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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진목사/폐위된 와스디
(에 1:9-22)
(요약)
율법에는 양면성이 있으니 즉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약속함과 동시에 범하는 자에게 저주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율법은 본래 선하고 신령하며 아름다운 것이지만 문제는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그것을 범할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며 이 율법의 의로는 천국에 갈 수가 없음이 자명해졌다. 즉 율법은 인간으로 죄악됨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알게 함이 그 목적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가 아닌 다른 의 즉 예수 믿고 성령 받음에 더욱 힘써 날마다 거룩하게 되는 참된 축복의 길을 가야 한다.
(설명)
☆ 와스디 (율법의 예표)
(전설) 왕의 측근 오타네스의 딸 아메스트리스
(의미) '사랑스러운'의 뜻
1. 율법도 잔치를 베풀고 있다(9절).
출20:6, 12, 신28:1-14
2. 율법은 엄격한 하나님의 명령이다(10절).
신28:58-62
3. 율법은 본래는 아름다운 것이다(11절).
롬7:10, 12, 14, 16, 고전15:56, 고후3:7-11, 고후3:9
4.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한다(12절).
롬4:15, 롬7:14, 롬3:19, 갈3:1-3
5.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다(16절).
갈3:19, 갈2:16-21, 롬3:20
6. 율법은 죄인을 만드는 것이 그 임무이다(17절).
고후3:9, 롬3:20
7. 완전한 법의 등장으로 율법에서 해방된다(14절).
롬8:1-2
8. 천국은 율법의 의보다 나아야 들어간다(19절).
마5:20
9. 율법적 신앙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23절).
가정의 질서수립(하나님 주권중심 수립의 예표)
(강 해)
오늘은 "폐위된 와스디"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하수에로의 대 잔치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즉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대 잔치를 마련해 놓으시고 죄인들을 부르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왕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왕후 와스디의 왕명 거역사건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왕이 취중에 자기의 권세와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아리따운 왕비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할 때 와스디가 거절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왕비로 봐서는 참으로 억울한 사건 즉 그릇된 요청, 간교한 조언, 연속적인 해프닝으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배후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가 있었습니다.
와스디는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왕의 측근 중의 하나인 오타네스(Otanes)의 딸 아메스트리스(Amestris)라고 합니다. '와스디'란 이름은 '사랑스러운'의 뜻으로 그의 별칭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럼 신령한 의미에서 와스디는 무엇입니까? 와스디는 율법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의롭고 선하며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죄인을 하나님께서 베풀어 놓으신 은혜의 대 잔치에 오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과거에도 설명한바가 있지만 좀 더 다른 측면에서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율법도 큰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9절에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부녀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했습니다.
바사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남녀가 어울려서 술이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왕후는 여자만을 위하여 다른 장소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처럼 율법도 성도들에게 엄청난 잔치를 약속합니다. 출20:6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또 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리고 신28:1-14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라" 에서부터 시작하여 얼마나 풍성한 잔치가 예고되어 있습니까? 구약 성경의 구구절절 이러한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건을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율법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후가 잔치를 베풀지만 왕 앞에서 못 베풀고 뒷 후원에서 베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지 율법으로는 그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2. 율법은 엄격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10절에 "제 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하여" 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187일간의 잔치를 마치는 날 그 아쉬움 때문에 이성을 잃을 만큼 술을 마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사의 관례를 깨뜨리면서까지 왕후를 술자리에 나오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런데 비록 주흥이었지만 어전 내시 일곱을 갖추어 명령한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내시들의 권한은 크게 강화된 때였습니다. 더구나 바사에서는 규례가 엄격하여 왕의 허락이 없이 마음대로 나오거나 나오지 않을 때는 오직 죽이는 것이 그 나라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만약 거역한다면 그것은 저주와 죽음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축복만이 아니라 거역하는 자들이 받게 되는 저주와 심판으로 가득합니다. 신28:58-62을 보면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 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너희가 하늘의 별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한 마디로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가 율법의 엄숙함입니다.
