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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은혜의 사람 (잠 28:4-6)
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 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5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6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 보다 나으니라
이 시간에 “큰 은혜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에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아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처음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당황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은혜와 은사를 그토록 사모하고 구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과 같이 마술 부리고 돈벌이하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도를 위해서 구하는 것인데 사탄이 틈을 탄다든지 그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은사란 잘못된 것이라. 하면서 은사를 부정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 은사가 기록되어 있고 사모하라고 했는데 그 말씀과의 충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 그래서 갈등에 깊이 빠진 적이 있었는데 감사한 것은 그 답 역시 성경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잘못하고 잘못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모두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은혜와 은사를 받되 넘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큰 은혜를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1.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4절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 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율법을 버린 자가 악인을 칭찬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와 비슷한 악인의 행위를 칭찬하고 옹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악인은 악인과 함께 하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그들이 자기를 옹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요즘 민주화가 지나치다 보니 합당치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결성하고 서로를 옹호하고 합법화하려고까지 세를 규합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에게 율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다면 말씀은 그들을 온전하게 고쳐놓을 텐데 말씀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은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 안의 악을 내쫓고 말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법궤가 가는 곳마다 악을 내어쫓고 악의 세력에게 재앙을 내리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법궤가 머물면 복이 임합니다. 오벧에돔 집에 법궤가 머물 때 오벧에돔의 복 받는 소문이 다윗의 궁까지 들렸습니다. 법궤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또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상징입니다.
말씀이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혜 안 주신다고 실망하지 말고 말씀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바로 은혜입니다. 옥토와 같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기쁨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본문처럼 인내로서 지키는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100배의 결실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지켜 줄 것입니다. 성경보다 체험에 치중하면 사탄의 영에 미혹되어도 그걸 알지 못하고 자기들 끼리 예언하고 자기들 끼리 입신하고 교훈하지만 악령의 역사일 뿐 참된 진리 안에 세워주지 못합니다. 미혹된 같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비는 믿지만 말씀보다 신비를 더 믿는 신비주의는 반대합니다. 신비주의는 사탄의 밥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1992년 12월 28일 24시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시한부종말론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사람들 얼마나 신비적이었습니까? 전국에서 그 날 그 시에 예수님 재림하실 것을 봤다는 간증들이 쇄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악령에 지배 당한 그들이라 그들도 영분별하고 그들도 이단연구한다면서도 그렇게 잘못된 것은 모두 사탄의 영에 미혹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말씀이 있으면 처음부터 그런 소리에 좌우로 흔들리거나 미혹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그 말씀이 그를 분별력 있게 할 뿐 아니라 그를 구원하고 그 말씀이 그를 새 사람을 만들어놓고 복의 사람을 만들고 더 온전하고 신령한 사람을 만들어놓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사도 바울이 행20:31에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권면했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죄에 대해 어떤 항생제보다 더 강합니다. 그래서 시119:9에서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했고, 잠4:4-8에는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했습니다.
말씀이 있으면 체험을 해도 잘못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떤 기사와 이적이 있을지라도 일차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된 말씀에 세우시기 위한 섭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체험을 주시는 것은 우리 삶을 도우시기 위한 것도 있지만 먼저는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 다음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어 영생 얻으라고, 그리고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믿어 확신하라고 체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체험했다면 그 체험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분별함과 동시에 그 체험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체험중심으로 계속 나가다 보면 곁길로 나가게 됩니다.
천로역정에서 기독도가 길 잘못 들어 얼마나 흑암에서 고통을 당했습니까? 하나님보다 은혜 위주, 은사 위주, 축복 위주로 나가면 우상숭배나 같기 때문에 하나님은 멀리 떠나고 사탄이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주신 그 복음의 말씀에 굳게 서서 묵상하고 감사하면 그 은혜의 영광을 믿음으로 누리기 시작할 뿐 아니라 소망이 넘쳐옵니다. 우리가 은혜 달라고 얼마나 애걸복걸했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받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믿고 감사하고 모든 것을 성경 안에서 이해하고 손에 잡히는 것 없더라도 이 예수의 복음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2. 큰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모든 것을 다 얻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5절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여기 “정의”는 원어로 ‘미쉬파트’ 의미는 ‘법률적으로 선언된 공식적 판결’ 혹은 ‘개인의 의를 입증해 주는 법적 결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공적인 정의를 말합니다.
