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진주 톨게이트에서 진주시내로 접어들었다.숙소를 진주성부근으로 정하고 내일 아침 진주성을 들려 전주로 출발하기로 계획을 했다. 진주성 바로 앞에 있어 위치가 좋다는 성수장을 목적지로 했으나 막상 성수장에 도착하니 주차장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다보니 버킹검 모텔이 눈에 들어와 위치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숙소로 정했다.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늦게나마 저녁을 먹기위해 주변 식당을 찾아가 갈치조림으로 저녁을 먹었다. 조금 뱁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밑반찬이나 갈치조림이 맛이 있는 편이었다. 숙소에 들어와 양치질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꿈나라로 갔다.
3월 27일(금)
이른 새벽에 일어나 집사람에게 나이가 들어 잠도 없다고 타박을 받고 조금 더 누워서 뒤척거리다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주변 정찰을 나갔다. 나가보니 진주성 북문이 직선거리 30미터 정도였다. 숙소를 중심으로 다람쥐 챗바퀴 돌듣 운동삼이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돌아오니 집사람도 어느 정도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침은진주가 일찍부터 도축업이 성한 곳이기 때문에 곰국이나 선지국 등을 잘할 것 같으니 어제 저녁을 먹은식당에 가서선지국으로 먹기로 하고 걸음이 느린 내가 먼저 출발하여 가기로 했다. 결국 식당 문앞에서 뒤쫓아온 집사람과 만나 식당에 들어가 선지국을 주문해서 아침을 먹었다. 경상도 음식 답지 않게 잡냄새도 없고 아주 담백하며 깔끔해서 다시 진주에 온다면 또 이용할 것 같다.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뽀딷하게 아침을 먹고 짐을 꾸려서 숙소를 나와 진주성 북문(공남문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하여 성을 가로 질러 남강쪽의 성가퀴를 따라 촉석루 쪽으로 가서 촉석루에 갔다가 집사람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는 의암으로 내려가고 나는 내려가기가 어려워 촉석루 부근을 왔다리 갔다리하고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번이 진주성에 세 번째 였다. 1984년 남원에서 발굴조사를 하다가 하루 시간을 내어 현장에서 같이 조사를 하던 후배들과 같이 진주에 와서 진양호에서 배를 타고 한바퀴 돌아본 다음 진주에 와서 진주성 동문 부근에서 진주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진주성으로 들어와 촉석루와 의암 논개 사당에 들렸다가 서문 부근까지 걸어가 가야 유물이 주로 전시되어있는 국립진주박물관에 들렸다가 남원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고, 한번은 1987년 또는 1978년 무렵 삼척에서 고등학교 수학여행 인솔교사로 학생들을 인솔하고 진주성과 촉석루를 주마간산식으로 다녀 간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직 젊은 시기였는데 이번에는 이미 나이가 들고 몸도 예전같지 않은 시기에 와서 되돌아보니 느낌이 당시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하동에서 섬진강 매화축제가 열린다고 해서 가는 길에 들리기로하고 진주를 출발해서 국도를 따라 하동을 거쳐 화개장터가 있는 화개로 접어 들었지만 축제가 열리는 장소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다. 화개장터까지 도착했지만 벚꽃축제가 열린다는 현수막은 몇곳에 붙어있지만 매화꽃축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안내도 없고 좁은 지역이다 보니 차를 주차할 공간을 찾지 못하겠다. 화개장터 부근을 몇 번 돌다 그냥 구례 방향으로 빠져나왔다. 구례에서 다시 완주-순천 고속도로를 올라타고 상관 인터 체인지에서 국도를 이용해서 김제, 부안을 거쳐서 변산 방면으로 달리다가 변산 해수욕장 조금 못미처 원조 할매 바지락죽집에서 늦은 점심으로 바지락무침과 백합죽을 주문해서 허겁지겁 정신없이 거의 퍼 넣는 수준으로 먹어치웠다. 이제 배도 부르고 새만금방조제를 따라 군산쪽으로 가기로 했다. 새만금 방조제는 기네스북에 오른 전장 33킬로미터가 넘는 대규모 방조제였다. 만약 시간이 있어 일몰시에 붉은 노을이 지는 방조제를 건너가면 정말 장관일 것 같았다. 군산에는 고창북중 11회 동창생인 김상길이 살고 있어서 한번 만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휴대폰에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아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고 네이버 중국여행 길라잡이 방장님이신 자티님도 연락처를 알지 못해 포기하고 익산을 거쳐 전주 효자동 3가에 살고 있는 동생 집으로 오고 말았다.