3. 그러나 율법은 본래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11절에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면류관을 정제하고 왕의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방백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와스디는 "사랑스럽다"는 그 이름 그 대로 또 왕이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을 만큼 그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거기다 면류관까지 정제하는 왕후이니 영광과 권세가 얼마나 크겠으며 더구나 아버지가 왕의 최 측근이니 얼마나 당당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느 한 부분 흠잡을 곳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7장 10절에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라고 했고 12절에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했으며 14절에서는 "율법은 신령하다"고 했고, 16절 역시 "율법의 선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을 더욱 완벽하게 나타낸 천국민의 율법인 산상보훈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계의 명사들이 이 율법을 보고서 감탄합니다. 마음으로 범죄함도 죄이며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축복하라는 법이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에는 하나님의 선과 의와 영광과 거룩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고 하셨습니다. 마치 아하수에로가 와스디를 통해 자기 영광과 권세를 드러내려 한 것과 같습니다.
거기다 율법은 권세와 영광이 있습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인생을 지옥에까지 보낼 만큼 그 권세는 대단합니다. 대통령이라 해도 우리를 맘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니고 백 명도 아니고 오고 가는 구원받지 않은 세대 모두를 정죄하여 지옥에 넣을 수 있다니 그 권세가 얼마나 막강합니까?(고전15:56). 그리고 모세의 얼굴에 빛을 발하게 할만큼 그 영광 역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고후3:7-11). 그래서 고후3:9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이 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예수 믿고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자동으로 지켜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롬8:3-4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 속에는 예수를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4.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만 이루게 합니다.
12절에 "그러나 왕후 와스디가 내시의 전하는 왕명을 좇아오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중심이 불 붙는듯 하더라" 했습니다.
왕후는 남자들이 취하여 무절제해진 그 분위기가 싫었기 때문에 왕과 왕후의 위신과 페르시아의 법도를 내세워 왕명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 거부 과정에서 있었을 간곡한 권유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굽힐 줄 모르는 와스디의 원리원칙 법도 고수는 왕의 진노를 불러 왔고 그를 몰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을 고수하면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범죄만을 더하게 되어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롬4:15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했습니다. 율법은 신령하지만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리는(롬7:14) 이율배반적인 기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고(롬3:19) 나아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주의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1-3) 책망했습니다. 대개 율법주의를 자처하지는 않지만 복음적이지 않고 율법적으로 살거나 일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그 결과는 자신도 가정도 교회도 불행한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의 방법으로서는 바른 것이 아닙니다.
16절에 "므무간이 왕과 방백 앞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할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도 방백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여기 일곱 박사 겸 방백들은 왕의 고문관 격인 자들로서 왕궁을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출입할 수 있었으며 왕의 침실에서 마저 왕과 자유로이 담소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왕의 모사들입니다. 또한 사례를 아는 박사들이라 했는데 "사례"란 이는 '시대,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15절의 "규례대로"란 '전례대로'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전례를 아는 자들이요 그들만은 왕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와스디가 왕에게만이 아니라 온 나라의 방백들과 백성들에게도 잘못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즉 이것은 법률적으로 만이 아니라 경험적 실재적 역사적인 결론이란 사실입니다.
이처럼 수천년의 역사가 내린 결론은 율법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못할 뿐 아니라 백성들을 구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지도 못했고 도리어 모두 정죄하고 죽였으니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이 왜 주어졌습니까? 갈3:19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대답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자 마자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죄인이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임을 알게 하사 참된 구원의 길을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즉시부터 그 율법에 의해 자신들의 불의가 드러나고 심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실패가 무려 2000년, 그러므로 율법은 역사적 경험적 사례적으로 따져볼 때 결코 인간의 구원의 길은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6. 율법은 적극적으로 모든 자로 죄인을 만드는 것이 그 임무입니다.
17절에 "아하수에로왕이 명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부녀에게 전파되면 저희도 그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했습니다.