이처럼 악인에게는 자타가 인정해 줄만한 공적인 정의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왜곡된 판단만 있을 뿐입니다. 그에게 법전을 주고 성경을 줄지라도 아전인수 격 즉 자기에게 이로울 대로 해석할 뿐입니다. 어떤 좋은 교훈이 될 만한 사건을 보고도 왜곡되게 해석하고 자기를 위한 교훈을 삼지 않습니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진짜 찾아야 할 분을 찾지 않고 자기가 추구하는 입장에만 갇힌다면 안 됩니다. 시14:2-3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은혜 가운데 있지 않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못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십시오. 오늘 말씀에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했듯이 하나님을 찾으면 다 찾는 것이고, 하나님을 찾으면 다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는 것은 복이 아니라 복되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모든 복을 다 찾은 것이요,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복에서 떠난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와 은사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은혜와 은사 역시 함께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능력만 구하고 신비만 추구하고 복만 구하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거하지 못하고 잘못 됩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의 전부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신학대전을 쓴 중세기에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토마스야,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구나. 그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이 때 토마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직 당신뿐입니다, 주님!(Only yourself, Lord).” 오직 주님 당신 한 분이면 족합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시 24편에 거룩한 성산, 즉 영적 정상 수준에 어떻게 오를지를 알려줍니다. 시24:6에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하나님을 사모해야 정상에 오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만을 더 사랑하고 더 순종하고 더 기뻐하고 더 가까이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복보다 하나님을, 은사보다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은혜를 받게 하는 방법입니다.
3. 큰 은혜는 자기를 가장 작게 여길 때 받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6절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 보다 나으니라.”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그리고 반대로 부유해도 굽게 행한다면 얼마나 무가치한지를 보여줍니다.
여기 “굽게 행하다”는 것은 ‘두 길을 가다’라는 의미인데 즉 하나님을 따르는 길과 세상을 따르는 길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모습, 다시 말해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 같으나 실상 마음은 세상의 재물과 이익을 따라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부유한 자이면서 굽게 행하는 이유가 뭘까요?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정 감사한 줄 안다면 가난한 자보다 백 배도 더 감사할 일이 많을 텐데 감사를 모른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하여도 성실하다면 왜 그럴까요? 역시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것도 감사하고, 숨 쉬는 것도 감사하고, 먹고 사는 것도 감사하고, 가족과 이웃이 있는 것도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자기를 작게 여길 때 가능합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도 자기를 작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크게 여겨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크게 여기면 절대 감사나 찬송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크게 여기면 은혜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작게 여기면 우리를 택해 주신 것만 생각해도 감사와 찬양이 넘치고 은혜가 강물처럼 넘칩니다. 그래서 딤전6:6-8에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족하는 마음 없이는 은혜생활을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한국을 제패할 능력을 달라고 10년을 기도했지만 기도할수록 더 결과가 나빠졌습니다. 크게 실망한 나머지 지혜를 구해 깨닫고 보니 10년간 부르짖었던 기도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세가 아니라 성령을 갖고 휘두르려는 잘못된 기도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겸손히 쓰임 받는 기도를 드렸다면 그는 하나님의 큰 일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은혜생활이란 많이 받아서 되는 줄 알지만 내가 작아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습니다. 계3:8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그 교회에 열린 문을 주시고, 원수들로 절하며 복종하게 하시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시고, 면류관을 주시고,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이처럼 겸손하면 온갖 복락을 다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작아지는 길,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중세기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수도원에 모여 겸손의 도를 따르기를 갈망했습니다. 우리가 수도원에 갈 필요는 없지만 만약 수도원을 운영한다면 성경을 많이 읽게 하되 읽는 자세와 바른 해석으로 잡아주고, 기도를 많이 시키되 하나님만 구하게 하고, 사명감을 심어주되 철저히 쓰임 받는 겸손과 사랑의 도를 훈련시키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오, 예수님도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십니다. 그럼에도 큰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오늘 말씀으로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복음의 말씀에 서서 감사하며,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며 전부로 삼고, 겸손한 마음으로 내 생명을 다 바쳐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칭찬하는 큰 은혜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