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아버지가 도착하셔서 아버지, 나, 동생 셋이서 근처에 대구탕을 잘하는 식당으로 가서 얼큰한 대구탕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동생집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양치질을 하고 준비된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3월 28일(토)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깨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빈둥거리다 다시 선잠이 들어서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다시 일어나니 제수씨는 벌써 머리를 만지러 미장원으로 가고 없었다. 있는 반찬과 밥솥에 있는 밥으로 아침을 대충 해치우고 양치질과 면도와 머리를 감고 그래도 정장을 입어야겠기에 챙겨온 드레스 셔츠와 검정색 싱글 양복을 입고 집사람도 한복을 챙겨 입었고 동생부부가 도착하여 두 대의 차에 분승하여 N 컨벤션 웨딩홀로 출발했다. 웨딩홀은 전주에서 국도로 정읍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전주 박물관 맞은 편에 있어서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결혼 씨즌이라서 인지 웨딩홀 훨씬 전부터 차가 밀리고 있었다. 겨우 웨딩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주차관리인이 차량 진입을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선 동생차와 내가 탄 차량은 혼주의 차량이라고 해서 비밀 구호인“봄날”이라는 패스워드를 말하자 사전에 약속이 되어서인지 식장 가까이 마련된 혼주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장 1층에 마련된“혼주 휴게실”로 들어가니 사진 촬영과 폐백까지 참여하게 되면 점심을 먹을 시간을 놓치기 일수이기 때문이었다.큰고모, 둘째고모, 셋째고모와 둘째 셋째 고모부와 막내 고모부와 다음달에 순천에서 결혼하는 고종사촌 동생인 성진이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점심 식사가 마련된 4층으로 올라가 먼저 점심을 먹기로 했다. 결혼식을 보고가족사진 촬영과 폐백까지 참석을 하게되면 점심식사 시간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뷔폐로 마련된 식당에서 푸짐하게점심을먹고 시간이 되어 결혼식장으로 들어가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가족사진을 찍고 폐백까지 마친 다음 서울에서 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로 서울로 출발을 하고 순천 작은 아버지도 순천으로 출발하셨다. 서울에서 오신 고모부와 고모 고창고모부도 바로 출발하셔서 동생집으로 돌아와 전주에 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동창생인 박정진에게 전화를 하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지금 고창 시골집에 갔는데 내일이나 되어야 전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박정진이는 만날 수 없어서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할 것 같다. 전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중학교 여자동창 고옥례(고은혜)에게 전화를 하니 만나서 차나 한잔 나누자고 한다. 그래서 삼천동 용흥중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하고 누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용흥중학교 앞에서 고옥례를 만나 근처 카페로 이동하여 차를 한잔마시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옥례친구와는 중학교 재학시절 같은 취미와 특기를 가져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옥례와 나 둘 다 노래를 잘 부른다고 음악선생님이시던 조기일 선생님에게 발탁이되어 고창군 중학교 예능 경연대회에 같이 출전하기도 했고 입상을 한 전적이 있었고 대화를 나누다보니 사실은 부안 초등학교 3학년부터 같이 밴드부로 활동했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당시 나는 심벌즈 주자였고 옥례는 하모니카 연주자였다. 2년 선배인 누나 장영란도 부안초등학교 재학시절 하모니카 연주자였다. 고은혜목사가 부른 성가 시디를 두장 선물로 주어서 고맙게 받고 이런 저런 지난 얘기로 3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귀가를 독촉하는 전화가 와서 누나 차가 주차되어 잇는 용흥 중학고로 돌아와 옥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동생집으로 돌아왔다. 동생 집에는 제수씨 친정집 4촌 형제들이 모여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가 있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 익산에 살고있는 처형과 동서를 만난다는 구실로 동생집을 나와 익산 왕궁리에 소재한 왕궁온천장으로 가서 방을 잡고 양치질과 간단하게 세면을 한 후 바로 골아 떨어졌다.