사실 와스디 사건은 작다면 아주 작은 사건입니다. 더구나 취중에 되어진 일이요, 당시 형편을 참작하면 이해가 가능하고, 또 와스디의 거역은 도리어 국법을 존중함이요 또한 이것이 왕의 체면을 지키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어쩌면 역시 성숙한 왕후답다고 칭찬 받을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문제를 비약시키고 확대시켜 철저히 죄인 만드는 작업을 하는가? 그랬던 배경적인 이유는 왕의 극도의 분노 앞에 적절히 반응은 해야 되겠고 그렇게 하자니 왕후의 나중 왕후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고, 구속사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에스더를 예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율법이란 인간을 죄인 만드는 임무가 그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래서 고후3:9에 율법을 정죄의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사 인간의 철저한 죄악성과 무능력을 깨닫게 하사 심판과 저주의 대상임을 보이시는 이유는 그래야 참 구원의 길인 예수를 받아들이고 은혜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 앞서 와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각인에게 복음으로 와 닿기 위해서는 먼저 철저한 정죄와 무능력을 깨닫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먼저는 사람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죄인 만들기를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 손든 심령에 복음을 안겨 줄 때 진정한 복음의 빛은 발하게 됩니다.
7. 감사한 것은 완전한 법의 등장으로 율법에서 해방됩니다.
14절에 "때에 왕에게 가까이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방백 곧 가르스나와 세달과 아드마다와 다시스와 메레스와 마르스나와 므무간이라" 했습니다.
이 일곱 방백들이 와스디를 폐위시킨 주역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일곱 방백의 7은 하나님 사역의 완전 숫자요 그래서 대개 구속을 집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방백은 당시 종족 중심의 국가의 체제의 지역장들로서 그러니까 생명적이요, 또한 이들은 규례를 아는 자들이니 법에 정통한 자들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왕을 가까이 하며 왕의 기색을 살피는 왕의 심중을 통달하는 자들입니다. 이 네 가지의 특징을 종합해 보십시오. 종합하면 이 일곱 방백들은 생명의 성령의 법의 상징입니다. 이들이 죄와 사망의 법 즉 율법의 상징인 와스디를 폐위시키켰습니다. 그래서 롬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이 폐했다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선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는 율법의 역할은 지금도 존재한다고 봅니다. 또 아직도 자기의 의를 의지하려는 자들에게 율법의 넘어지게 하는 역할 역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율법은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들이 율법을 의지하려 했다가 넘어졌던 경험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방법으로서는 폐했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되는 것도 성화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8. 천국은 율법의 의보다 나아야 들어갑니다.
19절에 "그 왕후의 위를 저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했습니다.
와스디가 아무리 아름다웠어도 이제는 그 아름다움 정도로는 안됩니다. 이제 와스디를 대신할 정도의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나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처럼 율법의 의로는 천국 갈 수 없습니다. 마5:20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보다 더 나은 의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 의로만 천국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가 율법을 안지킨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마음으로 범죄하지 않을 만큼 은혜로 성령으로 더 잘 지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는 율법의 의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9. 구체적인 삶에서 율법신앙을 파괴하고 복음신앙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23절에 "각 도 각 백성의 문자와 방언대로 모든 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남편으로 그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방언대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했습니다.
여기 와스디 사건이 주는 파급효과가 나타납니다. 메대 파사 127도가 뒤집혀지고 모든 가정이 바꾸어지는 대 개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가정 가정마다 남편을 존경하는 풍조가 생겨나고 혼혈결혼의 경우 남편의 언어로 말하게 하는 완전히 가부장적 제도가 확립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주권중심의 신앙수립의 예표입니다. 바울도 가장 주권의 가정회복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유로 사용했습니다(엡5:22-33). 그러나 율법신앙은 우리 안에 하나님 주권과 겸손의 성령 충만한 신앙을 수립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신앙은 속히 무너져야 합니다. 이 실패는 빨리 경험할수록 좋습니다. 또 이 실패는 뼈저리게 더욱 분명히 경험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믿고 성령 받아 그 영을 따라 사는 생명적인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부터 신앙은 수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화는 점진적입니다. 이 땅에서 완성은 없습니다. 마치 파사의 혼혈가정에서 이방의 아내가 남편의 언어를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점차 배워 나가듯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와스디의 사건을 통해서 율법을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율법은 아름다울지라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성령을 교훈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처음과 나중 모두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나가야 합니다. 즉 중생도 은혜요 성화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율법만 고집하지 말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육체의 율법주의로 마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육체가 아니라 은혜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은혜를 충만히 입는 일에 힘쓰십시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아 말씀 안에서 거룩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