3월 29일(일)
이른 시간에 눈을 뜨고 뒤척거리다가 6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면조를 하고 고양이 세수를 한 후 온천장 주변을 조금 걷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1층 식당으로 가서 매생이 갈비탕으로 아침을 먹고 멀지 않은 금마면 기양리에 소재한 미륵사지로 향했다. 소요시간은 15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미륵사지는 1980년부터 거의 10년 정도 발굴을 계속 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절로 그 이전에는 경주 황룡사지가 제일 크다고 생각했으나 발굴 결과 황룡사지보다 훨씬큰 사찰로 밝혀졌다. 익산은 백제 무왕(서동요의 주인공인 서동이 무왕이 되었다.)이 백제 중흥을 위해 도읍을 옮기고자 했던 지역이고 천도 계획의 하나로 건립한 사찰로 현재는 복원된 대규모 석탑이 있는 동원과 이와 대칭되는 지점에 남아잇는 백제의 목탑계 석탑이 있는 서원(서탑은 탑의 붕괴를 막는다고 일본식민지 시대에 콘크리트를 부어서 일부분만 원형으로 남고 나머지는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되어 졸속 처방의 대표적인 서탑은 현재 해체조사 후 복원 할 계획이 추진 중인데 탑의 중심부에서 화려한 금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보존처리되어 현재 미륵사지 잔시관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동탑이 있는 동원과 서탑이 있는 서원의 중앙지점에 거대한 당간지주가 있어서 당간지주의 중심과 동탑과 서탑의 정중앙을 계산하여 미륵사지의 증심축으로 예상을 하ㅅ고 발굴조사작업을 시작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중심축의 북쪽 지점에 거대한 목탑지가 발견되고 그 북쪽으로 금당(절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불상을 안치한 불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석가모니불을 많이 안치하여 대웅전 또는 대웅보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지만미륵전 또는 용화전(미륵불을 안치한 경우) 무량수전(아미타불을 주존으로 안치)비로전(비로나자불)약사전(약사여래를 주존으로 안치)금당의 북쪽으로는강당지가 있고 강당에서 금당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지도 노출되었다.
그런데 거대한 목탑지의 초석 밑에 적심자리(초석이 흔들리면 건물 저체가 붕괴될 위험이 있기에 초석을 놓을 자리를 깊이 파고 20센티 정도의 돌과 점토를 넣고 몇층으로 쾅쾅 다진 후 초석을 올려 놓음)가 나오지 않아서 궁금증과 함께 고민거리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정밀조서를 해보니 초석을 놓을 위치에 가로세로 깊이가 각각 1.5미터 정도로 파고 2/3정도를 모래로 채운 후 초석을 세운곳으로 밝혀졌다.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집이 모래위에 세운 사상누각이지만 반면에 가장 안정적인 집이 또한 모래위에 세운 집이다. 사상누각이 위태로운 경우는 모래가 유실될 경우리고 모래가 유실되지만 않는다면 무게를 가장 골고루 분산시키고 가장 안정적인 초석(주춧돌)의 받침이 된다. 현재의 토목 건축에도 이용되는 기술로 도로에 인도를 만들기위해 보도 블록을 깔때도 블록 아래 모래를 깔고 보도 블럭을 그 위에 얹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수 있고 모래사장인 여의도에 63층의 고층빌딩을 세울때도 옹벽을 만들어 모래의 유실을 막고 모래위에 63빌딩을 세운 것도 미륵사지의 거대한 목탑지의 모래적심과 같은 기술로 당시 백제인들의 뛰어난 건축술과 과학기술의 수준을 짐작할수 있다.
미륵사지에서 또 한가지 놀라운 점은 거의 100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동탑과 서탑의 기단의 높이가 불과 0.6 센티미터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탑을 축조할 당시 의도적으로 두 탑의 기단의 높이를 맞췄다는 것인데 레벨이나 트렌싯 같은 측량기구도 없고 목수들이 벽돌을 쌓을 때 사용하는 투명한 비닐호스도 없는 당시에 어떤 방법으로 레벨을 맞추었을까 하는 의문을 놓고 발굴조사원들이 모여서 여러차례 토론을 해봤지만 도대체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몇차례의 모임을 가진 동안 동료 조사원이 그럴듯한 의견을 내놨다. 당시로서 가장 가능한 방법은 물레벨을 사용하는 것이고 투명 비닐호스가 없는 당시로서는 두탑을 연결하는 도랑을 파고 그 도랑에 물을 채운 후 수면으로부터 높이를 맞추는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랑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도랑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며칠 후 정말로 도랑의 흔적이 발견되어 도랑을 파서 수면을 기준으로 두 탑의 기단의 높이를 맞춘 것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당시 우리 일행들은 미륵사지 앞에 있는 미륵상회에 숙소를 정하고 하숙하는 방식으로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는 우리 두 사람 외에 원광대학교 역사교육과 재학생들도 같이 발굴조사를 참여해서 거의 10명 정도가 미륵상회에서 숙식을 같이 했다. 기억에 남은 음식으로는 거의 날마다 점심은 큼지막한 양푼에 밥을 전부 모아서 열무김치와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한꺼번에 비벼서 모두 둘러앉아서 볼이 미어지게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집에는 5-6살 정도로 보이는 딸아이가 있어서 애교를 많이 부려서 인기가 좋았다. 동료 중 군대에 다녀온 후 복학한 원대 재학중인 선배가 있었는데 체격이 건장하고 체구가 우람한 전형적인 우량아였다. 그런데 그집 딸애한테 자기를 ‘물찬 제비’라고 여러차례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자기를 부를 때도‘물찬 제비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강요했다. 그런데 그애가 부르는 호칭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그 애흘 불러서 그 호칭을 정확하게 들리게 여러차례 부르도록 하니 ‘물찬’은 정확하게 맞는데 제비는 흐릿하게 발음을 해서 다시 여러번 부르게 하니 ‘제비’가 아니라‘돼비’ 였다.‘돼비’가 뭐냐고 물으니‘돼지 같은 제비’라는 뜻이라고 대답해서 거기 있던 일행 모두 한마디로 빵 터져서 배꼽을 잡고 뒹굴거리며 웃었다. 소화제로 기가 막히는 포복절도할 웃음이었다.
미륵사지를 둘러보며 그 당시의 축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미륵사지에서 금마방면으로 조금 가다가 쌈밥집이 있어 쌈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귀가길에 올랐다. 기왕에 경주에 숙소를 정하고 감은사지도 한번 들려보기로 해서 네비게이션에 경주 감은사지를 입력하고 익산인터체인지에서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서 대전 남부 순환도로를 이용 경주톨게이트에서 경주시내로 들어가 불국사를 지나 토함산 터널을 지나 양북온천장을 찾아갔지만 양북온천장에는 따로 숙소가 없고 찜질방만 있었다. 그래서 동해바다가 보이는 대본해수욕장쪽에는 숙소가 있을 것 같아 감은사지가 있는 용당리를 지나 대본해수욕장으로가니 팬션“과 몇곳의 모텔이 눈에 띠었다. 그중 동해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있는 “화이트 캐슬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식사를 해결하려고하니 아직 해수욕 씨즌이 아니라서인지 주변에 있는 식당이 전부 일찍 문을 닫아서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문을 닫지 않은 식당이 있어서 겨우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와 일찌감치 골아 떨어졌다.
3월30일(월)
6시가 될까말까 한 시간에 잠에서 깨었지만 아직 주변이 어둡다. 조금 더 빈둥거리다보니 동쪽으로 난 창문쪽이 어렴풋하게 밝아오는 것 같아 커튼을 걷어보니 수평선 저쪽으로 서서히 여명이걷히는 것 같다. 이숙소는 시설은 별로지만 일출을 보기에는 최상의 위치였다. 커피를 한잔 타서 탁자위에 놓고 의자에 앉아 수평선이 시시각각 변하며 동이 트는 모습을 보는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해가 완전히 수평선 위로 떠오른 다음 아예 체크 아웃을 하고 숙소를 떠나 우선 감은사지로 갔다. 감은사지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무대왕이 임종시에 아들 신문왕에게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 해서 동해바다에 안치하면 동해용왕이 되어 왜구의 침탈로부터 동해바다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했다. 아들 신문왕은 유언을 지켜 문무대왕의 시신을 화장해서 동해비다에 안치한 곳이 바로 대본해수욕장 앞에 위치한 대왕암이다. 신문왕이 돌이켜 생각해보니 생전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느라 고생을 했고 죽어서까지 동해바다를 수호하는 호국용이 된 아버지를 위해 절을 지은 것이 바로 감은사이다. 감은사의 금당(절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불전 또는 법당으로 우리나라는 주로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이 대부분이다.) 불상이 안치되는 불전지하에 돌로 방을 만들어 동해바다를 지키느라 피곤해진 문무왕의 호국용이 쉴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공간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감은사지는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에서 1979-1980년에 발굴조사를 했다. 당시 발굴단장은 문화재연구소장이신 김정기 선생님이고 부단장은 문화재연구소 학예관 조유전선생 그리고 현장실무책임자는(흔히 주지라고 부르기도 한다.)문화재연구소 학예사이신 윤덕향 선생이었다. 나도 동기생인 고창여고에 근무하는 최금철친구와 같이 참여해서50일 정도 발굴조사를 하다가 구정을 몇일 앞두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그때는 막 20대에 접어든 청춘이었는데 35년이 지난 지금은 늙고 병든 몸이 되어서 다시 찾아와 발굴현장을 둘러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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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랜만에 무열 친구의 기행문을 접하게 되어서 반갑네~!
내용은 나중에 자세히 읽어볼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